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마 - 행복이란
유타 바우어 지음, 엄혜숙 옮김 / 키위북스(어린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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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이가 처음 배운 감정 언어가 happy였다는 것을 생각했다. 아이는 그 단어를 듣고 활짝 웃었다. ‘해피’라는 음의 소리 안에 행복이 담겨 있을까. 무심코, 혹은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 ‘행복하세요’하고 말한 뒤에는 무엇이 뒤따를까. 아니 그 전에,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 그림책 <셀마>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행복이 뭘까, 고민하던 친구가 산 위의 위대한 산양을 찾아가 묻는다. “행복이란 무얼까요?” 그는 어미 양 셀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셀마는 매일 아침 해가 뜨면 풀을 조금 먹고, 한낮이 될 때까지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운동을 좀 하다가 다시 풀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마이어 부인과 수다를 좀 떨다가 밤이 되면 푹 잤다. 평온한 일상이었다. 그런 셀마에게 누군가 묻는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무얼 하고 싶나요?



그러자 셀마는 해가 뜨면 풀을 좀 먹고, 한낮에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운동을 좀 한 다음 저녁이 되면 마이어 부인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거라고 답한다. “그럼 복권에 당첨된다면요?”하는 질문에도 같은 대답이다. 풀을 뜯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운동을 하고, 또 다시 풀을 뜯는 셀마의 일상이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그에게 좀 더 많은 시간과 좀 더 많은 돈은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지금보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지금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겠지, 라는 우리의 막연한 생각을 정면으로 깨트린다. 그런 셀마를 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행복’은 지금보다 시간이 더 많다고, 혹은 돈이 좀 더 많다고 오는 것이 아닌 것. 지금-여기의 어딘가에, 그러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다시 또 반복해도 좋을 일들로 차곡차곡 채우는 것.



긴 말 하지않고, 일상의 영원회귀를 보여주는 셀마의 행복 철학 덕분에 오늘 새벽이 귀하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읽고 싶은 책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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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1학년 수학 교과서 1-2 - 전3권 마음이음 핀란드 수학 교과서
마아리트 포슈박 외 지음, 마이사 라야마키-쿠코넨 그림, 이경희 옮김 / 마음이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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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진짜 초등학생! 제가 초등학교 가는 것보다 은근 더 걱정되고, 긴장되기도 하는지라 아이와 마음먹고 수학 문제집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문제집은 ‘핀란드 1학년 수학 교과서’예요. 선배 언니가 좋다고 추천해 준 문제집이기도 했고, ‘1학년’이라고 크게 딱 못 박혀 있는 것도 왠지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교과서’라니! 학교 갈 생각에 설렘만 가득한 우리 예비초딩이에게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과서’답게 학기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는 1학년 2학기를 선택했어요. 1학년 1학기 문제가 너무 쉬울 거라 생각했다기보다, 1학년 2학기가 너무 궁금했던 마음. 그런데 이 책의 백미는 다른 데 있었어요. 놀이 수학과 탐구 과제! 아래 사진의 페이지 수 보시면, 놀이 수학과 탐구 과제가 다른 과정 사이사이에 끼어있어요. 초등 저학년에게 연산은 아주 중요하지만, 연산만이 수학은 아니죠! 홀수-짝수 놀이, 시계 놀이, 시간표 놀이, 주사위 놀이, 돈 쓰기 놀이 등을 통해서 생활 속 수학을 접해보기도 하고, 게임을 통해 수와 더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일 것 같아 기대되었어요. 


채니는 20까지의 더하기-빼기를 더듬더듬해 나가는 수준인데, 어떤 문제는 아주 쉽게 어떤 문제는 모르겠다며 몸을 배배 꼬았어요. 어제의 난관은 친구들이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 문제였고, 오늘은 시계였는데요. 500원짜리 2개와 100원짜리 2개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야?라고 묻지 않고, a는 500원짜리 2개를 가지고 있고, b는 a보다 200원이 더 많아- 하는 형식으로 묻고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그렇게 6명이 가지고 있는 돈을 묻더라는!)(아래-오른쪽 사진 참고하세요) 마치 추리게임하듯 연산을 해볼 수 있었거든요.


시계는- 30분이 지나면 몇 시일까요?를 질문으로 하는 미로 찾기에서 헤매길래 한참 설명해 줬는데요. (2시에서 2시 30분으로는 갈 수 있지만, 2시 30분에서 3시로 가기는 너무 힘든 것…)(하아) 그 앞 페이지에 채니가 혼자 해둔 시계 문제를 살펴보니 아이에게 어떤 개념이 부족해서 어려웠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오늘 다시 한번 해보자 u_u …)

 


무엇보다 재미있게! 질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수학과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어떻게 하면 그게 될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채니에게 익숙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이 책이 신선한 자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핀란드 수학 교과서를 따라, 수학 놀이도 많이 해보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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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를 따라
정지원 지음, 강순석 감수 / 필무렵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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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보여주는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가벼운 마음으로 연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그 가벼웠던 넘김이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깊숙한 곳으로 나를 침잠시킨다.



