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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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바리."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메모했다. 뭔가 할 말 또 한가득인데 정리가 안 됐거나 정리하기 싫었던 게다. 그렇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자'로서의 바리에 주목한 것입니다. 책 뒤의 대담에도 나오지만 세계체제 이후 적응하지 못한, 버림받은 수많은 나라의 백성들의 얼굴이 '바리'입니다."(창비 2007 가을호, 251)라고 말한 작가의 창작 의도에 정통하게 읽어버린 셈이다. 

재미있었지만, 뭐 그리 신나지는 않았다. 나는 아마도 '고통당한 고통의 치유자, 수난당한 수난의 해결사' 바리가 보다 더 스펙터클하기를 바랐나보다. 좌중을 압도하는 굿판의 무당처럼 바리의 생도 그러기를, 그렇게 강한 모습만 보여주기를 바랐나보다. 현대의 샤먼 바리는 한없이 여리다. 가도가도 고난의 행군, 안정됐다 싶으면 떠나야 하고 안온하다 싶으면 가족 중 누군가는 또 죽어야 한다. 카타르시스가 없다. 아마 그래서 신나지 않았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게 현실일 게다. 바로 지금 여기, 살아가는 모양새. 개인적으로는 [심청]이, 그보다는 [오래된 정원]이 훨씬 더 좋지만... 아마 [바리데기]가 전작들보다 훨씬 단단하고 냉정한 작품일 게다.
 
<별순검>과 [퀴즈쇼] [바리데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까지 거치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건지 명확하게 알겠다. 아마도 내가 문학에 바라는 건 치유. 그리고 생의 의미를 간파할 해박한 지식.
문제는 여전히 깜냥이 안 된다는 것. 더 큰 문제는 여전히 덤비지도 못한다는 것. 미망이라면 이제 그만 좀 덮어버려라!

 
> 바리 혹은 황석영

[바리데기]
어디 갈라구, 혼나야 돼. 멍텅구리.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나는 화가 치민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까지 겪은 일만 해도 서럽다거나 진저리가 난다거나 아무런 원망의 말과 불평도 없이 수걱수걱 당하기만 해왔는데, 참으로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까막까치는 부리를 벌리고 깔깔 웃더니 또 이랬다.
생명수 가져올래문 넌 아직 멀었지. 세상에 산 것들 고생 많아, 고생 많아.
나는 화를 꾹 참고 까막까치에게 물었다.
서천 가는 길을 가르쳐다구.
따라와, 따라와.
고것이 날개를 펴고 가지 끝에서 날아오르더니 내 머리 위를 몇번 빙빙 돌고 나서, 그대로 거대한 나무둥치를 향하여 머리를 처박을 듯이 곧장 날아갔다. 잘코사니야, 넌 이제 대가리가 깨어져 죽었다. 그런데 나무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리며 동굴 같은 입구가 나타났다. 까막까치는 그 안으로 날아가버렸는지 자취가 간데없다. 컴컴한 입구 안으로 발ㅇ르 내밀자 나는 빨려들듯이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밑바닥에 내려서자 천장이 까마득하게 하늘 꼭대기에 보이고 길이 동서남북중 다섯 갈래로 나 있다. 길 한복판에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입은 사자가 쥘부채를 두 손에 꼭 쥐고 섰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소리였는데 그가 먼저 물어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131-132)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223)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 자기가 풀어야 하는 거야. 에밀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243)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던 것을 샹이 건드렸을 뿐, 그것은 먼 길을 거쳐오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원한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된다. ...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에요? 믿고 의지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신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게 그 본성이다. 색도 모양도 웃음도 눈물도 잠도 망각도 시작도 끝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거야. 우리에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우여곡절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 이겨내야 하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란다. 어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 아내와 딸들이 총살당하고 잠무카슈미르를 떠나면서 나는 너와 똑같이 신을 원망했다. 어째서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262-263)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283)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286)

"한국문학은 살아있다" 소설가 황석영과의 대화, 창비 2007 가을호
황 ... 쫓겨났다고 생각하면서 중심부에 안 들어가는 거죠. 중심부에 들어가면 내가 못 견디거든요. 그러니 늘 바깥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서 저 안을 그리워하고. 어떤 친구가 자칭 경계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경계인이에요. 늘 소속되지 않은 자의 그런 자유와 억압에 대한 긴장감이 있어요. (242-243)

언젠가 이문구의 소설을 대학에서 읽혔더니 '오히려 포스트모던'하게 받아들이더라는 누군가의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돈 끼호떼]가 요즘 새삼 기억되는 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되던 당시에 고전을 형식적으로 패러디했던 관점이 획기적이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하나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 한국은 언어와 문화가 마이너리틴데 이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까요? 전혀 예측 못하는 방향으로, 저들이 여태까지 고수해왔던 소설적 서술이나 방법론, 이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자기 스타일이지요. ... 서사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것에 걸맞게 서사의 형식, 그것을 엮어내는 방법론, 이런 걸 잘 형성해내면 내 문학이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지요. (247-248)

과거의 서술은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집 안과 거실로 들어가는 데 수십페이지가 들었어요. 정원의 돌과 나무에 관해서, 또는 집 안의 불빛과 분위기, 대문의 모습, 현관과 손님을 맞는 하인의 표정 복장 얼굴 생김새, 그리고 마호가니 또는 보르네오 또는 아프리카 원목으로 만든 온갖 가구들, 책상 위의 문방구와 서재에 앉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이런 식으로 수십권이 씌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테면 영환느 렌즈 안에 들어온 것만 보여줄 뿐 다른 방식의 서술로 줄거리를 이어줍니다. 디테일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장면과 장면을 배치하지요. 이를 몽따주라고도 하고 미장쎈이라고도 하고, 언뜻 비치는 작은 소품 하나로 복선을 준비해놓기도 합니다. 앞의 길고 잡다한 서술을 피사체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함축해야 하는 거지요. (249) 

