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나사의 회전 ㅣ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6
헨리 제임스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진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에서 보는지, 어떤 날씨에 보는지, 심지어 어느 시간에 보느지에 따라서도


자연 풍경마저 달라지지 않는가.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인 줄 알았다면 아마 진즉에 찾아 읽었을 거다. 헨리 제임스가 쓴 [나사의 회전]은 1898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현대 고딕 소설, 심리 소설의 사조라고도 불리는데, 나는 고딕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인지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심리 소설로 읽었다.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사람 중 하나인 나는 공포영화 속에 심어놓은,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나 '혐오감을 들게 하는 장치'들을 아주 불편하게 느끼기에 그런 류의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을 즐기진 못한다. 그런데 [나사의 회전]에서 감탄한 부분은 놀라게 하되 아주 천천히, 안개가 스며들어 어느새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느리지만 분명하게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부분들이다. 공포영화는 싫어하지만 긴장감 가득한 스릴러는 또 무척 좋아하는 기묘한 취향의 내가 정말 몇 년 만에 취향저격 소설을 만난 것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소설의 가장 주된 화자인 가정교사의 입장에 서서, 그녀의 시선과 관찰과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도 기이한 긴장과 스릴이 느껴지고 그 정반대의 입장에서 읽어가도 다른 결의 스산함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나는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때부터 가정교사의 불안한 심리 상태가 마음에 걸렸던 터라 그녀가 묘사하는, 그녀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어디까지나 '가정교사가 재단한 사물과 사람'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갔다. 그래서 마일즈가 저택으로 돌아오고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고 전전긍긍하는 단계에서는 가정교사의 극단적인 렌즈가 저택 전체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문제는 그 날 밤이었다. 한밤중에 마일즈가 저택 마당에 서서 저택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 날 밤.



실은 여전히 가정교사가 목격했다는 그 유령들이 미스 제셀과 피터 퀸트 였는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경험이 많지 않고 예민하고 젊은 가정교사를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특히, 자기를 고용한 고용주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그의 인정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면 자기 무덤이라도 팔 것 같은 이 여자의 이성과 감정의 기울기는 과연 평행한가? 마일즈와 플로라를 찬양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가 '아.. 이 분 얼빠네. 그 아이들 삼촌한테도 그러더니.'라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래서 호숫가에서 가정교사가 미스 제셀의 유령을 보았을 때, 호수를 등지고 놀이에 전념하는 플로라를 관찰하면서 '세상에, 플로라는 이미 미스 제셀의 유령을 보았고 심지어 애써 저 여자의 등장을 무시하고 있어!!'라며 경악할 때 심지어 우습기까지 했다.



가정교사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그로 인한 시야의 왜곡에 나마저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작품을 읽어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 가서는 가정교사에 대한 불신이 나에 대한 불신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혼자 숲으로 간 플로라와 그를 쫓아간 가정교사와 그로스 부인과의 대화 장면이 결정적이었다.



플로라는 작고 발그레한 얼굴을 굳은 듯 경직시킨 채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난 표정으로 내 속을 꿰뚫어보며 비난하는 것 같았다.

173쪽



이 장면에서 플로라가 보여주는 반전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가정교사가 플로라를 정확하게 보았고 내가 틀렸나?' 작품 초반부터 지금까지 내내 내가 가지고 있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가정교사의 집요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 플로라가 어른들이 경악할 만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무서운 아이 플로라로 변신하는 부분이다. 이 장면 이후로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급물살을 타면서 앞에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결과로 작품은 끝이 난다.



가정교사가 할리 가의 주인인 고용주와 짧은 만남을 하면서 맺었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단연 '절대 고용주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조카들과 조카들이 사는 곳에 대하여 모든 관심을 끄고 싶어하는 고용주의 의지는 상당히 강력했다. 심지어 이 고용주는 가정교사가 플로라와 마일스가 사는 저택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마일스가 다니던 학교장이 보낸 서신을 봉투도 뜯지 않은 채 가정교사에게 고스란히 넘기면서 '나는 알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보고하지 말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야기 초반인 그때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의아했다. 아이들을 너무도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인가? 자기가 떠안게 된 조카들이 짐스러워서 싫은가?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결말을 모두 읽은 후에 돌이켜 보면 조카들에게 여러 번 당한 기억이 있어서 치를 떨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플로라가 결말부에서 보여준 변신을 감안하면 그러고도 남을 만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 작품은 아이들의 말과 반응에 대한 가정교사의 해석과 응대만을 통하여 작품 속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야기 속에서 가정교사가 '이건 이런 뜻이야, 저건 저런 뜻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라고는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그런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교사가 해석한 내용을 반박할 수도, 다른 의미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이 소설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이유일 것이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건대 가끔 두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오빠나 동생을 팔꿈치로 살짝 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꼭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못하실 거야!” 여기서 ‘한다’는 표현은 나의 훈육에 간섭하기 시작한 그 여자의 유령에 대해서 내가 한 번쯤은 직접적인 언급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127쪽



