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영화속 노년의 삶 잔잔히 그려 독자와의 아름다운 동행을 꿈꾸며… [ 04/10/29]
[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

“저자는 ‘제 원고가 부족해서 책이 안 나간 거예요’, 출판사는 ‘저희 능력 부족으로 못 팔아 죄송합니다’ 하는 관계가 아름다운 동행이지요. 그 반대로 ‘너희 때문에 내 책이 안 나갔다’거나 ‘이런 원고를 써서 나가길 바라다니!’ 한다면 그런 비극이 없을 겁니다.”

“우린 참 아름다운 동행이네요. 게다가 저만 유명해지고 출판사는 손해를 보셔서 어떡해요?”

“웬걸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정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그렇게 여러 분이 인정해 주시는 책을 못 팔고 있으니 죄송합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릴 뿐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전쟁, 혁명, 독재, 경제개발의 광풍, 그리고 현재의 현란하기 그지없는 시절까지 도합 ‘150년’이 넘은 세월을 살아오신 부모님을 모실 수 있음을 감사드리며 노년을 위한 한 권의 책을 낸 것이 1년 전이었습니다. 유경 선생의 <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였습니다.

유 선생은 우연한 기회에 저희 출판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저희가 낸 어린이 그림책에 대한 황홀한 서평을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했거든요. 당연히 편집자 한 사람이 감사의 글을 띄웠고, 이렇게 초라한 출판사인지 모르던 그분이 답례로 방문해 주셨습니다. 손에는 귤 한 봉지를 들고.

아, 그런데 그때 유 선생을 맞은 것은 일에 찌든 출판쟁이가 아니라 저희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잎 떨어진 감나무였습니다. 온몸이 감성의 촉수였던 유 선생은 당연히 이성을 잃었고, 덥석 저희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도 어르신들을 위한 책을 한 권 내고 싶었는데,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 진정 산을 푸르게 만드는 나무는 꽃이 지고 나야 열매를 맺는다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로부터 제목은 탄생했지요.

유 선생은 몇 해 전부터 인터넷 매체에 ‘녹색노년’이란 제목으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책과 영화 속에 그려진 노년의 삶을 따뜻한 눈길로 담담히 그려낸 그 에세이들이 책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유 선생에겐 영화도 책도 이웃의 삶도 ‘노년’이란 프리즘을 통해 새롭게 해석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지요. <봄날은 간다>와 <공공의 적>, <로드 투 퍼디션> 같은 영화에서 삶의 뒷모습과 노년의 진실을 읽어내는 사람이 유 선생 말고 또 있을까요?

그래선지 놀랍게도 책이 출간되자 언론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큰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격려는 저희에게 비타민 복합제보다 더 큰 약효가 되었고요. 그런데 왜 책은 창고에 쌓이는 거지? 자책의 한숨만 커가고 있습니다.

좋은 필자, 좋은 원고, 부족한 출판사. 이 삼박자가 모여 만든 안타까운 책 <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 제가 출판 시작한 후 십여 년 동안 이 책만큼 경제적 이유가 아닌 이유로 팔리길 간절히 바란 책도 없었습니다만 바람에 그치고 말았지요.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되어 앞마당 감나무 열매는 붉게 물든 채 유 선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 선생과의 아름다운 동행에는 독자 여러분들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낙엽의 향기를 하늘로 띄워 보냅니다.

김흥식/서해문집 대표 = (한겨레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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