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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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나라 없는 나라]를 몇 년 전에 읽었다. 그때의 감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좋은 소설이었다. 소설가 이광재의 수상소감까지도 너무나 멋졌다. 전봉준에 대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이렇게 깊은 설득력과 대단한 박진감, 무게감을 가진 소설을 또 볼 수 있을까. 이 작품 덕분에 ‘혼불문학상’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한국의 역사를 참신하고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재탄생시키는 소설. 그래서 과거로부터의 해방과 뿌리의 계승이라는 아이러니를 조화롭게 이루는 작품들이 ‘혼불문학상’의 특징이라는 것.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칼과 혀]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도 참 좋다.

 혀는 피로 되어 있다. 혀는 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혀는 피를 맛보기 원하는지 모른다. 피는 그것을 대하는 자, 구하는 자의 심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피는 요리의 재료이기도 하고, 생명력 그 자체이기도 하고, 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리는 피를 다룬다. 모든 재료는 피가 있다. 어떤 재료에는 그것이 숨의 형태로, 어떤 재료 에는 그것이 눈의 형태로. 그래서 첸의 아버지 왕테판은 첸에게 요리를 가르칠 때 ‘재료의 눈을 보고 먼저 그것을 제압’해야 한다고, 그렇게 제압한 후에는 재료를 섬세하게 다루어 새롭게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요리가 피를 제압하는 일이라면 전쟁 역시 그렇다. 그러나 전쟁은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죽여버리기 위해서 제압한다. 생명을 되살리는 요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이렇게 부딪힌다. [칼과 혀]는 전쟁에 대항하는 요리, 권력에 맞서는 미학에 대하여 그린 소설이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첸은 요리사다. 아버지 왕체판으로부터 물려 받은 거대한 도마를 사용하여 깊이 있는 요리를 만들어낸다. 이런 요리 실력을 무기로 첸은 관동군 사령관 오토조에게 접근하여 일본군인들을 독살하고 일본군 점령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 오토조는 전쟁에는 관심이 없고 자나깨나 문학과 요리에만 관심을 두고 다양한 문화재들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미식가다. 하루라도 빨리 본토로 돌아가고 싶을 뿐, 일본의 승패는 그에게 중요치 않다. 오토조는 첸의 요리를 즐기기 위하여 그를 지배하려 하여, 첸은 오토조를 요리로 길들여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첸은 오토조를 비롯한 일본 군인을 대상으로 음식에 독을 타 독살을 시도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오토조는 첸을 죽이는 대신 혀 절반을 자르고 부엌에 쇠사슬로 묶어 두고 요리만 하는 노예로 삼는다.
 첸에게는 길순이라는 아내가 있다. 조선 여인 길순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생존자다. 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첸의 아내가 되었다. 길순의 오빠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목으로 길순에게 오토조를 암살하고 그녀 자신도 순국하라고 강요한다. 길순은 오빠의 명령대로 오토조의 위안부가 되지만 오토조의 목을 찌르는 대신 그의 혀 절반을 깨물어 잘라내버리고 도망친다.
 본토에 원폭을 당하고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자 관동군 전체가 흔들린다. 더구나 소비에트 군이 바로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오토조는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수집한 문화재들을 함께 옮기려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오토조는 중국인들의 추격을 받는다. 첸은 그런 오토조와 같은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첸은 오토조가 도망치도록 돕지만 오토조는 길순의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투쟁했던 근대사를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이 책의 결말을 읽었다.
 이 작품 속에서 도드라지는 건 첸과 오토조의 충돌이다. 첸의 도마는 육중하고 오토조의 혀는 날렵하다. 둘은 시종일관 ‘요리’를 매개로 부딪힌다. 그러나 이 치열한 대립의 끝에 둘은 ‘삶의 고통’이라는 인류 공통의 연민을 공유하면서 놀라운 화해에 이른다. 오토조는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찌질한 인물인데 좀처럼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는 오토조가 가진 결핍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첸과 오토조의 화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첸과 오토조의 화해 덕분에 이 작품은 그 전의 다른 역사소설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관점이 새로운 역사소설로 말미암아 독자가 과거의 빚, 과거의 사연에서 벗어나 미래를 보게 만든다. 

