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훔쳐라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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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있는 젊은 작가다. 소설집 내내 김소진을 연상시킬 정도로 낯선 우리말들이 대거 등장한다. 해설 쓴 성민엽의 말마따나 생경한 토속적인 우리말들이 첨단의 소재와 어울려 등장하니 '낯설게 하기'의 효과가 살갑게 다가온다. 다만 소설이 매우 암울하고 괴기해서, 읽고나면 기분이 나쁘다(?). 여기 실린 모든 소설들은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다. 가짜, 거짓, 허위, 사기, 사이버, 망상 - 이것들이 현실과 진실을 전복시켜버린다. 현실이 알이라면, 가짜들은 알을 품은 닭이다. 때문에 박성원의 소설에서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가짜들은 무섭게 부유하며 활개치고, 나는 복화술사 박성원 소설에서 진짜는 발견 못하고, 가짜만 혼잡스러이 읽은 채 엉뚱한 이해를 끄적인다.

「댈러웨이 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의 사진가가 풍문으로 떠돈다. 그 사진가의 사진은 컴퓨터로 조작된 것이다. 가짜가 현실을 엎고 판을 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댈러웨이의 사진 기법(평범한 인물, 풍경 사진인데 잘 들여다보면 인물의 눈동자에 혹은 숟가락에 또는 가로등에 댈러웨이가 나타내고자 하는 장면이 반사되어 들어 있다. 이건 문학에서 그 흔한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로 통용되는 기법)에 대해 너스레를 떨어대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대단한 기법이 아닌 듯하여 실은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짐짓, 이 소설을 읽은 직후 친구에게 전화해서 댈러웨이라는 사진가가 있는데 어쩌구 그 기법이 어쩌구… 소설과 똑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만 레이를 좋아하는 친구는 '그게 뭐가 대단한데?'라고…. 일반적으로 소설집의 앞에 실리는 소설이 가장 재미있는데, 이 소설은 재미 때문이 아니라 가장 쉽게 읽혀서 앞에 실린 성싶다.

「중심성맥락망막염」은 시야의 중심이 안 보이는 괴상한 병을 앓는 사람이 등장한다. 반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무르팍을 탁! 칠 소설. 「이상한 가역 반응」은 사회의 허위와 개인의 망상에 대해 뜨악한 의문을 던진다. 「실마리」는 작가가 공들여 쓴 분위기가 역력하다. (일단 주인공이 소설가다.) 사이버 동호회에서 발생하는 논쟁을 풍자한 대목에서 (공감이 가니까) 무척 웃었다. 「런어웨이 프로세스」와 「호라지좆」은 김영하 소설보다 욕이 더 심하게 나온다. 또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고, 재밌다. 「호라지좆」에 나오는 중앙도서관은 울동네에 있어 자주 가는데, 언젠가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박성원이 은근히 몽땅 풍자해놓았길래, 나로선 아쉬웠다. (하지만 많이 웃었다.)

「왈가닥 류씨」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성민엽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류씨는 작가이고 왈가닥은 소설이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박성원이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언뜻 보이기도 하지만(정말 그렇다면 너무나 솔직하고 또한 불온하다…), 그것 역시 거짓말일런지?…

'류씨는 왈가닥이라는 인형을 언제나 오른손에 끼고 다닌다. 류씨에게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왈가닥이 류씨의 수음용일 것이라는 게 우리의 중론이었다.'(240) '그러면 왈가닥과 류씨는 앞으로 무엇을 하냐구? 그야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잡상스런 너스레나 떨면서 우리끼리만 킬킬대는 단지 거리로만 존재하겠지. 앞으로도 비웃을 소재는 많으니까 말이다. 복화술? 세상에 복화술이라니, 도대체 누가 요즘 세상에 그런 것을 구경한단 말인가.'(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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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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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겨울. 이맘 때였다. 나는 음습한 골방 벽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쭉 핀 자세로 9시부터 9시까지 미동 않고 눈을 뜬 채 꼬박 같은 생각을 되풀이 하였다. 나와 사귀기로 한 그가 내가 존경하는 형과 했다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행동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다른 입을 통해 들었다. 12월의 추워져가는 밤, 나는 꼬박 12시간 동안 그가 내게 말하지 않는 것들을 새김질하고 또 새김질해댔다. 나는 미동도 않고 눈을 뜬 채였다.

