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 - 라즈니쉬의 달마어록 강의
오쇼 라즈니쉬 / 정신세계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달마어록을 읽어보기로 한 것은 라즈니쉬가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 류시화씨가 번역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불교 서적들이 대체로 딱딱하고 공허한 측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저 불교에 대한 지식채득을 위해서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라즈니쉬의 더 많은 책들을 읽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받아서 번역자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상당한 호기심이 자극되었다. 류시화씨가 라즈니쉬 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과 인도 여행 중에 꿈속에서 라즈니쉬가 집어던진 책에 놀랐고 한국에 돌아와서 달마어록 재 번역을 의뢰 받았다는 이야기 등에서 흥미가 많이 자극되었다.


도입부에서 달마의 기록이 또한 상당한 흥미로 다가왔다. 불교도들이 아닌 일반인들이야 그저 달마도를 보고 달마라는 스님이 살았구나. 그정도 생각하는데, 달마의 일생과 영혼의 깊이를 읽고 새삼 나의 무식을 자책하였다.


달마어록은 초판이 1992년 7월에 나왔으니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넘는 세월이다. 그런데도 이제야 달마어록을 접하게 되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책의 모양을 보니 초판모양 그대로 정신세계사에서 출판되는 것 같다. 혹시 책이 잘 팔리지 않아서 절판되는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달마어록은 책 분량이 무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 처음보면 두께에 주눅이 들것 같지만 조금만 읽어보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고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시간 가는줄모르고 읽을 수 있었으며 책이 두꺼워서 읽을 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달마의 혜안과 라즈니쉬의 적절한 많은 예에 의한 설명으로 흥미가 배가되었다. 이 책을 읽고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좀더 알수 있게 되었다. 선불교를 좀 깊이 있게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 같았는데 많은 예문과 설명으로 쉽게 수긍이 갔다.


다만 한가지 라즈니쉬가 달마의 대답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이야기 해보면,

제자가 달마께 묻기를, “당신은 우리의 참된 불성과 모든 덕이, 깨어있음을 뿌리로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지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달마 왈, “무수한 번뇌와 열망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은 욕심과 성냄과 망상의 세가지 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라즈니쉬 왈, 여기서 달마는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 후로 라즈니쉬는 달마에 대해 상당부분 비판쪼로 언급한다.

통상적으로 영혼은 무지의 구름에 의해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때 라즈니쉬 생각에는 무지의 뿌리가 뭐냐고 물으면 그 질문은 영혼이 윤회하기 시작하는 시초의 문제를 묻는 것이기에 모른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라즈니쉬는 달마께서 모른다고 하기에는 용기가 없어서 헛소리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라즈니쉬가 무지의 시작(기독교의 원죄)에 대해 알았다면 이런말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이 땅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야 했던 원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 안의 나”(Impersonal Life)라는 책에 보면 저자가 그 원죄의 원인을 조금은 비춰주고 있다. 이것을 몰랐던 라즈니쉬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생각되며,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으니깐... 그러나 라즈니쉬는 다른 책에서도 보면 자기가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함부로 속단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석가와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는 이야기 등 등에 대해 모두 미화시키기 위한 후대의 조작으로 단정하고 있다.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라즈니쉬가 확인 후 말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라즈니쉬의 저작들이 읽을 가치가 없다거나 품격을 떨어뜨린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는 많은 깨달음을 얻은자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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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길
오쇼 라즈니쉬 지음, 마 디얀 프라풀라 옮김 / 지혜의나무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오쇼(Osho) 라즈니쉬는 이 책에서 사람이 깨닫기 위해서

첫째 육체를 정화해야 하고,

육체를 정화하는 것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육체에 사이지 않도록 해야 하고 스트레스가 쌓여있으면 그것을 해소하여 명상이 쉽게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상념을 정화해야 하며,

상념을 정화한다는 것은 머리 속을 가만히 주시하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사라지는데 이것을 조용히 살펴보면 왔다가 사라지는데 이 생각들은(상념) 다른 사람들의 텔레파시나 생각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은 아니다. 이때 이 상념들을 지켜보는 자가 진정한 내 자신인 것이다. 상념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좋은 생각들만 머릿속에서 생각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나쁜 생각이나 욕심들은 가만히 주시하여 스스로 없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중요한 것이 나쁜 상념들이 자꾸 머릿속에서 생각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감정을 정화해야 한다고 했다.

감정을 정화한다는 것도 상념을 정화하는 것과 비슷한데 어떤 격한 감정이 발생하면 그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잠시 주시하면 그것도 스스로 사라진다고 한다. 이렇게 세가지를 계속 실천하면 신성(하나님, 깨달음)을 진정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온다고 한다.

간디도 비슷한 내용인데 뭐라고 간단히 요약된 내용은 없지만 먼저 진리에 따른 자기 정화(수련, 금욕)을 수행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할 수 없어서 그렇다만 간디는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진리를 실천했으며, 그런 생활을 통해서, 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틀릴 수 없었던 영혼이었다. 우리가 진리로 받들어야 하는 가르침들은 모두 사실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어서는 절대로 아니되며 반드시 간디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 말씀을 구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머릿속만 혼란스럽게 하므로 듣지 않는 것만 못하다.

