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동네 서점들이 참여하는 독서축제 [2004.10.16]
만해 한용운은 ‘독서삼매경’이란 글에서 가을에 책 읽는 맛을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그것은 무슨 습관이나 제도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인사가 독서에 적의(適宜)하게 되는 까닭이다. 자연으로는 긴 여름의 괴로운 더위를 지나 밝은 기운과 서늘한 바람이 비롯하는 때요, 인사로는 자연의 그것을 따라서 모든 일이 번거로운 여름 동안에 땀을 흘려가며 헐떡이던 정신과 육체가 적이 가쁘고 피곤한 것을 거두고, 조금 편안하고 새로운 지경으로 돌아서게 되는 까닭이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낮보다도 밤을 이름이니 추야장(秋夜長)이라면 자연히 독서와 회인(懷人)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표정훈의 책 ‘탐서주의자의 책’에서 재인용)
그러나 요즘 출판계에서 가을은 불황의 골이 깊어지는 계절로 통합니다. 신선한 바람과 드높은 하늘, 세상을 물들이는 단풍을 따라 사람들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판에 책 판매부수가 여름 휴가철에 비해 격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가을을 맞아 독서 축제(15~17일)를 벌였습니다. 2000개의 시립 도서관과 100여개의 학교 도서관, 500여 개의 서점들이 참여한 독서 축제의 백미는 가을 밤의 책 읽기였습니다. 매년 열리는 이 축제에서 올해 처음으로 선보인 ‘서점들의 밤’이란 행사에 참가한 200개의 서점들은 15일 밤 책 낭독회를 가졌습니다. 유명 저자들이 참가했고, 독자들과 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짙어가는 가을 밤에 책을 통한 만남의 광장을 대도시의 소형 서점들이 연출한 겁니다. 파리에는 대형 서점 못지 않게 각 동네 서점들이 출판 문화의 요충지로서 큰 역할을 합니다. 서점 주인들이 스스로 골라 짧은 추천사를 단 책들이 진열대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독서 축제에 소형 서점이 전국적 규모로 동시에 참여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형 서점들은 대형 서점에 눌리고 인터넷 서점의 할인 판매에 밀려 점차 소멸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처럼 동네 서점이 참여하는 가을밤의 독서 축제를 꿈꿀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