빛나는 재치와 따듯한 배려가 담긴 그의 제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중세 이야기에 나오는 진정한 기사들은 자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았어요. 이제 선생님의 마음을 알겠어요. 이제부터 선생님은 저를 혼자 있게 해주실 거고, 제 걱정을 하거나 몰래 엿보지 않을 것이며, 항상 저를 옆에 두려고 하지 않으실 거죠. 제가 어디든 다녀올 수 있는 자유도 주실 거예요.”

161쪽



이번에 읽은 [나사의 회전]은 미래와 사람 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시카고플랜 고전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든지 주의를 기울여 충분히 즐기면서 읽으면 좋은 게 독서이지만 이 '시카고플랜'은 더 나은 독서와 사고를 위하여 누구라도 해볼 만한 유익한 독서법이지 않을까. 책 속에서 모델을 정하고, 가치를 발견하고, 발견한 가치에 대하여 비전을 가지라는 세 가지 과제를 생각하며 책을 읽는 건데, [나사의 회전] 같이 장르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소설에 저 세 가지 과제를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 독서모임의 주제 도서나 토론 때에 이야깃거리로 매우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건대 가끔 두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오빠나 동생을 팔꿈치로 살짝 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꼭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못하실 거야!" 여기서 ‘한다’는 표현은 나의 훈육에 간섭하기 시작한 그 여자의 유령에 대해서 내가 한 번쯤은 직접적인 언급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연은 협력한다
디르크 브로크만 지음, 강민경 옮김 / 알레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이 지구를 지배해 온 방법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자연은 공생과 협력을 거치며 균형을 이루어 살아왔고 때로 크고 작은 변화가 발생한다고 해도 이내 균형을 다시 찾았고 몇몇 종이 멸종을 했어도 지구는 여전히 살아있다. 인간이 만든 기후변화가 인간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한 지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과연 인간은 지구에서 생존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협력과 공생을 통하여 지구 생태계의 거대한 연결망에 편입하여 생존을 이어갈 만한 종인가, 아니면 30년 이내에 멸망해도 어쩔 수 없는 뭐 그런 종인가.



독일을 대표하는 복잡계 과학자인 디르크 브로크만은 [자연은 협력한다]를 펴내며 인간이 너무나 착각하고 있는 여러가지를 정면으로 뒤엎는다. 예를들면 인간이 '박테리아'라는 단어를 듣고 연상하는 더럽고 지저분한 혹은 병을 일으키는 불결한 인상은 실제 박테리아와는 결코 어울리지도, 비슷하지도 않다는 내용과 같은 것들이다. 생태계가 약육강식이라는 무한한 경쟁을 통하여 진화하고 번성하고 생존해 왔다는 인식도 틀렸다. 경쟁이 아니라 공생과 협력을 통해 자연은 생존해왔다. [자연은 협력한다]는 생태계를 견고하게 유지해 온 자연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무엇인지, 그것을 배우기 위하여 '복잡계 과학'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복잡계 과학이라는 말은 무척 생소하다. 이 책을 통해 이런 분야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자인 디르크 브로크만은 이론물리학 분야를 전공한 학자로 현재는 복잡계 과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데,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던 이 복잡계 과학이라는 게, 무엇을 목표로 어떤 연구를 하는지 그리고 그 연구가 인간이 처한 위기 즉, 인류 멸종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씩 이해가 된다.



공통점은 서로 다른 대상을 결합하는 것을 넘어서 구속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서로를 구분하는 차이점은 끝없이 많지만 공통점을 가질 가능성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현대의 자연과학은 오로지 이 구속성을 통해 발전해 왔다.


