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명상여행
박남식 지음 / 솔과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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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뭐 별거나 싶어져 버렸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낯선 그 여행지와 무엇이 다른고... 란 생각이 들어버렸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허물없던 학창시절 내 삶을 알고 있는 이는 하나 없는 곳,

길을 걷다 우연히 옛 애인은 커녕 동창조차 만날 수 없는 곳,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을 필요가 없는 곳,

집을 나서면 내 20여년 기억에선 볼 수 없었던 파랗고 하얀 구름과 멋들어진 산이 눈 앞에 펼쳐지는 곳,

모르는 길도 아직 많고 길을 걷다보면 어디선가 짠내음 물씬 풍겨 오는 곳,

조금만 부산을 떨면 바닷가에 앉아 하세월 할 수 있는 곳,

하늘보며 온천을 할 수 있는 곳

 

어느 시인은 늙어지면 이 곳 속초에 와 살고 싶다했는데 나는 벌써 와 살고 있다.

아직 3년도 채 되지 않아 종종 바캉스 온 듯 기분낼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도 그곳에서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일상의 삶이듯 내 지금 이 삶은 일상인 듯 여행인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이방인 느낌 역시 지역주의 강한 우리나라에선 고향이 아닌 타지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방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어느 블로거가 여행준비에 제일 처음은 환상을 갖는 것이라 하더라. 그러나 환상을 갖기엔 지금 이곳에 대한 환상도 체 가시지 않았나보다. 떠나고 싶다는 그 마음을 가만히 한쪽에 모셔둔다.

 

인도, 티벳..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같다.

그리하여 덥석 들게 만든 책 '나비의 명상여행'

'나비' 박남식님의 인터넷 아이디란다. '나비'와 '흑나비' 나를 끈 이유 하나 더...

 

그러나...

아쉽다. 환상을 쌓거나 내 등을 떠밀기엔 조금 미약해 보이는 탓에 미안하고 안타깝다. 속삭이듯 서툴게 쓰인 글(동어반복)들은 흡사 나비님의 일기를 엿보는 듯도 하지만 금방이라도 보따리를 싸게 만들지는 못한다.

 

바람 산들 불고 따사로운 햇빛 아래 앉아 읽노라면 잠시 그곳을 다녀온 듯 하게 해 주기는 하겠다.

그러나 고개들어 하늘보면 티벳하늘만은 못하더라도 그만하지 않을까 싶은 속초하늘이 어쩌면 더욱 감명을 줄여버렸는 지 모른다. 회색 빌딩 가득에 끈적이는 후덥지근함 가득인 대구였다면 혹 또 모르겠지만...

 

기대가 커서였을런지도 모른다. 책표지에 '시간을 자유롭게 나를 위해 쓰라' 라는 말알이 해일처럼 내 가슴에 파고 든 탓에 그 뒤에 이어진 말알들의 영향력이 확 줄어들어버린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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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 이야기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지음, 김수진.조일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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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부녀다.
'유부남'이나 '유부녀'나 이미 임자(?)있는 몸
그럼으로 '접근시 유의바람'이란 딱지가 붙은 몸이다.
자유를 담보로 안정을 대출받은 자들.
그러나 모든 빚들이 그렇듯 이자 갚기만도 허덕이고 담보를 되찾고자 발버둥도 쳐보고..
그러다 자포자기 심정이거나 '요즘 빚 안지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그나마 담보라도 있고 대출받은 자금으로 편안히 사니 다행이지'하는 스스로의 합리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아무튼 그런 내 생각에 동병상련같은 책이라 집어들었다.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196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생(生)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덕인가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단어가 주는 오묘함을 입안으로 오물거리며 작가에게 이유없는 호감을 하나 던져주고 시작한다.
그래서인가 외국소설은 쉬 읽히지 않고 이해도 잘 안되던 내가 무척이나 재미나게 읽어내려간다.
 