[바리데기]라는 서사무가가 문화침탈이 빈번했던 한반도 같은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구비로 전승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랬기 때문에 수천년간 살아남은 것이기도 하구요. 모든 얘기꾼들은 입말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요. ... 나는 심층과 표층, 죽음과 삶을 갈라서 얘기한 게 아니에요. 죽음과 삶, 현실과 비현실, 이게 다같이 공유되어 있는 거예요. 박민규란 작가가 최근에 젊은 작가들끼리 좌담하면서 근사한 말을 했더라고. 소설은 물질이다...... 이게 근사한 말이지요. 내가 최근에 리옹에 가서 얘기를 하는데 어떤 프랑스 여성작가가........ 인기 절정의 여성작가래요. 몇십만부가 팔리고 하는데 맨날 자기 사생활을 작품으로 쓰고 그런데요. 누가 "글을 어떻게 씁니까?" 물었더니 작가가 하는 말이 내면이 피투성이가 되고 어쩌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나는 뭐라고 했냐면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그리고 궁둥이로 쓴다." 그건 뭐냐면 소설창작은 8,90퍼센트가 노동이 결정하는 거예요. 우선 오래 앉아 있어야 되거든. 프로 작가는 글이 안 나와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해요. 안 나오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난 글쓰는 행위를 물질적 행위로 보고, 세상에 표출도니 것도 그 물질의 부분으로 봅니다. 요새는 작가들이 왜 그렇게 엄살이 심한지 모르겠어요. 하늘에서 천형, 천벌을 받은 것처럼 말하더군. (251-252)

귀신이란 게 뭐냐면 몸이 사회화되는 과정이 귀신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254)

이 시대 우리의 산문을 어떻게하면 개척할 것인가가 내 고민인데, 하다 말기도 하고 안타깝게 중도에 죽기도 하고 그러지요.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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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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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는 여전히 감각적이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패션지 스타일로 말한다면 너무나도 리즈너블한 브랜드와 거리에 대한 묘사. 홍대 골목에 대한 묘사는 눈에 선해, 그런데 그게 광주 혹은 제주도에 사는 사람에게도 그리 선할 지는 의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적인 물가의 코스모폴리탄 서울에서 살아가는 졸지에 백수가 된 청년의 심상 묘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음을 역설하는. 

작가는 20대를 응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에 행여라도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처럼 음울하기만 하고 재미없음 어쩌나 우려했는데 기우였다. 작가는 제대로 20대를 응원한다. 키보드와 문자메시지로 감정을 키우고, 만나기 전부터 이미 공유했던 취향 덕택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좋아하면서도 어쩐지 서먹해지는 그 감정들을 세세하게 그린다. 작가도 그런 20대를 살았나보다. 청춘예찬식이 아니라 좋았고, 마냥 음울하거나 진취적이지 않아서 더 좋았다.
문제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덫에 걸린 상황, 옴짝달싹 못하겠는데 더 나아지기 위한 확신에 찬 길은 보이지 않고, 정답은 알겠는데 이상하게 정답과는 다르게 행동하게 되고, 해야하는 일보다 충동적으로 눈에 들어온 일 혹은 우연찮게 제안이 들어온 일에 기울어지게 되고, 무엇보다 예의 그의 소설에서 반복되는 것이긴 하지만 자기파괴의 쾌감! 그걸 알아줘서 고맙다. 자기파괴의 쾌감이 위악이 아니라서 더 좋다. 어쩔수도 없이, 의지 혹은 사고와는 관계없이 자꾸만 그렇게 되버리는 걸 그대로 그린 게 좋다. 그래서 신났다.
퀴즈쇼 혹은 경마식 퀴즈게임, 퀴즈쇼에서 이기기 위해 백과사전적 잡학과 순발력, 정치에 능해져야 하는 상황. 깊이있게 한분야를 파고든 이보다 다양하게 이리저리 찝적댄 말 그대로 백과사전적 잡학의 소유자를 해박하며 화제가 풍부하다고 칭찬하는 이 사회를 제대로 꼬집고 비튼거지. 그런 지식을 추구하고, 그런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회. 거기에 익숙해져야하는 신입들.
그런데 잘 모르겠다. 그 '회사'라는 것, '사회'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게 달 때 삼켰다가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상처준 채 토해내고, ... 생각이 이쯤 들어가면 꼬인다. 잘 모르겠다. 20대, 신났던 날보다 투덜댔던 날이 더 많았고, 칭찬받았던 때보다 질책을 들어야했던 때가 더 많았고, 쇠를 씹어 먹어도 소화시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는데 무얼 해야할지 할 수 있는지 몰라 우물쭈물했고, 그런 20대를 지났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할 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만 나날이 처지는 살 덕분에 몸이 늙는다는 슬픔을 알게 되는 대신 지난 날들보다는 조금 더 현명해진 거는 같은데. 적어도 뭘 하지 말아야할지는 알고, 질책을 칭찬으로 돌려 들을 줄은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살아야하지? 헌 책방 한 켠에 야전침대를 펼치고 익숙한 책들로 익숙한 풍경을 만들며 '회사'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민수처럼, 여전히 지난 시간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quantum leap은 더더욱 아닌 시간들.
그냥 불만은 아닌데... 책 다 읽고 나니 좀 궁금하고 답답해졌다. 지금이 난 참 좋은데, 나이들어가는 게 점점 더 좋은데, 더 나이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애매모호답답했던 20대들을 알아주는 김영하같은 작가가 있어서 좋은데, 그런데 지금은 모지? 하는 생각. 그냥 예의 그 푸념들...

