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1 : 세계편 퇴마록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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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퇴마록 세계편』은 읽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1권을 다 읽고나서 2권을 중반 쯤을 읽다가 시험기간 때문에 덮었고, 그 상태로 방치했던 것같다. 방학을 했으니까 일단 읽던 거 뒤처리부터 하자 싶어서 집어들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다보니 감회도 새롭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괴담에서 판타지로


세계편은 국내편과 다르다. 국내편은 '한국'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였기에 소재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괴담과도 같았고, 귀신이야기로도 볼 수 있었다. 한국적 소재와 그것을 통한 공포심 자극. 물론 국내편도 퇴마사들의 스펙이나 여러 경우에서 판타지(중에서도 영웅판타지)같은 면모가 약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강하지는 않았다. 괴담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세계편에 와서 괴담은 판타지가 되었다. 소재 자체가 전세계적인 것들로 바뀌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녀귀신은 호러인데, 늑대인간은 판타지 같은 그런 문제랄까. 좀비, 흡혈귀, 늑대인간도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퇴마록 세계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판타지 같은 것이 아더왕 전설을 이용한 것 아닌가 싶다. 퇴마사들은 세계편에서 전세계를 쏘다니며 일을 해결했다. 블랙서클이라는 전세계적 음모 조직의 뒤를 좇는 과정에서 정말 신기한 일들도 많이 겪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인물도 몇 명 더 등장한다. 연희와 백호 검사 되겠다. 





 

수정된 부분과, 아쉬운 부분


전체적으로 수정된 부분은 별로 없다.(물론 나는 초판은 기억도 잘 안 난다.) 작가 본인이 서문에 밝혔듯이 뒷부분에 조금 바뀐 부분이 있다. 더글러스탐정이 개입하는 부분인데, 이 인물부터가 이번에 새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사실 퇴마록의 문장력, 문체는 투박하다. 오래된 소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 소설이 처녀작인 탓으로 보인다. 그 탓에 퇴마록의 이야기도 스케일은 대단하지만 세련된 맛이 없다. 그런데 역시 더글라스가 나오는 부분만큼은 새로 쓰인 것이 확 티가 날 정도로 문장력이 향상되어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더글라스는 이야기 개연성을 위해 추가되어서 딱 그 정도의 역할만을 하고 끝날 뿐이라는 데 아쉬움을 준다. 



퇴마록을 다시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행동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사실 사람은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그들의 정의감과 고민, 갈등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세련된 이야기가 아니니까. 퇴마사들의 정의감이 이야기가 다른 방향, 더 현대적이고 매력적으로 바뀌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들이 너무 평면적이라고 해야할까. 여전히 준후는 귀엽지만, 이 인물들 대화하는 걸 보고 있으면 손발이... 오글오글.


검은 어느 때 써야하는가?

"벨 때 써야 합니다."

힘을 기르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약한 자를 위함입니다."

명예와 영광과 생명 중 무엇이 중요한가?

"생명입니다."

-2권 194쪽




국내편에서도 말했지만 추억으로 커버하고 읽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여러 나라의 전설 등은 흥미롭기도 하니까. 

그래도 개정에 대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난 전면 개정 찬성하는 편인데. 역시 힘들구나. 

혼세편은 많이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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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zebra 1
브루노 무나리 글.그림, 이상희 옮김 / 비룡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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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미는 팝업북 수집이다. 그리 흔하지는 않은 취미이다. 한 권을 사고 두 권을 사다 보니 어느새 가지고 있는 팝업북은 30여권. 팝업북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특이한 아동 서적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더란다. 아무래도 팝업북은 대체로 아동서적이고, 그림책 중에서도 토이북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살펴보게 된 그림책 중에서는 정말로 예술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책들이 많았다. 어릴 때는 대수롭게 보고 넘겼던 일러스트라는 게, 다시 보니 이런 거였구나. 그림책이란 알고 보면 가장 종합적인 예술 아닐까. 