책52쪽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만 몰두하는 것은 일종의 학술적 편협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학술적으로 편협해져서는 복잡한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책60쪽



이론물리학과 수학에서 출발하여 전염병학, 생물학, 신경과학, 통계물리학과 사회학까지 연구한 저자는 그래서 학술적 편협성을 뛰어넘어 학문의 융합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자연은 협력한다]에는 인간이 처한 기후위기라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 대한 해법을 경제, 사회, 신경과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탐구하려는 시도가 잘 나타난다. 저자가 언급한 분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미생물이었다. 미생물과 내가, 내 신체가 이렇게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걸 이 책에서 배웠다.



사람들은 연구를 거쳐 그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미생물과의 협력적인 결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럴 수 있는 동식물은 단 한 종도 없다. 모든 식물과 모든 동물은 체내 혹은 체외에 미생물을 달고 있다. 이 미생물들은 동식물이 살아가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책284쪽



모든 고등생물이 예외 없이 미생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생물과의 공생이 고등생물이 발생한 약 5억년 전부터 존재했으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서 존재했던 적이 없다.


책289쪽



인간이 겪는 수많은 만성 질병이 미생물의 기능 장애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모든 반추동물과 초식동물은 기본적으로 소화기관 내에 있는 박테리아에 의존한다.


290쪽



미생물과 생물의 연결성, 협력 구도를 다룬 <7장 협력>편을 정말 꼼꼼하게 읽었는데 읽어볼수록 재미있다. 이 책의 여러 챕터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7장은 인간 사회가 현재 처한 위기 즉, 개인주의가 불러온 위기, 몰이해와 몰지각이 불러온 위기, 과도한 경쟁이 불러온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는 내용이다. 지금의 우리는 집단행동을 두려워하거나 폄하하고 자기가 아는 세계와 지식 안에서 갇혀 있는 것을 편안해한다. 그러나 단순히 기후위기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 무척이나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다. 내 삶에 작은 한 조각, 작은 변화 하나의 원인을 진단하기 위하여 다각도의 진단과 성찰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미생물과 생물의 공생, 협력 활동을 바탕으로 다윈이 놓친 진화의 또다른 열쇠를 설명한 내용들을 읽다 보면 '나만 아니면 돼.' 라든가 '나만 잘하면 돼.'라는 인식이 인류와 지구 전체로 봤을 때 아주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복잡계 과학의 도움으로 규율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고 필수적인 메커니즘을 확인하고, 세세한 것들만 따지다가 길을 잃지 않고 여러 현상 사이의 연결을 인식한 다음 그 공통점에서 배울 수 있다. 공통점만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이점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 우리는 그저 차이점을 규명하고 그 수를 셀 뿐이다.

책308쪽



지금까지 남다른 점, 남다른 것에만 홀려 왔다면 이제는 같은 것, 같은 점에 주목해야 할 때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이야기 하지면 다른 인종, 다른 문화, 다른 성별 등 차이에만 집중하고 그것에 매몰되면 결국 남는 것은 갈등 뿐이다. 자연의 여러 종들이 서로 협력하고 공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종들 간에 존재하는 공통점 때문이다. 공생과 협력이 자연 생태계에 긴밀하고 견고한 연결망을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생태계가 존속해왔다면 공생과 협력의 결과,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지지 않는가. 책 속에서 등장했던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개인인 적이 없다'.


우리는 복잡계 과학의 도움으로 규율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고 필수적인 메커니즘을 확인하고, 세세한 것들만 따지다가 길을 잃지 않고 여러 현상 사이의 연결을 인식한 다음 그 공통점에서 배울 수 있다. 공통점만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이점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 우리는 그저 차이점을 규명하고 그 수를 셀 뿐이다. - P3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 드라마로 인해서 더 유명해진 허먼 멜빌의 [모비딕]. 내가 알기로운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꼽은 명저라고 알려져 최근에 부쩍 이 소설을 찾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 하다. 원래도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 저자인 허먼 멜빌은 몰라도 [모비 딕]이라는 소설 제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워낙에 유명한 책인 경우, 제목만 들어도 대략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그런 베스트셀러의 경우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라는 책을 알고 그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는 대략 알지만 실제로 [토지] 전권을 다 읽은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는 그런 아이러니. 실제로 완독한 사람은 적은데 그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그런 아이러니. 그런 책 중 하나가 단연 이 [모비 딕]이겠다.


