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 A - Boy 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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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여러모로 놀랍기도 하고 마음도 아프고 그랬던 영화.

 
고작 열 살에 살인자가 된 소년을,

son이라고 부르며,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며,

그 착한 본성을 알아본만큼 사랑해주는 보호관찰사 테리.

사회적인 아버지인 그가 세상이 모두 증오하는 소년은 깊이 사랑하고 소통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과는 화해하지 못하는 것. 그 불화 때문에 두번째 아들을 결국 잃게 된 것...

이건 어쩜 평범한 얘기인지도 모르지.


전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사생활도 있고 행복해질 권리도 있다며 받아들이는 직장 상사와 친구들.

위험한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격리해야 한다는 검사의 구형 이유.

천인공노할 짓을 했어도 사회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

결국 죄와 죄인을 동일시하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건 같지만,

적어도 영국이 사회적 또는 규범적으로 두번째 인생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한 번 더 후한 점수를.

 
누군가는 답답해했던 느린 전개와 무거운 이야기인데

숨막히지 않고 아름답다 느낄 수 있었던 화면, 유독 나무가 많았던 그 화면은 역시

촬영상을 탈만하다는 것.


이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회자될만하고 추천할만하고 다시볼만한데,


근데 그 속깊은 이야기.

과거를 모르고서도 친해지고 사랑하고 진심이었으면서,

막상 밝혀진 과거 앞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게 사람이라는 것.

그 뻔하디 뻔하고 지루하디 지루하고 어처구니없는 게 우리들의 행동이라는 것.

영화 속 어떤 인물도 차마 비난하지 못하겠다는 것.

도대체 진실이라는 것, 진심이라는 것,

한 사람을 형성하는 시간이라는 것.

추억 혹은 역사, 바로 지금 여기 중 어디에 방점을 찍고 살아가냐는 거지.

그의 역사만큼이나 그 부모의 역사도 중요한 내게,

지금 모습보다 지난 행적 혹은 트라우마, 까놓고 말하자면 배경에서 미래를 찾는 나로서는,

그런 속물 근성 가득한 게 나라는 걸 알아버린 지금으로서는

그들 하나하나의 마음이 너무 무겁다는 거지. 잘잘못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친구들과 밥과 수다와 산책과 광합성과 무지개가 아니었더라면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할 뻔했는지도.

그 수다와 광합성과 산책과 무지개 덕분에

너무 오래 홀로 방 안에만 있어 내가 참 많이 왜곡되고 둔해졌구나라는 걸

알게 되지 않았다면 결코 기분은 나아질 수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마지막, 출렁이는 검은 바닷물과 매달린 팔에 힘도 안 주고 있는 잭 또는 보이 A와

오래도록 선명하고 또렷했던 (진짜) 일곱빛깔 무지개가 동시에 떠오른다는 거지.

그래서 참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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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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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흘려듣던 갓등의 "지와 사랑" 가사가 문득 귀에 꽂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봤더니, 역시나였다. 아마도 어릴 때 마루 책장에 꽂혀있던 세로쓰기된 세계문학전집 제목은 "지와 사랑"이었던 것 같다. 
역마와 도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가에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인지, 끄덕끄덕 공감을 하면서도 작위적인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떠돌고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골드문트. 그 충동적임.
골드문트는 황금의 입(Goden Mouse)의 독일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골드문트의 다른 이름은 금구(金口)인 셈. 그는 처음부터 표현하는 존재로 명명되었다. 나르치스 역시 마찬가지, 냉철하고 차가운 머리로 끊임없이 자신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명된 존재. 그 두 존재가 젊은 시절 충돌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온 일생을 노후며 죽음 후까지도 영향을 줘 서로를 깨치게 하다니. 아름다운 우정으로 포장된 이들의 관계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종교와 에술의 관계이겠지. 종교와 예술, 이성과 감정, 머리와 마음, 그 모든 것 신앙의 이름으로 어우러질 수 있지.