하루하루가 같다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일들이 생기는 것처럼, 제목은 하나지만 각 편마다 독립된 이야기구조로 전개되는 시트콤처럼..
하루하루(그게 오늘, 내일이라는 연속선상에 놓인 하루하루인지는 알 수 없고 또 중요치도 않지만) 주인공의 이야기들은 유주얼서스펙트가 생각나게끔하는 반전으로 짜릿한 미소를 준다.
그러나 어쩌면 결국 또 다시 스스로의 합리화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아니, 단도직입이라는 표현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권선징악>인 듯한 결말이 조금 찜찜하지만, 세상엔 완전한 악도 완전한 선도 없다는 불완전한 인간성을 그나마 따스히(?)보듬어주며 전개되는 지라 크게 거부반응은 없다. - 어떻게 보면 이런 게 더 무서울 지 모르겠다. 은근슬쩍 스며들어 내 머리 속에 권선징악, 일반적 상식들을 '거봐, 맞잖아, 그러니까 너두 상식적으로 살아.'해 버릴지도 모르니까(말하고보니, 두렵네. 괜히 읽었나 --;;)-
 
유부남 가슴 속에 '바람' 잘 날 없다!?
 
한끝 차이로 자꾸 비껴가는 삶,
마음껏 소리지를 수조차 없는 마음의 감옥,
여기 이곳을 탈출하고 싶은 유부남들의 소심한 점프샷!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일한 오디세이는 결혼인가?
불륜은 잠깐의 휴식일 뿐인가?
만일 당신이 결혼이라는 모험에 뛰어들려고 하거나
불륜의 파도에 몸을 맡기려 한다면
이 책은 편안한 술친구 같은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책 뒤편에 쓰여진 이 문구가 정말 적절한 소개인 듯 하다.(그러자고 적은 거겠지만 ^^;;)
"편안한 술친구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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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 세계의 젊은 작가 9인 소설 모음
올가 토카르축 외 지음, 최성은 외 옮김 / 강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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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축전 '2006서울, 젊은 작가들'이란 대명제 아래 폴란드, 아르헨티나,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칠레, 스웨덴, 멕시코, 헝가리, 체코 의 젊은 작가들이 한곳에 모였다.
 
우선 제목이 끌리지 않는가? '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아이러니, 혹은 뫼비우스의 띠같은 제목...
 
이 제목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축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액자식 구성으로 C라는 주인공이야기와 그 주인공이 읽는 추리소설이 제시되어지는데 후반부에 이 두 이야기가 서로 얽히면서 혼란스러우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만약 이러한 형식이 영화에 차용된다면 어떨까 읽으면서 상상해보았다. 영화를 보던 내가 영화 안으로 들어가 살인을 저지르고 영화밖으로 나온다. 영화 안의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종잡을 수 없는 범인을 찾아헤매고 두려움에 떤다. 그것을 다시 화면 밖에서 감상하는 관객, 곧 나, 곧 살인범...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지 않는가? 이런 기법으로 인하여 이 단편은 첨단의 작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생각한다. 책 제목으로 이 단편의 제목을 내건 것도 그만큼 이 단편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가 뒤이은 단편들은 또렷히 무릎을 치게 만들진 않았다. 아무래도 외국소설은 감성과 생활환경의 차이 탓에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문장 역시나 익숙하게 이어지지 않는 번역체들이라 읽고 난 뒤에도 머리 속에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잘 없다.

그러다 다시 기억에 담긴 단편은 스웨덴 작가 레나 안데르숀의 '정상회담'이다.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권력가이다. 대통령, 총리 등.
그러나 사회적 권력보다는 개인적 권력, 친구사이 연인사이 가족사이 일상적 관계에서도 언제든 적으나 많으나 권력은 존재한다는 내 생각을 기반에 둔다면 이 소설에서 권력자가 본인이 지닌 권력을 인식하지 못한 채 휘두르는 권력과 권력 아래에서 순응하며 따르는 비권력자의 모습을 나는 본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이 워낙에 당연한 것이라 권력이라 인식조차 못한 채 때론 자만으로 때론 이중성으로 권력자가 되고 비권력자는 때론 무능하게 때론 자포자기로 때론 사랑으로 권력자에 응하고 그 모습에서 나는 권력자가 되었다가 비권력자가 되었다가 하며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마음이 떨려온다. 그는 나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점점 크고, 점점 흐트러지게 그림을 그리더니 갑자기 멈추고는 나를 낯선 사람인 듯 바라본다.
그의 이런 양면성에 나는 익숙해지고 있다. 아프다. 그는 주자마자 다시 가져가버린다. 아니면 우리의 사랑을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의 인과 개념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가벼운 그림자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바로 그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로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니 그냥 내버려둔다.
 