크흐흐.. 이를 어쩌나... 음주 블로깅, 수습이 안 되네. 이쯤에서 그만!

 

2007. 11. 7-8

 
 

>퀴즈쇼


그것은 복숭아를 자르는 것과 비슷하다. 겉은 부드럽지만 어떤 지점에 이르면 더는 날이 들어가질 않는다. 진짜 감정은 딱딱하게 응결된 채 부드러운 과육 아래 숨겨져 있는 것이다. (13-14)


'이것도 곧 끊기겠지?'라고 생각하니 더 짜릿했다. 백수란 이런 것이다. 이, 자기 파괴의 쾌감! (39)
 

"자네도 요즘 젊은이 같구만. 생각도 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고 있잖아."
"그게 어때서요?"
"우선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거든. 그리고 틀리더라도 일단 자기 생각을 준비해둬야 하는 거야."
"왜요?"
그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세상이 그런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질문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는데요."
"그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게." (46-47) 

 

"인생의 큰 시험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계속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 (54)
 

그러나 그런 낙관을 유지하는 데에도 최소한의 공간은 필요했다. 그러니까 감옥 같은 독방에는 낙관보다는 비관이 더 어울린다는 뜻이다. 자기도 모르게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아무 일도 하고 싶어지지 않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사립문을 열고 나가면 너른 들이 나타나는 농가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은둔형 외톨이가 되기 힘들다. 야생화와 나비,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다보면 어느새 잡초뿌리라도 뽑고 있는 건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도심 한가운데의 이런 고시원에서는 인간이 점점 애벌레처럼 변해간다. 스스로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미래의 인간들처럼 선으로 연결된 채 영양만 공급받고 있는 한 마리 고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나는 어느새 그런 울적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은 왜 사는 걸까? 산다는 것에 뭔가 의미는 있는 걸까? 자벌레처럼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기어가다가 알을 까고는 죽어버리는 걸까? 질문을 던지면 던질수록 ㅇ니생은 더 오리무중이 되어 저 멀리 달아났다. (64)
 

사람의 운명이라고 믿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운명이란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을 결국 맞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할 연인들에게는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이 즐비하다. 신화 속에는 깨진 거울이 서로 만나 온전한 거울이 되는 얘기들이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주몽은 끝내 고구려의 왕이 된다. 운명은 누구 말마따나 과녁에 맞도록 쏘아진 화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백 퍼센트 명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이미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단 한 개의 단서도 치명적이며, 단 한 조각의 유류품도 무서운 확신이 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무능력한 탐정, 서툰 수사관이다. 그들은 법정에서는 채택도 하지 않을 어수룩한 증거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신념에 도달한다. 누구도 그 신념을 철회시킬 수 없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신념, 그것은 운명에 대한 확신이다. 이 서툰 탐정의 눈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사건의 전모는 이미 명백하며 범인의 검거는 식은 죽 먹기다. 화살은 이미 표적에 꽂혀 있고, 표적으로 걸어가 십 점 만점의 정중앙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뽑아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화살을 뽑아든 우리의 영운은 이렇게 외치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운명적 사랑이라고. (82-83)
 

연정을 완성하는 것은 비밀이다. 연정과 비밀은 된장과 미생물의 관계와 같다. 비밀이라는 균은 연정을 발효시킨다. 비밀이 발효시킨 연정은 서서히 냄새를 풍기며 익어간다. 아슬아슬하다. 비밀이 너무 과하면 연정은 부패되고 그리하여 끝내는 악취를 풍긴다. 그때쯤되면 모두가 그것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러나 적당하기만하다면 연애를 신비롭고 짜릿하게 만들어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결혼은 연애의 결말이라기보다 전혀 다른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크다. 결혼은 연애에서 비밀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한 무균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84)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 상쾌함은 조금 독특한 것이었다. 가진 돈을 다 털렸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랄까, 바로 조금 전까지 상대방의 패를 읽기 위해 들였던 노력에서 해방됐다는 기쁨. 이제 머리싸움이나 표정관리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오는 자포자기의 쾌감. 그건 아마도 자기 존재의 바닥을 ㅗ한인한 자만이경험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좋아. 드디어 밑바닥에 다다랐군.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셈이야, 겨우 이정도였나? 별거 아니었잖아? 나는 내 감정이 시키는 대로 나쁜 습관과 충동에 모든 것을 내맡겼고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자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꼴이 됐다. 그러나 아직 멀쩡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론은? 내가 충분히 강하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듯,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고통도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자, 이제 모두를 위해 여유 있게 한번 웃어주는 거야. 뭐 해, 이민수! 어서 나가지 않고! 쇼타임이야. (118)
 

