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훔쳐보기  [04/10/15]
 
[Book World 窓]일기장 훔쳐보기

대학 시절 친구 자취방 책꽂이에서 우연히 시집 한 권을 꺼내 펼쳐보다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시집의 여백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시에 대한 소감과 함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적혀 있더군요. 친구가 군에 있을 때 밤마다 연인을 생각하면서 끄적거린 흔적이었습니다. 외로운 곳에 갇혀 있는 상황 때문에 그만큼 절절했을지는 모르되, 그 친구의 낙서들이 시인의 시보다 더 감동적인 대목도 많았습니다.

책 정리를 하다가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발견하고 감회에 젖는 경우도 더러 있을 겁니다. 얼마 전에는 오랫동안 버려둔 책상자를 정리하다가 어느 책의 속지에서 그 책을 결혼식 전날 구입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한참 정신없이 바쁘고 경황이 없을 법한 날이었을 터인데 웬일로 서점에 들렀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했지요. 아마 새로운 생활에 대한 들뜬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기 위해 서점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래된 책을 펼치면 누렇게 변색된 속지에 군데군데 밑줄을 그어놓은 흔적들도 보입니다.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이었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왜 이런 정도에 밑줄을 그었을까 의아해질 때도 있습니다.

이사갈 때 책이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다 싸들고 가자니 무거울 뿐 아니라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은 책들은 그래도 무언가 자신에게 소중한 기억을 남겼거나 언젠가 다시 펼쳐보고 싶은 자신만의 ‘베스트셀러’일 가능성이 높지요. 따지고 보면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들은 자신의 지적 혹은 정서적 편력을 보여주는 일기장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지난 14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헌책방이 문을 열었다지요? 그곳에 가서 다른 이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재미를 맛보는 건 어떨까요.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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