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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세상] ‘헌책 축제’의 날을 꿈꾸며  [04/10/06]
 
일본 도쿄 시내의 간다(神田) 지역은 도쿄대학을 비롯한 학교와 서점·출판사들이 몰려 있는, 일본 교육·문화의 중심지로 이름이 높습니다. 특히 진보초(神保町) 일대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고서점가로 150여개의 헌책방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10월 말이면 ‘헌책 축제’가 열리는데, 이 행사는 올해로 벌써 45회를 맞는다고 합니다.

이 거리에는 물론 헌책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최대의 서점인 6층짜리 ‘산세이도(三省堂)’ 건물도 있고, 일본 정신 문화의 산실이라는 출판사 ‘이와나미(岩波) 북센터’도 있습니다. 이곳에 가면 출판 왕국 일본의 저력과 자긍심을 보는 듯하여 부러운 기분마저 들기도 합니다.

일본에 갈 때면 이곳에 들러 책을 구경도 하고 사기도 하는 것이 즐거움인데, 몇 해 전의 한 장면을 나는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방 저 책방 들락거리며 한나절을 보내고 어느 한 책방에 들어갔습니다. 허름한 2층 목조 건물, 20평 남짓한 매장에는 그윽한 헌책 내음이 가득했습니다.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다닐 만큼 비좁은 통로, 즐비하게 늘어선 책꽂이들, 그 칸칸에 빼곡히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그 책들을 눈으로 가볍게 훑으며 이 통로 저 통로로 걸음을 옮기던 내 시선 끝자락에 한 정경이 잡혔습니다.

-출판왕국 日의 헌책방 정경-

책방 한쪽 구석에 카운터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안쪽 테이블에는 돋보기를 걸친 노인네 하나가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무슨 작업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대뜸 나서 빤히 쳐다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책을 펴들고 읽는 체하면서 노인에게 곁눈질을 보냈습니다.

노인은 책을 앞에 놓고 화필 같은 솔로 겉먼지를 쓸어낸 다음,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거기에 묻어 있는 손때를 벨벳 헝겊으로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읽고 난 책을 사들여 그렇게 정성껏 쓸고 닦아, 비록 헌책이나마 가장 깨끗한 상태로 다듬어내는 것이겠지요. 그런 다음 그 책에 나름대로 적정한 가격을 매길 것이고, 가격표가 붙은 책은 책꽂이에 꽂힌 채 또 다른 누군가의 눈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그 책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다시 팔려나갈 것입니다.

게다가 그 책방에 있는 수천권의 책들 모두 그 노인의 자상한 손길을 받았을 것이고, 또 그 노인은 이제까지 수십년 세월을 그렇게 해왔을 테니, 그동안 그 책방을 거쳐서 나간 책들까지 합하면…. 나는 그만 상상을 접고 말았습니다.

또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이 겹쳐서 떠오릅니다.

어느 지방 도시의 제법 유명하다는 헌책방에 몇 사람이 모였습니다. 헌책을 사랑하는 동호인들의 정기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저마다 헌책을 사랑하는 이유를 늘어놓았고, 헌책방이 점점 사라지는 우리나라 현실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에 한 회원이 도착하여,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들고 온 비닐봉지를 풀었습니다. 내용물은 소주와 돼지 삼겹살. 책방 주인은 익숙한 솜씨로 탁자를 대충 치우더니 그 위에 휴대용 가스버너와 불판을 올려놓았고, 회원들은 저마다 책묶음 한 뭉치씩 옮겨다가 엉덩이로 깔고 앉았습니다.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고, 고기 굽는 연기에 헌책들은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많은 지방축제중 하나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에도 유전(流轉)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책도 하나의 생(生)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을 잘 만나 평생을 함께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 손 저 손 떠돌다 파지로 전락하여 운명을 다하는 책도 있지요. 헌책방은 책이 책으로 생존해 있는 마지막 거처입니다. 헌책방이 고물상과 다른 이유입니다.

가을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온갖 축제와 행사가 열립니다. 국제적인 영화제부터 각 지방의 문화제까지, 민속의 향연에서 먹거리의 난장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내용도 다채롭습니다. 특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책과 관련한 행사도 적잖게 마련되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헌책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김석희/ 번역가·소설가)=경향신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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