 왜 완독률이 적은가? 그야 당연 책이 두껍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길고 책이 두꺼울수록,,권수가 많을 수록 책이 재미있었다. 물론 잘 쓴 이야기의 경우에만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선 권수가 5권 이상 되는 소설의 경우 재미 없는 작품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읽어야 할 내용이 많은 소설이라고 해서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이 '재밌다'는 보장만 확인되면 노빠꾸로 고고!! 했었지.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는 좀 알겠다. 읽는 것도 엄연한 노동이라서 페이지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체력이 달린다. 그런 지경이니 들고 있기에도 무거운 [모비 딕] 완독에 도전하는 건 내게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이슈메일이 배를 타고 나선 것처럼 고된 줄 알면서 뛰어든 그런 거였지. 


 모든 것이 망꾼을 나른함에 빠져들게 한다. 열대지방에서 고래잡이의 생활 대부분은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간다. 들려오는 소식도 없고, 신문도 읽지 못하고, 별것 아닌 일을 부풀린 호외를 보고 쓸데없이 흥분할 일도 없다. 국내의 재난, 파산 채권, 주식 폭락 등으로 괴로워할 일도 없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3년 치가 넘는 식량이 통에 가득 담겨 있고 메뉴는 늘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209쪽


 요즘 포경 업계는 몽상적이고 우울하고 얼빠진 젊은이들의 도피처가 되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곤란한 걱정거리에 넌덜머리를 내며 타르와 고래 지방에서 위안을 얻으려 한다. 

212쪽 


 이거지, 이거야. 이슈메일이 망루에 앉아 망망대해에 무의미한 시선을 둔채 우주가 그의 귓가에 불어넣는 온갖 질문들로 인한 상념에 잠겨 저도 모르게 형편없는 망꾼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모비 딕]은 그런 책이다. 애초에 요즘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추리나 스릴러 같은 그런 요소의 재미로 읽는 게 아니라 마치 바다를 바라보듯, 우주를 탐구하듯 상념에 빠진 채로 흘러가듯 읽어 나가는 작품이다. 읽어보기 전에는 '와, 이 책 두께가 만만치 않은데.' 혀를 내둘렀더라도 괜찮다. 포경선을 배경으로 찍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라든가 [순풍 산부인과]와 같은 블랙 코미디를 본다고 생각하면 모든 진입 장벽이 다 사라질 것이다. 왜 포경선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이라고 했냐면 진짜로 작품 속에 그려진 포경선 내의 온갖 에피소드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 특유의 포악하고 건조한 유머가 나하고도 잘 맞는 것 같다. 뱃멀미가 처음에는 곤욕이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편안해지는 것 같은 이치인가? 작가가 작품 속에 풍성하게 가꿔 놓은 표현들도 흥미롭다. 



 바다는 자신과 이질적인 사람에게 적수가 될 뿐 아니라 자기 자식에게도 악마 같은 짓을 하며, 자신이 초대한 손님을 살해한 페르시아 연회 주인처럼 자기가 낳은 생명체마저 봐주지 않는다. 

354쪽


 너희는 의족이 떨어져 나가 부러진 창에 의지하여 한 발로 서 있는 늙은이를 보고 있다. 이것이 에이해브이고 그의 몸이다. 하지만 에이해브의 영혼은 100개의 다리로 움직이는 지네다. 나는 폭풍우 속에서 돛대가 부러진 군함을 끌어당기는 밧줄처럼 긴장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좌초된 느낌이기도 하다. 아마 내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끊어진다면 뚝 하는 소리가 나겠지.