 


 길순의 등장과 영향력이 이 작품에서 첸과 오토조에 비해 약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길순은 칼과 혀 이 둘 중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다. 길순은 칼은 썩히고 혀는 잘라내는 인물이다. 대의라는 허울을 빌미로 전쟁을 감행하고, 약자들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칼’을 거부하는 여성이며, 피를 탐하고 생명을 지배하려는 혀를 잘라내버리는 인물이다. 길순은 작품 속에서 고요한 폭풍의 눈으로 자리한다. 첸와 오토조의 극적인 화해의 배경에 길순이 있었고, 오토조의 죽음에도 길순이 있었다. 살육과 폭력의 전쟁 속에서 여성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풀꽃으로 계속 살아가고 부활하듯이.

 요즘같이 동아시아 관계가 시끄럽고 위태로운 시절에 이런 작품이 건설적인 미래 설계를 시작하는 작은 벽돌이 되면 좋겠다.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때로 소설은 진짜 현실보다 강렬하게 현재를 제대로 보여주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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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비망록 -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 개정판
양창석 지음 / 늘품(늘품플러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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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로이센 제국 시절에 세워졌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겼을 때는 승리의 개선문,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대결의 문이자 서독과 동독의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저자는 전쟁과 이념의 갈등의 역사를 지나 화해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를 이 책 제목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1989년 5월 2일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독일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공산정권의 붕괴, 최초의 자유총선거, 통일조약 등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공산정권과 민주정권으로 분열되었던 독일은 통일에 이르렀다. 독일 자국민들조차 대단한 역사였다고 회상하는 이 사건은 타국인 내가 보기에, 더구나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의 한 사람이 보기에 ‘기적’ 그 자체다. 지금의 한반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분단 70년, 이미 북한과 남한의 시민 정서가 이렇게나 다른데 과연 통일이 가능할까? 단절된 두 개의 사회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이런 우문에 대한 현답이라고 할만하다. 이 책을 쓴 양창석 저자는 28년 동안 통일부에서 근무했다. 특히 2년 반 동안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통일연구관으로, 그 후에는 독일통일연구단장으로 일했다. 이런 경험을 집대성하여 저자는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으로 나온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원고를 다듬으면서 저자는 독일 통일 주역들로부터 들은 생생한 증언들과 통일 과정에 참여한 국가 수반들의 회고담을 함께 원고에 반영했다고 한다.

 

 증언, 회고담과 함께 현장의 생생한 사진들이 실려 있는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통일’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나라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인 모두에게 ‘통일’은 현실이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한반도 통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 2011년에 출간되었다가 2020년인 올해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에게 ‘통일’은 과거도, 영영 오지 않을 미래도 아닌 현재상황이라는 것.

 

 

  이 책의 주인공은 동독 주민들이다.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흡수통일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동독 주민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다. 통일의 주체를 서독으로 보는 것이다.
7쪽

 

 그는 통제와 감시가 있었지만 100% 절대적인 통제는 불가능했다면서 조직 활동은 통제했지만 개인의 사고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비록 정치집단을 조직할 수는 없었으나 친구들끼리 토론 모임은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모임이 1989년 데모 확산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45쪽 

 

 

 독일 통일이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이 책이 짚어준다. 통일의 주역은 정부나,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아니라 시민사회라는 점이다. 물론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정부와 국제사회의 분위기, 주변국의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맞물려야 한다. 소위 말해 ‘때’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대로 이 때 즉,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절대 오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대박적 통일을 이루려면 국민 개개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독일 통일이라는 우수한 선례를 배우고, 현재의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읽고 개개인이 ‘통일’에 가장 적합한 사고가 무엇인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봐야 한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 대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정치나 국제 관계를 공부하는 대학생뿐 아니라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통일에 대한 사회적인 담론이 형성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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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작가 - 우리가 사랑했던
조성일 지음 / 지식여행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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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작품 외에 어떤 활동이나 업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것이 작가로서의 얼굴을 지어주진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고한 작가들을 떠올릴 때 그의 얼굴이나 그의 생활이나 그의 습관 같은 인간적인 어떤 모습이 아니라 그가 남긴 작품의 제목으로 혹은 그 속에 담긴 한 구절로 그들을 떠올린다. 