그런데 이번에 비룡소에서 Zebra라는 그림책 시리즈를 만들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의 그림책을 선보이는 시리즈이다. 브루노 무나리의 『까만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는 zebra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다. 어린이가 보는 책이라는 편견을 넘어,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성인들마저 매혹시키는 그런 책. 


 


책이랑 책갈피랑 드로잉북이랑 포스터까지. 뭔가 전체적으로 어린이 책만이 아니라 디자이너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다. 


 

 


 

저자인 브루노 무나리는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그쪽 세계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브루노 무나리가 어떤 분인지는 피카소가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격찬했다는 말에 약간 감이 잡힐까 말까 한다. 무지 유명하겠지. 작년에는 한국에서 전시회도 열었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거야? 책을 펼쳐보자, 그 센스에 감탄. 또 감탄. 


 

나는 이걸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사진으로 보여줄 수 밖에. 사진 대 방출.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밤과, 풀숲과, 동굴. 




한밤 중에 집을 나서 책 속으로 들어가면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어둠이다. 검은 종이. 

 


 

 

그 어둠 속에서는 불빛 하나가 빛나고 있다. 작은 불빛 하나가. 

 


 



저 멀리. 밤에는 고양이가 짝을 찾아 나서고, 


 

 


박쥐가 날아들고, 사람들이 불빛을 따러 사다리를 세우기도 한다. 





불빛의 정체는 뭘까. 별일까?


 


반딧불이. 밤이 가자 새벽이 다가 왔고, 반딧불이는 풀숲으로 날아간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의 풀숲.





검은 종이 다음으로는 하얀 트레이싱지가 나온다. 겹겹이 겹치는 종이 아래. 반투명한 종이는 아래의 그림을 비춘다. 숨어있는 동시에 드러난다. 풀숲에는 많은  생명이 있다. 트레이싱지로 원근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개미들도 있다. 

 

 



개미들은 굴로 들어간다. 개미굴은 땅에 있다. 

 

 

 


 


 

그 땅에는 숨겨진 동굴이 있고. 동굴이 있으면 들어가는 게 예의렸다.

 

 


 


동굴 속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화석, 그림.... 보물까지! 

 


 



회색 종이로 표현된 종이는 석회굴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다르게 잘린 굴의 모양과 크기는 진짜 동굴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곳에는 강물도 있다. 





긴 동굴 탐험을 마치고 나온 나를 반겨주는 것은



어느새 돌아온 밤과, 그 속의 별빛들이다. 아니, 반딧불이일까? 잘 모르겠네.




놀라지 마시라. 이 세련된 그림책이 1956년에 나왔다는 사실! 

유명세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이거 조카 주려고 했더니. 내가 가져야겠다. 팝업북이랑 같이 고이 모셔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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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터는 단 한 가지 방법 블랙 로맨스 클럽
앨리 카터 지음, 곽미주.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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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대세인가 보다. <도둑들>은 보지 못했지만 관객의 마음을 훔쳐 흥행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캣우먼, 셀리나 카일(앤 해서웨이)도 매력적인 대도의 끝을 보여주었다(언니, 멋있어!). 법을 무시하고, 가진 자들을 농락하는 대도둑의 모습은 매혹적이다. 대도라면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걸을 것 같고, 상황 판단력도 좋아야할 것 같고, 예술품을 보는 안목도 높을 것 같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담대함과 기술력도 갖춰야겠지. 이야기 속의 도둑들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사람들이고, 나한테는 그런 대도가 훔칠만한 그런 물건이 없으니까 마음껏 환상을 펼쳐도 되겠지? 


그리고 여기 새로운 도둑이 있다. 




 

 

 

도둑맞은 그림을 훔치기


아니, 도둑의 길을 버리려고 한 도둑이 있다. 카타리나 비숍. '캣'이라는 별명을 더 좋아하는 그녀는 신분을 훔쳐 콜건 기숙학교에 다녔지만 사고가 생겨 퇴학당한다. 


