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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디자인하라
유영만.박용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2년 8월
평점 :
티비 프로그램 [금쪽 같은 내새끼]에 출연했던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부모가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한글을 깨우쳤다. 아주 어릴 적부터 유투브를 보면서 말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 아이더러 부모는 언어 천재라고 자랑스러워했으나 실상 아이는 언어를 요구, 거절 등에만 사용하고 사람과의 상호작용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할 뿐 아니라 부모와도 정서적인 언어 소통을 하지 못했다. 말을 할 줄은 알지만 제대로 쓸 줄 몰랐던 아이는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을 처방 받고 사회성을 기르면서 해당 회차는 막을 내렸다.
'이거 줘, 저거 싫어, 저리 가' 등 자신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언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과 언어를 통해 상호작용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는 부모와 친구 등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편안하고 일반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아이는 고립된 채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버린다. 아이 본인의 고통과 아이를 아끼는 주변인들의 고통은 수치로는 환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아이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투브와 넷플릭스로 언어를 깨우친 아이들. 사람의 기운과 정서적 교감이 배제된, 말을 주고 받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부재한 언어의 세계는 좁고 얕고 낮다. 이 얄팍한 세계를 품은 사람은 딱 그만큼의 프레임으로 외부 세상을 재단한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딱 이런 경우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언어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고, 단어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차원적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세상은 내가 가진 개념적 넓이와 깊이만큼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 인식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
책 14쪽
요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문해력, 독해력이 현저히 낮아져서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어디 어린 아이들만 문제일까. 어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글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맥락을 잡지 못하거나 호흡이 긴 글은 아예 읽지 않는 어른들도 얼마나 많은가. 한 권의 구성을 가진 책을 제대로 소화해 내는 어른의 수도 그리 많지 않다. sns에서 생산되는 언어만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아이들 이상으로 어른들 역시 깊고 넓고 높은 언어를 소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를 디자인하라] 이 책은 평범한 개인이 기존의 언어 세계를 바꿔나가야 할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서 썼다. 언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도 멈추고 소통도 단절되며 공동체 의식도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많아도 머릿속의 생각을 표현할 적확한 단어가 없으면 아이디어는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지 않더라도 표현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일 뿐이다(책 119쪽). 저자들이 이 책에서 수없이 강조하듯이 '언제나 언어가 문제다'. 언어의 세계가 풍요로워져야 할 이유를 책 전반에 충분히 이야기한 저자들은 part 2에서 언어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과학의 언어에 대해서 쓴 부분이었다.
나의 언어는 현재의 직업과 환경, 관심사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용접을 하는 사람은 그 분야의 언어로, 출판을 하는 사람은 그 분야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sns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와 매체에서 접하는 언어 역시 우리의 세계를 저 마음대로 지어버린다. 함정은 어떤 특정한 분야의 언어가 세계 전체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학의 언어가 그렇다. 마치 종교처럼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는 우리들의 시대에 우리가 과학의 언어로 사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과학의 언어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 정신, 정서의 세계를 내 안에서 고사시킨다면, 그것도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든, 지금보단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서는 그것도 아니면 세계 평화를 위해서든 편중, 편향된 언어의 세계를 허물고 넓게 지어올리는 확장공사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애정과 관심은 이해의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의 언어에 사고를 점령당한 것 아닐까? 감정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객관적인 입장에 서야만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과학의 언어로만 사고하면, 언어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책 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