'사랑이 솟구친다'는 말을 비유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나는 두뇌 깊숙한 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물질이 분수처럼 솟구쳐 대뇌피질의 모든 주름을 흥건히 적시는 것을 느꼈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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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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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은 후 서경식과 프리모 레비를 읽어야지 다짐한 후 서경식과 프리모 레비를 사기까지 반년, 진작 사둔 책을 손에 들기까지 넉달, 들고 다니며 다 읽기까지 꼬박 다섯달. 참 오래도 걸렸다. 꾸준하지 못하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띄엄띄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여러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구구절절 공감이라 외려 몰입하지 못했다는 것. 양자 이야기에 울어버린 것 하며 운동엔 젬병이던 저자의 모습에서 기억도 안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의 달리기며 끝내 넘지 못했던 철봉,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걸 알게 한 철봉, 1,2등이 넘어진 덕분이었지만 어쨌거나 운동회 달리기에서 무려 3등을 했던 짜릿함까지 예상치못한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책을 더 읽고 싶어 야유회조차 달갑지 않았던 소년의 마음이나, 시집을 읽으며 행여라도 형들의 핀잔을 받을까 책을 감추던 모습 등이 순수하게 책이 좋아 책을 읽었던 어린 명제와 오버랩됐다. 책을 더 읽고 싶은 데 일찍 불을 끄는 엄마가 야속했고, 책 얘기를 하면 어쩐지 가족이나 친구들의 핀잔을 들을 것 같은 생각. 문창과에 들어가기 전까지 순수했으나 부끄럽기도 했던, 정말 취미이자 재미이던 내 독서습관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던 게 더딘 책읽기의 첫번째 이유. 놀랍게도!!! 공감의 소년이 아닌 청년 시절에도 있었으니, 지식인 서경식이 대학 졸업 후 파친코 가게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단다. 그 지식인의 허송세월을, 나태의 절정인 그 시간죽이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은 단번에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괴로웠을 마음. 물론 그와 나의 나태의 이유는 다르지만, 그에 비하면 나의 나태는 정말이지...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두번째 이유는 부채감 혹은 반성,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 책장을 휘리릭 넘길수도 없고 책을 펼치는 것조차 한동안은 부담이었다. 사실 이 책을 산 이유 중 하나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드러난 그 해박한 지식과 열린 세계관이며, 유아언니를 통해 알게 된 재일조선인 혹은 교포2, 3세의 삶 등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수필, 또는 누군가의 독후감을 싫어하면서도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수많은 추천 때문이 아니라 아마 그런 지적 편력을 다시금 향유하고 싶은 지적 허영? 뭐 그런 게 컸을 거다. 그러나 내내 광고하고 있듯, 이 책은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트클럽상 수상작이며, 수상의 주된 이유는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라는 것, 그런데 수상당사자는 재일교포 2세이며, 재일교포로서 이 상의 첫 수상자라는 것. 모국어가 아니라 모어(母語)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자의 감정이 느껴져 자꾸만 괴로웠다. 그의 독서편력에 신나가 공감하다가도 웬지 미안해져서. 나보다 훨씬 세상을 오래 산 분인데, 그의 소년시절이 한없이 애틋하고 짠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한 건 재미. 강박 내지 의무감으로 다시 집어드는 다른 책과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연상되는 기억이 많아, 몰입할 수 없지만 그런 재미를 놓칠 수도 없었기에. 게다가 은근 무시하던 수필 장르의 매력까지 느끼게 해준 탓. 어쩌면 수필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도록 하는 것, 그래서 말하고 싶게 만드는 것, 그렇게 깨어있게 하고 치유해주는 것. 좋은 글. 좋은 글이 담긴 책이다. 

책 한권 한권마다 유년의 기억과 정서를 담아, 웃음과 눈물과 성장을 담은 그의 기억과 글에 비하면 내 블록질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새삼 부끄러웠다가,
나도 비슷한 유년의 기억이 있는데 나는 왜 쓰지 못하는지 새삼 억울하기도 했다가,
그런 저런 생각 끝에 어쩌면 책은 내게는 맥거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오래 걸린만큼 많은 생각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책.
하필 편집을 하면서 본 책이라 그런지, 편집 또한 어찌나 이쁘고 정갈한 지... 

2007. 6 - 10
 

>소년의 눈물... 방울 방울..

"한국어판을 펴내며"
내 책 중 몇 권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이 [소년의 눈물]이야말로 조국의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진작부터 소망해온 책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곧 그런 바람이 무리이겠다 싶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내가 이렇듯 체념했던 것은, 우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며 이들의 작품, 또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등등을 한국어로 번역해내기가 녹록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이 친숙하지 않은 만큼 그에 관한 정보가 도리어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 재일교포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이며, 일본사회의 주류를 향해 소수자들이 품고 있을 굴절된 심정, 또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5)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밀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만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7)

"어린아이의 눈물2 -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조국 상실자 바이코프는 '국가'에 절망하여 '자연으로 자신을 침잠시켰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무자비한 현실 정치는, 호랑이 '왕대'에게 그랬듯 바이코프 역시 그가 바라는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63)

"본디 한 뿌리에서 자라났건만 - [삼국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살아오면서 형제들 문제, 집안 문제로 울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본디 한 뿌리에서 자라났건만" 하는 조식의 [칠보시]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읽은 책의 구절을 떠올리는 자신이 늘 조금은 우스워지곤 한다. (102)

"얄미운 녀석 - 다자이 오사무의 [추억]"
마음이 왜 그렇게 혼란스레 요동쳤던 것일까? 그 안에 바로 그 시절 내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 내 관심과 초조함 역시 결국엔 늘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지 의문으로 수렴되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훌륭한 인물이 못 될 것 같다는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혹시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식에 항상 시달렸던 것이다.
요컨대 이 얄미운 녀석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한번 그런 데 생각이 미치자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과연 나에게도 '명문교'에 합격했다며 으스대고 싶은 기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사'를 위해, 혹은 다른 무엇을 위한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지만, 결국 '엘리트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한 것은 아닐까? 나아가 이를테면 저 영어시간의 사건만 하더라도, 무언가 거대한 존재에 저항할 계획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다', '동정을 받고 싶다'는 기분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나 역시 "고개를 떨구어" 버린 것은 아닌가? 등교길 전차 안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내 모습을 들킬까 전전긍긍한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 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자문을 내가 수없이 반복하게 된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이 작품이 그만큼 능숙하게 그려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이 글을 접한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었다. (118-121)

