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왕도 크리야
파라마함사 하리하라난다 지음, 신주희 옮김 / 도서출판 한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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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에 대해 이책보다 더 잘 설명한 책은 없는듯합니다. 홉흡의 근본 원리에 대해 진리가 잘 간수되어 있는듯 합니다.
구입해두고 그동안 읽지 못했는데 이제보니 주옥같은 내용들이 들어 있네요.
역시 바바지는 초인적인 인물인듯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복이 있느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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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간디'인가 ?

양희규 (현 산청간디고등학교 교장)



많은 이들이 묻는다. 왜 하필이면 '간디농장' 또는 '간디학교'라고 했는지―.


간디의 사상과 삶은 아마 11년 전부터 내 인생의 지침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간디의 어떤 점이 나의 삶에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 가지만 매우 간략히 이야기해 보겠다.

우선 무엇보다도, 간디의 '단순함'(simplicity)이다. 그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진리'이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를 따라 그는 살고자 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고 믿는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것도 아끼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어려워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간디는 늘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진리인가? 진리이면 가고 진리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지"라고. 그는 이 단순한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생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간디와 거의 같은 사상을 가졌지만, 사상과 삶의 괴리 때문에 늘 고통과 갈등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간디에겐 거의 그런 갈등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이었다. 나는 간디의 "진리 앞에서의 단순함"을 너무나 닮고 싶었다. 비록 나에겐 아득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간디의 단순함을 이 사회에 널리 전하고 싶었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단순함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부족한 점이라는 확신에서 말이다. 그래서 간디학교는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가르칠 것이다. 단순함은 힘이요 아름다움이다. 즉 앞으로 박차고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이고 그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한편 복잡함이란, 깊이 살펴 보면, 흔히 우리의 '탐욕'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동기와 은밀히 결합된 경우가 많다. 위대한 사람은 모두 '한 가지만 바라보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사랑을 위해 혹은 진리를 위해. 간디는 바로 그런 사람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간디의 '노동의 삶'이다. 간디는 육체노동의 삶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육체노동이 소중하다는 자각을 한 그 순간, 주저 없이 자신이 하던 신문사를 '농장'으로 옮겼다. 그는 그 농장을 '톨스토이 농장'이라 이름 붙이고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신문을 발행하였다. 나는 이런 간디의 삶에 반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자 노력해 왔고, 이것이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1985년 가을(대학원 시절) 서울을 떠나 충북 제원군 박달재 아래 한 농가에 정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새벽에는 공부를 하는 삶을 시작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대체로 나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삶을 꾸려 왔다. 1986년 금오산 뒷자락 산 중턱에 살던 시절 나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과 새벽에 글을 읽었다. 나는 집을 짓고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면서 틈틈이 석사 논문을 구상했고 그 해 겨울 일주일 정도 걸려 머리 속의 구상을 석사 논문으로 완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듬해 나는 그루터기 선교회에서 설립한 고등학교 과정 학교의 운영 책임을 맡게 되어 만 1년간 60여명의 학생과 10여명의 다른 교사들과 생활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 동안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육체노동(노작 교육)을 하는 교육 방식을 엄격히 지켜 나갔다. 오후가 되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울려 자동차 정비를 하고 옷 만들고 농사를 함으로써, 그야말로 학교가 생산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자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가고 몸과 마음이 골고루 건강하게 발달되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싼타 바바라에서 보낸 5년 간의 유학 시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89년 6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영어로 쓰여진 간디의 자서전을 두 달에 걸쳐 정독을 했다. 박사 과정의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 2개월 간 청소부로 취직하여 하루 여덟 시간씩 일했다. 그 후 학기가 시작되고서도 3년 반 가량 매주 삼 사일 약 15시간 정도 청소부로 일했다. 물론 나는 더 편한 다른 일거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육체노동을 원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뒤 나는 미국 대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시간 부족으로 청소부 일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육체노동은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마 유학 2년째부터인가 나는 학교에서 텃밭을 얻어 간단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 호박, 작은 토마토 등 몇 가지 작물은 자연농법을 해서 성공했던 것 같고 한 때 나의 작은 정원은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칭찬 받기도 했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고자 농장의 삶을 택했다. 그리고 내가 교육을 한다면 아이들에게도 노동의 기쁨과 소중함을 꼭 심어 주고 싶다. 그래서 간디학교는, 소비만 하고 '쓰레기를 만드는 학교'가 아니라, 노동을 통해 '생산을 하는 학교'가 될 것이다. 의식주 문제를 가능한 스스로 해결할 줄 아는 사람들을 기르고자 힘쓸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무엇인가 생산하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환경이니 쓰레기 문제니 하는 문제가 있을리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간디의 '공동체'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간디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틀 속에서 농장과 학교와 신문사를 운영했고, 공동체(사티아그라하 아쉬람) 속에서 민족 해방운동을 했다. 그의 삶은 공동체 없이 설명될 수 없다. 나는 그에게서 공동체 정신을 배웠고 또한 공동체 운영 방식도 배웠다.