캣은 희미한 방 안의 공기가 모두 빠져 버린 듯한 이상한 느낌에 압도되었다. 어쨌든, 걸렸을 경우에 대해서라면 차라리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몰리는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p.18


캣은 단 3개월 동안 가문을 떠나있었다.(가업이 도둑질이란다) 그런데 그 시간은 그들의 세계에선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지 그 사이 꽤 많은 일들일 벌어져있다. 그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도둑인 캣의 아버지가 타코네의 그림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 문제다. 아버지는 그것을 훔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하랴. 최악의 악당 타코네는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타코네가 캣에게 준 시간은 2주. 그 안으로 그림이 타코네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 캣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도둑맞은 그림을 되찾기로 한다. 그리하여 10대 소년소녀 도둑들이 여기 모여서 일을 친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 헨리 미술관을 턴단다. 도둑맞은 그림을 다시 훔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런던에 위치한 헨리 미술관은 가상의 미술관이다. 언급되는 그림들도 대부분의 가상의 작품들. 헨리 미술관은 런던에 위치한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일단 런던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연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는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내셔널 갤러리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내셔널 갤러리의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W.W.헤일 5세


캣에게는 아주아주 중요한 조력자가 있는데 바로 W.W.헤일 5세. 억만장자다. 잘생겼다. 성격 괜찮다. 머리 좋다. 완벽남 그 자체. 로맨스 남주의 전형이라고 해야할까? 대저택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는 부자이다. 이런 남자가 캣이 좋다고 따라다닌다. 역시 로맨스 소설 남자주인공은 이래야지 싶은 그런 소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로맨스 요소는 그리 강하지 않고, 연애보다는 도둑질(?)에 방점이 찍혀있다.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여기 있고, 또 다른 매력적인 서브 남자 주인공도 있는데 왜 그런 걸까. 


W.W.헤일 5세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이라면, (유일하게 이름만은 예외로 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후에 바로 지금과도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헤일이 마치 그 애의 시골집 서재에 있는 소설의 초판본처럼 느껴지던, 그런 시간들. 그리고 캣은 책의 첫 장조차 마치지 못했다. p.121



캣 때문이다.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인정하지도 직시하지도 않는다. 캣은 아직 자신을 아기 고양이라는 위치에 놓고 싶어하는 듯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식조차 못하는 캣이기에 헤일이 캣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조차 약해보인다. 캣이 헤일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스스로가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만큼 약하다. 일단 그녀는 일상을 원하며 가문을 버리고,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헤일조차 버렸지 않은가. 적절한 밀고 당기기인지, 밀기만 하는 건지. 원. 


"너네 둘, 함께 지낸 지 얼마나 됐어?"

닉의 물음에 너무나도 빠르게 캣의 미소가 사라졌다.

"우린 함께가 아니야."

캣은 불쑥 말했다. 바로, 뭔가 다른 대답을 했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뭔가 내숭을 떨거나, 아니면 영리해보이는 대답으로. 하지만 너무 늦었다. 캣은 이미 멍청한 소녀이자 끔찍한 거짓말쟁이처럼 들리는 대답을 해 버렸다. 둘 다 캣으로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역할이었다. -p.263




전 세계를 오가는 대도의 세계를 엿보고,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미술관을 터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좋은 오락소설이었다. 사실 문장이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내가 이런 급박한 진행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소설 자체가 그런 건지는 잘 분간이 안 간다. 그 점을 제외하면 정말 즐거운 독서였다. 로맨스는 오글거리지 않을 정도로 적절했고, 주인공들은 매력적이었다. 매력적인 10대 '캣'우먼이 잘생긴 억만장자의 도움을 받아 세계 최고의 미술관을 털었으니까. 근데 다음 권에선 연애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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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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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 언니는 때때로 자기의 여행 보따리를 풀어놓고는 한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프랑스, 터키, 체코, 태국... 정말 많은 나라를 여행했던 언니에게 단 한 군데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꼽은 곳은 어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었다. 핀란드. 북유럽에 위치한 추운 나라. 게다가 겨울에 가야한단다. 겨울에는 하루에 단 세 시간 해가 뜨고, 그 세 시간 안에 모든 일을 해결해야하는 곳. 눈이 쌓여 걷기도 힘든 때. 온종일 암흑 투성이인 그 때 가야 한단다. 추천 이유는 간단했다. 핀란드의 사우나는 일품이란다. 하루종일 집에 박혀 자기만 해도 좋더란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깨워서 보게 된 하늘에 걸린 오로라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란다. 거듭거듭해서 '겨울의' 핀란드에 가라는 말을 다짐을 들었다. 언니의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풍일까. 


