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팔리는 책’보다 ‘좋은 책’ 만들겠다 [04/11/04]
 
미디어재벌에 쫓겨난 편집인
미국 출판계 수익지상주의 비판
‘자본정글’속 독립출판 실험 성공
미국식 따르는 한국출판의 미래는?

분명 출판은 산업이고, 출판사는 기업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출판이란 분야는 수익성을 따지는 경제 원칙과 정글 같은 시장의 법칙보다는 큰 이익을 내기 힘들어도 좋은 책이라면 펴내는 신념과 살가운 사람 냄새가 통하는 곳이라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 이런 믿음은 우리 출판계에서 아직은 어느 정도 통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분야를 소수 거대자본이 독점하거나 과점하는 미국에서는 출판시장도 이윤창출을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몇몇 거대 복합미디어그룹들의 전투장이며, 출판사 역시 연 몇%의 수익성을 목표로 내걸고 아등바등 모든 것을 쥐어짜는 제조업체와 다름없다. 거대한 다국적 출판기업들은 끊임없는 인수합병으로 수십, 수백개의 출판사를 거느리며 덩치를 키우고 있고 수십년 전통을 자랑하던 독립출판사들은 속속 거대출판그룹의 계열사로 전락하면서 제 색깔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와중에서 편집자들은 점점 더 ‘좋은 책’보다는 ‘잘 팔리는 책’을 펴내도록 강요당한다.

앙드레 쉬프랭(69)은 이런 출판 풍토에서 꿋꿋이 버티면서 출판을 경제원리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오락거리나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닌 진지하고 공익적인 책들도 얼마든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편집자다. 책은 이 걸출한 편집자가 출판 신념과 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듯 일해온 출판 인생을 되돌아본 회고록이다.

쉬프랭은 1962년 미국 최대의 출판그룹인 랜덤하우스의 계열사인 판테온에 입사해 출판 인생을 시작했다. 쉬프랭은 유럽의 수준높은 출판물을 미국에 소개하면서 판테온을 색깔있고 개방적인 출판사로 키웠고, 큰 돈을 벌지는 않아도 계속 흑자를 내는 탄탄한 경영으로 수익 면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이어갔다. 군나르 뮈르달과 에릭 홉스봄, 에드워드 톰슨 같은 유럽의 석학들과 노엄 촘스키 등의 쟁쟁한 미국 학자, 아리엘 도르프만 같은 제3세계의 지성들이 그를 만나 세계적인 인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랜덤하우스의 새 주인이 된 미디어기업 뉴하우스는 수익성 위주의 책을 낼 것을 계열사들에 종용했다. 경영진은 막무가내로 그를 몰아세웠고, 쉬프랭은 결국 89년 회사를 떠나고 만다. 에드워드 톰슨과 작가 커트 보네거트 같은 문화계 주요인사들이 그를 비롯한 판테온 편집진의 집단 사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경영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90년, 쉰다섯살의 나이에 쉬프랭은 ‘수익’보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책을 펴내는 출판사 뉴프레스를 설립했다. 그를 믿었던 에드워드 톰슨과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셸 푸코의 상속인 등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뉴프레스는 ‘팔리는 책’만 고집하는 출판계가 외면하던 인문사회 분야의 책들과 소수 독자들을 위한 책을 보란듯이 줄줄이 성공시키며 단기간에 비중있는 출판사로 성장했다. 반면 수익을 고집한 랜덤하우스 경영진은 수천만달러의 손실을 냈고, 랜덤하우스는 1998년 독일 거대기업 베텔스만에 매각되고 말았다.

책을 통해 쉬프랭은 지난 반세기, 특히 최근 10년 동안 미국의 출판이 어떻게 그 본연의 정신을 잃고 돈벌이 사업으로 변해버렸는지, 곧 거대출판기업들이 어떻게 장삿속으로 출판을 변질시켰으며 양식있는 출판인들과 가치있는 책들이 어떻게 출판계에서 사라지고 있는지를 생생하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 모습은 대형 출판사들이 최근 급속히 미국식 출판시스템을 추종하고 있고, 랜덤하우스가 중앙엠앤비와 한몸이 되어 ‘거대 자본’으로 등장한 우리 출판계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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