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정년  [04/10/22]
 
[Book World 窓]작가의 정년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시골 역의 역장 관사에서 객사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82살이나 먹은 노인네가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가출해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실만 보면 자세한 내막을 알 길 없는 사람들에게 톨스토이의 아내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처럼 악처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연구자들은 오히려 톨스토이의 아내를 동정한다지요. 10명이 넘는 자식들을 낳고 넓은 영지를 거느리는 대저택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살면서 톨스토이를 섬겼지만, 정작 남편은 바람 피우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겁니다. 겉으로 알려진 톨스토이는 도덕군자요 인생론을 설파하는 근엄한 성자처럼 보이지만, 기실 ‘쫀쫀한’ 톨스토이는 역장 관사로 찾아온 아내를 죽어가면서까지 방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하네요. 무엇이 그리 화가 났는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알 길이 없지요. 이렇거나 저렇거나 톨스토이는 죽기 직전까지 글을 썼던 정력적인 작가였습니다. 사망하던 해인 1910년에도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을 펴냈으니까요.

이번 주 우리 출판계의 화제는 작가 박완서씨가 신작 장편 ‘그 남자네 집’을 펴냈다는 소식일 겁니다. 바로 오늘 완성된 책이 출간되는데 문학담당 기자들에게는 주중에 교정지 상태로 전달되어 미리 노작가의 열정이 담긴 작품을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국 문단에서 특히 소설가들은 일찍 ‘정년’을 맞는 게 이상한 관례처럼 굳어지다시피 했습니다. 시와 달리 소설은 긴 호흡과 노동력이 더 필요한 장르라서 노년에 이르면 체력과 지력이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일제시대 문인들은 채 서른 살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는 게 다반사였고, 이후로도 환갑을 지나서까지 괜찮은 작품을 펴내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그 정년이 길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박완서씨는 올해 73세인데 이번에도 나이를 핑계 대고 느슨해지거나 허술해지는 구석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탄탄하고 감동적인 장편소설을 펴냈습니다. 그가 소설책을 낼 때마다 결국 한국 소설가의 정년을 매번 경신하는 셈이지요. 노작가의 원숙한 작품세계를 맛보는 즐거움을 한번 누려보시지요.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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