사전 지식 없이 책을 들었다가 낭패 보았다. 첫 장을 여러 번 되풀이 하여 읽었지만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읽다보니 이건 묘사가 아니라 화자의 중얼거림이다. 같은 사건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사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화자의 생각이다. 그 의식의 타래들이 중첩되고 반추되어 불시에 번복.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인지, 관찰하고 있는 것인지 헛갈리는데, 같은 사건이 끊임없이 약간의 차이로 불거져 나오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의식인 것 같다.

화자의 아내인 A…와 프랑크가 시내로 나들이 갔다가 대단치 않은 사고였는데도 하룻밤을 보내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프랑크의 차는 신형이고 세세한 프랑크의 성격으로 봤을 때 고장났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가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혀 블라인드를 통해 관찰한 둘의 모습. 이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프랑크의 자동차는 또 고장난 모양이다.'(102)처럼, '또' 아까 했던 생각을 되풀이 한다. '남자는 여전히 흙으로 뒤덮인 통나무 다리에서 흙탕물 위로 몸을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다.'(121)처럼, '여전히' 진행되는 의심 또 의심.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그러나 맴도는 생각들.

'빛은 활짝 열린 세 창문 가운데 어느 것을 통해서든 쉽게 그녀에게 다다른다.'(123) 햇빛은 사실적인 관찰과 명징한 의식을 은유하겠지만, 어둠으로 은유되는 질투 앞에 '완전히 위력을 잃은 광선에 불과'(140)하다. 때문에 그의 '숨소리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며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게 한다. 아직도 측정할 무언가가, 구별할 무언가가, 묘사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말이다. 이 완전한 암흑 속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115-116)

이 소설의 묘사는 도무지 연상되어지지 않는다. 정독을 하는 것보다 속독을 하는 게 낫다. 어떻게 읽어도 이미지는 정립되지 않고 부유하기만 할 테니. 이를테면 이런 - '주변 색보다 밝은 네 개의 반짝이는 점 두 쌍이 두 군데에 걸쳐 정방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정방형의 왼쪽 모서리 점 두 개는 왼쪽 정방형의 오른쪽 모서리 점들로부터 채 10십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83) - 이거 머리 속으로 그려지는가? 거의 모든 문장이 이러하다.

의식 속으로 침윤하면 로브그리예가 쓰듯이 한정된 경험일지라도 '도주의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된다.'(124) 이 소설은 빛이 아닌 어둠을 맞이하며 맺는다. 그러나 밤 9시부터 아침 9시에 질투하기를 멈추어서였을까. 그 스무 살 겨울의 나는, 의심하고 반복하여 떠올리며 질투하던 나는, 끝내는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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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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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인가,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선생이 소개시켜줬다. 어떤 내용이길래 저런 꽉 막힌 사람이 다 추천을 할까… 한동안 궁금해하다가,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요 며칠 전 자프란스키의 책을 읽다 카프카가 나오길래 나와 비슷한 인간 그레고르 잠자씨가 생각나, 오래 전 꽉 막힌 선생이 이 책을 소개하며 얘기했던 호랑이로 변신한 사내가 떠올라, 다행히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읽는 내내 감읍 또 감읍했다.

서른세 살에 요절한 작가 아츠시의 대표작 4편이 실려 있다. 모두 중국 고전에서 모티프를 빌어 근대적 소설 양식으로 아츠시가 새로 쓴 것이다.

「산월기」는 《인호전人虎傳》을, 「명인전」은 《열자列子》를, 「제자」는 《논어》 등을, 「이능」은 《한서漢書》와 《사기》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산월기」
일찌기 벼슬을 버리고 학문을 위해, 후대의 자자한 명성을 위해 산속으로 뛰어간 사내가 호랑이가 돼버린다. 그레고르 잠자처럼 왜, 어떻게 변신했는지는 애매하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속세에 겁먹고 자존심만을 뻣뻣하게 감싸고 전전긍긍하다 "급기야는 나의 외모를 이렇게 속마음과 어울리는 것으로 바꿔 버리고 만 거라네."(44) 우연히 산속에서 조우한 옛 시절 친구에게 호랑이는 신세한탄을 솎아낸 뒤 자신의 시를 기록해 후세에 전해주기를 부탁한다. 호랑이가 돼서 광기에 휩싸임에도 불구 간혹 정신이 찾아올 때면 시를 짓는다는 것. 이별에 이르러서야 호랑이는 처자의 얘기를 꺼낸다. 자신은 죽었다고 전해달라고. 호랑이 사내가 호랑이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비정함이 아닐까? 이것을 읽는 나는 왠지 소스라치게 두려웠다.