이 외에도 '정상회담'에서 발견되는 몇몇 문장들은 나를 재밌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나는 잠들어 잔다.
나는 깨어나서 깬다.
 
와 같은 문장. 내가 행하는 행위들을 내가 아닌 남이 행하고 있는 듯 무심히 바라보는 느낌의 문장. 나를 객체화시키는 문장. "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인가" 언제나 '나'의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게 이 문장은 비록 회피라 느끼면서도 평안을 준다. 또한 나의 어깨를 도닥여도 준다.
 
"일상생활 속의 귀납법도 그래. 텔레비전에서 철학자가 얘기하는 걸 들었어. 자기가 보는 모든 까마귀가 검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했어."
 
까마귀가 전부 똑같은 색이든 아예 무색이든 상관없다. 그가 내게 기대어올 때, 내게 다가앉아 머리를 헝클어뜨려줄 때,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 그의 논리에 맞서려는 마음 속의 반박들은 그의 커다란 불 속에 작디작은 물방울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술기운에 이마께가 뜨끈거린다. 우리는 호텔로 간다. 이불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서로의 냄새를 맡는다. 그는 아름다운 말을 속삭이고 나의 애정은 샘솟는다.
 
(옮긴이 : 기영인-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석사, 영국 요크 대학교 문학석사)
 
문득 오래전 드라마 '거짓말'에서 성우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랑을 하면서 강한 사람은 없어.  사랑을 하면 모두가 약자야.  상대에게 연연하게 되니까.  그리워하게 되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버텨지지 않으니까.  우린 모두 약자야."

책 표지가 썩 미묘하다. 반짝이는 흰색 어쩌면 은색인 표지는 햇빛아래 놓이면 금색으로 보인다. 사진으로 그 색을 찍어 올리려 하였으나 사진에선 언제 금색으로 변했더냐는 듯 도로 흰색이 되어 있다. 어쩌면 은색또한 찍히지 않는다. 직접 눈으로만 확인 가능한 표지의 색은 보고 싶으면 사서 보라는 도도한 유혹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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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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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눈에 막귀에 막입이라 나 스스로를 말한다.
며칠 전 시에서 열리는 종합예술제에 갔다가 자주 얼굴을 본다며 알은 체를 해 오는 이에게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라고 답했다. 그 사람은 "그러시면 함께 참여하시지요?"하고 제안했다. 나는 "재주는 없어서요"라고 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겐 다른 이의 작품을-영화든 연극이든 책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평가할 재주는 없다. (물론 만들 재주는 더더욱 없다.)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보기를 읽기를 듣기를 좋아한다. 처음엔 재주없는 내가 조금 부끄럽고 싫었다. 막눈에 막귀에 막입이라는 말이 자조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작가, 작품, 관객 이 세박자가 어우러질 때 작품이 작품다워지는 거 아니겠냐고 작품을 보아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작품이 더욱 빛나는 것 아니겠냐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내 몫에 충실하자고 나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이런 변명과 안전망을 약간 비겁하지만 바탕에 깔고) 나는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 '센티멘탈'에는 총 4개의 단편들이 있다.
청수淸水, 다카세가와, 추억, 얼음 덩어리
그 중 추억과 얼음덩어리는 내겐 산뜻한 충격이었다.
옮긴이(양윤옥)의 말을 빌자면 "추억'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시어들을 낱낱이 해체하여 단순히 여기저기에 흩어놓은 듯이 보이지만,-실로 이 부분에서 나는 당황했다. 페이지 하나에 적게는 3단어가 흩뿌려져있고 그러한 페이지가 무려 45페이지나 이어져있다.-실은 여기에도 공들인 트릭이 숨어 있으니,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치채지 못한 독자분께서는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보아 꼭 발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란다."라고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발견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수준이다. 누군가 발견의 기쁨을 내가 발견하기 전에 발견한다면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얼음덩어리'는 한 페이지를 두 단락으로 구분지어 소설이 적혀있다. 처음에는 왼쪽단락을 읽고 오른쪽 단락으로 넘어가면 되는 것인 줄 알고 그저 새로운 형태의 편집법이려니 했다. 그러나 양 단락의 이야기는 독자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동일한 사건을 지녔으나 왼쪽 단락은 A라는 주인공의 시선이고 오른쪽 단락은 B라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왼쪽 단락만을 읽었을 땐 시간이 좀 걸리던 것이 오른쪽 단락을 읽을 땐 30분도 채 걸리지 않고 빨리 읽혔다. 우리가 어딘가를 찾아갈 때 갈 때는 오래걸리지만 올 때는 금방 오는 것처럼 이미 익숙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전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쨋거나 그런 단락 구분의 전개 역시 무척이나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문득 '냉정과 열정사이'가 이런 식의 전개방식으로 쓰여진 책이였다면 훨씬 재미있었지 않았을 까, 훨씬 잘 읽혔지 않았을 까 싶었다.(더욱 놀라운 것은 중간 중간 두 이야기가 만나 한 문장을 이루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 두 주인공이 공유하게 되는 시간, 기억들)
 
