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그린다 - 그림 같은 삶, 그림자 같은 그림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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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지적 갈증을 해소해주는 시원한 책을 만났다. 제목은 '그리메 그린다' (다빈치북스, 2012). 올 초 문득 중고교 미술 교과서를 구할수 있으면 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음악, 미술과 같은 예체능 과목은 학교에서도 주변과목으로 치부했었고, 학생들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목이었다. 뭐 요즘은 더하겠지만...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수십년이 흐르고나니 별안간 그때 미술교과서에 천연색 화보로 실렸던 명가들의 명화가 새삼 그립더라. 교과서를 구할수 있으면 구해다 가위로 오려 벽에 붙여놓고 최소한 그렇게 유명한 작품을 누가 그렸는지 정도는 공부하고 싶은 뒤늦은 만학열이 솟구쳤다.

 

화가라고는 고흐, 고갱, 마네, 모네, 피카소 처럼 유명한 이름만 알고있지 그들이 그린 그림, 대표작 하나 제대로 알지를 못하니 그쪽으로의 지적 목마름이 심해져 가는 중이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메 그린다'. 일면 유명 화가들이 그린 유명작품을 소개하고, 설명해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딱 내가 찾던 바로 그 책이긴 한데, 대상이 좀 다르다. 서양화가 아닌 동양화, 조선시대 화가들의 생과 그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꿩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신선한 지적 충격을 받았다. 그래.. 내게 부족했던 미술상식은 서양화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양화로 따져보니 이건 더 일자무식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분들도 나와 대동소이 하지 않을까? 그나마 서양화가들에 대해서 조금 알고있는 분들이라도 우리나라, 조선이나 고려시대 유명한 화가들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작품들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아는 분들이 없을터이다.

 

 

 

 

안견, 김홍도, 장승업, 이정, 김명국, 최북, 윤두서, 이징, 김시, 심사정, 허련, 임희지, 신윤복, 김득신, 정선 등 15명의 대가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래는 안견이 그린 역작, <몽유도원도>.

 

 

안견은 신라시대 솔거, 고려시대 이녕과 더불어 우리 민족 3대 화가로 불린다고 한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아니라 반만년 우리 역사를 통틀어 꼽는 3명중에 한명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화가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세종때 안평대군의 후원을 받아 승승장구하다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과 단종이 죽임을 당하고 세조가 즉위하면서 안견의 출세가도도 끝이나고 한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안견하면 떠오르는 일생의 대작, <몽유도원도>도 안평대군과 사연이 깊다. 안평이 하루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도원(桃源)을 보고, 꿈에서 깬후 안견을 불러 꿈얘기를 해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니 이때 탄생한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당시 안평대군은 예술을 사랑해서 재능있는 예술인들을 불러모아 후원하는 낙으로 살았다고 한다. 안평 그 자신도 대단히 뛰어난 글과 그림을 많이 남겼다. 이때 함께 어울렸던 학자들이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등인데 이들은 후에 계유정난때 신숙주가 배신하고 양대군의 편에 서면서 모조리 죽음을 맞게된다.

 

 

김홍도는 풍속화로 유명해서 나는 풍속화만 그린줄 알았다. 그런데 김홍도도 왕실의 도화원에 속해 정조임금의 어진을 그리기도 한 당대 최고의 왕실화가이기도 했다. 후에 정조가 죽은 이후 보수파의 미움을 사서 화단의 중심에서 쫒겨난 이후에는 말년을 비운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돈이 없어 아들의 월사금도 제때 내지 못했고, 끼니를 굶을정도의 가난속에 살다가 조용히 숨을 거뒀다. 위 그림은 <송호도>라는 그림인데 김홍도를 발굴해서 키웠던 스승 강세황과 함께 그린 작품이다. 위에 소나무는 강세황이, 아래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각각 자신의 파트 옆에 이름을 새겼다.

 

 

오래전 영화 <취화선> 속 주인공이기도 했던 장승업. 천재 화가라 알려져있다. 천민 출신으로 종살이를 하다 주인을 잘만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인이 맘먹고 키워준 덕분에 천부적인 재능을 세상에 맘껏 펼치고 살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까칠한 문화평론가 황현조차도 장승업의 그림을 보고 '신품'이라 칭했단다. 고종임금이 소문을 듣고 대궐로 불러 그림을 그리라 했지만,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왕명도 거스르며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에 자아도취되어 술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역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워낙 기인이었고, 신의 재능을 갖고있었기에 혹자들은 금강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설이 민간에 널리 퍼져있다. 위는 장승업의 그림 <호취도>.

 

이 책에 소개된 화가 한명, 한명이 소설같은 생을 살다가지 않은 이가 없으나 마지막으로 이 사람을 소개하지 않을수 없다. 바로 혜원 신윤복. 드라마 <바람의 화원>으로도, 영화 <미인도>로도 소재가 되었던 풍속화가의 대가다. 그때까지 이름높은 화가들은 인물화, 산수화, 매난국죽등을 그리면서 품위를 지켜왔는데 신윤복은 그 틀을 깨고 기생과 서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혜학적으로 그려냈다. 또한 춘화에 가까운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그림도 그려냈다. 그때까지 '사랑'을 그림으로 다룬 이들이 없었기에 '사랑'이라는 소재를 그림으로 표현한 최초의 화가가 아닐까? 아래 그림은 그중에서도 신윤복을 대표하는 그림 <미인도>다.

 

 

그저 이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 미인상을 알수 있는 자료로만 쓰인게 아니라 자세히 뜯어보면 여인의 얼굴표정부터 손짓 하나, 입고있는 옷에서도 당시의 사회상과 유행을 알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화가 신윤복이 남장 여자라는 설이 제법 사실처럼 야사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까 언급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도 문근영이 신윤복 역을 연기했고, 영화 <미인도>에서는 김규리가 신윤복을 연기했다. 두 작품 모두 신윤복이 사실은 여자였을 거라는 설에 기반한 작품들이다. 왜 유독 수많은 화가들중 신윤복만을 여자라고 가정하는걸까? 남자에게서는 도저히 찾을수 없을만큼의 섬세한 붓놀림과 관찰력,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표현이 그를 남장여자로 알려지게 된 계기라고들 한다. 이런 내용은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책에서는 당연 남자로 보고 있다 ^^

 

책 제목 <그리메 그린다>는 무슨뜻일까? 그리메는 그림자의 옛말이기도 하고, '그림에'를 소리나는 대로 읽어 그리메라고 읽을수도 있다. 책 뒷 표지에 나와있는 이 글귀가 제목을 잘 설명해 준다.

"내가 산 것이 그림자냐, 그림자가 나를 산 것이냐?

내가 그린 그림이 그림자냐, 그림자가 나를 그린 것이냐?"

그림자를 그리기도 하고, 그림속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리메 그린다> 기억해 둘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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