「명인전」
궁술의 명수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사내. 달인의 제자가 되어 어느덧 달인에 버금가는 명궁이 된다. 그러자 욕심이 생긴 사내는 천하 제일의 명성을 얻기 위해 스승을 제거하려 한다. 어느 벌판에서 마추친 두 사람. 제자의 갑작스런 활에 활로 응수, 둘의 활은 허공에 부딪쳐 떨어지고, 반복, 그러다가 둘은 서로 문득 깨달고는 벌판에서 포옹하고 엉엉 운다. 스승은 위험천만한 제자를 궁술의 도인에게 보낸다. 도인을 만나고 9년 후 돌아온 사내. 사내는 활을 잡지 않는다. "지위(至爲)는 행하지 않는 것이고, 지언(至言)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지사(至射)는 쏘지 않는 것이다."(60) 이런 말을 하는 데도 그 동네 사람들은 이해가 빨랐던 모양으로 사내는 계속하야 명인으로 살아갔고 40년이 지난 어느날, 지인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어느 기구를 보고는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주인은 농담인 줄 알았는데 곧 진담일 줄을 알고는 "아아 선생께서…… 고금에 무쌍한 활의 명인이신 선생께서 활을 완전히 잊으시다니! 아아, 이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후 당분간 한단 땅에서는 화가는 붓을 감추고 악사는 비파의 현을 끊고 장인은 줄과 자를 손에 쥐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63)

「제자」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의 이야기다. 저잣거리의 무뢰배 자로는 그 꽉 막힌 공자의 제자였음에도 리버럴했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는 친구 사이처럼, 둘의 정겨운 관계는 우정, 우정이란 단어가 적절하다. 공자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 거문고를 타는 자로의 외곬성은 못내 쓸쓸했다. "자로의 거문고 소리가 여전히 살벌한 북성인 것을"(80) - 이 구절은 이 소설의 복선으로 읽혔다. 결국 외곬이던 자로는 소금절임의 형벌로 죽고, 공자는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집안의 모든 젓갈류를 내다버리고, 이후 일절 식탁에 젓갈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122)

「이능」
 한의 무제 시절 흉노를 치러 간 장수 이능. 무제의 엷은 귀와 간신의 무리 때문에 우직한 이능은 기마병도 못 거느린 채 열세한 군사로 흉노족을 치러 갔다가 분전하나 사로 잡힌다. 이능이 반역자라고 무제에게 간하는 무리들 앞에서 이능을 두둔하다가 궁형을 받은 사마천. 정신적 육체적 극단의 고통에서 오로지 사기 집필에만 몰진해 도통(?)해버리는 사마천. 그리고 무제가 발작해 이능 일가를 몰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능은 소무의 19년간의 절개에 대해, 한나라 사람들의 가식과 흉노족의 마초적이지만 순수함, 그 틈에 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싫어 사냥으로 달래고…. 이능, 사마천, 소무 - 세 인물을 축으로 고대의 꼬락서니를 새김질 할 수 있는 좋은 작품. 황제, 충성, 절개 - 이 놈, 무지막지한 헤게모니의 기저에 대해 새삼, 몹시 궁금해졌다.

역자의 친절한 주석이 123개나 된다. 흠뻑 빠져들 수 있어 좋았지만 책 뒤에 있어서 불편했다. 신영복 선생의 추천 해설이 여덟 장 분량이나 된다. 신영복 선생이 번역 출판을 권고한 모양이다. 내용 중 한시(漢詩)는 선생이 번역한 듯. 드문드문 이철수 화백의 삽화도 볼 수 있다. 이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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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왜? - 두 위대한 철학자가 벌인 10분 동안의 논쟁
데이비드 에드먼즈 외 지음, 김태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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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이 초조한 모습으로 부지깽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자기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그걸 지휘봉처럼 휘둘렀다"라고 회상한다. 그러다가 윤리학의 지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때 비트겐슈타인은 포퍼에게 도덕적 규범의 예를 하나 들어보라고 요구했다. 포퍼는 "나는 대답했다. '초청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 대답에 격분한 비트겐슈타인은 부지깽이를 내동댕이 치고 문을 쾅 닫으며 방을 나가버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5)

