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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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처음이라는 말은 설렌다고. 그런데 나에게 처음이란 언제나 불안을 동반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설렘보다는 불안이 더 큰 것이,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본 배명훈의 장편 소설


『은닉』은 내가 처음 접하는 배명훈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타워』도 출판사는 배명훈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광고했지만, 연작소설집이라 장편이라 볼 수는 없었다. 배명훈의 첫 장편소설은 『신의 궤도』이지만 그건 내가 읽을 수 없을 때 출간되었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직 접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은닉은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배명훈의 장편소설이 되었다. 이제까지 단편은 정말 많이 읽었는데 말이다. 


배명훈. 이 작가를 처음 알았던 건 내가 고등학교 때다.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오래된 거 같은데 2007년이니까.... 어라. 5년이나 지났네? 지금은 출간되지 않는 <판타스틱>이라는 장르문학 잡지에 실렸던 배명훈 작가의 단편을 보고, 굉장히 재미있고 독특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했더라지. 평범한 세계 같다가도 정말 사소하지만 짐작할 수 없었던 반전이 오고, 그의 독특한 상상력에 감탄하고, 어딘지 붕 뜬 듯 하면서도 현실에 발을 단단히 발붙이고 있는 내용에 즐거워하고. 배명훈은 내게 단편의 맛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작가였다. 이후로도 많은 단편집과 웹진 거울을 통해 그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장편은 이게 처음이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절대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 배명훈 아니겠나. 배명훈이잖아. 단편이 늘어서 장편이 되었다고 해도 그 재미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통통 튀는 상상력에,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 실감나는 인물 대사. 거기다 은경이까지 나오니!(웹진 거울에 실렸던 배명훈 단골 여주인공 은경이 가상 인터뷰 [클릭])



도입부만 설명해보자. 


나는 킬러다. 11년만에 맞이하는 휴가를 맞아 체코에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지령이 내려졌고 지령에 따라 관람한 연극에서 은경이를 보게 된다. 


시체였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반라의 여자였다. 시간이 멎어 버린 죽은 여자의 몸. 아마도 연출자나 미술감독이 세심하게 배치해 둔 상태 그대로, 생명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습으로.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정지해 있는 몸. 시체를 흉내 내는 육체. 죽음을 연기하는 삶.

-p.22


은경이를 본 순간, 주인공은 그녀를 보호하기로 한다. 그리고 옛 동료 조은수에게 신호를 보낸다. 





(아래는 스포일러를 거를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주의 바랍니다)



빛과 그림자


은닉의 주요 인물은 세 명으로 축약된다. 주인공 '나', 조은수, 김은경. 이 셋은 이야기의 중심 축이며 진행자이다. 재미있게도 '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보다 사건에 이끌려 나간다고 생각되는 인물로,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김은경은 사건의 발단이자 핵심이지만 회상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사도,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조은수는 초반에는 얼굴이 없고 생사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보니 세 인물 다 존재가 애매하다. 한 개체를 상징하는 '이름'이 부재한 주인공, 살아서 죽어있고 죽어서 살아가는 은경이, 그 존재가 경계에 걸쳐있는 조은수. 이들은 인물이면서 소품이고 개념이다. 주체가 의심당하는 자들. 


은경과 은수는 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서있다. 은경이는 완벽히 '소품'의 위치에 얹어져 있다. 그녀가 연극에서 맡고 있는 그 역할이 연극 밖의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은경이는 '나'나 조은수 보다 강력한 메시지이며 상징이다. 그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이다.  빛. '나'로 대변되는 인간이 갈망하는 빛이며 생명이다. 아무 대사가 없어도 그 존재 자체로만 '나 여기 있소'하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은경 씨로서는 은닉에서의 연기가 배명훈 소설 중에서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언제나 추구하고 있는. 그럼 은경이와 반대점에 있는 조은수는 뭘까. '나'는 은경이를 경외(경애?)한다. 그리고 조은수는 '나'를 바라본다. 조은수는 그림자이다. 은경이의 반대 쪽에서 나를 항상 따라다녀야하는 그림자. 실질적인 능력을 가진 것은 은수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그림자로 머물러야 하는 인물. 하지만 그는 은경이와 달리 이야기 속에서 생동한다. 은경이가 인간을 넘어서 인간을 이끄는 어떤 존재라면 은수 역시 인간을 넘어섰지만 인간을 반대로 동경하는 그런 존재. 그렇기에 은경이보다 더 인간적이고 멋있었고...


"결국은 그렇게 될 겁니다. 조은수는 완성형이고 김은경은 최종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p.188



나라는 인물은 참 미묘하다. 그는 사람이다. 그래. 평범한 사람이다. 은경이와도 어울리지 않고, 초천재 은수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도 모르겠는 평범한 인물. 평범하게 감정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그는 꼭두각시이다. 배명훈의 꼭두각시? 아니. 은경의 꼭두각시. 은경이를 노리는 두 세력의 꼭두각시. 미끼. 움직이는 듯 하지만 그 스스로 움직이는 때는 거의 없다. 체스판의 말처럼 남들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애 쓰지만 체스판은 기울어있고, 한 쪽으로 미끌어질 수밖에 없다. 남들이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일반인의 모습 아닐까. 



