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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터는 단 한 가지 방법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앨리 카터 지음, 곽미주.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도둑이 대세인가 보다. <도둑들>은 보지 못했지만 관객의 마음을 훔쳐 흥행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캣우먼, 셀리나 카일(앤 해서웨이)도 매력적인 대도의 끝을 보여주었다(언니, 멋있어!). 법을 무시하고, 가진 자들을 농락하는 대도둑의 모습은 매혹적이다. 대도라면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걸을 것 같고, 상황 판단력도 좋아야할 것 같고, 예술품을 보는 안목도 높을 것 같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담대함과 기술력도 갖춰야겠지. 이야기 속의 도둑들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사람들이고, 나한테는 그런 대도가 훔칠만한 그런 물건이 없으니까 마음껏 환상을 펼쳐도 되겠지?
그리고 여기 새로운 도둑이 있다.

도둑맞은 그림을 훔치기
아니, 도둑의 길을 버리려고 한 도둑이 있다. 카타리나 비숍. '캣'이라는 별명을 더 좋아하는 그녀는 신분을 훔쳐 콜건 기숙학교에 다녔지만 사고가 생겨 퇴학당한다.
캣은 희미한 방 안의 공기가 모두 빠져 버린 듯한 이상한 느낌에 압도되었다. 어쨌든, 걸렸을 경우에 대해서라면 차라리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몰리는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p.18
캣은 단 3개월 동안 가문을 떠나있었다.(가업이 도둑질이란다) 그런데 그 시간은 그들의 세계에선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지 그 사이 꽤 많은 일들일 벌어져있다. 그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도둑인 캣의 아버지가 타코네의 그림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 문제다. 아버지는 그것을 훔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하랴. 최악의 악당 타코네는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타코네가 캣에게 준 시간은 2주. 그 안으로 그림이 타코네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 캣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도둑맞은 그림을 되찾기로 한다. 그리하여 10대 소년소녀 도둑들이 여기 모여서 일을 친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 헨리 미술관을 턴단다. 도둑맞은 그림을 다시 훔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런던에 위치한 헨리 미술관은 가상의 미술관이다. 언급되는 그림들도 대부분의 가상의 작품들. 헨리 미술관은 런던에 위치한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일단 런던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연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는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내셔널 갤러리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내셔널 갤러리의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W.W.헤일 5세
캣에게는 아주아주 중요한 조력자가 있는데 바로 W.W.헤일 5세. 억만장자다. 잘생겼다. 성격 괜찮다. 머리 좋다. 완벽남 그 자체. 로맨스 남주의 전형이라고 해야할까? 대저택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는 부자이다. 이런 남자가 캣이 좋다고 따라다닌다. 역시 로맨스 소설 남자주인공은 이래야지 싶은 그런 소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로맨스 요소는 그리 강하지 않고, 연애보다는 도둑질(?)에 방점이 찍혀있다.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여기 있고, 또 다른 매력적인 서브 남자 주인공도 있는데 왜 그런 걸까.
W.W.헤일 5세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이라면, (유일하게 이름만은 예외로 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후에 바로 지금과도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헤일이 마치 그 애의 시골집 서재에 있는 소설의 초판본처럼 느껴지던, 그런 시간들. 그리고 캣은 책의 첫 장조차 마치지 못했다. p.121
캣 때문이다.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인정하지도 직시하지도 않는다. 캣은 아직 자신을 아기 고양이라는 위치에 놓고 싶어하는 듯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식조차 못하는 캣이기에 헤일이 캣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조차 약해보인다. 캣이 헤일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스스로가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만큼 약하다. 일단 그녀는 일상을 원하며 가문을 버리고,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헤일조차 버렸지 않은가. 적절한 밀고 당기기인지, 밀기만 하는 건지. 원.
"너네 둘, 함께 지낸 지 얼마나 됐어?"
닉의 물음에 너무나도 빠르게 캣의 미소가 사라졌다.
"우린 함께가 아니야."
캣은 불쑥 말했다. 바로, 뭔가 다른 대답을 했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뭔가 내숭을 떨거나, 아니면 영리해보이는 대답으로. 하지만 너무 늦었다. 캣은 이미 멍청한 소녀이자 끔찍한 거짓말쟁이처럼 들리는 대답을 해 버렸다. 둘 다 캣으로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역할이었다. -p.263
전 세계를 오가는 대도의 세계를 엿보고,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미술관을 터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좋은 오락소설이었다. 사실 문장이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내가 이런 급박한 진행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소설 자체가 그런 건지는 잘 분간이 안 간다. 그 점을 제외하면 정말 즐거운 독서였다. 로맨스는 오글거리지 않을 정도로 적절했고, 주인공들은 매력적이었다. 매력적인 10대 '캣'우먼이 잘생긴 억만장자의 도움을 받아 세계 최고의 미술관을 털었으니까. 근데 다음 권에선 연애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