1946년 10월 25일, 케임브리지 대학의 작은 회의실에서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 10분간 격렬한 논쟁이 붙었다. 종내에는 비트겐슈타인이 포퍼를 부지깽이로 위협했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도대체 비트겐슈타인은 왜? 부지깽이를 들었을까?!

서두에 박력있는 문체로 사건을 묘사한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회원들의 엇갈리는 진술들, 수십 년 뒤 포퍼는 자서전에서 의혹스러운 그날의 회상 기록을 한다. 저자들은 그 일치하지 않는 진술들에서 두 철학자의 특징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매혹의 카리스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이 두 맞수를 공평하게 다루려 할 때 부딪히게 되는 한 가지 문제는 비트겐슈타인 사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마법의 힘이라고밖에는 달리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어떤 힘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이다.」(37) 케인즈 교수는 케임브리지에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하자 이렇게 말했다. "신이 도착했다. 나는 5시 15분에 도착한 기차에서 신을 만났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들은 그가 벽을 통과할 것이라고 말하면 그 말을 믿어버렸다. 「이때 나는 의자의 팔걸이를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목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 나는 그가 정말로 벽을 지나갈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지붕이 무너질까봐 걱정했다. 그것은 그가 지닌 마력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마력의 일부는 이처럼 거의 모든 것을 마술처럼 환기시킬 수 있다는 데 있었다.」(40)

반면 포퍼는 「한 사람은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은 왜소하고 평범해 보였기 때문에 전자가 포퍼일 것 같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실은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 두 번째 사람이 포퍼였다.」(41)

저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두 철학자의 고향 빈으로 독자를 데려 간다. 그 10분을 위해 아예 뽕을 뽑자는 심산. 비트겐슈타인家는 오스트리아에서 로스차일드家 다음으로 부자였다. 예술의 도시 빈의 최상류층. 비트겐슈타인의 집은 브람스와 쇤베르크와 말러 등이 드나드는 음악 살롱이었다. 또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의 누이가 결혼할 당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유대인이었음에도 막대한 재산 덕분에 양차 대전을 무사히 넘겼을 정도의 가문 출생 막내 귀공자 비트겐슈타인.

반면 포퍼의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마찬가지 유대인이었던 관계로 나치에게 재산이 몰수 당했다. 포퍼는 학업을 포기해야했고 막노동을 했고, 결국은 뉴질랜드로 망명한다…

성공 과정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 비트겐슈타인은 공학도였다. 수학에 관심이 있어 논리 철학으로 한창 명성 날리던 러셀의 책을 읽고는 편지를 쓰게 되고 만나고 대번에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천재인 것을 알고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했고. 그를 이해하거나 그를 세상에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62) 그러나 몇 년 후 이 천재는 스승 러셀을 무시한다. 「걱정 마세요. 절대로 이해 못 하시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65), 「그는 1차 대전 이후 러셀의 모든 철학적 연구가 형편없는 것이라는 얘기도 서슴지 않고 했다.」(66)

그러나 포퍼는 러셀을 존경했다. 「피터 먼즈는 러셀에 대한 포퍼의 태도가 "거의 영웅 숭배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평가한다.」(71) 포퍼는 비트겐슈타인과는 달리 열심히 작업했지만 그의 명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뒤늦게야 출판되었다.

