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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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겨울. 이맘 때였다. 나는 음습한 골방 벽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쭉 핀 자세로 9시부터 9시까지 미동 않고 눈을 뜬 채 꼬박 같은 생각을 되풀이 하였다. 나와 사귀기로 한 그가 내가 존경하는 형과 했다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행동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다른 입을 통해 들었다. 12월의 추워져가는 밤, 나는 꼬박 12시간 동안 그가 내게 말하지 않는 것들을 새김질하고 또 새김질해댔다. 나는 미동도 않고 눈을 뜬 채였다.

사전 지식 없이 책을 들었다가 낭패 보았다. 첫 장을 여러 번 되풀이 하여 읽었지만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읽다보니 이건 묘사가 아니라 화자의 중얼거림이다. 같은 사건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사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화자의 생각이다. 그 의식의 타래들이 중첩되고 반추되어 불시에 번복.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인지, 관찰하고 있는 것인지 헛갈리는데, 같은 사건이 끊임없이 약간의 차이로 불거져 나오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의식인 것 같다.

화자의 아내인 A…와 프랑크가 시내로 나들이 갔다가 대단치 않은 사고였는데도 하룻밤을 보내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프랑크의 차는 신형이고 세세한 프랑크의 성격으로 봤을 때 고장났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가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혀 블라인드를 통해 관찰한 둘의 모습. 이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프랑크의 자동차는 또 고장난 모양이다.'(102)처럼, '또' 아까 했던 생각을 되풀이 한다. '남자는 여전히 흙으로 뒤덮인 통나무 다리에서 흙탕물 위로 몸을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다.'(121)처럼, '여전히' 진행되는 의심 또 의심.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그러나 맴도는 생각들.

'빛은 활짝 열린 세 창문 가운데 어느 것을 통해서든 쉽게 그녀에게 다다른다.'(123) 햇빛은 사실적인 관찰과 명징한 의식을 은유하겠지만, 어둠으로 은유되는 질투 앞에 '완전히 위력을 잃은 광선에 불과'(140)하다. 때문에 그의 '숨소리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며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게 한다. 아직도 측정할 무언가가, 구별할 무언가가, 묘사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말이다. 이 완전한 암흑 속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115-116)

이 소설의 묘사는 도무지 연상되어지지 않는다. 정독을 하는 것보다 속독을 하는 게 낫다. 어떻게 읽어도 이미지는 정립되지 않고 부유하기만 할 테니. 이를테면 이런 - '주변 색보다 밝은 네 개의 반짝이는 점 두 쌍이 두 군데에 걸쳐 정방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정방형의 왼쪽 모서리 점 두 개는 왼쪽 정방형의 오른쪽 모서리 점들로부터 채 10십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83) - 이거 머리 속으로 그려지는가? 거의 모든 문장이 이러하다.

의식 속으로 침윤하면 로브그리예가 쓰듯이 한정된 경험일지라도 '도주의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된다.'(124) 이 소설은 빛이 아닌 어둠을 맞이하며 맺는다. 그러나 밤 9시부터 아침 9시에 질투하기를 멈추어서였을까. 그 스무 살 겨울의 나는, 의심하고 반복하여 떠올리며 질투하던 나는, 끝내는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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