물론 나는 가보지 못했다. 나는 추위에는 쥐약인데다가 거긴 하루종일 밤이라고 하지 않나. 나돌아다닐 수도 없는 여행이 뭐가 좋단 말인가! 게다가 이 언니, 정리해둔 정보 준대놓고 까먹어서 안 줬단 말야. 흥.




 



탄생도 허풍처럼


그런데 여기 그보다 더 긴 겨울을 나는 사내들의 이야기가 있다. 『북극 허풍담』은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핀란드보다 더 위쪽, 더 짧은 해, 더 강력한 추위, 빙산이 흐르는 그 땅에서 사냥을 하고 사는 사람들. 문명과의 연결점은 한 해에 단 한 번 오는 배 뿐이다. 절대적 추위와 고독의 땅에서 살아가는 열댓명 정도 되는 사냥꾼들은 하도 할 일이 없는 나머지 별의별 이상한 일을 다 벌인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건들의 기록이다. 


작가 요른 릴은 19세에 북극 생활을 시작해 16년을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책 속에는 북극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북극의 추위를 담은 원고는 허풍처럼 출간되었다. 책날개에 쓰인 출간 비화(?)는 그것만으로도 허풍담이라고 느껴진다. 북극에 찾아간 어느 책장수가 원고를 훔쳐서 출판업자에게 넘겼다나 뭐라나. 




 




차가운 책


허풍담에는 북극의 삶과 유머와 고독이 담겨있다. 북극의 삶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어 때론 웃기고, 때론 무섭다. 해학, 웃음, 순수함이라는 표면 뒤에는 북극의 삶에 따르는 고독과 광기, 죽음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가벼운 듯 차가운 책. 백색으로 빛나는 빙산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북극 그대로다. 그렇다. 북극 허풍담은 차가운 책이다. 극중인물인 엠마가 차가운 처녀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엠마는 극중 인물이 맞는 거지? 상상이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북극의 하루는 너무나 길기 때문에 1년 정도의 시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간다는 것이다. 북극에서의 시간은 멈춘 것 같다. 사건은 수 없이 일어나는 거 같은데 잘 살펴보면, 1년에 한두 번 일어나는 소동일 뿐이다. 나머지 시간에 이 사람들은 뭘 하며 사는 걸까. 그 간격에서는 고독이 느껴진다. 장과 장 사이, 서로 모여 떠드는 사이, 그들은 자연만 벗삼는 절대적 고독과 항상 함께 한다.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대체 뭘 해야할까. 확실한 것은 밸프레드는 자면서 지낸다는 것이겠다. 아 부러워.

 

그러나 핏속에 사막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르다. 황무지는 결코 황량하지 않다. 산 하나하나, 계곡 하나하나, 피오르 하나하나, 빙산 하나하나가 놀라운 선물을 감추고 있다. 고독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짓누르는 건 드문 일이고, 대개의 경우 고립은 경이로운 자유의 감정을 준다. 북극 지방은 생명력과 변화로 가능하다. 원소 말고는 장애물이 없고, 자연 말고는 섬길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저들끼리 정하는 법말고는 따로 법도 없다. 이 꼭대기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단지 처한 환경 덕분에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2권 165~166쪽]

 





 

나능야 무서운 북극곰. 을 사냥하는 사냥꾼. 근데 북극곰 한 마리가 무지무지무지하게 크네.