빈 학파는 비트겐슈타인을 '숭배'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포퍼는 빈 학파에 속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결국 끼지 못했다. 후에 포퍼는 혼자서 빈 학파를 박살내버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언어의 오해에서 오는 부산물일 뿐이라고 했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없다고 못박았다. 「사람들은 철학이 결코 진보하지 않으며 우리는 아직도 고대 그리스인들과 똑같은 철학적 문제에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입이 닳도록 하는 사람들도 정작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가 계속 같은 질문은 던지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275) 반면, 포퍼에게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없고 언어적 수수께끼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가 "즐겨 혐오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287)

이상의 내용을 염두하자면 포퍼에게 비트겐슈타인은 「학문적 적수 이상의 존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존경받는 변호사의 아들에게조차 닿을 수 없었던 화려한 빈을 상징했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사회적 지위와 부가 존경받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가능했던 제국의 도시, 인플레이션이 낳은 가난에도 꿈쩍하지 않고 나치마저 매수할 수 있었던 별천지를 보았다. 이 세계는 가난 때문에 뒤처지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해야 했던 자신의 상황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198)

모든 것을 깔보는 천재와 이인자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저돌적인 도전자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은 이러한 제조건에 의해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단, 비트겐슈타인은 포퍼를 몰랐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포퍼는 달랐다. 「포퍼는 어서 시작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는 에너지가 솟구쳤고 가슴은 쿵쿵 뛰었으며 더 많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철학이 말의 유희일 뿐이라는 쓰레기 같은 관념을 일소해버릴 것이다. 눈뜨고 못 보아줄 정도로 잘난 척 하는 이 선동가를 해치우리라.」, 「고귀한 자가 추락할 것이다. 빈 학파를 정신적으로 이끌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그들과 철저히 거리를 두었던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저택의 홀을 왔다갔다하며 사색하는 외로운 천재.」, 「오늘밤 승리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사과해야 하리라.」(302-303)

두 저자는 저널리스트답게 방대한 자료를 아우르고 치밀한 기획/구성력을 발휘한다. 비트겐슈타인 추종자 측과 포퍼 측의 엇갈리는 그 날의 부지깽이 사건을 엄청난 괴력(?)으로 파고 들어 '서사'를 화알짝 전개시킨다. 이것은 추리 소설인가?! 오, 이렇게 철학적이고 역사적이고 매력적인 서사를 가진 추리 소설이 있었나?… 철학의 대중화를 꾀함인가?… 재밌다, 너무나 재밌다,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파트마다 삽입된 매력적인 사진들은 어떻구… 한 사건을 핵으로 두고 자박자박 살을 붙이는 저자들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하며, 그 유쾌한 지적 유희의 독서삼매에 빠질 기회를 그대도 반가이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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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 사랑에 관하여 - 세계의 고전 사상 7-003 (구) 문지 스펙트럼 3
플라톤 지음, 박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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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sym 먹고 마신다posium는 의미를 지닌 향연sym-posium. 고대 그리스인들은 음주 모임을 생리적/감정적 쾌락을 발산시키는 장으로 맺지 않고 이야기를 꽃피워 정신적/이성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항연이라는 문화를 만들어냈다."(202) "적당한 음주는 우리의 영혼을 유연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순전히 이성적으로만 사유할 때에는 전혀 생각해내지 못하는 여러 다른 대상들도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술 한 잔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적도를 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는 연습은 감정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필요로 하는 모든 다른 덕목의 함양에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플라톤이 음주를 일종의 철학적 사유의 훈련으로 간주하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197-198)

아폴로도로스가 아리스토데모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들려주는 형식으로 향연은 시작한다. 화자가 중첩된 듯한 서두에 다소 헷갈렸지만 아가톤의 집에서 서막이 오른 후부터는 일사천리로 푹 빠져 읽었다.

항연에 참석한 현자들이 와상에 눕거나 앉아 돌아가면서 사랑eros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파이드로스-파우사니아스-에릭시마코스-아리스토파네스-아가톤-소크라테스-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 순이다. 엉뚱한 얘기들이 많아 나와서 동화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재밌는 것은 뒤로 갈수록 고차원적이고 유머가 넘치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 소크라테스가 현녀 디오티마에게 들은 이야기-사랑은 진행될수록 높은 단계로 발전-와 같은 전개 형식이다. 디오티마의 이야기인 즉,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출발하여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아름다운 육체에서 아름다운 자기 함양의 노력에로, 아름다운 자기 함양의 노력에서 아름다운 인식에로,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들로부터 저 더 높은 단계의 인식에까지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그 인식은 피안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인식이며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것 자체를 직관하는 것이랍니다."(141-142)

파이드로스는 토마스 만의 중편 <베니스에서의 죽음> 때문에 익숙한 이름. 그가 하는 사랑 이야기에서 건진 것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더 신에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이미 신들려 있기 때문"(58) - 앞으로 많이 써먹게 될 것 같은 문구다. 흐흐.