"안 이래도 되는데."

은수가 속삭였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목소리가 절대 아니었다. 

"너랑 이렇게 나란히 걷고 싶었어."

"나도."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p.158


악마는 우리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소설 속에도 명시되어 있다. 자연. 원형. 절대자. 그것이 생명을 앗는 것으로 깨어나는 건 생사의 경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일까? 악마 이름 의미는 잘 모르겠음. 친절히 설명해준 마지막 악마만 알겠고. 사실 빛으로 알고 있었던 무언가가 악마라는 건 그리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였던 은수가 오히려 너무 애정과 우정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은 충분히 역전될 수 있고. 진짜 악마는 그 관계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뭐라고 횡설수설하는 거지. 책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뭐라 설명할 수 없음. 지금 정줄 놓은 거 같아. 




예약특전 '배명훈 매뉴얼'. 단편 <안녕, 인공존재!>의 인공존재 설명서가 떠오릅니다. 



인섹트 플라이트


"IF 코드. 딱 걸린 거지. '곤충,' 'IF,' 이렇게 추적해 들어가니까 한 가지가 툭 튀어나왔어. 그 곤충연구소에 있는 풍동실험실 이름에 IF라는 말이 딱 들어가 있더라고."

"그게 뭔데?"

"인섹트 플라이트 Insect Flight. 그 IF 코드의 비밀은, 곤충비행 연구였던 거야."

p.188


몰입해서 읽고 있던 내 주의를 확 끌었던 단어, IF. '인섹트 플라이트'. 배명훈 작가의 단편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당연히 <인섹트 플라이트>를 꼽을 것이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고, 지금은 폐간된 판타스틱에만 실렸던 그 단편. 처음 본 배명훈의 소설은 역시 판타스틱에 실렸던 <우주로 날아간 마도로스>였지만 그를 인식하게 했던 소설이라면 단연 <인섹트 플라이트>였다. 그렇기에 인섹트 플라이트는 사실 두번째이지만 처음이었다. 두 번째 장편이지만 내게는 처음인 은닉과 같달까. 인섹트 플라이트는 섬세함과 반전, 그리고 10대 소녀였던 나를 꿈꾸게 한 로맨스(!)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었다. 곤충 형태의 초소형 비행체. 


그 아이디어가 은닉에서 되살아났다.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단편이.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안 좋아할 수 있겠는가. 배명훈 작가를 좋아하게 된 그 작품이 여기서 나와버렸는데. 아이디어만 겹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거대한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수단. 그것이 그 작은 곤충이었다는 아이러니. 악마를 불러낸 수단으로 악마를 없애는 진실. 디코이라는 수많은 허위 정보들, 가상의 분신들을 없애는 것이 단 하나로 수렴된 점으로 가능했다는 거. 그 장면은 정말 명장면일 거야. 



 

 

, 이렇게 배명훈 작가님 사인본이 셋! 작년에 신의 궤도를 질러두지 않은 걸 후회 중이다. 



정치를 둘러싼 전략은 어렵네요


배명훈 특유의 사회 비꼬기도 여전하다. 『타워』에서 볼 수 있었던 대놓고 신랄한 풍자는 덜하지만, 예술을 대하는 연방 공무원들의 태도에는 작가의 삐딱한 시선이 배여있다. 아무래도 그 자신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더 잘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창수에게 중요한 건 그 글 자체가 아니라 그 글이 일으킬 반향일 것 같앗다. 예술에 관한 한 연방행정기관의 감수성은 그런 식으로만 작동할 수 있으니까. 연방에는 감수성을 담당하는 기관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서, 스스로 느낀 것에 직접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느끼고 난 후에 일어나는 동요에 대해서만 한 발 늦게 반응할 수 있을 뿐이다. 

-p.116


은경이를 둘러싼 단체의 태도와 전략은 어렵다. 대충 읽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얘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몇 번을 생각해야했다. 내가 이런 집단의 행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작가는 자신의 역량을 이용해 상황을 만들어냈는데 내가 그 상황을 판단하는 인물들 수준이 되지 못해서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난 별로 정치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나봐.





그냥 한 번 읽어보세요.


이 외에도 소설 안에 수 많은 코드가 있다. 흑백, 체스, 미끼, 버린 자, 프라하, 겨울, 기수...  나는 다 못 파악하겠다. 설명할 자신도 없고, 지금도 말 안 되는 말만 잔뜩 뭐라고 지껄여 놨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었더니 두서도 없고. 어차피 이 글은 내 기록을 위한 거니까. 끝까지 두서 없이 가야겠다.


그냥 다들 한 번 읽어보세요. 강추. 배명훈입니다. 두 말이 필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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