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23

젼이와 상영형과 종로 씨네코아에서 봄.
김기덕 감독이 만들고 장동건이 나오는 영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서해를 배경으로 해병대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소재로함. 개연성 90% 정도, 이 영화는 리얼리즘 영화군에 속하겠다..

얼핏보면 이 영화는 어설프게(?) 분단의 비극을 연출해 낸 듯하지만.. 특정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얼마나 잔혹해 질 수 있는가, 그야말로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약자로서의 인간의 비극을 그려내는 감독의 시선과 집요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김기덕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특히 섬), 매우 엽기적이라거나 하는 느낌이 강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장면은 나온다.. 성교를 하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남자, 다시 수류탄으로 갈갈이 찢겨진 남자의 몸,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그 찢겨진 시체의 떨어진 팔을 얼굴에 묻고 울어대는 여자.. 미친 그 여자가 보여준 여러 행위들이 엽기적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회를 치는 도마위에서 사시미로 머리카락을 내려치는 모습이나, 수술장비도, 마취제도 제대로 없는 부대 안에서 야밤에 낙태수술(?)을 받은 이후, 피를 뚝뚝 흘리며 횟감이 들어 있는 어항 속으로 들어가는 미친 여자의 모습 등..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그리 엽기적이라는 인상을 짙게 받지 못한 이유는.. 그 하나하나의 모습에 역사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모습들보다 훨씬 더 인간의 잔혹성이 강하게 와 닿았기 때문일 것 같다..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대비.
그 대비는 한 인간이 얼마나 다른 인간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느 아이들처럼 총들고 간첩 한번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장동건.. 친구들을 만나면 으레히 자신이 속한 부대이야기 간첩이야기들만 주구장창 떠들어대든 청년... 그 청년이 도깨비 간첩이 아닌, 바로 어제 아침 싸운 민간인 양아치였다는 것,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고,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고 애인이 있는.. 그런 인간을 따발총으로, 수류탄으로 갈갈이 죽이고 난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을 낯설게 만든다.. 까래서 깠는데, 까고 났더니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조직의 비열함 마저도 보여주려 한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 광인으로서의 강 상병이 도심 한가운데서 군복을 입고 총칼을 들고 기본 자세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로 위로 옆으로 옆으로 돌아~ 다시" 행인들은 "왠 사이코야~"하는 눈빛으로, 그를 구경거리 존재로 쳐다본다.. 곧 강 상병이 정말로 사람을 총칼로 찔러버렸을 때,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일상에서라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들(한 지역을 통제하고 그곳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쏴 죽여버리는 것, 죽여놓고도 미안하단 말 한번 없이 "그러게 왜 거길 들어가요~ 몰랐어요~"하면서 오히려 큰 소리 치는 모습, 어떤 이유에서건 상명하복이라는 것... 미친 여자와 놀이삼아 섹스를 하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낙태수술을 하고..)이 군대라는 통제된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일어났다 사라져버린다..

조직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은 또 얼마나 추한가. 윗 사람이 갈구면 난 아랫 사람을 갈구고 또 아랫 사람은 그 아랫 사람을, 또 그 아랫 사람을... 또 아랫 사람을.. 갈구고 괴롭히는 이상한 힘의 논리. 특정한 그 공간을 떠나버리면 강 상병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을.. 그 속에서 규율이란 이름으로 불합리하고도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약한 졸병들은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다.. 이미 그 특정 공간에서의 부조리함은 처음부터 합의가 되어 있었다는 듯이.

인간의 추한 모습의 합. 아니 약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악이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일까.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유물론적 존재로서의 인간. 특정 상황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 약해 빠진 인간. 타협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더 비열해지거나, 아니면 미쳐버리는 것.. 그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의 합이다.. 미침 이외의 방법은 모두가 추하다.
약함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여지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불유쾌하지만, 그것이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참.. 장동건의 연기는 처음에는 좀더 살기나 광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어야 했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감독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함.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췄을 테니까.. 한 인물의 카리스마 따윈 이 영화에서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다른 작품>
96 악어
97 야생동물보호구역
98 파란대문
99 섬
00 실제상황
01 수취인 불명
02 나쁜 남자
02 해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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