제목 [출판가쟁점] '조폭'들은 출판계를 떠나라 (기획회의, 2004.10.)


'조폭'들은 출판계를 떠나라!

지난 호 이 지면에서 소개했던 {편집자 분투기}를 소개하는 어느 일간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말문을 열고 있었다. "출판 불황 속에서도 새로 독립 출판사를 차리는 편집자들은 늘어만 간다. 주먹구구식 영업 형태가 사라지고 유통이 현대화되면서 합리적인 사고와 풍부한 경험으로 전문성을 확보한 편집자들의 운신 폭이 커진 것이다." 좋은 책을 소개하기 위해 나름대로 배경을 셜명하려는 기자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선 '출판 불황 속에서도 새로 독립 출판사를 차리는 편집자'들이 늘어가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사고와 풍부한 경험으로 전문성을 확보한 편집자'들의 운신 폭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편집자들의 운신 폭이 커졌다면 그들은 '경영의 부담'까지를 안는 모험을 하면서 굳이 '독립'을 할 필요가 없다. 편집의 전문성만으로는 '운신의 폭'이 작기 때문이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이 옳다. 물론 나는 이런 편집자들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는 편이다. 그것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에디터십을 펼칠 수 없다면, 시장에 맨몸으로 부딪쳐서 그게 가능하리라는 기대가 차라리 순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주먹구구식 영업 형태가 사라지고 유통이 현대화되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고목나무에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이 낫다는 비관적인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유통 개선이 이루어지거나 아예 출판물이 확실히 공공재로 유통될 수 있는 조건에서라면 아마 좋은 편집자는 좋은 출판 경영자일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이런 조건에서라면 좋은 편집자와 좋은 출판 경영자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날, 나는 '합리적인 사고와 전문성'을 갖추고 꽤 의미있는 책을 내고 있는 어느 독립 출판인이 어디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사면초가'의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하는 것을 밤새도록 들었다. 그 핵심에는 조폭을 뺨치는 유통의 횡포가 있었다. 출판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뻔히 아는 그렇고 그런 얘기지만, 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니 좀 지겹더라도 되풀이해 보자.

대략의 주뮨량과 주문 추세를 보면 결재일에 수금할 액수를 대략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측은 무의미한 것이기 십상이다. '장기 재고'도 아니고 '현재 멀쩡하게 잘 나가고 있는' 책을 결재일을 며칠 앞두고는 반품해 버리는 것으로 결재 금액을 깎아 버리고는, 하루이틀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주문을 하는 편법적인 재고 조절이 자행된다는 것이다. 매출에 상응하는 만큼의 정당한 수금을 못하는 것도 억울한 판국에, 출판사가 부담하는 반품 비용은 둘째치고라도 멀쩡한 책이 망가지게 되는 데다가 일시 품절로 인한 잠재적인 손해까지 덤으로 발생하는 기막힌 상황인 것이다. 아예 굶어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는 이런 폭력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도대체 누가 "주먹구구식 영업 형태가 사라지고 유통이 현대화되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유포하고 있는가.
수금을 하러 가면, 같은 사무실의 한 쪽에선 어음을 발행하고 다른 한 쪽에선 그 어음을 할인해 주더라는 (최소한 눈으로 뻔히 보이지는 않도록 서로 다른 공간을 이용하는 최소한의 '염치'조차 상실한) 그야말로 전설 같은 '칼만 안 든 강도짓'도 여전하다니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유통이 합리화되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식상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 까닭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흔해빠진 개탄을 다시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안 팔린 물건은 고스란히 반품을 할 수 있으니 도무지 '판매상의 위험 부담'이라는 것을 하나도 감당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덤으로 어음 할인을 통해 가외 수입까지 짭짤하게 챙기는 한편으로 편법적인 재고 조절을 통해 소매상으로 팔려 나간 만큼도 결재를 해 주지 않는 횡포를 서슴지 않는 유통업자들이 도대체 왜 줄줄이 부도를 내고 나가 떨어지는가이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은 다 어디로 가는가 말이다.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나는 무서운 사실 한 가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유통 합리화'에 대한 논의는, 거칠게 말하자면 출판업의 숙원인 반면에 유통업의 '밥그릇 지키기'라는 식의 구도로 전개되어 왔지만, 이것조차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소·영세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이는 도매상들조차도 어쩌면 '마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도매상들이 영세 출판사들로부터 이렇게저렇게 '갈취'한 돈이 결국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출판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조폭적인 출판 유통의 고질병을 낳는 '주범'은 실속은 없이 덩치만 키운 일부 출판사들이지 그들에게 발목을 잡혀 끌려다니다가 결국 주저 앉아 버리게 될 유통업자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공범' 행위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언제나 '하수인'들이지 '두목'이 아니라는 조폭 세계의 법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조폭적 행태를 중시시키려 한다면, '두목'은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하수인'만 닥달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조폭 두목'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문화 산업을 합네 하며 '출판인'이랍시고 명함을 내밀고 거들먹거리며 입에 발린 소리로 '유통 합리화'를 오히려 앞장서서 떠들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그대로 두고서는 독립 출판인들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질 뿐이다. 아니 이미 더 이상 좁아질 여지도 없는 고사(枯死) 직전의 상태라고, 이대로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그저 얼마나 더 버티는가의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그리고 조폭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독립 출판인들, 책을 책스럽게 만드는 일 말고는 다른 삶의 보람이 없다는 그 순해빠진 '편집자'들에게, 제발이지 '책의 완성도'에 희망을 걸며 열심히 하노라면 형편이 좀 나아질 수도 있으리라는 가련한 자기 최면에서 한시바삐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기를 권한다. 선택은 둘 중의 하나뿐이다. 서서히 앉아서 고사해갈 것인가 아니면 이 바닥에서 조폭들이 더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을 것인가. 특히나 마음으로 공감은 하면서도 누군가가 나서서 해 주기만을 바라는 이들에게 결코 '무임승차'의 자리는 없으리라는 처연한 진리도 아울러 전한다. 덧붙여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당장의 '밥벌이'를 포기하지 못해 자기 고발의 용기를 망설이는 편집자들이 있다면, 언젠가 당신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 결국 '배운 도둑질'이라고 '창업'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을 때를 생각한다면 오늘의 알량한 밥그릇을 위해 내일의 자기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어리석은 짓을 할 참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싶다.

모든 출판사는 실제로 팔린 만큼만 정확히 계산해서 가져 가라. 그렇게 해서는 유지가 안 되는 출판사라면 더이상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민폐 끼치지 말고 사업을 정리하라. 시장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해서 다른 출판인들이 애써 만든 책의 판매 대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가면서까지 용케 살아남아 본들 당신들은 '조폭'이지 더이상 '출판인'이 아니다. 

똥개(ddonggae)  날짜 2004년 11월 09일 0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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