파이드로스의 이야기 중 황당하고도 웃겼던 부분은, 군대를 연인들로 구성하자는 것. 연인 앞에서 싸우다 도망가는 게 부끄러울테니 열심히 싸울테고, 연인의 위험을 목숨 걸고 지켜낼 것이기 때문이라나(뒤로 가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고대 그리스는 동성애가 자연스러웠다).

파우사니아스의 이야기는 조선시대적이다. 계급적이다. 어처구니 없다. 파우사니아스 다음 주자는 아리스토파네스인데 딸꾹질이 나와서 부득불 에릭시마코스가 바통 터치. 의사인 그는 의술의 관점에서 사랑을 이야기 한 후 향연에 초대된 현자답게 박식해서 음악, 천문학, 예견술에 빗대어서도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 중 내가 체크한 것 - "건강한 사람이 하는 사랑과 병든 사람이 하는 사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73), "우리는 결코 사려 깊지 못한 사람들도 좀더 사려 깊은 사람으로 바뀌도록 사려 깊은 사람들을 존중해주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지켜주어야 한다"(77)

딸꾹질 멎은 고대 희랍 최고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장. 미상불, <향연>에서 가장 재미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희극이 비극보다 천하다는 괴상한 말이 나오고, 또한 알키비아데스도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를 조롱하는 말투를 한다(<항연>을 저술한 플라톤은 비극이 이데아에 더 가깝게 닿아 있다고 판단. 그러나 결론 부분에 소크라테스는 희극과 비극을 차별하자 않고 둘 다 인정한다). 그러거나말거나 이 천진한 현자는 익살맞다(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선을 당장 사봐야겠다!).

"이 사람 아리스토파네스여! 자네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겐가?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에 농담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80)라는 에릭시마코스의 말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앞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겠다고 한다. 영화 <헤드윅>과 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도 나오는 '사랑의 기원'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

인간은 본디 둥그런 등과 원형의 옆구리를 지니고 있었다.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다리, 둥그런 목 바로 위에 완전히 서로 똑같은 두 개의 얼굴이 반대로 놓여 있고 그 위에 머리가 붙어 있었다. 귀도 네 개, 성기도 두 개였다. 이 고대인들은 종이 셋이었다. 성기 두 개가 남성인 종, 여성인 종, 하나는 남성 나머지 하나는 여성인 종 - 이렇게 세 종류였다. "남성은 본래 태양의 자식이고 여성은 지구의 자식이며, 그 두 종의 성질을 모두 지닌 이 세번째 종은 달의 자식인데, 그 이유는 달이 그 두 행성에 모두 관여하고 있기 때문"(83)

그 고대인들은 너무나 오만하여 신들에게 대들었다가 까불면 "다시 둘로 나누어서 외발로 뛰어 다닐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노라"(84)는 경고와 함께 제우스에 의해 둘로 쪼개졌다! "이렇게 인간의 본래 상태가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 나뉘어진 각각은 자기 자신의 또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그것과의 합일을 원하게 되었다"(85), 그리하여 "우리들 각자는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존재 즉 반편(半片)의 사람"(86)이다.

때문에, 자웅양성이었던 종에서 나뉘어 남자가 된 반편들은 여성을 좋아하고, 반대로 여성이 된 반편들은 남성을 좋아한다. 본래 순전한 여성적 존재에서 반편이 된 여성들은 남자들에 전혀 관심이 없고 여성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이러한 부류들로부터 레즈비언이 생기는 것. 반면 순전 남성적 존재였던 반편들은 호모가 되는 것. ㅡ 오, 이 동화처럼 재미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배꼽이야말로 먼 옛날 인간이 둘로 쪼개졌을 때 제우스의 명을 받은 아폴론이 치료해주며 남겨둔 흔적, 우리의 죄를 상기하라는). 뒤이어 터지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익살에서 나는 얼마나 웃었던고…. 그 익살을 인용하자면, "내가 방금한 말을 자네 에릭시마코스는 내가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내 말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방금 말한 그러한 극소수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둘 다 모두 본성상 진정한 남자들인 것 같으니까 말일세."(90-91) - 이 말인즉,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가톤의 이야기는 매우 현란하다. 사랑에 대한 찬미가 주된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화려한 언변에 엄살을 늘어놓다가, 예의 그 변증법을 실행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이상하다 싶은데 아가톤은 자꾸 "네", "네" 동조한다. 나는 의아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기교였던 것. 소크라테스에게 휘말린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여! 저는 제가 그때 이야기했던 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113)며 꼬리를 내린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정도로 공격을 그만두지 않는다. 살살 달래며 상대방에게 카운터를 날릴 준비를 한다. "그건 아닐세, 아가톤이여! 자네는 그 문제에 대해 훌륭하게 이야기한 셈이네. 그렇지만 조금만 더 물을 테니 대답해보게나!"(113-114)

