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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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향'은 이름이자 단어이며, 강한 힘을 지닌다.


마법사가 외는 어떤 주문보다도


혹은 영혼이 응하는 어떤 주술보다도 강하다. 찰스 디킨스



0. 한동안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파친코>를 드디어 읽는다. 이미 모두가 다 읽은 것 같아, 에이 다음에 읽지 뭐 하고 지나쳤는데 감사하게도 인플루엔셜에서 <파친코> 1권을 보내주셨다. 소설은 소문대로 몰입감이 상당했다. 1권만 해도 볼륨이 꽤 되는데, 그럼에도 순식간에 읽혔다. 최근 공부모임에서 일제 강점기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소설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선자의 이야기는 비단 개인의 것이기보다는 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1. 소설의 도입부,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작을 부쳐먹던 땅 주인이 땅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나마 짓던 농사마저 짓지 못하게 된다. 딸이 줄줄이 넷이나 되었는데, 그중 가장 어렸던 양진은 너무 어려서 불평할 줄 몰랐고, 그나마 제일 적게 먹기 때문에 떠넘기기가 쉬웠다. 그렇게 양진은 열다섯에 시집와 선자를 낳았다. 선자는 양진 부부의 기쁨이었고, 희망이었다.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란 선자는 누구보다 곧았고, 당당했다. 꽉 찬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품은 그녀를 빛나게 했다. 한수도 그 즈음 만났다. 선자에게 사랑은 아프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이삭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삭은 모든 것을 품어주겠노라 했다. 선자는 그런 이삭이 고마웠고, 절대로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선자의 삶은 늘 고단했으나, 그 사이 어딘가에 꼭 숨 쉴 구멍이 있었다. 스스로는 빛날 데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숨길 수 없는 빛이 은은하게 늘 새어 나왔다.



2. 선자의 서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당대 사회상은 '그때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았다. 조선인들이 사는 빈민가인 이카이노가 그랬고, 목욕탕에 갈 곳이 없어 넝마를 걸치고 신발도 없이 다니니 시장에서 짐꾼 일도 못하는 조선인들이 그랬다. 두 사람이면 족할 방 한 칸에서 열댓 명이 살면서 남자들과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잠을 자기도 일쑤였다. 더러워서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더러웠다. 하지만 더러웠기에, 그들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이카이노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마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판잣집들은 하나같이 조잡한 자재로 형편없이 지어져 있었다. 현관 입구 계단을 물청소하거나 창문을 닦아놓은 곳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 외관이 수리도 못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엉겨 붙은 신문지와 타르지를 창문 안쪽에 붙여 가렸고, 갈라진 틈을 막으려고 나무 쐐기를 박아놓았다. 함석지붕은 대체로 녹슬어 구멍이 나 있었다. 집들은 싸구려나 주운 재료로 거주자들이 직접 지은 것처럼 보였다. 오두막이나 천막보다 더 튼튼해 보이지도 않았다. 연기가 임시변통으로 만든 강철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봄날 저녁 치고는 따뜻했다. 누더기를 반쯤 걸친 아이들이 골목에서 잠든 술 취한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요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관 계단에서는 작은 남자아이가 똥을 누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163쪽)



3. 선자의 아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랐지만 일본인일 수 없었다. 본토 아이들보다 일본어를 더 잘 말하고 잘 써도 그랬다. 노아는 스스로가 조선인인 것을 숨기려 했다. 그렇게 자란 것이 비단 노아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자이니치들의 얼굴 없는 형상이 떠올랐다. 그들은 조선에서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인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4. 선자의 남편 이름은 이삭, 이삭의 형은 요셉이다. 아이들의 이름은 각각 노아와 모자수(모세)라 지었다. 소설 속 이삭의 직업이 목사이고, 목사 가족의 이야기이니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가 배제되기 어려웠다. 이삭이 선자를 받아들일 때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지 묻는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선자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한다.



창세기 속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다. 이삭 역시 비슷한 고초를 겪는다. 성경 속에서 이삭에게 어떤 선택권도 없었던 것처럼, <파친코>의 이삭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고됨을 모두 견뎌낸다. 그렇게 소설은 자녀를 통해, 자신의 삶을 통해 계속된 신앙고백을 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사회상과 기독교가 맞물려 <파친코>는 묘한 힘을 뿜었다. 그것은 사랑이자 용서였고, 인내와 끈기였으며 충성과 헌신이었다.



5. 주문한 2권은 오늘 온다. 오늘 밤에 신나게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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