이 그림책 <물줄기를 따라>는 제주 강정마을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깨진 바위 앞에서 "멋지다"고 생각한 주인공 앞에 알 수 없는 소녀가 나타나 주인공을 이끈다. 소녀가 보여주는 것은 사라진 녹나무숲, 무너진 바위, 깎여나간 땅, 떠나는 원앙이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소녀의 표정이 비장하다. 그제야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강정마을'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의 '강정마을'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동안은 자주 뉴스에 등장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자연스레 관심이 옮겨지고, 마침내는 잊혀진다. 그렇게 잊혀진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을 생각하니 아득하다. 그런 일이 과연 '강정마을' 뿐일까. 소녀를 따라가며 만났던 많은 장면들은, 말이 없어 외려 많은 것들을 말하게 한다.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좀 더 부지런해져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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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된 문장가, 최치원 - 최치원전 처음부터 제대로 우리 고전 4
김경희 지음, 하민석 그림 / 키위북스(어린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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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이와 재미있게 읽었던 키위북스의 ‘처음부터 제대로 우리 고전’ 시리즈의 신간이 나왔다. 이번엔 ‘최치원’의 이야기. 최치원이라니,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인물이었던가, 그가 뭘 했었지? 하고 뒤적여보니 <계원필경>을 쓴 사람이란다. 아, 계원필경이라면 들어봤지! 그런데 그게, 무슨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더라?




1. <최치원전>은 통일신라 시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지은 소설이다. 역사 속 최치원 역시 <최치원전>속의 그처럼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격문을 지었으며 나중에는 가야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외의 부분에서는 실제와는 달리 ‘이야기’로 쓰였다고. 그도 그럴 것이 후기 통일신라 시기에 살았던 최치원이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기 어려웠을 것이고, 남아있는 기록이란 열두 살이 되던 해인 868년에 홀로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장원으로 급제한 일이 있다-정도일 텐데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대로서는 정말이지 흔치 않았던 해외 유학생이었고, 그곳에서도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고 국내로 돌아왔으니 그의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린 것은 당연할 터. 호기심과 시기심, 또 알게 모르게 있었을 텃새에 밀려 결국 그는 이것저것 국내 정치를 위해 시도해 보다 가야산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 실제 <최치원전> 원문은 어떤지 모르나, 이 책은 초등 저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쉬우면서도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외로운 천재였던 최치원이 홀로 강자와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 또 그 싸움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읽어냄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 속 최치원의 유년기가 얼마나 기구한지. 그럼에도 이 아이는 또 얼마나 당당한지!)



“너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구나. 아직 나이가 어린데 당나라에 가서 잘 할 수 있겠느냐?”


“그렇사옵니다. 만약 나이가 많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왜 돌함 속의 물건을 알아내지 못하고 저 같은 어린아이에게 시를 짓게 하였답니까?”


치원의 대답에 임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치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나라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신라가 당나라보다 크기가 작다고 무시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임금께서는 아무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오호, 듣던 대로 기개가 대단하구나! 그래, 당나라 황제가 무섭지 않느냐? 황제를 만나면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어른이 어른다운 행동을 해야 아이 또한 어른을 공경하고 섬길 것입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큰 나라라고 섬김을 받을 생각만 하고 하는 짓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돌함 하나 보내고 꼬투리를 잡아 작은 나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당나라가 큰 나라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작은 나라를 대접하지 않는데 어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겠습니까? 저는 이런 뜻으로 황제를 대하겠나이다.”


(‘신선이 된 문장가, 최치원’ 중에서)



그렇게 그는 다사다난했던 자신의 유년기와 가까스로 얻은 아내를 반도에 두고 당나라로 떠난다. 그가 떠난 뱃길은 때로 판타지이기도 했고, 때로는 영웅담이기도 했다. 누구 앞에 서더라도 늘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최치원의 태도에서 무엇이 그의 어깨를 저리도 당당하게 펼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이 책을 함께 읽는 우리 아이도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거듭 바랐다.



3. 최치원을 몰랐기에,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최치원의 글을 찾아서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책에 중간중간 드러난 그의 문장들은 가히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특히 최치원의 아내 운영이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지은 시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을 울렸다.



백조는 쌍쌍이 짝을 지어 구름 속을 나부끼고


외로운 돛단배는 가다가다 푸른 하늘에 닿는구나.


이별 술에 노래 곱건만 기쁜 생각 전혀 없고


오랜 세월 등불 앞에 이내 시름 쌓이리라.



밤마다 동방에서 괴로워 말고 시름하지 마요.


꽃처럼 고운 얼굴 상할까 두렵소.