나는 이 두 단편만으로도 이 작가가 '천재'라고 불리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뭐, 물론 다른 작가가 이미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게는 처음이었으니까 ^^;;
 
이외에 청수淸水나 다카세가와도 내용면에서 우수했다.
 
개인적인 말알 두개
 
1. 소년은 어린애처럼 쉽게 흐트러지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도 자신은 항상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그 부주의한 독백을 서둘러 정정했다.
 
2. 그렇지만 기왕이면 작고한 사람의 작품과 눈싸움을 하는 것보다, 아직 그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현역작가와 직접 교류하며 그 작품을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책을 사들일 때 이와 비슷한 심정이다. 어떤 이들은 명작은 몇 십년 혹은 백여년전에 소설들이라며 칭송을 마다치 않지만 나는 나마저 그렇게 과거의 작가와 작품에 매달려 현재의 작가와 작품을 등한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내 기준에서... 다독(多讀)을 하지 못하는 나로썬 과거의 책과 현재의 책 모두를 읽어내는 건 좀 버거웠거든 ^^;;)  물론 칭송받는 책들 역시나 팔려나가며 현재의 출판업자들에게 이익을 주겠지만 그러한 이익보다 중요한 이익을 창출해주고 지지해주며 지금 내가 나가야 할 바는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거는 이들, 그리하여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들, 그들의 재능 그것이 빛나고 인정받기를 더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사들인다고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 어쨋거나 오늘 이 땅에 선 우리가 바로 명작이며 역사가 아니겠는가)


'일본','일본인'이라는 것이 묘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월드컵을 응원하고 흥겨워하지 않으면 매국노나 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 팽배한 당연함에 나도 모르게 세뇌당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다른 외국 소설에 비하면 일본 소설이 잘 읽히며 이해하기도 쉽다. 아마도 정서가 비슷한 탓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소설과 우위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일본소설이 좀더 몽환적이라는 내 주관적인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좀 더 몽환적이라는 것이 좀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닐테니까)

도 모르게 내면화되는 환경의 영향을 깨닫게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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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8-2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은, 마지막 두 페이지의 전체 문장을 바탕으로 단어를 뽑아내서 새로이 앞 글을 만들었다는 게 트릭인 것 같습니다. 앞 페이지들에 흩뿌려진 단어의 위치가 마지막 두 페이지와 정확히 겹치거든요.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셨는지? 제 경우엔 이 단편집이 가장 떨어진다는 판단입니다만.

흑비 2006-09-07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봤군요. 아무튼, 실은 다른 소설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평이 있더군요. 이 단편집이 가장 떨어진다는... 다른 소설들도 찬찬히 훑어볼 계획입니다만.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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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흥분했다. 막 책을 덮은 지금 박수를 치고 싶다. 그것도 일어서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흔히 남녀관계에서 '골키퍼' 운운하는 걸로 미루어 축구를 이야기 소재로 삼은 작가의 의도가 파격적으로 새롭진 않지만 어렵고 진지한 주제를 대중적으로 풀어나가기에는 절묘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소재뿐만 아니라 문체 역시나 내내 유쾌하게 잘도 이끌어가고 있는 작가의 실력은 세계 문학상 당선이 아깝지 않다. (후에 참고자료를 보니 그의 노력이 대단하다.)
 
