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전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 언니는 때때로 자기의 여행 보따리를 풀어놓고는 한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프랑스, 터키, 체코, 태국... 정말 많은 나라를 여행했던 언니에게 단 한 군데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꼽은 곳은 어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었다. 핀란드. 북유럽에 위치한 추운 나라. 게다가 겨울에 가야한단다. 겨울에는 하루에 단 세 시간 해가 뜨고, 그 세 시간 안에 모든 일을 해결해야하는 곳. 눈이 쌓여 걷기도 힘든 때. 온종일 암흑 투성이인 그 때 가야 한단다. 추천 이유는 간단했다. 핀란드의 사우나는 일품이란다. 하루종일 집에 박혀 자기만 해도 좋더란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깨워서 보게 된 하늘에 걸린 오로라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란다. 거듭거듭해서 '겨울의' 핀란드에 가라는 말을 다짐을 들었다. 언니의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풍일까. 


물론 나는 가보지 못했다. 나는 추위에는 쥐약인데다가 거긴 하루종일 밤이라고 하지 않나. 나돌아다닐 수도 없는 여행이 뭐가 좋단 말인가! 게다가 이 언니, 정리해둔 정보 준대놓고 까먹어서 안 줬단 말야. 흥.




 



탄생도 허풍처럼


그런데 여기 그보다 더 긴 겨울을 나는 사내들의 이야기가 있다. 『북극 허풍담』은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핀란드보다 더 위쪽, 더 짧은 해, 더 강력한 추위, 빙산이 흐르는 그 땅에서 사냥을 하고 사는 사람들. 문명과의 연결점은 한 해에 단 한 번 오는 배 뿐이다. 절대적 추위와 고독의 땅에서 살아가는 열댓명 정도 되는 사냥꾼들은 하도 할 일이 없는 나머지 별의별 이상한 일을 다 벌인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건들의 기록이다. 


작가 요른 릴은 19세에 북극 생활을 시작해 16년을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책 속에는 북극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북극의 추위를 담은 원고는 허풍처럼 출간되었다. 책날개에 쓰인 출간 비화(?)는 그것만으로도 허풍담이라고 느껴진다. 북극에 찾아간 어느 책장수가 원고를 훔쳐서 출판업자에게 넘겼다나 뭐라나. 




 




차가운 책


허풍담에는 북극의 삶과 유머와 고독이 담겨있다. 북극의 삶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어 때론 웃기고, 때론 무섭다. 해학, 웃음, 순수함이라는 표면 뒤에는 북극의 삶에 따르는 고독과 광기, 죽음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가벼운 듯 차가운 책. 백색으로 빛나는 빙산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북극 그대로다. 그렇다. 북극 허풍담은 차가운 책이다. 극중인물인 엠마가 차가운 처녀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엠마는 극중 인물이 맞는 거지? 상상이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북극의 하루는 너무나 길기 때문에 1년 정도의 시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간다는 것이다. 북극에서의 시간은 멈춘 것 같다. 사건은 수 없이 일어나는 거 같은데 잘 살펴보면, 1년에 한두 번 일어나는 소동일 뿐이다. 나머지 시간에 이 사람들은 뭘 하며 사는 걸까. 그 간격에서는 고독이 느껴진다. 장과 장 사이, 서로 모여 떠드는 사이, 그들은 자연만 벗삼는 절대적 고독과 항상 함께 한다.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대체 뭘 해야할까. 확실한 것은 밸프레드는 자면서 지낸다는 것이겠다. 아 부러워.

 

그러나 핏속에 사막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르다. 황무지는 결코 황량하지 않다. 산 하나하나, 계곡 하나하나, 피오르 하나하나, 빙산 하나하나가 놀라운 선물을 감추고 있다. 고독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짓누르는 건 드문 일이고, 대개의 경우 고립은 경이로운 자유의 감정을 준다. 북극 지방은 생명력과 변화로 가능하다. 원소 말고는 장애물이 없고, 자연 말고는 섬길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저들끼리 정하는 법말고는 따로 법도 없다. 이 꼭대기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단지 처한 환경 덕분에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2권 165~166쪽]

 





 

나능야 무서운 북극곰. 을 사냥하는 사냥꾼. 근데 북극곰 한 마리가 무지무지무지하게 크네.




북극에 대한 환상


북극허풍담은 북극의 삶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면서도 다른 환상을 불어넣는다. 어느 분이 북극에 가고 싶다고 한 것처럼. 자연과 벗한 사람들의 순수함, 거기서 발현되는 웃음이라는 것이 꽤나 맛깔난다. 한 편 한 편을 미국식 느낌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어울릴 것같다. 때론 문명과 원시의 대비를 통해 문명의 허례허식을 비웃기도 하고, 자연이 선사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한 사람의 죽음조차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죽음, 광기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것이다. 안 웃기냐고? 웃기다. 그런 것조차 웃음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바로 이 북극 아니겠는가. 

 

 

「엄마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아. 엄마란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오래된 무언가지.」

요엔손 씨가 거들고 나섰다.

「맞아, 빌리암.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어야 해. 엄마를 이 황무지에 모셔올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팔뚝에 모시고 다닐 수는 있지.」

[1권 92쪽]



 

「그 멍청한 자식이 사람들 몸에 잔뜩 물감을 처발라 놓았어.」

「어째서 그자가 했다고 생각하지?」

부관이 물었다.

「그 자식만 셔츠를 입고 있으니 그렇지!」

[1권 99쪽]



단조로워 보이는 그곳의 삶이 이렇게 다양한 에피소드로 꾸며질 수 있다니 역시 사람 사는 곳에는 사건사고가 끊일 수 없는가 보다. 무려 이 책이 10권이나 있다니, 북극의 삶은 계속되는 건가? 자, 다음 북극 이야기를 기다려보자.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질지 기대하며.




그래서 북극 가고 싶냐고요? 아뇨. 전 아니에요. 그린란드 북동부에 갈 바에는 차라리 한 겨울에 핀란드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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