골드문트와 明諸,, 그 이름의 유사성에서 문득 신이 나고 힘이 났다. 아... 이 주책맞은 소녀적 감성이라니! -_- 그래도 뭐, 살짝 기분좋았던 걸 어떻게 해? ^^ 

5월 초, 꽃 피고 새 울고 초록이 지천이던 그때 하필 서점에서 문득 떠올라 서가 사이를 뒤져 찾아낸 이 책 한권에 윤하와 그를 비롯해 나를 둘러싸고 지탱하고 있는 친구들, 각기 다른 무게감으로 묘하게 균형잡고 있던 그 축들이 모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속에 어우러졌다. 하필 이런 때에 이런 소설이라니! 게다가 갓등 2집. 이 무슨 조화람?이 라고 생각했다. 그때. 답은 글쎄, 아마도 5년, 혹은 10년 후쯤엔 알게 될런지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 미술이 문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아마도 예술양식의 우월성을 설명하라면 본능 혹은 원초적임에 가까운 순서대로 무용>사진>연극>회화>문학(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예술대 열개과의 입학 성적과는 관계없이 내가 정한 우월 혹은 부러움의 척도가 한 때는 그랬는데, 그 모든 예술 양식에는 모두 구상이 들어가 있나 보다. 자연을 재현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하여 세계는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투명하게 재현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없다는 것.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거고, 정신이 필요한 거니까. 절대순수가 될 수는 없어도 고양된 감상과 능력으로 순수를 지향할 수는 있을테니까.

결론은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 지위가 아니라 지향을 따라야 한다는 것"
나를 둘러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무수한 교감이 수없이 말해준 걸, 이제야, 당신들의 그 소리없는 아우성과 500쪽 가까이 빼곡히 들어찬 단어들에야 겨우 이해한 나의 미욱함. 하지만 뭐, 이쯤에서 알게 된 것만 해도 천만다행. 알고 난 후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한 건 하나도 없다는 게 슬프지만... 어쩌면 나는 골드문트처럼 아직도 헤메고 있는지도. 집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처없이 떠도는지도. 아직은 그래야만 하는 시기인지도.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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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벨로의 마녀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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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엘료, 이제 그만 볼까부다.

<11분>부터 계속되던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변치않는 기대로 신간이 나올때마다 사고는 있으나

<베로니카...>나 <피에트라....>, <연금술사>에서 주던 설렘과 감동과 여백이 없다.

나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건지,

주인공들은 여전히 의미를 추구하고 영원이나 궁극을 찾아 헤매지만...

나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는 꾸준히 여성성, 신의 여성적인 면모를 탐구하지만

진짜 여성을 이해하고나 있을까?

아내나... 많은 이들을 통해 간접경험이야 하고 있겠지만,

끊임없는 사회적 거세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동경하는 잉태나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직관력... 그런 걸 정말 이해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지도, 너무 담뿍 빠져들었었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무얼 느끼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정해놓은 채 책을 펴든 탓일런지도 모른다.

코엘료의 다음 이야기는 레바논이나 체르노빌에서 펼쳐질 지도 몰라..

 

<순례자>와 <발키리>나 어서 읽어야겠다.

에딘버러에서 그 많은 짐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사서 들고 올때의 설렘, 그때 바로 읽었어야 했는데...


 2008. 1. 7



>마녀를 보는 시선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충만함을 억제했더라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쓰디쓴 절망적인 삶을 살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노심초사하고, "이것부터 해결하고, 내 꿈에 매진해야지"라고 늘 되새기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오지 않을 거야"라고 한탄하며 좌절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23
 
스승과 그 스승의 가르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종교의식과 엑스터시를, 상징의 전달자와 상징 자체를 혼동하지 마라. '전통'은 삶 속에 깃든 힘에 연결된 것이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에 연결된 것이 아니다. 23-24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낼 최상의 방법은 타인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시각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8 
 

음악은 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음악 취향에 따라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다. 58
 
"성인(聖人)이란 자신의 삶에 존엄을 부여한느 사람이오" 나는 말했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그것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오. 그래야 우리에게 닥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향해 웃을 수 있지. 그리고 모든 일에는 다 주어진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거요. 정점(頂點)에서 뻗어나오는 빛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말이오." 81
 
"스승이라, 그게 뭐요? 스승은 무슨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제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사람이오. 제자가 지닌 최선을 다하는 힘을 고취시키는 사람이지." 118
 