675쪽 



 [모비 딕]은 특히 허먼 멜빌이 성경에서 소재를 가져와 다양하게 쓴 표현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굉장하다. 와,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을 이렇게 끌어와 표현할 수도 있구나. 이런 류의 표현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모비 딕]을 절대 절대 절대로 완독해 봐야 한다. 만약 성경 모티프에 대한 해설이 필요하다면 책 맨 뒤에 이 책의 옮긴이가 써둔 해제를 먼저 읽은 후 작품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현대지성에서 펴낸 [모비 딕]은 레이먼드 비숍의 목판화 일러스트가 함께 수록되어 거칠고 광포한 바다 한복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레이먼드 비숍의 목판화가 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모비 딕] 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실린 목판화였다고 한다. 1930년대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 레이먼드 비숍의 목판화를 책에 함께 수락했다는 출판사의 전략이었는데, 와 정말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컬러로, 세밀하게 묘사한 삽화보다 이 작품의 분위기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퀴케그와 모비 딕의 느낌을 설명하는 데는 단연 압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언어를 디자인하라
유영만.박용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티비 프로그램 [금쪽 같은 내새끼]에 출연했던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부모가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한글을 깨우쳤다. 아주 어릴 적부터 유투브를 보면서 말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 아이더러 부모는 언어 천재라고 자랑스러워했으나 실상 아이는 언어를 요구, 거절 등에만 사용하고 사람과의 상호작용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할 뿐 아니라 부모와도 정서적인 언어 소통을 하지 못했다. 말을 할 줄은 알지만 제대로 쓸 줄 몰랐던 아이는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을 처방 받고 사회성을 기르면서 해당 회차는 막을 내렸다.


 '이거 줘, 저거 싫어, 저리 가' 등 자신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언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과 언어를 통해 상호작용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는 부모와 친구 등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편안하고 일반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아이는 고립된 채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버린다. 아이 본인의 고통과 아이를 아끼는 주변인들의 고통은 수치로는 환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아이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투브와 넷플릭스로 언어를 깨우친 아이들. 사람의 기운과 정서적 교감이 배제된, 말을 주고 받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부재한 언어의 세계는 좁고 얕고 낮다. 이 얄팍한 세계를 품은 사람은 딱 그만큼의 프레임으로 외부 세상을 재단한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딱 이런 경우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언어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고, 단어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차원적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세상은 내가 가진 개념적 넓이와 깊이만큼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 인식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

책 14쪽








 요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문해력, 독해력이 현저히 낮아져서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어디 어린 아이들만 문제일까. 어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글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맥락을 잡지 못하거나 호흡이 긴 글은 아예 읽지 않는 어른들도 얼마나 많은가. 한 권의 구성을 가진 책을 제대로 소화해 내는 어른의 수도 그리 많지 않다. sns에서 생산되는 언어만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아이들 이상으로 어른들 역시 깊고 넓고 높은 언어를 소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를 디자인하라] 이 책은 평범한 개인이 기존의 언어 세계를 바꿔나가야 할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서 썼다. 언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도 멈추고 소통도 단절되며 공동체 의식도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많아도 머릿속의 생각을 표현할 적확한 단어가 없으면 아이디어는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지 않더라도 표현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일 뿐이다(책 119쪽). 저자들이 이 책에서 수없이 강조하듯이 '언제나 언어가 문제다'. 언어의 세계가 풍요로워져야 할 이유를 책 전반에 충분히 이야기한 저자들은 part 2에서 언어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과학의 언어에 대해서 쓴 부분이었다. 


 나의 언어는 현재의 직업과 환경, 관심사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용접을 하는 사람은 그 분야의 언어로, 출판을 하는 사람은 그 분야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sns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와 매체에서 접하는 언어 역시 우리의 세계를 저 마음대로 지어버린다. 함정은 어떤 특정한 분야의 언어가 세계 전체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학의 언어가 그렇다. 마치 종교처럼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는 우리들의 시대에 우리가 과학의 언어로 사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과학의 언어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 정신, 정서의 세계를 내 안에서 고사시킨다면, 그것도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든, 지금보단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서는 그것도 아니면 세계 평화를 위해서든 편중, 편향된 언어의 세계를 허물고 넓게 지어올리는 확장공사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애정과 관심은 이해의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의 언어에 사고를 점령당한 것 아닐까? 감정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객관적인 입장에 서야만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과학의 언어로만 사고하면, 언어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책 30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외인구단 DNA - 메쎄이상의 코로나19 극복기
조원표.이상택.김기배 지음 / 하다(HadA)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첨단 전자상거래 회사(알리바바)가 왜 전시회를 하는 건가요? 오프라인 전시회와 알리바바닷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알리바바가 본사에서 오프라인 전시회를 수시로 개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나에게 이 책 본문에 등장하는 '오프라인 전시회와 알리바바닷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는 물음이었다. 그러게? 왜 알리바바닷컴이 오프라인 전시회를 하는거지? 어차피 모든 물건은 온라인으로 거래하지 않나? 