'공동체 정신'이란 간단히 말해서 '나의 행복이 모든 사람의 행복 속에 포함되어 있다'라는 깨닫는 것이다. 흔히 이기주의자들과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내 주위의 사람들이 불행하다면 나 역시 행복해 질 수 없는 법이다. 내 아내가 불행한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으며 내가 불행할 때 내 아내 역시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연관성은 나와 내 이웃 간 뿐 아니라 나와 모든 사람 간에도 적용된다. 나와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의 불행(혹은 행복)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도둑이 들 끊는 사회에서 부자로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결코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은 내가 진정 행복하려면 이 사회 전체가 행복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하는 구조악(예를 들어, 인종차별의 법과 관행, 독재, 제국주의)에 대해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간디는 강조한다.

하지만 개인은 무력하다. 개인의 힘으로 구조악에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항상 '공동체'를 만들어 구조악에 저항했다. 그의 공동체 식구들은 숫자에 있어서는 몇 십 명에 불과했지만 수천 수만의 군대보다도 더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농사를 지었고 함께 신문을 발행했으며 함께 감옥에도 갔다. 그 식구들은 '사랑과 자발성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과 신뢰라는 토대 위에서 어떤 어려운 일도 자발적으로, '신명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조직도 이러한 '내적 공동체'의 형성 없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행사(event)는 할 수 있겠지만 삶의 변화는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곳의 식구들과 함께 공동체를 탐구하고 모색하고 있다. 공동체를 통해 생명이 살아 숨쉬고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받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기존 문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새로운 문화로 향한 작은 노력을 더 값지게 여긴다. 이 곳에서 운영하는 '숲속마을 작은학교'나 '간디대학' '협동조합 식의 운영 방식,' 이 모두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우리의 꿈을 표현하는 것이다. (양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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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철학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는 책 


<장자>를 읽다보면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해 먼저 알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시대적 상황이라 하면 사상적 밑바탕으로 공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역사적 밑바탕으로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더 거슬러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공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에 상당히 목말랐다. 장자가 가장 영향을 받은 인물은 노자보다 오히려 공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신의 사상을 전개할 때 공자에 의지해 전개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자에 호가호위하면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흔히들 장자, 그리고 노장사상이라 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경구를 연상하게 만든다. 암기식 정규 교육의 훌륭한(?) 자산으로 남아있는 글귀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을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장자>를 읽다보면 그 자연이 아니라 '이치로서의 자연'임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노장사상이 9세기 당나라 시대의 선승들에게 계승되면서 이러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장자 사상의 근원적 가치는 단지 속세를 떠난 자기 수양과정으로만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개인의 자유(또는 개인의 초월), 그리고 상호의존성에 의거한 비본질론적인 철학으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자는 유가적 견지에서 덕목과 규범을 앞세운다.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절대적 권위을 얘기한다. 제도나 이념, 도덕, 명분 등을 내세운다. 반면 장자는 이러한 것을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의 소요유(消遙遊)를 얘기한다.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적, 시각주의적 진리를 앞세운다.


