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고향  [04/11/07]
 
신문에서 향기로운 기사들을 읽었다. 늦가을의 주말을 그 향기에 묻혀 지내며 문학의 소중함을 새삼 깊이 느꼈다.

미당 서정주 시인(1915~2000)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질마재를 뒤덮은 노란 국화는 사진을 보는 것 만으로도 들판에 진동하는 국향을 맡을 수 있다. 미당 시문학관 해설자인 서동진씨와 양돈업을 하는 아마추어 시인 정원환씨 등 마을 사람들이 7만 여 포기의 국화를 심어 이 엄청난 꽃동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5천여평의 야산에 국화로 시를 썼다. 큰 시인을 배출한 고장의 벅찬 자부심으로 쓴 그 엄청난 시의 들판이 햇볕 속에 눈부시게 빛난다. 꽃 속으로 난 오솔길을 어린이들이 줄지어 걷고 있다. 그 아이들이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를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나도 그들과 같이 합창으로 시를 외우고 싶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시의 마지막은 더 많은 사람들과 더 크게 합창하고 싶다.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는 서정주 선생님이 잠들어 있는 산소까지 뒤 덮고 있다. 서선생님이 짙은 전라도 억양으로 ‘국화 옆에서’를 낭송하던 생각이 난다. 그가 낭송하는 ‘자화상’ ‘선운사 동구’ 등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있어서 우리는 어떤 빈곤 속에서도 초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깨닫게 된다.

또 다른 기사는 박경리 선생님이 지난 주 50년 만에 통영을 방문하여 고향 사람들의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동행했던 기자는 작가와 고향의 만남을 감동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 된 자랑스런 통영의 딸을 맞는 시내 곳곳에는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었다. “박경리, 박경리, 박경리”라는 외침으로 환영한 현수막도 있고, “박경리 선배님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통영초등학교 후배들의 현수막도 있었다. 그가 강연하러 통영문화회관에 들어설 때 강당을 가득 메운 고향 사람들은 기립하여 “고향의 노래”를 합창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고향에 늦게 왔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향에 오지 못했던 지난 50년은 생존투쟁의 나날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고료로 생계를 꾸려야 했고, 대하소설 ‘토지’에 매달려 25년을 바쳤고, 원주에 토지문화회관을 세우고 자리잡기에 10년이 흘렀습니다”라고 그는 늦어진 귀향을 설명했다.

그는 또 “제가 통영에서 태어나고 진주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토지’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다. 민란의 시발지였던 진주, 예술적 감수성이 넘치는 통영의 모든 것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고백으로 작가는 뜨겁게 고향과 재회했다.

오래 전 원주의 선생님 댁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손수 만드신 생선요리를 손님들에게만 권하고 자신은 손대지 않았다. “통영 사람은 다른 지방 생선이 입에 안 맞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는 통영 사람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번에 선생님은 고향의 생선을 맛있게 드셨을까.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각 지방이 자기 고장 출신 예술가들을 제일의 재산목록으로 챙기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예술가들은 고향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예술가들은 고향을 자랑스럽게 하고, 그 고장을 풍요롭게 하고,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작품의 무대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지금은 영화나 TV드라마의 무대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차츰 시와 소설, 그림 등으로 대상이 넓혀질 것으로 기대 된다. 그런 작업을 통해 국민 모두가 문화 예술의 소중함에 눈 뜨고,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가을이 가기 전 질마재에 찾아가 국화 동산을 거닐며 ‘국화 옆에서’를 외우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제 질마재의 국화 동산은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재산이 됐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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