 이 질문을 읽고 나면 문득 매년 열리는 북페어-도서전이 떠오른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구입할 때 예스24나 알라딘, 교보문고 등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하고 있는데 이 북페어는 왜 매년 열리는 걸까? 오프라인에서 책을 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으프라인에서 열리는 북페어는 단순히 책을 구입하는 곳이 아니다. 책을 중심으로 한 문화 전체가 전시되고 그 문화의 실물을 경험하고 체감하는 곳이다. 더구나 어린이도서, 교구 같은 것들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 자료만으로 제품을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다. 실물을 보고 확인한 다음에 구입한다면 얼마나 믿음직스러울까! 온라인 매매가 성행하는 만큼 오프라인 전시회 역시 꾸준히, 점차 더 크고 빈번하게 열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그래서 알리바바닷컴은 꾸준히 전시회를 열고 B2B 보증사업을 하던 메쎄이상도 전시회 사업에 뛰어들었다. 




‘B2C 마켓플레이스는 이미 알려져 있는 완성품을 사고파는 것이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모두 가능합니다. 하지만 B2B거래는 다릅니다. 오랫동안 반복될 공급처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B2B 거래를 위해서는 직접 만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한두 번은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공장 방문 등 스킨십이 이뤄지는 만남까지 주선하는 것이 마켓플레이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알리바바닷컴의 담당자는 “B2B 거래는 단발 거래가 아니고 원자재나 반제품을 지속해서 공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완성품 역시 오랫동안 되풀이될 수 있는 거래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면거래가 필수”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책 38쪽




 [외인구단 DNA]는 전시산업 회사 메쎄이상의 임원들이 쓴 메쎄이상과 전시산업에 대한 책이다. 메쎄이상과 전시산업이 모두 생소한 독자라 해도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우리의 일상과 산업, 문화가 연결된 지점인 전시회를 주목하여 왜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길을 지나다 보면 전시회 현수막이나 광고 간판, 버스 광고판 등에서 전시회 광고를 보게 된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전시회면 특히 더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인테리어, 애견용품, 육아용품 등 우리 생활에 밀접한 분야마다 연에 1회 혹은 2회 정도 전시회가 개최된다. 전시회 장소는 주로 코엑스나 킨텍스 등이다. 왜 전시회는 보통 코엑스에서 많이 열릴까? 그렇게 넓은 장소가 거기 밖에 없어서? 왜 민간 기업은 전시장을 짓거나 운영하지 않을까? 그 많은 전시회들이 다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전시장 운영자가 되기 위해선 초기 투자를 상상이상으로 많이 해야 한다. 민간투자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킨텍스는 토지가격을 제외하고 건축비만 1조 원 이상 소요됐다. 지방자치단체가 전시장 1만제곱미터를 짓는 데에도 보통 2천억원 이상의 예산이 사용된다.

256쪽 



단순계산으로는 무조건 적자이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는 전시가 일으키는 파생효과가 중요하기 떄문이다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오는 외국인 관광객, 전시회를 통해 바이어를 만나고 수출기회를 얻는 중소기업, 전시회 자체가 k-pop 처럼 한국의 브랜드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 등을 감안해서 전시회를 키우는 것이다.

258쪽

 


모든 업종에서 오프라인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오프라인 전시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수많은 물건을 온라인으로 구매합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거나 고관여 제품으로 온라인으로 구매하더라도 그 전에 오프라인으로 확인을 합니다. 예를 들어 대형 매장에 가서 신제품 냉장고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 집에 돌아와 확인한 모델을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오프라인 매장은 전시장의 기능만을 담당했을 뿐입니다. 업체 입장에서는 전시장 기능만 하는 매장을 상설로 운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프라인 전시회를 통해 제품을 확인하도록 돕고, 온라인을 통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도우면 되니까요.

