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두의 독서교실]삶의 교과서 '헬렌 켈러-A Life' [ 04/10/15]


읽다 보면 아주 천천히 읽게 되는 책이 있다. 연필로 밑줄도 치고, 슬쩍 윗부분을 접어놓게 되는 책. 나도 모르게 여백에 몇 자 끄적거리고, 포스트잇을 붙여 비쭉 빼내기도 하는 책.

‘헬렌 켈러-A Life’(도로시 허먼 지음, 미다스북스)가 그런 책이다. 이 책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3중 장애인인 헬렌 켈러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평전은 전기의 일종이지만 저자의 평가가 강조된다. 즉,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평가가 곁들여지는 평전은 그 주인공과 저자, 독자의 시각이 어우러지면서 의미와 정서의 독서 체험을 독특하게 형성하는 장르다.

저자는 4년에 걸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헬렌 켈러의 삶을 철저하게 재구성한다. 당사자라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객관적 사실을 고스란히 복원해내며 헬렌 켈러와 그 주변의 인물들, 당대의 현실을 손에 잡힐 듯 펼쳐내는 것이다. 여기에 삶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암시적이면서도 심층적으로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빨리 읽기란 그리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란 지극히 단편화된 이미지에 불과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볼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결혼을 하고 싶어요”라고 고백하는 헬렌의 평범한 모습에 이를 혐오하면서 극력 반대한 어머니 켈러 여사의 이기심이 겹쳐진다. 또한 스물 한 살의 어린 나이에 헬렌을 만나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삶을 좌우한 교사 애니 설리번의 양면적 태도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그녀는 헬렌에게 세상을 열어줬지만 헬렌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했다. 심지어 헬렌이 원하지 않는 순간에도!) 여기에 그녀를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규정하려 했던 수많은 불순한 시도들.

생존을 위한 투쟁, 새롭게 열리는 또 하나의 세상,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내가 꿈꾸는 세상 등. 연대기처럼 펼쳐지는 이 평전의 소제목들만 읽어도 헬렌 켈러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저자 도로시 허먼은 헬렌 켈러, 즉 모든 이 세상의 장애인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것은 자유와 평범한 삶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깨우쳐 준다. 후각과 미각, 촉각 그리고 수화와 점자, 입술 읽기로 세상을 읽고 배우고 헤쳐 나간 헬렌 켈러는 우리들 모두가 이른바 정상(正常)이라는 것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마련해 준다. 또한 신비화된 성인이 아닌 늘 흔들리는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청소년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삶의 교과서로 새롭게 다가온다.

최근 독서인증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워낙 책을 안 읽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읽히고 싶단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으며 시험 문제를 떠올려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 책을 불태우겠다. 책읽기는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즐겁고 고귀한 정신적, 실천적 행위다. 특히 푸른 영혼들에게는 더더욱!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숭문고 교사)=조선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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