 서평 전문지인 <삶과책>에 연재되었던 ‘그리운 그 작가’시리즈가 책 [그리운 그 작가]가 되어 나왔다. 시인, 소설가, 수필가, 동화 작가 등 작고한 한국작가 28인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간 한국문학계의 별들. 그들의 얼굴과 생활, 그들이 살다간 모습은 어떠했고 그것이 그들이 작품과는 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차분한 어조로 이 책 [그리운 그 작가]는 전한다. 
 


 한국의 근대와 현대는 참으로 고단하고 위태로웠다. 여러 사회학자나 연구자 혹은 의사들이 한국이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집단적 트라우마를 앓고 있음을 수년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이 트라우마에 요동치는 한민족의 정서를 보듬고 지탱하고 다져온 것은 문학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서는 시와 소설, 동화와 수필 등 한국의 지난 역사 속에서 빛을 냈던 이 작가들의 작품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운 그 작가]는 그런 작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려준다. 박경리, 이효석, 백석, 이상 등 중학생 이상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아는 작가들뿐 아니라 권정생, 마해송, 홍명희 등 한국 문학과 문학사에 낯선 사람에게는 생소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모두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최명희 작가님의 얼굴을 몰랐는데 이 책에서 보고는 너무 미인이시라 놀랐다든가, 황순원 작가님이 무척이나 심지가 굳은 선비이셨구나 싶어 <소나기>가 더욱 좋아졌다든가, 이런 감상들이 28개의 꼭지를 읽을 때마다 이어진다. 작가들의 생애를 반추하면서 그들의 육필원고나 생가 등 사진 자료들도 적지 않게 수록하여 읽는 재미가 더하다. 신문용이었던 원고를 서적용으로 다듬어 내셨다는 저자의 수고에도 박수를 보낸다.

 

 한국 문학사의 세세한 맥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한국 문학계의 바탕이 된 문학계의 별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작품이 어떤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 책 [그리운 그 작가]를 통해서 알게 된다. 애초에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작고한 작가들을 추억하고 그리며 그들을 떠올려보는 데에 있었는데, 책이 되어 나온 지금 이 책은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잔잔한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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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
강혜은 지음 / 하영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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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학이 연기되면서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들어하실 분들은 유아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되면 그냥 저들끼리 노니까 돌봐주거나 간섭할 일이 적어 보이는데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은 경우가 좀 다르다. 일단 손이 많이 간다. 예전 회사 선배가 대전에서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는데 요즘 올라오는 언니의 인스타를 보면 대부분이 고된 육아에 대한 하소연이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오밤중 놀이터에서 남매가 뛰노는 사진을 찍어 올린 언니의 인스타에는 #집에들어갈생각이없음주의 #낮에는어떻게참았니 #그래놀아라놀아 같은 태그가 붙어있다. 나야 구경하는 입장이니 웃음이 나지만 현실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부모님들의 입장에서는 차마 울 수는 없기에 나는 쓴웃음으로 이 시기를 지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개학까지는 열흘도 더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코로나19가 영 잡히지 않고 있어 온라인 개학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교를 보내기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안 보내자니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부모님들의 한숨을 덜기 위한 놀이 책이 있다.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의 관심을 창의적인 놀이로 돌려보자는 취지의 놀이 가이드책이다. 재작년부터 교육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 꾸준히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 난독증, 낮은 문해력이다. 글보다 영상에, 사람보다 스마트폰에 친화적인 세대일수록 난독증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의 경우 문해력 수준이 심각하게 낮다. 너무 어려서부터 스마트폰에 몰입한 탓이다. 이미 여러 다큐멘터리를 통하여 고발된 이 위험한 현상에 뚜렷한 해법은 없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점진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개선이 필요할 뿐이다.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의 일환이다.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를 지은 강혜은 저자는 방송 작가로, 자유기고가로 일해왔다. 아들을 기르면서 그는 ‘아이들은 차가운 스마트폰이 아닌 사람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놀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우리 시대 아이들이 진짜 놀이를 즐기기를 바라며 이 책을 엮었다.