그랬다. 자기가 쥐고 글을 쓸 붓을 존중하다보면 자연히 글을 쓰기 위해 평상심과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평상심은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품격이란 겉치레가 아니오. 삶과 일을 존중하는 자세지요. 당신이 자세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때, 그 자세가 허위거나 작위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오. 바른 자세를 갖추려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종이와 붓은 더 품격을 갖추게 되는 거요. 종이는 평평하고 아무 색이 없는 표면이기를 멈추고, 자기 위에 놓인 것들의 깊이를 받아들이지요. 품격이란 가장 완벽한 서예를 위해 갖춰야 할 적합한 자세라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이와 같아요.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때 단순함과 집중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할수록, 절도 있는 자세일수록 아름다운 거지요. 처음에는 불편하지만 말이오." 119
 
"... 당신은 살아 있고, 이 촛불은 당신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예요. 그걸 믿으세요. 길을 따라 걸어서 목적지에 다다른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어요. 우리는 발을 옮길 때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각각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거예요. 매일 아침 스스로 새기도록 하세요. '도착했다'라고. 그러면 그날 매 순간을 느끼는 게 더욱 쉬워질 거예요." 195
 
"그 질문은 잘못됐어요. 당신은 알아야 해요. 당신이 상대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베푸는 입장이라는 것부터.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든 생기지 않든 똑같이 만족스러울 거예요. 당신에게 사랑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이제 당신의 샘을 발견했으니 그냥 흘러가게 두세요. 그 샘물이 당신의 세계를 채울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미리 안전거리부터 확보하려 들지 마세요. 발걸음을 디디기 전에 확신을 얻으려고 기다리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이 주는 대로 받게 될 거니까. 이따금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곳에서 받을 수도 있지만요."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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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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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참 이 분, 글이 맛깔나다. 말씀도 참 맛깔나게 하셨을 것 같다.
천재는 요절한다더니... 그리 일찍 돌아가신 걸 보면 천재였는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걸 지독하게 판 천재.

어떤 책을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기분이 들 때나 있는데 오주석 이 양반의 책이 그렇다.
한국화를 읽다보니 전통 사상이며 환경이며 자연이며 한자며 어찌나 해박해지셨는지
그림에 담긴 역법부터 생활상, 정치 이야기까지 술술술이다.
풀어내는 입담 또한 어찌나 정갈하고 사려깊으면서도 깊이있는지, 그 애정이 절로 느껴진다.
골라 쓴 단어마다 어찌나 적확하고 의미가 풍부한지,
생전에 소비적인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는 우리 옛그림에서 선조들을 만난 게 아니라 친구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
그림 속 화가의 마음으로 덥썩 다가가 농밀한 우애를 나눴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김홍도 이 양반"같은 표현이 자연스럽게 툭툭 나오지.
그림을 읽어내는 그 찬찬한 상상력하며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그 섬세한 묘사..
하루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닌게지. 

두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천자문을 떼어야겠다. 다섯살배기부터 가르쳤다는 우리네 고유의 사고관이 무언지 궁금해졌거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유롭고 충분하게 공부해야겠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좋아서 더 알고 싶어서 계속 공부한 세월이 아니라면 나올 수가 없는 글이다.  먹고사는 핑계로 소비적이고 얕은 글쓰기에 익숙해진 동안 가볍고 뻔하고 조급해진 글쓰기로는 될 턱이 없지. 공부하고 숙고하고 충분히 즐긴 연후에 봉선화 꽃씨 터지듯 통익어 툭 튀어나오는 자연스러운 글쓰기. 그걸 위해 호흡을 좀 가다듬어야겠다.  

그리고호랑이 보러 한번 더 가야겠다. 자꾸만 호랑이에게 끌렸던 건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다.
조선반도를 지켰다던 산신령 호랑이.

