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오래 전인가,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선생이 소개시켜줬다. 어떤 내용이길래 저런 꽉 막힌 사람이 다 추천을 할까… 한동안 궁금해하다가,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요 며칠 전 자프란스키의 책을 읽다 카프카가 나오길래 나와 비슷한 인간 그레고르 잠자씨가 생각나, 오래 전 꽉 막힌 선생이 이 책을 소개하며 얘기했던 호랑이로 변신한 사내가 떠올라, 다행히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읽는 내내 감읍 또 감읍했다.

서른세 살에 요절한 작가 아츠시의 대표작 4편이 실려 있다. 모두 중국 고전에서 모티프를 빌어 근대적 소설 양식으로 아츠시가 새로 쓴 것이다.

「산월기」는 《인호전人虎傳》을, 「명인전」은 《열자列子》를, 「제자」는 《논어》 등을, 「이능」은 《한서漢書》와 《사기》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산월기」
일찌기 벼슬을 버리고 학문을 위해, 후대의 자자한 명성을 위해 산속으로 뛰어간 사내가 호랑이가 돼버린다. 그레고르 잠자처럼 왜, 어떻게 변신했는지는 애매하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속세에 겁먹고 자존심만을 뻣뻣하게 감싸고 전전긍긍하다 "급기야는 나의 외모를 이렇게 속마음과 어울리는 것으로 바꿔 버리고 만 거라네."(44) 우연히 산속에서 조우한 옛 시절 친구에게 호랑이는 신세한탄을 솎아낸 뒤 자신의 시를 기록해 후세에 전해주기를 부탁한다. 호랑이가 돼서 광기에 휩싸임에도 불구 간혹 정신이 찾아올 때면 시를 짓는다는 것. 이별에 이르러서야 호랑이는 처자의 얘기를 꺼낸다. 자신은 죽었다고 전해달라고. 호랑이 사내가 호랑이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비정함이 아닐까? 이것을 읽는 나는 왠지 소스라치게 두려웠다.

「명인전」
궁술의 명수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사내. 달인의 제자가 되어 어느덧 달인에 버금가는 명궁이 된다. 그러자 욕심이 생긴 사내는 천하 제일의 명성을 얻기 위해 스승을 제거하려 한다. 어느 벌판에서 마추친 두 사람. 제자의 갑작스런 활에 활로 응수, 둘의 활은 허공에 부딪쳐 떨어지고, 반복, 그러다가 둘은 서로 문득 깨달고는 벌판에서 포옹하고 엉엉 운다. 스승은 위험천만한 제자를 궁술의 도인에게 보낸다. 도인을 만나고 9년 후 돌아온 사내. 사내는 활을 잡지 않는다. "지위(至爲)는 행하지 않는 것이고, 지언(至言)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지사(至射)는 쏘지 않는 것이다."(60) 이런 말을 하는 데도 그 동네 사람들은 이해가 빨랐던 모양으로 사내는 계속하야 명인으로 살아갔고 40년이 지난 어느날, 지인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어느 기구를 보고는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주인은 농담인 줄 알았는데 곧 진담일 줄을 알고는 "아아 선생께서…… 고금에 무쌍한 활의 명인이신 선생께서 활을 완전히 잊으시다니! 아아, 이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후 당분간 한단 땅에서는 화가는 붓을 감추고 악사는 비파의 현을 끊고 장인은 줄과 자를 손에 쥐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63)

「제자」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의 이야기다. 저잣거리의 무뢰배 자로는 그 꽉 막힌 공자의 제자였음에도 리버럴했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는 친구 사이처럼, 둘의 정겨운 관계는 우정, 우정이란 단어가 적절하다. 공자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 거문고를 타는 자로의 외곬성은 못내 쓸쓸했다. "자로의 거문고 소리가 여전히 살벌한 북성인 것을"(80) - 이 구절은 이 소설의 복선으로 읽혔다. 결국 외곬이던 자로는 소금절임의 형벌로 죽고, 공자는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집안의 모든 젓갈류를 내다버리고, 이후 일절 식탁에 젓갈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122)

「이능」
 한의 무제 시절 흉노를 치러 간 장수 이능. 무제의 엷은 귀와 간신의 무리 때문에 우직한 이능은 기마병도 못 거느린 채 열세한 군사로 흉노족을 치러 갔다가 분전하나 사로 잡힌다. 이능이 반역자라고 무제에게 간하는 무리들 앞에서 이능을 두둔하다가 궁형을 받은 사마천. 정신적 육체적 극단의 고통에서 오로지 사기 집필에만 몰진해 도통(?)해버리는 사마천. 그리고 무제가 발작해 이능 일가를 몰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능은 소무의 19년간의 절개에 대해, 한나라 사람들의 가식과 흉노족의 마초적이지만 순수함, 그 틈에 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싫어 사냥으로 달래고…. 이능, 사마천, 소무 - 세 인물을 축으로 고대의 꼬락서니를 새김질 할 수 있는 좋은 작품. 황제, 충성, 절개 - 이 놈, 무지막지한 헤게모니의 기저에 대해 새삼, 몹시 궁금해졌다.

역자의 친절한 주석이 123개나 된다. 흠뻑 빠져들 수 있어 좋았지만 책 뒤에 있어서 불편했다. 신영복 선생의 추천 해설이 여덟 장 분량이나 된다. 신영복 선생이 번역 출판을 권고한 모양이다. 내용 중 한시(漢詩)는 선생이 번역한 듯. 드문드문 이철수 화백의 삽화도 볼 수 있다. 이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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