"끝내 읽지 못한 책 -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46)

닛타 지로에서 우치다 핫켄에 이르는 책들은, 이를테면 내게는 '읽지 않아도 무방한 책'이다. 혹여 내가 자주 병치레를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읽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이 '읽지 않아도 괜찮은 책'에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허비해버렸던 것일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오기도 한다. 읽어서 무언가 얻을 게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정에 없던, 부수적인 소득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도락'인 셈이다. (150)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는 관념이 내 머리에 싹튼 것은 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그 과정은 두 방향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간단히 말하면 내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런 측면에서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분야에 '꼭 읽어야 할 책'들이 방대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구구하게 쓰지는 않겠다.
또다른 하나는 '사춘기의 교양 콤플렉스'라고 불러야 마땅할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도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를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특정 부류에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동일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 없이 비대해져 강박관념이 되기도 했다. '특정 부류'라고 막연하게 표현해둔 까닭은,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우러러볼 때 그럴 수 있듯이, 참된 지식의 거인을 향한 동경과 단순한 '문화적 특권 계급'에 대한 선망이라는 본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아직 미숙한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칭찬받던 그 어린 시절은, 어느덧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더이상 단순한 즐거움으로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152-153)

그녀와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더 안간힘을 다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이라도 읽는다면 그나마 괜찮았다. 목록이나 겉표지만 알고 있는 책들을 마치 실제로 읽은 듯이 얘기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 허점이 드러날라 치면 앞뒤 조리를 맞추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허둥지둥 그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다종다양한 새 개념과 어휘를 만나고, 마른 땅이 수분을 빨아들이듯 이를 흡수했던 것도 그 즈음이다. 이때 나는 '허영'이니 '자기혐오'와 같은 단어들을 내 소유로 만든 뒤,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쏘아붙였다. (158)

그 시절의 나는 왜 모든 일에 그렇게도 과도한 의식으로 대했던 것이며, 또 사사건건 거북살스러워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친근한 감정과 그리워하는 감정에 자연스러울 수 없었던 것일까? (163)

"희망이란 - 루쉰의 [고향]"
대학을 졸업하고 3-4년이 흘렀을 무렵, 나는 어느 지방 도시의 파친코 가게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때는 마작장에서 주임 같은 일도 했다. 나는 곧 그 방면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고통 속에서 하루를 끝내고 파친코 가게 2층 숙소에서 우울하게 옆으로 웅크려 누웠을 때에도 이따금 루쉰의 글을 읽었다. (176-177)

아주 오래 전, 이 글을 읽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어느 새 피와 살로 변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 역시 나름대로 인생의 경험을 거듭해가며 '피를 목격하고 난 후' 마침내 루쉰의 '암흑'과 '희망'이라는그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 루쉰이 "희망이란 본재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는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거의 없다'라고........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걸어가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180-181)

"사라져가는 말 2 - 김소운의 [조선시집]"
조명희의 [주도](呪禱) 
 
주(主)여!
그대로 운명의 저(著)로
이 구덕이를 집어 세상에 드러트릴 제
그대도 응당 모순의 한 숨을 쉬였으리라
이 모욕의 탈이 땅 우에 나둥겨질 제
저 맑은 햇빛도 응당 찡그렸을리라.

오오 이 더러운 몸을 어찌하여야 좋으랴
이 더러운 피를 어따가 흘려야 좋으랴
주여 그대가 만일 영영 버릴 물건일진대
차라리 벼락의 영광을 주겠나이까
벼락의 영광을!
 
"다리를 소유하려는 사상 -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하나의 다리를 건살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ㅇ낳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를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에 절대로 데우스엑스마키나 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와 땀, 두뇌 속에서 태어나야만 한다.(22, 프란츠 파농, [대지의 처주받은 사람들])
작은 형은 파농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형들은 어떤 꿈과 이상을 품고 스스로를 '투기'하려 했던 것일까?
어찌 되었건, 형들이나 나나 모두 굳게 믿고 있었다. 원대한 이상과 일상의 욕망, 그 괴리에 온몸이 찢기면서도 제 삶을 의미있는 무엇으로 만들려면 서투를지언정 이상을 향해 도약해야만 한다고." (228)

"저자 후기"
좋건 싫건 어린 시절 각인되어버린 그 무엇을 짊어진 채,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움과 얼마 되지 않는 잗다란 기쁨으로 수놓인,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그 무엇이다. (236)