오쇼 라즈니쉬의 이 책도 삶의 정화를 위해 실용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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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간디'인가 ?

양희규 (현 산청간디고등학교 교장)



많은 이들이 묻는다. 왜 하필이면 '간디농장' 또는 '간디학교'라고 했는지―.


간디의 사상과 삶은 아마 11년 전부터 내 인생의 지침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간디의 어떤 점이 나의 삶에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 가지만 매우 간략히 이야기해 보겠다.

우선 무엇보다도, 간디의 '단순함'(simplicity)이다. 그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진리'이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를 따라 그는 살고자 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고 믿는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것도 아끼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어려워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간디는 늘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진리인가? 진리이면 가고 진리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지"라고. 그는 이 단순한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생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간디와 거의 같은 사상을 가졌지만, 사상과 삶의 괴리 때문에 늘 고통과 갈등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간디에겐 거의 그런 갈등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이었다. 나는 간디의 "진리 앞에서의 단순함"을 너무나 닮고 싶었다. 비록 나에겐 아득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간디의 단순함을 이 사회에 널리 전하고 싶었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단순함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부족한 점이라는 확신에서 말이다. 그래서 간디학교는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가르칠 것이다. 단순함은 힘이요 아름다움이다. 즉 앞으로 박차고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이고 그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한편 복잡함이란, 깊이 살펴 보면, 흔히 우리의 '탐욕'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동기와 은밀히 결합된 경우가 많다. 위대한 사람은 모두 '한 가지만 바라보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사랑을 위해 혹은 진리를 위해. 간디는 바로 그런 사람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간디의 '노동의 삶'이다. 간디는 육체노동의 삶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육체노동이 소중하다는 자각을 한 그 순간, 주저 없이 자신이 하던 신문사를 '농장'으로 옮겼다. 그는 그 농장을 '톨스토이 농장'이라 이름 붙이고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신문을 발행하였다. 나는 이런 간디의 삶에 반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자 노력해 왔고, 이것이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1985년 가을(대학원 시절) 서울을 떠나 충북 제원군 박달재 아래 한 농가에 정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새벽에는 공부를 하는 삶을 시작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대체로 나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삶을 꾸려 왔다. 1986년 금오산 뒷자락 산 중턱에 살던 시절 나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과 새벽에 글을 읽었다. 나는 집을 짓고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면서 틈틈이 석사 논문을 구상했고 그 해 겨울 일주일 정도 걸려 머리 속의 구상을 석사 논문으로 완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듬해 나는 그루터기 선교회에서 설립한 고등학교 과정 학교의 운영 책임을 맡게 되어 만 1년간 60여명의 학생과 10여명의 다른 교사들과 생활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 동안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육체노동(노작 교육)을 하는 교육 방식을 엄격히 지켜 나갔다. 오후가 되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울려 자동차 정비를 하고 옷 만들고 농사를 함으로써, 그야말로 학교가 생산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자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가고 몸과 마음이 골고루 건강하게 발달되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싼타 바바라에서 보낸 5년 간의 유학 시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89년 6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영어로 쓰여진 간디의 자서전을 두 달에 걸쳐 정독을 했다. 박사 과정의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 2개월 간 청소부로 취직하여 하루 여덟 시간씩 일했다. 그 후 학기가 시작되고서도 3년 반 가량 매주 삼 사일 약 15시간 정도 청소부로 일했다. 물론 나는 더 편한 다른 일거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육체노동을 원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뒤 나는 미국 대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시간 부족으로 청소부 일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육체노동은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마 유학 2년째부터인가 나는 학교에서 텃밭을 얻어 간단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 호박, 작은 토마토 등 몇 가지 작물은 자연농법을 해서 성공했던 것 같고 한 때 나의 작은 정원은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칭찬 받기도 했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고자 농장의 삶을 택했다. 그리고 내가 교육을 한다면 아이들에게도 노동의 기쁨과 소중함을 꼭 심어 주고 싶다. 그래서 간디학교는, 소비만 하고 '쓰레기를 만드는 학교'가 아니라, 노동을 통해 '생산을 하는 학교'가 될 것이다. 의식주 문제를 가능한 스스로 해결할 줄 아는 사람들을 기르고자 힘쓸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무엇인가 생산하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환경이니 쓰레기 문제니 하는 문제가 있을리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간디의 '공동체'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간디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틀 속에서 농장과 학교와 신문사를 운영했고, 공동체(사티아그라하 아쉬람) 속에서 민족 해방운동을 했다. 그의 삶은 공동체 없이 설명될 수 없다. 나는 그에게서 공동체 정신을 배웠고 또한 공동체 운영 방식도 배웠다.