근 한달가량 광고를 얼마나 해대는지...
처음엔 너무나 상업적인 멘트에 눈을 돌렸다가 저 정도 극성이면 뭔지 한번 봐주자 싶어 구입했다.
구입하기 전에 우연히 어떤 이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이 소설에 대한 그의 세계관을 보게 되었는데 뜨악 싶었다. 극우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블로그에서 이 소설은 앞뒤 따질 것도 없이 바람핀 '년'들은 모두 잡아죽일 '년'이 되어 있었다.
 
책을 읽다 그가 책을 읽기나 하고 그런 이야길 써 놓은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오히려 과거 첩제도로 공공연히 인정되었던 '남편이 결혼했다'를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도 있건만, 하긴 워낙에 극우적이였으니 그런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좋게 생각해준다면 바람피는 '놈' 역시나 잡아죽일 '놈'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사고가 아메바 수준이지만, 그 블로그 주인 덕택에 자책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생각보다 괜찮다. 요소요소 진보적 시각을 어렵지 않게 풀어두고 있는 것도 그렇고... 축구와의 절묘한 만남은 소설이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내가 산 수많은 책 중에 유일하게 극비가 읽기 시작한 책이다. 축구를 워낙에 좋아한 탓인가. 재밌다는 게 그의 반응이다. 어젠 한 20장 읽더니 눈이 감기긴 했지만. 지켜볼 일이다. 끝까지 다 읽을 것인지... 아마 평소 내가 한 얘기도 있고 해서 그리 파격적이라 생각진 않을 듯 하다. 므흣~
(퇴근 후 집에 가니 내가 잠들고 난 뒤에도 책을 읽었다며 짚어주는 데 꽤나 많은 분량을 읽었더라. 한다는 말이 나랑 똑같은 말을 하는 여자가 책 속에 들어앉았는데 열받아 한대 쥐어박아 주고 싶더라나. 어찌 그래두 읽었냐니 어떻게 되냐 한번 보자라는 심보로 읽었단다. 그래도 외면하지 않으니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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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송 모프로그램 작가 덕분에 이 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케 되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관계로-생각보다 내 머리가 많이 나쁘다- 먼저 결혼한 남편을 남편 1, 나중에 결혼한 남편을 남편 2, 여자주인공을 아내라고 하기로 한다.)

모방송 모프로그램 작가가 물었다. 남편1(혹은 남편 2일지도 모른다)이 아내를 사랑한 게 맞냐고. 자기 생각에 사랑이 아닌 것 같다고.. 나는 오히려 남편 1(혹은 남편 2일지라도)은 아내를 사랑한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남편1(혹은 남편2)을 사랑한 게 맞냐고 묻는다면 그건 맞다고 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라면 두 집 살림에 눈물콧물에 열심으로 살기가 힘들어 하나를 포기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힘든 것들을 다 안고 가면서,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라 애쓰는 그것도 아내 나름의 사랑이겠다. 인정은 된다. 쉽지 않은 일일텐데도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모습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 내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랑이 많지 않나 싶다. 가장 들기 쉬운 예로 동성애가 있을테고...(혹은 이혼 후 재혼, 이혼, 재혼의 반복된 사랑도 있을테고, 독신, 한부모가정 기타 등등 모든 사랑구성체들을...)

또 하나, 남자가 시앗을 두는 것은 크게 이슈가 되지도 않는 세상이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가져다준 파격에 비교하자면) 그런 면에서 '아내가 결혼했다'가 단순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이야기로 전개되기 쉬운 것 같고...

맘에 들지 않고 이해되지 않지만 내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또 한 사람으로 그 존재를 인정하여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라는 유토피아를 향해 나가는 전초의 '다양성의 인정'차원으로 이 소설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여전히 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내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한 모든 노력들은 옳은 것임을,우리의 모든 이유들은 다 옳은 것임을 믿는다.
그것은 애쓰고 애쓰는 마음,기도하는 마음...살아내고자 애쓰는 모든 관념은 아름답다.

 라는 어느 블로거의 글을 빌어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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