"해설 - 일상에서 보편의 세계로: 서경식, 그의 행보에 대한 공감 / 이시카와 이츠코"
어린아이의 눈물.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교실] 서문에 실린 이 에리히 케스트너의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서경식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ㅁ룽르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난으로 인해 모국어는커녕 자신의 조국을 침탈한 나라의 언어를 깨우칠 기회마저 빼앗겨버린, 서경식의 어머니와 같은 분들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속으로 고통스럽게 눈물흘리며 보냈던 것일까.
어린 자식의 예방주사를 맞히러 보육원이나 병원에 가서도 자신의 주소와 성명을 기록해야 했기에 정말 난처했다는, 야간 중학교 졸업문집에 실린 어느 재일조선인 여성의 글이 떠오른다. 그녀는 나이 쉰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하루의 혹독하고 고된 노동 뒤에 야간에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역 이름, 자식의 학교에서 전해오는 각종 통지서, 거리의 간판들, 편지 등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읽어낼 수 없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는 또 다른 어머니의 글에는, 야간 중학교 학습을 통해 글을 익히면서 편지와 신문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되고 글짓기까지 가능해지자 "마음속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는 말이 씌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주의 일본의 지배만 없었던들 이분들은 생활의 방편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게다가 타국 일본의 문자를 쓸 수 없다는 이유로 부조리한 상황을 감내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일본인 대부분은 그분들의 눈물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자녀들, 곧 소년 경식이 남몰래 흘렸을 눈물도 눈치챌 수 없었다. 또 거꾸로,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열도 곳곳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막연함 불행감"을 가져다주었고, 그들의 가슴에 끊임없이 고통의 눈물을 흐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24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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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만나는 기독교 영성
클라이브 마쉬 외 엮음, 김도훈 옮김 / 살림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발견하고는 우선 눈이 번쩍 뜨였으나... 읽고 나서는 여러가지 아쉬움들.


1. 영화와 신학간의 학제간 연구인데다,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까지 기독교를 두루 아우르는 이 책이 왜 가톨릭에서는 번역되지 못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일반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점이지만, 살림은 개신교 서적 출판에 꽤 많은 힘을 쓰고 있다는 것.
 

2. '메타내러티브'와 모든 보편성 요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을 전제로 하면서, 변해가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특성이 주목했다(386쪽), 영화의 서사성에 대한 이해는 신학과 영화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중심 주제가 된다.(44쪽)고 이미 전제하고는 있지만, 왜 내러티브로만 보려고 할까? 어쩌면 그게 이 연구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가 미치는 감정적 정서적 영향에 폭넓게 주목한다면 내러티브를 넘어서야 할 텐데. 내가 배운바로는 그게 바로 영화를 연구(공부)하는 방식이고, 영화를 영화로 보는 방법인데. 시청각이 사유를 침략했음을 불평하거나 지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지의 광학적, 청각적 기호들과 함꼐 사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시간-이미지>, 들뢰즈, 표4)는 들뢰즈의 고민이 이 책에는 하나도 반영이 안 되어 있다는 것. 물론 나 역시 들뢰즈를 조금도 이해 못하고 있긴 하지만. 신학을 통해 영화를 바라본다는 점이 주는 한계겠지만,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신학을 보면 달라지나? 왜 그래야 하는데? 모르겠다. 관심도 있고 재미도 있으나 뭔가 상당히 아쉽기도 한.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기독교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하면 안정된 논조를 지닌 다행스런 책. 영화를 너무 신화화하며 호들갑 떨고 있는 개신교의 일부 분위기와 책들에 비하면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가 함께 모여서 그런건지, 학문적 연구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화에 대한 탈신화화에는 성공. 그러나 영화 속 기호에 대한 탈기호화는 두고 볼 문제. 어쩌면 이 또한 연구의 한계일런지도.
 

4.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어 공부해야겠다. 주술구조를 따져가며 읽어야하는 독해의 번거로움이란-_- 꽤 팔리는 (대중)문학작품이 아닌 담에야 번역서에 교열을 안 붙인다는 거 익히 알고는 있지만, 살림 정도면 꽤 큰 출판사인데 말이야. 허나 불평하기 전에 인용된 다른 글들을 찾아볼 엄두를 못 내는 형편없는 내 영어실력이 더 문제.
 

5. 나는 확실히 너무 많이 배웠거나, 너무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게 문제. 확실하게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믿음보다는 어설픈 의심과 파헤치기에만 능하구나. 이건 완전 좌절거리.
 

2007. 5

 