275쪽 




 하나의 전시장을 짓고 운영하는 데에는 굉장한 비용이 든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시장은 민간이 짓고 운영한 사례가 없다. 그런데 2020년, 최초로 민간 기업이 짓고 운영하는 전시장이 등장했다. 바로 메쎄이상이 수원역 앞에 짓고 운영 중인 수원메쎄다. 메쎄이상이 전시장을 건립한다고 했을 때 업계에서는 "미쳤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이디어 였으니까.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아이디어 였으니까. 그런데 메쎄이상은 했다. 이미 전시업계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그 날부터 기존 업계의 많은 부분에 도전하고 개척하며 청개구리처럼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메쎄이상이니까. 기존 업계는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전시회를 매수하고 전시회의 광고를 바꾸고 새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수많은 전시회 운영을 통해 얻은 방대한 자료를 데이터화하여 더 질 좋은, 더 수익률이 높은 전시 운영으로 도약하는 일. 기존 업계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몇 번이고 해내왔던 사람들이 메쎄이상이다. 

 이 책은 메쎄이상이라는 회사가 전시산업에 뛰어든 배경과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 메쎄이상의 사내 문화와 분위기는 어떤지, 메쎄이상이 앞으로 가지고 있는 전시산업의 방향은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이들이 겪은 시행착오, 실패 등도 가감없이 담겨 있다. 승승장구해 온 것 같지만 난데없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도,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까다로운 상황도 있었던 메쎄이상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메쎄이상의 사내 문화에 대한 부분이었다. 


 

일찍 출근해라, 돈을 열심히 모아라, 워라벨은 없다. 모두 꼰대 소리를 들을 만한 주장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은 아니다. 우리 회사는 기꺼이 꼰대가 되고자 한다.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하는 메쎄이상은 삼시 세끼 먹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178쪽 




 생각은 진보적으로, 규칙은 보수적으로, 실행은 파격적으로. 

서로 부딪힐 것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의외로 위 조합은 상당히 잘 어울린다. 메쎄이상에서. 혼자서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걸으려면 사실 크게 어렵지 않다. 그냥 쌩또라이가 되면 된다. 누가 뭐라든지 마이웨이로 내 마음 가는대로 노빠꾸 직진할 뿐이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걷는 건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특히 여럿이 함께 실행을 파격적으로 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내문화가 중요하다. 여럿이 함께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려면 분명한 구심점이 필요하니까. 

 메쎄이상의 기업문화 중 최고 장점은 아이디어의 선순환이지 싶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 아이디어가 수용되고, 실현되고 나면 다함께 더 좋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또 그렇게 나온 좋은 아이디어가 수용되고 실현되는 아이디어의 선순환. 

 아이디어를 낸다 -> 아이디어가 수용이 된다 -> 아이디어대로 실현을 한다 -> 더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 아이디어를 낸다 -> 아이디어가 수용이 된다 -> 아이디어대로 실현을 한다 -> 더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 아이디어를 낸다

 여기서 함정은, 이 아이디어대로 실현을 할 때, 그것을 실체화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말처럼 쉽게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처럼 그냥 뚝딱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때로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수만이 동원되기도 한다) 같은 목표를 두고 손발 맞춰가며 일해야만 생각에 불과했던 아이디어가 비로소 손에 잡히는 현실이라는 몸을 얻는다.

이러하므로, 일반적인 회사에서 평범한 직원의 아이디어가 채택이 되고 그것이 현실화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회사의 임원부터 평범한 직원까지 모두가 그 아이디어에 자극받아 ‘그래, 이거 함 해보즈아!!’하고 팔 걷고 나서서 정말로 그대로 만들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디어를 낸 직원 뿐 아니라 모든 직원에게는 굉장한 동기부여가 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면 누구나 좋은 아이디어, 여러 번 고심하고 고뇌한 결과로 나온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려하고, 아이디어가 좋으니까 반영이 되고, 아이디어대로 나타난 결과물에 모두가 다시 긍정적인 자극을 받으면서 그 회사는 퐁퐁퐁 마르지 않는 샘처럼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 있고 에너지 넘치는 직원들의 회사가 된다.




 메쎄이상의 가치관과 비전이 확실해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전시산업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전에 일상적으로 찾아갔던 전시회들도 거대한 산업 흐름의 중요한 일부로 바라보게 된다. 무엇보다 메쎄이상이 가지고 있는 사내 문화가 인상적이다. 직원들의 커피값을 아끼기 위해서 아예 질 좋은 커피를 제공하고, 주말에 제발 책 좀 읽고 공부하라는 잔소리 시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회사. 꼰대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밥은 잘 챙겨먹어야 한다며 구내 식당 식단에도 관심을 갖는 회사. 세상에, 너무 재밌잖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