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참 이 분, 글이 맛깔나다. 말씀도 참 맛깔나게 하셨을 것 같다.
천재는 요절한다더니... 그리 일찍 돌아가신 걸 보면 천재였는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걸 지독하게 판 천재.

어떤 책을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기분이 들 때나 있는데 오주석 이 양반의 책이 그렇다.
한국화를 읽다보니 전통 사상이며 환경이며 자연이며 한자며 어찌나 해박해지셨는지
그림에 담긴 역법부터 생활상, 정치 이야기까지 술술술이다.
풀어내는 입담 또한 어찌나 정갈하고 사려깊으면서도 깊이있는지, 그 애정이 절로 느껴진다.
골라 쓴 단어마다 어찌나 적확하고 의미가 풍부한지,
생전에 소비적인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는 우리 옛그림에서 선조들을 만난 게 아니라 친구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
그림 속 화가의 마음으로 덥썩 다가가 농밀한 우애를 나눴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김홍도 이 양반"같은 표현이 자연스럽게 툭툭 나오지.
그림을 읽어내는 그 찬찬한 상상력하며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그 섬세한 묘사..
하루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닌게지. 

두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천자문을 떼어야겠다. 다섯살배기부터 가르쳤다는 우리네 고유의 사고관이 무언지 궁금해졌거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유롭고 충분하게 공부해야겠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좋아서 더 알고 싶어서 계속 공부한 세월이 아니라면 나올 수가 없는 글이다.  먹고사는 핑계로 소비적이고 얕은 글쓰기에 익숙해진 동안 가볍고 뻔하고 조급해진 글쓰기로는 될 턱이 없지. 공부하고 숙고하고 충분히 즐긴 연후에 봉선화 꽃씨 터지듯 통익어 툭 튀어나오는 자연스러운 글쓰기. 그걸 위해 호흡을 좀 가다듬어야겠다.  

그리고호랑이 보러 한번 더 가야겠다. 자꾸만 호랑이에게 끌렸던 건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다.
조선반도를 지켰다던 산신령 호랑이.

2007. 11 - 2008. 1 

책 속으로 

1권

수묵화는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양식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상을 낳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회색이 생리학적으로 시각 속에서 완전한 평형 상태를 낳는다고 말한다. 눈과 뇌를 연결하는 시각신경은 회색을 바탕으로 한 평형 상태를 요구하며, 이 회색이 없을 때에는 심지어 정신적 불안정까지 초래된다고 한다.
수묵화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회색조를 이룸으로써 항상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하고 안정감을 준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동양의 수묵화가들은 대체로 장수를 누렸다. 29

감히 옛 그림의 감상 요령을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가장 커다란 두 가지 원칙이 있으니 그것은 '옛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옛사람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211

2권

날마다 외양이 바뀌어 가는 약빠른 세상살이 속에서, 나 자신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자연과 한참 떨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말하고 그 자연이 낳은 옛 그림의 세계를 이야기하기라 이따금씩 영 멋쩍고 부끄러운 감 없지 않다. 그러나 좋은 것은 변하지 않고 더욱이 가장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예술품이건 참된 생각이건 혹은 알뜰한 사랑이건 간에 세상에서 진정으로 훌륭한 것은 모두 선하고 결 고운 마음으로 빚어낸 것이라 믿으므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두번째 책을 다시 내놓았다. 11(책을 펴내며)

우리 옛 시나 음악, 그림의 창작은 서양의 그것보다 즉흥성이 강하고, 또 기법 면에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필휘지의 전통이 있다. 하지만 더 의미심장한 것은 술이 작가의 예술 정신에 미치는 영향 문제다. 술이란 묘한 것이라 마실수록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며, 좋게 말해서 인간의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다. 사람마다 다르긴 해도 대체로 술이 들어가면 교묘한 생각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능력은 줄어드는 대신에, 오히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정감을 진솔하게 곧바로 토로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세부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은 벗어던지고 곧바로 사물의 본질에 육박하게 하는 것이다. 75

