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출판전망대]'상상+현실=팩션' 의 시대  [04/10/09]
 
지식 '편집' 이 능력이다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e-콘텐츠’의 중독자일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거나 회사에 출근하면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켠 다음 무엇인가를 뒤진다. 그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키워드’다. 나는 이런 습관에 감히 ‘검색형 독서’라는 명패를 붙여놓고 이런 습관이 책 문화를 어떻게 바꿔놓을까를 몇 년째 고찰해왔다. ‘원 테마 잡지’도 몇 년째 펴내고 있으며 <21세기 지식키워드 100>이나 <21세기 문화키워드 100> 같은 단행본도 만들어 세상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 결론은 이렇다. 지금 책 시장은 철저한 분할과 통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키워드 100’에 들어있는 키워드들은 모두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 ‘개론’이니 ‘원론’이니 하는 책들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하나의 키워드가 제목인 책만 넘쳐난다. 이런 경향은 실용서 영역에서 시작되어 이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책의 제목이 ‘파트워크’형 정보로 잘게 쪼개지는 대신 설명하는 방식은 통합적이다. 가령 <한낮의 우울―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민음사)은 과학, 철학, 역사, 정치, 문화적인 모든 지식을 통합해 우울증을 설명한다. 이런 서술이 가능해진 것은 네트워크와 디지털로 대표되는 정보기술혁명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 패러다임에서는 우울증과 같은 하나의 ‘단서’를 실마리 삼아 인터넷에서 자기 멋대로 여행(서핑)하다가 인류가 이미 생산해놓은 ‘충분한 지식’을 활용해 자기 나름의 상상을 통해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앤드류 솔로몬은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다. 지금은 대학에서 우울증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처럼 책의 지은이는 ‘정상’이나 ‘중심’을 향해 외길을 파던 ‘계단식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라 거미집처럼 널려있는 지식을 자유롭게 ‘편집’할 줄 아는 ‘거미집 사고’의 소유자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정보를 편집할 수 있는 능력(리터러시)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는 자기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 노력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소설이 바로 ‘팩션’이다. 사실적 상상력인 ‘팩트’와 허구적 상상력인 ‘픽션’이 하나로 결합(퓨전)돼 간다는 것은 나도 몇 년 전부터 글을 써왔지만, 팩션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한 계기는 김성곤(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최근 글에서였다.

팩션은 지금 소설시장에서 질풍노도와 같다.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베텔스만코리아)는 이미 70만 부를 넘어섰다. 그의 최근작 <천사와 악마>는 국내에서 출간하자마자 초판 6만 부가 다 나가는 바람에 10만 부를 다시 발행했다. <단테클럽>(매튜 펄, 황금가지), <진주 귀고리 소녀>(트레이시 슈발리에, 강), <4의 규칙>(이안 콜드웰 외, 랜덤하우스중앙), <임프리마투르>(리타 모날디 외, 문학동네) <곤두박질>(마이클 프레인, 열린책들) 등 팩션형 소설들이 연이어 출간되며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한결같이 한 사건을 실마리로 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이 전개되면서는 사건해결에 필요한 수많은 단서가 제시된다. 그 단서를 통해 독자는 마음껏 자기 상상을 하며 사건을 해결해 간다. 물론 그 상상은 “현실과 상상, 의식과 무의식,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 사이의 모든 구분을 허무는 것이며 모든 정보를 통합한다. 이처럼 인터넷에서 시작된 ‘검색’의 습관이 이제 소설시장의 판도마저 바꿔놓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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