북극에 대한 환상


북극허풍담은 북극의 삶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면서도 다른 환상을 불어넣는다. 어느 분이 북극에 가고 싶다고 한 것처럼. 자연과 벗한 사람들의 순수함, 거기서 발현되는 웃음이라는 것이 꽤나 맛깔난다. 한 편 한 편을 미국식 느낌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어울릴 것같다. 때론 문명과 원시의 대비를 통해 문명의 허례허식을 비웃기도 하고, 자연이 선사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한 사람의 죽음조차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죽음, 광기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것이다. 안 웃기냐고? 웃기다. 그런 것조차 웃음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바로 이 북극 아니겠는가. 

 

 

「엄마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아. 엄마란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오래된 무언가지.」

요엔손 씨가 거들고 나섰다.

「맞아, 빌리암.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어야 해. 엄마를 이 황무지에 모셔올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팔뚝에 모시고 다닐 수는 있지.」

[1권 92쪽]



 

「그 멍청한 자식이 사람들 몸에 잔뜩 물감을 처발라 놓았어.」

「어째서 그자가 했다고 생각하지?」

부관이 물었다.

「그 자식만 셔츠를 입고 있으니 그렇지!」

[1권 99쪽]



단조로워 보이는 그곳의 삶이 이렇게 다양한 에피소드로 꾸며질 수 있다니 역시 사람 사는 곳에는 사건사고가 끊일 수 없는가 보다. 무려 이 책이 10권이나 있다니, 북극의 삶은 계속되는 건가? 자, 다음 북극 이야기를 기다려보자.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질지 기대하며.




그래서 북극 가고 싶냐고요? 아뇨. 전 아니에요. 그린란드 북동부에 갈 바에는 차라리 한 겨울에 핀란드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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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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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처음이라는 말은 설렌다고. 그런데 나에게 처음이란 언제나 불안을 동반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설렘보다는 불안이 더 큰 것이,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본 배명훈의 장편 소설


『은닉』은 내가 처음 접하는 배명훈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타워』도 출판사는 배명훈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광고했지만, 연작소설집이라 장편이라 볼 수는 없었다. 배명훈의 첫 장편소설은 『신의 궤도』이지만 그건 내가 읽을 수 없을 때 출간되었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직 접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은닉은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배명훈의 장편소설이 되었다. 이제까지 단편은 정말 많이 읽었는데 말이다. 


배명훈. 이 작가를 처음 알았던 건 내가 고등학교 때다.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오래된 거 같은데 2007년이니까.... 어라. 5년이나 지났네? 지금은 출간되지 않는 <판타스틱>이라는 장르문학 잡지에 실렸던 배명훈 작가의 단편을 보고, 굉장히 재미있고 독특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했더라지. 평범한 세계 같다가도 정말 사소하지만 짐작할 수 없었던 반전이 오고, 그의 독특한 상상력에 감탄하고, 어딘지 붕 뜬 듯 하면서도 현실에 발을 단단히 발붙이고 있는 내용에 즐거워하고. 배명훈은 내게 단편의 맛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작가였다. 이후로도 많은 단편집과 웹진 거울을 통해 그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장편은 이게 처음이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절대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 배명훈 아니겠나. 배명훈이잖아. 단편이 늘어서 장편이 되었다고 해도 그 재미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통통 튀는 상상력에,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 실감나는 인물 대사. 거기다 은경이까지 나오니!(웹진 거울에 실렸던 배명훈 단골 여주인공 은경이 가상 인터뷰 [클릭])



도입부만 설명해보자. 


나는 킬러다. 11년만에 맞이하는 휴가를 맞아 체코에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지령이 내려졌고 지령에 따라 관람한 연극에서 은경이를 보게 된다. 