>영화와 신학의 진지한 대화를 향하여


2. 영화, 그리고 문화의 신학들
/ 클라이브 마쉬, 성 요한 요크대학 리폰 칼리지 신학,종교학, 문화학 강의.
'신학'은 '신-이야기'이다. 신학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행해야할 가장 단순하고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이야기와 '신으로부터의'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모든 신학은 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은 궁극적 실제, 모든 존재의 근원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나 개념이다. 어떻게든 그 언어와 개념을 통해 궁극적 실재나 궁극적 존재가 이해된다. 신학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신학적 전통(무슬림,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무엇이든)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각자의 전통과의 연관성 속에서 신의 이해를 재작업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은 그 전통 안에 있는 신앙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특정 전통에 헌신하든 아니든, 그들은 자기들이 작업하는 신 개념을, 그 전통이 요구하는 신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것은 특히 예배와 윤리적 실천에 잘 표현되어 있다-과 연관시키려 한다.
신앙의 시각에서 볼 때에, 신학은 '신으로부터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포함한다. 가장 종교적인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문자 그대로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지 않을 정도로 '신으로부터'라는 말은 은유적인 말이다. 그러나 신학을 '신으로부터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이 인간의 단독작업이 아니라는 확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인간 경험과 독립되어 있는 실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신학은 단순히 인간의 개념화작업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신에 대한 이야기와 신으로부터의 이야기의 경계선은 아무리 보아도 모호한 것이며, 결정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자유와 책임을 가진다는 것, 이것은 또한 신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상당한 불명료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 이해를 검증하고 또 검증받기 위해서 그들 전통의 안팎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신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신은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이러한 통찰은, 신학이 인문학 분야로 자신을 이해하고 기능하는 방식 속에 반영되어 있다.
자신들의 신앙에서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실천에 있어서 '실재론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실제로 이 단어가 '존재하고 있는' 한 실재를 언급한다고 믿는다. 사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이 의자나 탁자나 나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적, 객관적 실재로 '존재한다'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실재론에 입각하여 신은 실제로 '있다'라고, 신이 단순히 하나의 개념이나 단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어 한다. 종교와 신학이 의심할 여지없이 신화와 상상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신은 인간의 신화-만들기의 결과나 사람들의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 신화, 이미지, 상징, 상상력, 시적 언어, 은유는 모두 종교와 신학을 산출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다'고 믿어지는 실재를 어렴풋이 파악하기 위하여 차용된 것이다. 따라서 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신이 누구인지는 종교 전통 안에서나 종교 간에나 서로 다르게 이해될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신학은 신이 있다는 가정 위에서 기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양한 기독교 전통 안에서 이해되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며 신으로부터의 이야기이다. 신이 오로지 기독교 전통 안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선(prior) 판단은 성립될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만이 홀로 누가 신인지를 파악해왔다고 가정할 수도 없다. 기독교 전통 내부로부터 신학적 성찰을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신학이 기독교 전통들과 관련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기독교 신학이 실제로 신을 독립적인 실재로 만난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확신과 실제로 신이 기독교인들에게 '말을 건다'고 믿는 확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사용된 '문화'의 의미는, 신학과는 대조적으로, 전적으로 인간적 구조물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문화는 인간 존재가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해석적 전략들의 전체적인 망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세워나가는 해석 망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종교는 '문화'의 한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 그 '의미 만들기'는 다른 분야의 의미 만들기보다 훨씬 더 명백하다. 종교나 아니면 예컨대 도상학과 같은 특정 예술 형식은 TV드라마나 팝 아트와 같은 다른 형태의 예술들보다 더욱 의미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
신학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세가지 방식이 있다. 이 방식들은 니버가 제시한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섯 가지 가능한 이해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다섯가지 해석들 속에서 니버는 그리스도를 문화와 대립적으로(Christ against Culture) 보거나, 그리스도를 근본적으로 문화와 일치하는 것으로(Christ of Culture) 보거나, 아니면 문화의 세가지 가능한 대화적 혹은 변증법적 관계들 즉, 구분과 통합이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되는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Christ over Culture,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55-57)
 
영화는 종종 대단히 일상적이고 매일 매일의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또한 자주 사회의 밑바닥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사회의 온도를 측정한다. ... 이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은 '기독론에 집중'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거기에 신학적 근거가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그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일상적인 삶에 주목을 할 수밖에 없다. ... 기독교 신학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세 번째 모델에 대한 탐구로부터 다음 다섯 가지의 신학적 범주들이 나오게 된다.
- 교회를 넘어 창조, 세상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
- 교회의 중요성
-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 하나님의 영의 창조성
- 기독교의 기독론 집중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기독교의 구체성 (68-69)
 
...틸리히적인 문화의 신학의 수정을 받아들인다면 영화가 신학에 초래할 결과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로, ... 신학에서 영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 교회의 컨텍스트와 신학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만 관련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 신학적 해석자가 기독교 교회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과제와 연관되는 신학적으로 의미있는 자료에 주목할 때, 그는 '교회'와 '세계'가 상호연관을 갖는 방법에 대한 물음에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세 번째로, ... 미디어로서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정서적' 반응의 창출을 통해 제시된 영상 이미지에 대한 응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감정적 채널을 통하여 신학적 성찰이 가능하도록 초대한다.
네 번째로, ... 영화가 일반적으로 대중화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관계기관(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신학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로,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신학은 자신의 단명한 특성을 상기하게 된다.
... 영화의 세계와 기독교 신학 사이에 존재하는 적당한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최소한 신학은 오늘날 서구에서 적합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은 단순한 '적합성'을 위한 요청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탐구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것이고, 진리는 언제나 시대 적합성을 띠는 것이다. 누군가가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가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탐구 때문이다.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종종 그것이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76)
 
3. 신학에서 영화 사용하기
/ 데이비드 존 그레이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바비블 칼리지 신약. 개방대학교 지구과학 강의. 과학과 신앙
영화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을 인상적인 시각매체를 통해 제시하는 하나의 도구이다. 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종교적인 것'이라고 전통적으로 이름을 붙여왔던 주제들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종교적인 주제들은 인간의 경험과 운명에 관계되는 모든 질문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들의 감성과 반응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영화를 비유에 빗대는 것이다. 크로싼은 신화와 비유를 구분하면서, "신화는 (기성)세계를 확고히 하지만 비유는 그것을 타파한다"라고 했다. 즉, 전달수단으로 신화가 가지고 있는 효과란 관점을 재고할 수 있게끔 도전이나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옳다고 정의한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것이든 현대의 것이든- 신환느 현 상태를 설명하고, 사건들이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의 이론적 근거나 원인을 밝히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비유란 전복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지반을 파고 들어가 의문을 던진다. (85-86)
 
