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 사상감정 ‘21세기의 코미디’  [04/10/19]
 
공안당국 냉전잣대 “시대착오” 비판빗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군주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오래된 정원> ….
국군기무사령부가 최근까지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에 사상 감정을 의뢰한 도서목록을 본 학자와 학생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학생들은 “공안당국이 시대착오에 빠져 있다”고 질타했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정화(23·서울대4)씨는 “대학 강의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책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며 “신입생 때부터 봐왔던 책들을 새삼 사상 검증의 대상으로 삼는 공안당국의 시대인식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정해영(27)씨는 “황석영씨의 소설 <오래된 정원>은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심사 대상에 거론되기도 했던 작품”이라며 “보수언론마저 ‘인정한’ 작품을 공안당국이 걸고넘어지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공안연에 의뢰된 서적들
고전·대학교재 수두룩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찬양·고무 판정 최악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론> 등이 저자의 ‘이름값’ 때문에 내용과 상관없이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았다. 이상길 성균관대 교수(신문방송학)는 “공안당국은 저자를 ‘좌파’로 미리 규정해 놓고 책 내용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사상체계 전체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다”며 “세금으로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기관이 상식적인 수준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어이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공안기관들이 ‘상상적’ 위험을 조장해 설자리를 잃어가는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찬양·동조 혐의로 판정된 것에 대해 해당 출판사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책을 펴낸 문예출판사 전병석(68) 대표는 “1988년에 초판을 낸 뒤 지금까지도 대학 강의용으로 연간 1500부가 나갈 정도로 고전 중의 고전”이라며 “이런 나라에서 책 펴내는 일을 해야 한다니 웃음만 나온다. 외국에서 우리의 이런 현실을 알기라도 할까봐 부끄럽다”고 말했다.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막스 베버의 책은 마르크스에 대한 반론인데 그런 책을 찬양·동조라고 판단을 내릴 정도라면 감정의 신뢰성이나 일관성이라는 게 참 의심스럽다”며 “한마디로 코미디”라고 말했다.

한상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고 학문 세계의 기본상식을 무시한 것이어서 코멘트할 가치도 없다”며 “이미 살고 있는 시대가 이념적으로 개방적인 시대인데 사회과학의 고전들을 검열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도 “30년 전에 교단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교재로 썼지만 당시에도 이적물 심의 대상에도 들지 않았다”며 “이제 와 ‘찬양·동조’라니 분명 착오일 것”이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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