시체였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반라의 여자였다. 시간이 멎어 버린 죽은 여자의 몸. 아마도 연출자나 미술감독이 세심하게 배치해 둔 상태 그대로, 생명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습으로.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정지해 있는 몸. 시체를 흉내 내는 육체. 죽음을 연기하는 삶.

-p.22


은경이를 본 순간, 주인공은 그녀를 보호하기로 한다. 그리고 옛 동료 조은수에게 신호를 보낸다. 





(아래는 스포일러를 거를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주의 바랍니다)



빛과 그림자


은닉의 주요 인물은 세 명으로 축약된다. 주인공 '나', 조은수, 김은경. 이 셋은 이야기의 중심 축이며 진행자이다. 재미있게도 '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보다 사건에 이끌려 나간다고 생각되는 인물로,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김은경은 사건의 발단이자 핵심이지만 회상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사도,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조은수는 초반에는 얼굴이 없고 생사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보니 세 인물 다 존재가 애매하다. 한 개체를 상징하는 '이름'이 부재한 주인공, 살아서 죽어있고 죽어서 살아가는 은경이, 그 존재가 경계에 걸쳐있는 조은수. 이들은 인물이면서 소품이고 개념이다. 주체가 의심당하는 자들. 


은경과 은수는 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서있다. 은경이는 완벽히 '소품'의 위치에 얹어져 있다. 그녀가 연극에서 맡고 있는 그 역할이 연극 밖의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은경이는 '나'나 조은수 보다 강력한 메시지이며 상징이다. 그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이다.  빛. '나'로 대변되는 인간이 갈망하는 빛이며 생명이다. 아무 대사가 없어도 그 존재 자체로만 '나 여기 있소'하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은경 씨로서는 은닉에서의 연기가 배명훈 소설 중에서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언제나 추구하고 있는. 그럼 은경이와 반대점에 있는 조은수는 뭘까. '나'는 은경이를 경외(경애?)한다. 그리고 조은수는 '나'를 바라본다. 조은수는 그림자이다. 은경이의 반대 쪽에서 나를 항상 따라다녀야하는 그림자. 실질적인 능력을 가진 것은 은수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그림자로 머물러야 하는 인물. 하지만 그는 은경이와 달리 이야기 속에서 생동한다. 은경이가 인간을 넘어서 인간을 이끄는 어떤 존재라면 은수 역시 인간을 넘어섰지만 인간을 반대로 동경하는 그런 존재. 그렇기에 은경이보다 더 인간적이고 멋있었고...


"결국은 그렇게 될 겁니다. 조은수는 완성형이고 김은경은 최종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p.188



나라는 인물은 참 미묘하다. 그는 사람이다. 그래. 평범한 사람이다. 은경이와도 어울리지 않고, 초천재 은수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도 모르겠는 평범한 인물. 평범하게 감정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그는 꼭두각시이다. 배명훈의 꼭두각시? 아니. 은경의 꼭두각시. 은경이를 노리는 두 세력의 꼭두각시. 미끼. 움직이는 듯 하지만 그 스스로 움직이는 때는 거의 없다. 체스판의 말처럼 남들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애 쓰지만 체스판은 기울어있고, 한 쪽으로 미끌어질 수밖에 없다. 남들이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일반인의 모습 아닐까. 



"안 이래도 되는데."

은수가 속삭였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목소리가 절대 아니었다. 

"너랑 이렇게 나란히 걷고 싶었어."

"나도."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p.158


악마는 우리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소설 속에도 명시되어 있다. 자연. 원형. 절대자. 그것이 생명을 앗는 것으로 깨어나는 건 생사의 경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일까? 악마 이름 의미는 잘 모르겠음. 친절히 설명해준 마지막 악마만 알겠고. 사실 빛으로 알고 있었던 무언가가 악마라는 건 그리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였던 은수가 오히려 너무 애정과 우정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은 충분히 역전될 수 있고. 진짜 악마는 그 관계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뭐라고 횡설수설하는 거지. 책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뭐라 설명할 수 없음. 지금 정줄 놓은 거 같아. 