야우스의 활자 텍스트에 대한 설명(수용미학)은 시각적인 텍스트에도 적용된다. 혁신적인 영화는 우리의 종교적 유산들과 상호 작용하여 성체시현을 야기하고, 다른 시각들과 윤리적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길키는 예술이 문화 비평을 하는 것이 에술의 '예언자적' 역할이라고 묘사한다. 예술은 우리의 경험을 고양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예술은 일상의 배후와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진리를 열어 보인다. ... 초월적인 것은 예술을 통해 나타나며, 예술과 종교는 서로 접근한다." (88)
영향력있는 할리우드 극작가인 슈레이더는 대학 시절에 종교적인 것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영화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영화 안에 있는 '초월적인 형식'이라고 자신이 명명한 것에 대해 논의한다. 슈레이더는 실제로 초월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거의 없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초월성을 구성하는 것이란 '일상적 감각 경험과 ... 내재적인 것을 넘어'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 그는 엘리아데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관점들을 영화라는 매체에 적용시켰으며, ... 엘리아데는 니체의 '신의 죽음'과 부버의 '신의 일식'을 지적하고 나서 '신의 죽음'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결국 전통의 종교 언어로는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 엘리아데는 신이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 안에서도 반종교적인 인간이나 사회에 의한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종교적 차원이 살아남아 있음을 예쑬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거룩함'이라는 종교 차원의 개념을 좀 더 탐구할 수 있는가? 실로 그것은 가치 있는 개념인가? 슈레이더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적 보편성'을 보고자 한다. 그는 신학자, 미학자 그리고 심리학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과 달리 오직 비평가들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고 믿는 그 무엇을 보고자 한다. (89-90)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말해 주고 종교도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종교적 전통-위에서 논의된 비유처럼-을 재고하고 전복시키는 이야기로 기능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대안적인 종교적 내러티브가 될 수도 있다. (92)
 
5. 가위손: 도시적인 동화로부터 바라본 기독론
/ 피터 말론, OCIC(현 SIGNIS)대서양지구 회장, 호주 주교회의 영화분과 담당
그들(많은 작가들)은 복음서의 예술르 문화적인 예수로 바라본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역사적 사실들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들은 기독교 전통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다양한 문화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은 복음서들을 그들의 의식 속으로, 그리고 그들의 상상과 언어 속으로 흡수해 왔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예술적 창조자들에게 자신들이 탐구하고 있는 가치의 은유.상징.이미지로서 예수에 대한 스토리들과 예술의 인격을 묘사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 유비나, 반드시 신앙의 유비는 아니다.
모순이 없는 신학적 통찰들이 지성적인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성적인 단계에 머무르면서 신비의 진리에 대한 보다 큰 이해나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통찰들은 또한 상징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신비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단계의 평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획득된 총찰들은'물론 '통찰'이 이러한 경험을 위한 가장 좋은 용어가 아닐수도 있지만- 감정 즉, 신비의 아름다움을 수용하는 갈망과 감정들의 수준에 있을 수도 있다.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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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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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아빠랑 앉아 분리수거를 정리할 때던가? 한과와 과일을 먹다 지쳐 배를 두드릴때 던가?

영화정보프로그램에 <워낭소리>가 나왔다.

나야... 뭐, 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니 TV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던 게 당연했지만...

아빠가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던 영화 <식객>의 한 장면,

성찬의 소가 도살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성찬을 돌아보며 흘린 눈물 한방울,

을 기억하시며 흥분하시던 아빠였으니.

(심지어 아빠는 <식객>을 극장도 아니고,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프로젝터로 틀어준 걸 보셨단다.

영화 보다 얘기 하다 누군가는 전화도 받고 누군가는 끽연하러 나가는 그 웅성웅성한 사이...)

그렇다. 학교에 다녀오면 낫부터 갈아들고 지게 메고

'속골'(이라고 쓰고 '소꼴'이라고 읽는다)로 '소 꼴'(이라고 쓰고 '소꼴'이라고 읽는다)을 베러가야했던 아빠의 유년.

내가 기억하는 우리집 외양간은 처음부터 창고였지만,

내가 아직 젖을 빨 무렵에만 해도 그 외양간에서는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아직도 <워낭소리>를 못 본 우리 아빠는 이 영화를 보며 얼마나 공감, 흥분, 관심, 혹은

소꼴베기에 진저리를 칠 것인가. 자못 궁금하지만... 아빠는 요즘 너무 바빠 영화를 보러 갈 시간이 없으시단다.

 

그리고 엄마의 무심한 관심.

역시나 너무 바쁜데다, 명절에 딸래미가 끌고 가지 않으면 극장갈 엄두도 못 내는 엄마도 오늘 드디어

"<워낭소리> 나두 봐야지." 하신다.

그렇다. 두 딸 대학 보낸 후 아빠 몰래 소테크를 시작했다가 IMF 탓에 소값이 떨어져 손해봤던 엄마다.

외가 외양간에서 침 질질 흘리며 여물을 잘도 먹던 송아지 두마리가, 소 두마리가 되더니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엄마가 얼마를 손해보고 얼마를 속을 끓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워낭 2개가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주말에 엄마 집엘 가보면, 베란다 창문 잠금쇠가 걸려있다가

벤자민 가지에 걸려있다가, 이름도 모를 가지가 무성한 어떤 화분에 걸려있다가
그렇게 워낭은 엄마의 빈티지 아이템이 되었고, 정성 들여 닦는지 투박하던 표면이 날이 갈수록 반짝였다.

그러다 언젠가 워낭 1개가 사라졌고(누군가 멋지다며 인테리어용으로 분양받은 듯)

아직도 남은 워낭 1개가 거실과 베란다를 오가고 있다.

 

나는 그냥 영화를 보면서 미안했다.

많이 웃었고, 많이 흐뭇했는데, 그냥 왠지 모르게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자꾸 미안했다.

아마 미안해서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 출연진 이름 좀 보게.

최원균 : 공경해 마땅할 어르신도 우시장에 가시면 "원균이~" 이렇게 불린다. 우리 막내 외삼촌도 원균인데 ㅋ

이삼순 :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로 삼순이란 이름에는 무조건 공감하고 볼 것

최노인의 소 : 아아- 이 적절한 작명센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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