2007. 11 - 2008. 1 

책 속으로 

1권

수묵화는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양식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상을 낳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회색이 생리학적으로 시각 속에서 완전한 평형 상태를 낳는다고 말한다. 눈과 뇌를 연결하는 시각신경은 회색을 바탕으로 한 평형 상태를 요구하며, 이 회색이 없을 때에는 심지어 정신적 불안정까지 초래된다고 한다.
수묵화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회색조를 이룸으로써 항상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하고 안정감을 준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동양의 수묵화가들은 대체로 장수를 누렸다. 29

감히 옛 그림의 감상 요령을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가장 커다란 두 가지 원칙이 있으니 그것은 '옛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옛사람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211

2권

날마다 외양이 바뀌어 가는 약빠른 세상살이 속에서, 나 자신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자연과 한참 떨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말하고 그 자연이 낳은 옛 그림의 세계를 이야기하기라 이따금씩 영 멋쩍고 부끄러운 감 없지 않다. 그러나 좋은 것은 변하지 않고 더욱이 가장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예술품이건 참된 생각이건 혹은 알뜰한 사랑이건 간에 세상에서 진정으로 훌륭한 것은 모두 선하고 결 고운 마음으로 빚어낸 것이라 믿으므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두번째 책을 다시 내놓았다. 11(책을 펴내며)

우리 옛 시나 음악, 그림의 창작은 서양의 그것보다 즉흥성이 강하고, 또 기법 면에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필휘지의 전통이 있다. 하지만 더 의미심장한 것은 술이 작가의 예술 정신에 미치는 영향 문제다. 술이란 묘한 것이라 마실수록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며, 좋게 말해서 인간의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다. 사람마다 다르긴 해도 대체로 술이 들어가면 교묘한 생각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능력은 줄어드는 대신에, 오히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정감을 진솔하게 곧바로 토로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세부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은 벗어던지고 곧바로 사물의 본질에 육박하게 하는 것이다. 75

예로부터 문인화를 감상할 때면 매양 작가의 인품을 함께 거론하기 마련이었다. 그림 한 점을 보고서 어떻게 화가의 인품을 평가할 수 있는가?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 홀로 정악 거문고를 뜯는 선비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문인화란 그저 가슴속 정을 풀어 헤쳐 본 것이지 원래 누군가 남이 보라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술 마시고 그린 그림은 비 오는 날 잦아드는 정악 거문고 소리와 꼭 같다. 자신만의 내밀한 세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고 순수하다. 문인화의 표현이란 차라리 모자랄지언정 넘칠 수가 없다. 차라리 어늘할지언정 웅변적일 수가 없다. 문인화는 사고팔지 못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두런거리는 혼잣말이다. 문인화에서는 미태가 떠도는 점을 가장 꺼린다. 예쁘게 꾸밈이란 거짓인 까닭이다. 이런 문인화를 보고서 인간의 품성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96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에는 이른바 선비의 문인화조차 이처럼 고답적이지 않고, 삶의 진실에 가까웠으며 솔직하고 건강했다. 문화의 중심에 늘 우리 자신이 존재했었다. 99 

사람들은 흔히 상생만 말한다. ... 그러나 상생을 어짊으로 보고 상극은 그 반대라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도道란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이다(一陰一陽謂之道)." 상생만 있고 상극이 없으면 세상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없이 성장하여 그야말로 악몽 속의 원시림 같은 덩굴숲 천지가 되고 만다. ... "사람의 도는 인과 의(立人之道 日仁與義)라 하였다. 차가운 대기를 뚫고 고요함과 위엄에 찬 <금강전도>의 세계는 하늘의 음과 양, 땅의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조 속에서 만고의 진리와 생명을 조형으로 보여준다. 140-141

