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번역의 힘’ [04/10/08]
 
올해도 노벨 문학상을 향한 한국인의 소망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매년 그렇듯이 ‘혹시나’ 하면서 힐끗거렸던 시선을 거두며 ‘역시나’라는 탄식을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하도 오랫동안 되풀이해 온 탓인지 무덤덤하기만 하다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러다가 이웃 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라는 2명의 수상자를 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면, 은근히 ‘질투는 나의 힘’이라며 어금니에 힘을 줍니다. 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번역해서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때마침 사이덴스티커가 쓴 자서전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씨앗을 뿌리는 사람)가 최근 나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 소년이 전쟁 도중 해병대 통역요원이 돼 일본어를 접한 뒤 일본 문화에 심취해 전후에 외교관으로 도쿄에 부임하고, 일본 문학을 영어권에 전파하는 대변인이 된 과정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사이덴스티커는 ‘설국’을 번역하면서 원작자를 찾아가 “선생님 이 부분은 좀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작가는 성실하게 열심히 작품을 읽은 후 “그렇군요”라고만 대답했다는 겁니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는 겁니다. 또한 그는 ‘기차가 지방 경계를 통과하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기차의 창문 밖으로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펼쳐져 있다’는 그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을 처음 번역할 때 ‘밤의 밑바닥’을 빼먹은 실수를 저질렀다가 개정판을 내면서 고쳤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가와바타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이 상의 절반은 번역자의 것”이라며 역자에게 최대의 찬사로 보답했습니다. 한국 작가들에게도 이 같은 찬사를 받을, ‘한국 문학의 히딩크’가 하루 빨리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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