결국 아가톤은 제압 당한다. "소크라테스여! 저는 선생님 말씀에 반박할 수가 없군요. 그러니 선생님이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밖에 없겠습니다." 패자 앞에 관대한 소크라테스! "친애하는 아가톤이여! 사실은 자네가 진리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는 것이지, 나 소크라테스에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네."(114)

아가톤을 제압한 후 소크라테스는 여유만만 설교하는 입장이 되어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스승 디오티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 불멸성에 관한 갈구! 인간은 불멸성을 사랑한다는 것. 생산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불멸의 축복. 신은 가진 것을 잃지 않지만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끊임없이 잃어간다. '어린아이일 때의 나'와 '노인일 때의 나'는 다르다. 시간도 인식도 육체도 잃어가는 것…. 그러므로 육체의 지속성은 자식을 생산하는 것. 인간들이 명예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그 이유(명예는 기억의 지속성). 육체의 생산보다 더 위대한 것이 영혼의 생산! 그것이야말로 명작을 만들어내는 모든 시인들과 장인! "이러한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사랑보다 더 훌륭한 협력자를 찾기는 어렵다는 사실"(143)

막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알키비아데스가 술에 취해 아가톤의 집에 입장한다. 아가톤과 소크라테스의 사이에 앉은 그도 역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한다. 미청년을 사랑하고 다니는 소크라테스를 뜨겁게 사랑하는 미청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사랑을 받는 아가톤을 질투한다. 알키비아데스가 취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언변은 탁월하며 웃긴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를 실레노스(심오한 지혜를 지니고 있고, 들창고, 두꺼운 이술, 황소 눈을 가진 매우 못생긴 외모의 소유자)와 가장 비슷하다고 둘러 말할 때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여! 겉모습을 놓고 볼 때, 선생님이 그 조각상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대해 선생님 자신도 아마 반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152)

이어, 소크라테스의 전쟁 중 무공, 신비하기까지한 기행 등을 이야기 하다가 끝내는 "선생님이야말로 유일하게 저의 연인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는데, 선생님은 그 사실을 저에게 밝히기를 주저하시는 것 같습니다."(161)면서 속내를 털어 놓는다. 또한 "사실 이분은 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글라우콘의 아들인 카르미데스와 디오클레스의 아들인 유티데모스 그리고 이분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농락했던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식으로 행동을 하셨었다네. 실상 그들과 관련하여 이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역할보다는 사랑받는 연인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지. 그래서 아가톤이여! 자네에게 충고하건대, 자네도 이분한테 놀림당하지 말고, 우리들의 경험을 교훈 삼아, 속담이 말해주듯이 '실제로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우둔한 아이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을 걸세."(170-171)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보기 좋게 반박하고 아가톤도 소크라테스에 동조한다. 알키비아데스는 탄식한다. "소크라테스님만 나타나면 어떠한 사람도 훌륭한 청년을 차지할 수가 없게 된다네. 지금도 또한 얼마나 쉽게 그리고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이분은 자기 곁에 이 훌륭한 청년을 자리 잡도록 만들었는가!"(173)

갑자기 한바탕 소란스러운 무리가 들이닥쳐서 현자들은 집으로 가고, 아리스토파네스와 아가톤과 소크라테스만이 남아 밤새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먼저 잠들고 그 다음에 거의 동이 틀 무렵, 아가톤도 잠들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님은 그 두 사람을 모두 잠들게 한 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고, 아리스토데모스는 평소에 늘 그렇게 하듯이 그분의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174-175)

향연을 읽고서 플라톤이 명상적 합리주의자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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