'공동체 정신'이란 간단히 말해서 '나의 행복이 모든 사람의 행복 속에 포함되어 있다'라는 깨닫는 것이다. 흔히 이기주의자들과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내 주위의 사람들이 불행하다면 나 역시 행복해 질 수 없는 법이다. 내 아내가 불행한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으며 내가 불행할 때 내 아내 역시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연관성은 나와 내 이웃 간 뿐 아니라 나와 모든 사람 간에도 적용된다. 나와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의 불행(혹은 행복)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도둑이 들 끊는 사회에서 부자로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결코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은 내가 진정 행복하려면 이 사회 전체가 행복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하는 구조악(예를 들어, 인종차별의 법과 관행, 독재, 제국주의)에 대해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간디는 강조한다.

하지만 개인은 무력하다. 개인의 힘으로 구조악에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항상 '공동체'를 만들어 구조악에 저항했다. 그의 공동체 식구들은 숫자에 있어서는 몇 십 명에 불과했지만 수천 수만의 군대보다도 더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농사를 지었고 함께 신문을 발행했으며 함께 감옥에도 갔다. 그 식구들은 '사랑과 자발성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과 신뢰라는 토대 위에서 어떤 어려운 일도 자발적으로, '신명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조직도 이러한 '내적 공동체'의 형성 없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행사(event)는 할 수 있겠지만 삶의 변화는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곳의 식구들과 함께 공동체를 탐구하고 모색하고 있다. 공동체를 통해 생명이 살아 숨쉬고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받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기존 문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새로운 문화로 향한 작은 노력을 더 값지게 여긴다. 이 곳에서 운영하는 '숲속마을 작은학교'나 '간디대학' '협동조합 식의 운영 방식,' 이 모두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우리의 꿈을 표현하는 것이다. (양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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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명상록 세계 명상록 시리즈 1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이명권 옮김 / 열린서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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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 나는 “간디 명상록”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다시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간디 명상록에 대한 알라딘 독자의 리뷰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한 책에 독자 리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나는 그 치욕을 면하게 하기위해 이렇게 독자 리뷰를 쓰고 있다.


이 책은 진리탐구를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모두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추천하는 책 10권을 읽으면 세상이 보인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 한권의 책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방편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그 심오한 뜻을 진실로 느끼기 위해서는 한 줄 한 줄 열심히 뜻을 새겨야 한다. 다만 간디 철학의 깊이를 완전히 전하지 못한 번역 서적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번역서가 나름대로 열심히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한 면은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번역되어 소개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귀한 책을 쉽게 우리가 볼 수 있었을 것인가?


간디는 이 책에서 불교인, 기독교인, 그 외 기타 종교인과 비종교인들인 일반인들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진실 되게 말하고 있다. 감히 영적인 삶의 단계를 오르지 못한 저로서는 이것이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때 감히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읽었던 많은 성현들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간디는 우리가 감히 우러러 보기조차 어려운 고귀한 영혼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이 책은 진리를 탐구하는 일반인들뿐 만 아니라 영적인 수행단계에 들어가 있는 수행자들에게도 그 깨달음의 단계를 넘어서는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리는 결코 많은 말들이 필요치 않다. 아주 명쾌하고 간단하지만 피나는 노력과 자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가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상반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는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할 뿐이다.


또 다시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수행체계나 종교가 만일 간디가 명상록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진리와 배치된다면 미련 없이 그 것을 집어치우라고 권하고 싶다. 모든 인간적인 집착과 탐욕은 우리의 이성을 흐리게 하여 진리탐구에 장애를 초래한다.


감히 진리 탐구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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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 -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 당대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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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디의 명상록을 읽고 간디의 팬이 되었다. 간디도 예수나 부처처럼 깨달은 영혼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간디가 직접 저술했거나 말했던 내용은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다.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책이란 아무 책이나 많이 읽는다고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꼭 필요한 진리만을 모아 놓은 책을 반복해서 읽고 그 뜻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줍잖은 지식으로 써놓은 책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관념(conception)에 혼선만 야기하여 진리의 채득을 어렵게 한다.


내가 진리의 채널이라고 확정한 간디가 그토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가바드 기타를 읽어보기로 했다. 책을 구입하고 서문을 읽고 본문 내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우선 쉽게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 많은 용어들 때문에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어 한동안 읽지 않고 두었다가 다시 보기로 했다.


먼저 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책의 뒤쪽에 바가바드 기타 전문을 읽어보았다. 그것도 모두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대로 그저 그렇게 읽다가 간디의 후기를 일부 읽고 나의 관심분야에서 본문 내용을 찾아 보았다. 본문의 3장 내용을 아주 흥미있게 읽었으며, 다시 간디후기를 읽다가 간디가 그토록 가슴에 와 닿았다는 2장 후미부분을 읽었다. 일반적인 서적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진리의 정수만 뽑아 놓은 것 같았다. 우리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하며, 성경을 읽는 사람도 이것을 읽고 진정으로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뜻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말했던 2장의 내용은 비록 간디의 해설을 읽고서야 완전한 뜻이 파악되었지만 상당한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단식을 힌두교나 불교쪽의 전유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까 헬렌 니어링의“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란 책에서 스콧트 니어링이 보여준 단식이 전통 캐톨릭의 단식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미국으로 올때 가지고 온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단식은 인간의 오감을 철수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며 몸이 쇠하면 오감의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또한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이 승화되고 심성이 고양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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