'사대'란 말은 [맹자孟子]에 나온다.
제나라 선왕이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도道가 있습니까?"하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겨낼 수 있습니다. ... 또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겨낼 수 있습니다. ...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즐기는 것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뜻을 두려워 하는 사람을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
사대란 어디까지나 사소事小, 즉 큰 나라의 작은 나라에 대한 도덕성과 예의를 바탕으로 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은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는 사대를 표방하였으나, 현존하는 강대국 청나라에 대해서는 그 연호를 쓰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사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게 지녔던 것이다. 또 [노자老子]를 보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낮추면 작은 나라의 신뢰를 얻게 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낮추면 큰 나라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대국은 자기를 낮추어 신뢰를 얻고, 소국은 자기를 낮추어 신임을 얻는다"고 하였다. 똑같이 자신을 낮추는 상호주의가 적용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사대주의는 힘에 의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평화적 외교 관계였다. 또 사대주의는 반드시 사소주의와 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예禮의 정신에 근본을 둔 관행이었다. 사대주의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면, 그것은 소국이 대국과 현신적 관계를 가질 때 자기의 독립성과 이익을 유지하려고 취했던 대응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대국의 도덕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저들이 강압을 가하면 과감히 창검을 들고 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를 표방했던 조선은 일찍이 명나라의 요동 지역을 수복하려고 정벌을 꾀했던 일조차 있었다. 일본은 사소事小를 가리고 사대事大만을 부각시키고, 자율성 대신 타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식민지 백성의 자기 비하 감정을 더더욱 조장했던 것이다.
사대주의의 참뜻을 아무리 강조해도 조선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름지기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음악을 듣고, 남의 술을 마시며 남의 춤을 추면서, 심지어 영어를 국어로 쓰자고 하는 우리가 주체적인가? 내 땅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들여놓고, 저들이 우리 땅을 더렵혀도 말 한 마디 못하며, 저들이 내 백성을 다치게 해도 따지지 못하는 우리가 더 독립적인가? 핵을 가지면 어린애 칼 쥔 격이라 걱정되니 제 스스로 개발 않겠다 맹세하고, 미사일 연구는 발사 거리를 남의 허락을 맡고 그만큼만 진행한다. 심지어 전력, 통신 등 기간산업까지 외국이 살 수 없으면 선진국이 아니라 하니, 이 모든 상황을 옛날과 비교해서 누가 조선을 사대주의 국가라 말하는가? 나는 두렵다! 조선을 '이조'라고 부르는 후손의 나라가 과연 백 년이나 가겠는가?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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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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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웃음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실용서,

그중에서도 자기계발서,

그중에서도 연애학개론 내지 연애심리학.

굳이 저 책을 들었던 건, 저 도발적인 제목이 심히 맘에 안 들어서였는지

꽤 괜찮아 꽤 공감해서 꽤 부러웠던 <섹스 앤 더 시티> 주변인들이 만들었다는 것 떄문이었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암튼 괜히 혼자 입 댓발 내밀며 시덥잖게 책갈피를 넘기다가

"마음이 정말 날카로우는 칼에 꿰찔리는 듯" 아팠다. 젠장.

나도 알고 있었다. 잘못된 연애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며

잘못된 걸 알았다면 ASAP로 쫑내야 한다는 것. 근데 맘이, 몸이 글케 되냐구?

결론은... 당신들이 옳았다.

나보다 내 책꽂이에 더 관심이 많았던 어떤 남자에게 이 책 얘기를 했을 때

예상했던 대로 불편해하며 콧잔등으로 흘리더니,

나름 재치있고 쿨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빠이빠이에 발걸음을 더듬거리던 그는

한 달 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었나봐"라며 문자를 보내와

결국은 내가 채인 것이었음을 아주 명백히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고맙다며...

무엇이? 좋은 책을 알려줘서? 그는 내게 반하지 않았었음을 알려줘서?

어쨌거나, 난 이 영화를 상당히 기다렸고 기대했다.

(그나저나 그는 이 영화를 혼자 봤을까? 둘이 봤을까? 분명 봤을텐데...)

 

그러나 '흥!'이었던 책이 예상밖의 '끄덕끄덕'이었던 것과는 달리

'기대만발'이었던 영화는 '니뿡!'이었다.

구성이야 뭐... 워낙 로맨틱코메디로 단련된 할리우드니, 깔끔하고 적절했으며 제법 흠잡을 데 없었지만

다른 로맨틱코메디보다도 훨씬 내 맘을 두드리지 못했단 말이다.

어쨌거나 발렌타인데이,

원하는 날,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영화를 보며 생각보다 함께 이 영화를 보러 온 커플이 많다는 데 놀란 나는

역시나 대체로 커플의 전유물이어서, 영화를 혼자 보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 대체로 진실이라는 것을 살짝 인정할 수 있었고...

 

책과 영화가 누누히 알려주는 뻔하디 뻔한 거짓말,

"널 너무 사랑하지만 너와 헤어져야겠어."가

어떤 사람의 상황에서는 지극히 진심으로 들릴 수 있다는...

놀라움인지 아픔인지... 어쨌거나,

 

뒤통수로 시작해 공감으로 끝난 책이나,

공감으로 시작해 뒤통수로 끝난 영화나,

책과 영화와 현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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