이러한 도를 설명하는데 장자 철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상관개념이 들어간다. 현대식으로 옮기면 변증법의 상호침투, 상대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있음은 없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美 또한 醜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상관개념에 의하면 유가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가치의 중요성의 의미가 삭감되어버린다. 이러한 상관개념을 발전하면 도대체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철학으로 발전되고, 그러다보면 도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다는 도의 보편주의에 다다르게 된다.


서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며 아웅다웅하는 제가백가가 쟁명하는 시대에 가히 경침을 울릴 수 있는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상대의 논리를 억누르면서 이기는 철학이라면, 장자는 상대의 논리를 인정하면서 이기는 철학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과연 백가쟁명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 초월을 내세우는 태도가 옳았느냐는 것을 논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느낌이 든다. 장자의 무위의 정치가 과연 옳았는지 조금 갸우뚱해진다. 정치로 나아가려는 안회를 말리는 공자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공자는 장자 자신을 의미한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여기서 공자(곧 장자)는 개인의 도 닦는 것이 먼저라면서 '심재(心齋)'하라고 안명론의 입장에서 가르치고 있다.


군웅할거 시대에 개인의 자유, 개인의 성찰을 그 무엇보다도 우위에 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철학은 현실정치에 훨씬 걸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자든, 장자든 누구나 고전을 쉽게 접목시켜 해설해놓았다고 한다. 그 '쉽다'라는 것에 함정이 있다는 느낌이다. 시오노 나나미도 역사를 볼 때는 과거 사람들의 눈으로 먼저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전을 쉽게 접목시킨다는 서적들의 대부분은 현대적 사례에 맞춰 해설하는 것에 연연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장자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제대로 장자를 볼 때 오히려 현대로의 접맥이 훨씬 수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쉽게 접맥시킨다는 책들이 그 당시 얘기를 하지 않은 채 자구의 해설과 현대의 재미있는 사례 끌어들이기에 급급한 해설로 치우치고 있는 점이 우리의 고전 읽기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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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그대에게
하나뿐인 나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에게
가장 순수한 영혼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검푸른 파도가 우리를 스쳐도
파도의 선율 따라 우리는 기쁘게
노래 할 수 있습니다.

그대 사랑함은 날 온전히 버리고
그대 안에서 새하얀 희생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 김세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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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년이라 삼베 한 벌 곱기도 곱구나
윤년에 삼베옷 만들면 명도 길고 좋다 길래
나, 내 손으로 수의를 만든다네
곱게 만든다네 온 힘 다해 만든다네.

나 저옷 입고 너울 너울 춤추며
한많은 이 세상 떠나리
애닯은 이 세상 떠나리.

그러나 그러나 어찌할꼬
내 목숨 바쳐가며 키워온 자식들
떠나가면 어찌할꼬 보고파서 어찌할꼬
두고 갈 모든 것들 사무쳐서 어찌할꼬.

어느 때 불쑥 내게 올 줄 모르는데
너 맞을 채비를 해야지,웃으면서 해야지.
어화둥둥 두리둥실,인생은 꿈이라네
자고 나면 십 년 가고 깨어보면 끝이라네

세상살이 인연의 줄 다버리고 가야지
나를 감싼 온갖 정 다 떼놓고 가야지
허무한 인생의 길 구비구비 지나치며
가다가 눈물나도 돌아보지 말아야지

살아생전 공덕으로 저승 갈 밑천 삼아
나래 나래 실타래에 엮어서 가노라네
떠나야지 떠나야지,웃음 안고 떠나야지
고통없는 곳으로 반겨주는 낙원으로

** 김 세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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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2003-11-2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상시시시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