예약특전 '배명훈 매뉴얼'. 단편 <안녕, 인공존재!>의 인공존재 설명서가 떠오릅니다. 



인섹트 플라이트


"IF 코드. 딱 걸린 거지. '곤충,' 'IF,' 이렇게 추적해 들어가니까 한 가지가 툭 튀어나왔어. 그 곤충연구소에 있는 풍동실험실 이름에 IF라는 말이 딱 들어가 있더라고."

"그게 뭔데?"

"인섹트 플라이트 Insect Flight. 그 IF 코드의 비밀은, 곤충비행 연구였던 거야."

p.188


몰입해서 읽고 있던 내 주의를 확 끌었던 단어, IF. '인섹트 플라이트'. 배명훈 작가의 단편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당연히 <인섹트 플라이트>를 꼽을 것이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고, 지금은 폐간된 판타스틱에만 실렸던 그 단편. 처음 본 배명훈의 소설은 역시 판타스틱에 실렸던 <우주로 날아간 마도로스>였지만 그를 인식하게 했던 소설이라면 단연 <인섹트 플라이트>였다. 그렇기에 인섹트 플라이트는 사실 두번째이지만 처음이었다. 두 번째 장편이지만 내게는 처음인 은닉과 같달까. 인섹트 플라이트는 섬세함과 반전, 그리고 10대 소녀였던 나를 꿈꾸게 한 로맨스(!)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었다. 곤충 형태의 초소형 비행체. 


그 아이디어가 은닉에서 되살아났다.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단편이.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안 좋아할 수 있겠는가. 배명훈 작가를 좋아하게 된 그 작품이 여기서 나와버렸는데. 아이디어만 겹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거대한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수단. 그것이 그 작은 곤충이었다는 아이러니. 악마를 불러낸 수단으로 악마를 없애는 진실. 디코이라는 수많은 허위 정보들, 가상의 분신들을 없애는 것이 단 하나로 수렴된 점으로 가능했다는 거. 그 장면은 정말 명장면일 거야. 



 

 

, 이렇게 배명훈 작가님 사인본이 셋! 작년에 신의 궤도를 질러두지 않은 걸 후회 중이다. 



정치를 둘러싼 전략은 어렵네요


배명훈 특유의 사회 비꼬기도 여전하다. 『타워』에서 볼 수 있었던 대놓고 신랄한 풍자는 덜하지만, 예술을 대하는 연방 공무원들의 태도에는 작가의 삐딱한 시선이 배여있다. 아무래도 그 자신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더 잘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창수에게 중요한 건 그 글 자체가 아니라 그 글이 일으킬 반향일 것 같앗다. 예술에 관한 한 연방행정기관의 감수성은 그런 식으로만 작동할 수 있으니까. 연방에는 감수성을 담당하는 기관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서, 스스로 느낀 것에 직접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느끼고 난 후에 일어나는 동요에 대해서만 한 발 늦게 반응할 수 있을 뿐이다. 

-p.116


은경이를 둘러싼 단체의 태도와 전략은 어렵다. 대충 읽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얘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몇 번을 생각해야했다. 내가 이런 집단의 행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작가는 자신의 역량을 이용해 상황을 만들어냈는데 내가 그 상황을 판단하는 인물들 수준이 되지 못해서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난 별로 정치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나봐.





그냥 한 번 읽어보세요.


이 외에도 소설 안에 수 많은 코드가 있다. 흑백, 체스, 미끼, 버린 자, 프라하, 겨울, 기수...  나는 다 못 파악하겠다. 설명할 자신도 없고, 지금도 말 안 되는 말만 잔뜩 뭐라고 지껄여 놨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었더니 두서도 없고. 어차피 이 글은 내 기록을 위한 거니까. 끝까지 두서 없이 가야겠다.


그냥 다들 한 번 읽어보세요. 강추. 배명훈입니다. 두 말이 필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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