이번에 가면 공명을 마땅히 가져와서


그대와 함께 부귀 누리며 즐겁게 살리라.



4. 앞으로도 기대되는 ‘처음부터 제대로 우리 고전’ 시리즈! 매번 아이와 함께 읽으면서 엄마가 훨씬 더 큰 인사이트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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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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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향'은 이름이자 단어이며, 강한 힘을 지닌다.


마법사가 외는 어떤 주문보다도


혹은 영혼이 응하는 어떤 주술보다도 강하다. 찰스 디킨스



0. 한동안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파친코>를 드디어 읽는다. 이미 모두가 다 읽은 것 같아, 에이 다음에 읽지 뭐 하고 지나쳤는데 감사하게도 인플루엔셜에서 <파친코> 1권을 보내주셨다. 소설은 소문대로 몰입감이 상당했다. 1권만 해도 볼륨이 꽤 되는데, 그럼에도 순식간에 읽혔다. 최근 공부모임에서 일제 강점기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소설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선자의 이야기는 비단 개인의 것이기보다는 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1. 소설의 도입부,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작을 부쳐먹던 땅 주인이 땅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나마 짓던 농사마저 짓지 못하게 된다. 딸이 줄줄이 넷이나 되었는데, 그중 가장 어렸던 양진은 너무 어려서 불평할 줄 몰랐고, 그나마 제일 적게 먹기 때문에 떠넘기기가 쉬웠다. 그렇게 양진은 열다섯에 시집와 선자를 낳았다. 선자는 양진 부부의 기쁨이었고, 희망이었다.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란 선자는 누구보다 곧았고, 당당했다. 꽉 찬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품은 그녀를 빛나게 했다. 한수도 그 즈음 만났다. 선자에게 사랑은 아프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이삭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삭은 모든 것을 품어주겠노라 했다. 선자는 그런 이삭이 고마웠고, 절대로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선자의 삶은 늘 고단했으나, 그 사이 어딘가에 꼭 숨 쉴 구멍이 있었다. 스스로는 빛날 데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숨길 수 없는 빛이 은은하게 늘 새어 나왔다.



2. 선자의 서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당대 사회상은 '그때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았다. 조선인들이 사는 빈민가인 이카이노가 그랬고, 목욕탕에 갈 곳이 없어 넝마를 걸치고 신발도 없이 다니니 시장에서 짐꾼 일도 못하는 조선인들이 그랬다. 두 사람이면 족할 방 한 칸에서 열댓 명이 살면서 남자들과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잠을 자기도 일쑤였다. 더러워서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더러웠다. 하지만 더러웠기에, 그들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이카이노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마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판잣집들은 하나같이 조잡한 자재로 형편없이 지어져 있었다. 현관 입구 계단을 물청소하거나 창문을 닦아놓은 곳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 외관이 수리도 못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엉겨 붙은 신문지와 타르지를 창문 안쪽에 붙여 가렸고, 갈라진 틈을 막으려고 나무 쐐기를 박아놓았다. 함석지붕은 대체로 녹슬어 구멍이 나 있었다. 집들은 싸구려나 주운 재료로 거주자들이 직접 지은 것처럼 보였다. 오두막이나 천막보다 더 튼튼해 보이지도 않았다. 연기가 임시변통으로 만든 강철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봄날 저녁 치고는 따뜻했다. 누더기를 반쯤 걸친 아이들이 골목에서 잠든 술 취한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요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관 계단에서는 작은 남자아이가 똥을 누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163쪽)



3. 선자의 아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랐지만 일본인일 수 없었다. 본토 아이들보다 일본어를 더 잘 말하고 잘 써도 그랬다. 노아는 스스로가 조선인인 것을 숨기려 했다. 그렇게 자란 것이 비단 노아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자이니치들의 얼굴 없는 형상이 떠올랐다. 그들은 조선에서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인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4. 선자의 남편 이름은 이삭, 이삭의 형은 요셉이다. 아이들의 이름은 각각 노아와 모자수(모세)라 지었다. 소설 속 이삭의 직업이 목사이고, 목사 가족의 이야기이니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가 배제되기 어려웠다. 이삭이 선자를 받아들일 때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지 묻는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선자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한다.



창세기 속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다. 이삭 역시 비슷한 고초를 겪는다. 성경 속에서 이삭에게 어떤 선택권도 없었던 것처럼, <파친코>의 이삭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고됨을 모두 견뎌낸다. 그렇게 소설은 자녀를 통해, 자신의 삶을 통해 계속된 신앙고백을 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사회상과 기독교가 맞물려 <파친코>는 묘한 힘을 뿜었다. 그것은 사랑이자 용서였고, 인내와 끈기였으며 충성과 헌신이었다.



5. 주문한 2권은 오늘 온다. 오늘 밤에 신나게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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