예로부터 문인화를 감상할 때면 매양 작가의 인품을 함께 거론하기 마련이었다. 그림 한 점을 보고서 어떻게 화가의 인품을 평가할 수 있는가?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 홀로 정악 거문고를 뜯는 선비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문인화란 그저 가슴속 정을 풀어 헤쳐 본 것이지 원래 누군가 남이 보라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술 마시고 그린 그림은 비 오는 날 잦아드는 정악 거문고 소리와 꼭 같다. 자신만의 내밀한 세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고 순수하다. 문인화의 표현이란 차라리 모자랄지언정 넘칠 수가 없다. 차라리 어늘할지언정 웅변적일 수가 없다. 문인화는 사고팔지 못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두런거리는 혼잣말이다. 문인화에서는 미태가 떠도는 점을 가장 꺼린다. 예쁘게 꾸밈이란 거짓인 까닭이다. 이런 문인화를 보고서 인간의 품성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96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에는 이른바 선비의 문인화조차 이처럼 고답적이지 않고, 삶의 진실에 가까웠으며 솔직하고 건강했다. 문화의 중심에 늘 우리 자신이 존재했었다. 99 

사람들은 흔히 상생만 말한다. ... 그러나 상생을 어짊으로 보고 상극은 그 반대라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도道란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이다(一陰一陽謂之道)." 상생만 있고 상극이 없으면 세상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없이 성장하여 그야말로 악몽 속의 원시림 같은 덩굴숲 천지가 되고 만다. ... "사람의 도는 인과 의(立人之道 日仁與義)라 하였다. 차가운 대기를 뚫고 고요함과 위엄에 찬 <금강전도>의 세계는 하늘의 음과 양, 땅의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조 속에서 만고의 진리와 생명을 조형으로 보여준다. 140-141

'사대'란 말은 [맹자孟子]에 나온다.
제나라 선왕이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도道가 있습니까?"하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겨낼 수 있습니다. ... 또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겨낼 수 있습니다. ...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즐기는 것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뜻을 두려워 하는 사람을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
사대란 어디까지나 사소事小, 즉 큰 나라의 작은 나라에 대한 도덕성과 예의를 바탕으로 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은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는 사대를 표방하였으나, 현존하는 강대국 청나라에 대해서는 그 연호를 쓰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사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게 지녔던 것이다. 또 [노자老子]를 보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낮추면 작은 나라의 신뢰를 얻게 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낮추면 큰 나라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대국은 자기를 낮추어 신뢰를 얻고, 소국은 자기를 낮추어 신임을 얻는다"고 하였다. 똑같이 자신을 낮추는 상호주의가 적용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사대주의는 힘에 의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평화적 외교 관계였다. 또 사대주의는 반드시 사소주의와 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예禮의 정신에 근본을 둔 관행이었다. 사대주의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면, 그것은 소국이 대국과 현신적 관계를 가질 때 자기의 독립성과 이익을 유지하려고 취했던 대응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대국의 도덕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저들이 강압을 가하면 과감히 창검을 들고 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를 표방했던 조선은 일찍이 명나라의 요동 지역을 수복하려고 정벌을 꾀했던 일조차 있었다. 일본은 사소事小를 가리고 사대事大만을 부각시키고, 자율성 대신 타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식민지 백성의 자기 비하 감정을 더더욱 조장했던 것이다.
사대주의의 참뜻을 아무리 강조해도 조선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름지기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음악을 듣고, 남의 술을 마시며 남의 춤을 추면서, 심지어 영어를 국어로 쓰자고 하는 우리가 주체적인가? 내 땅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들여놓고, 저들이 우리 땅을 더렵혀도 말 한 마디 못하며, 저들이 내 백성을 다치게 해도 따지지 못하는 우리가 더 독립적인가? 핵을 가지면 어린애 칼 쥔 격이라 걱정되니 제 스스로 개발 않겠다 맹세하고, 미사일 연구는 발사 거리를 남의 허락을 맡고 그만큼만 진행한다. 심지어 전력, 통신 등 기간산업까지 외국이 살 수 없으면 선진국이 아니라 하니, 이 모든 상황을 옛날과 비교해서 누가 조선을 사대주의 국가라 말하는가? 나는 두렵다! 조선을 '이조'라고 부르는 후손의 나라가 과연 백 년이나 가겠는가?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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