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원작과 영화의 거리                                                             [2004. 10. 28]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대표작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이다.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남녀주연상 등 3개 부문 영예를 안은 문제작이다. 나는 이 영화와 원작 소설을 보고 읽었으므로 원작과 영화작품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낀다. 간혹 어떤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영화를 보면 소설로 재구성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도 직업병일까.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작용한다. 원작을 먼저 읽었을 때와 영화를 먼저 보았을 때가 각각 다르게 작용한다.

그리고 원작을 감동적으로 읽은 경우에는 웬만해서 영화를 좋게 보기가 어렵다. 가령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경우, 원작을 먼저 읽고 난 결과 영화를 보는 도중에 나오고 싶은 느낌이 들었었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소설을 포르노로 만들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밀란 쿤데라는 그 이후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유형의 작가로는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있다. 무수히 많은 감독이 그에게 ‘백년동안의 고독’의 영화화 판권을 팔라고 종용했지만 작가는 요지부동이라고 한다. 과연 누가 그 소설을 영화화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에 반해 영화와 소설을 별개의 장르로 간주하여 원작을 어떻게 만들든 괘념치 않는 작가도 있다고 들었다.

‘거미여인의 키스’의 작가 마누엘 푸익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문제나 영화제작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 감명깊게 본 영화 ‘아이리스’는 영국의 유명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존 베일리가 자신의 부인인 유명 작가 아이리스 머독의 일생을 쓴 ‘아이리스’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경우였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분명 원작을 잘 살린 수작 필름이라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렇다면 ‘피아노 치는 여자’와 ‘피아니스트’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열연을 펼친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원작의 여러 가지 것들을 잘 살려내지 못한 경우라고 해야 하겠다. 특히 원작의 다면적인 이야기 층위 가운데 성(性)과 관련된 부분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원작의 가치를 많이 훼손했다고 보았다.

물론 옐리네크는 성의 문제와 페미니즘을 자신의 많은 담론들 가운데 중심에 놓고 있는 작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의 문제든, 페미니즘이든 그것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먹고 사는 문제나, 구원의 문제, 존재의 문제 등등을 떠나 그것 자체만을 보여준다고 할 때 단순화는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볼 중요한 사실이 파생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소 역겨운 묘사와 지나친 세부묘사에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적도 많았다. 지금도 이 소설을 읽던 순간을 생각하면 왠지 숨이 찬다.

그런 소설을 두 시간짜리 영상으로 만들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책은 내가 시간을 투자한 만큼 더 많은 것을 보답해주니까.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싸고도 작품성에 대해 논란이 많은 모양이다. 하물며 뛰어난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 때 감독들이 얼마나 어려울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정은숙 도서출판‘마음산책’대표· 시인)=서울신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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