 

 책은 재활용품으로 새로운 걸 만드는 놀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놀이, 온몸으로 체험하는 놀이, 생활 소품들을 직접 만들어보는 놀이, 책과 연계한 놀이 등 다섯 개의 파트로 구성했다. 하루종일 스마트폰이나 TV, 컴퓨터 모니터 등으로 영상을 보는 것에만 꽂혀 있는 아이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거나 몸으로 뒹굴거나 상상해볼 수 있는 다채로운 놀이 방법들이다. 별다른 도구 없이도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만들기와 놀이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들끼리 직접 해볼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대부분 부모와 같이 하는 놀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품이 들어가니 힘이 들 수도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좋다. 엄마나 아빠와 같은 걸 하면서 느끼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유대감은 이런 때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엄마와 같이 지점토로 꾸몄던 보석함, 아빠와 함께 만들었던 풍차나 어린이용 의자 같은 것들. 그때 부모님과 같이 만들었던 장난감이나 소품들은 이미 부서지거나 망가져서 버린 지 오래지만 기억들은 힘이 세다. 굉장히 오랫동안 그리고 꽤 자주, 살아가는 동안 그런 기억들이 소환된다. 어릴 적 놀이의 추억은 아주 사소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런 사소한 시간들의 가치는 성인이 된 후에 비로소 빛이 난다. 스마트폰에게 붙들린 아이들이 이 책 [스마트폰보다 엄마표 놀이]에 실린 놀이들로 빛이 나는 기억들을 많이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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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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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_ 서철원 _ 다산책방_ 2019 (혼불문학상 9회 수상작)

 

 전라감영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형을 당했다. 나라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서학(천주교)을 섬기고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혔다는 이유였다.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가계를 허물었나이다.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사실만으로 별장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죄인으로 몰아갔다. 그것만으로 논리가 부족했는지 제사를 갈아엎은 죄를 덧씌워 울먹였다.
  ... 기일에 맞춰 올려야 할 제사를 망각하고 십자가를 집 안에 들였나이다. 그 십자가를 아비보다 높고 임금보다 거룩하다 여겼나이다.
12쪽

 

 정조는 서학인 치죄를 빌미로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노론의 속내를 경계하여, 서학인 치죄를 내켜하지 않는다. 서학인을 향한 노론의 칼날에서 아버지를 뒤주에서 죽도록 몰아간 그물을 떠올리는 정조는 왕권을 공고히 하길 원하나 그 길은 요원하다. 특히나 정조가 총애하는 정약용의 형제들이 연이어 서학인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임금은 자신의 실세에 더욱 위협을 느낀다.
 임금의 명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을 조사하러 갔던 최무영은 윤지충의 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발견하고 보고한다. 그림에 담긴 기운과 속뜻을 수상히 여긴 정조는 도화서 별제 김홍도를 불러 그림에 대해 조사하라 명한다.
 
“나머지 열두 명은 누구라고 하던가?’
“예수라는 자의 열두 제자라고 하였사옵니다.”
임금이 숨을 멈추고 최무영을 바라봤다. 예수와 그의 열두 제자는 그림 속에서 무엇을 구상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임금의 생각과 무관한 지점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 그렸을 그림을 상상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 또한 의문이었다.
36쪽

 

 한편 정약용은 신앙을 깊이 감춰두고 생존을 고민한다. 외사촌이었던 윤지충의 순교를 전해 듣고 정약용은 임금에게도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서학인을 향한 서슬퍼런 핍박의 칼날을 벗어나려 한다. 그런 정약용 앞에 기묘한 아이, 도향이 나타난다. 도향은 전라도에서 순교한 늙은 여령의 딸로 가야금 연주에 탁월하다. 특히 사람을 죽일 수 있기에 금기로 알려진 변주까지 스스로 익힌 천재다. 그 옛날 가야의 기운을 실은 연주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도향은 한쪽 눈은 파랗고 한쪽 눈은 노랗다. 정약용은 여령으로서도, 여인으로서도 도향을 마음에 품는다. 그러나 도향은 정약용이 그토록 피하려는 서학을 배워 ‘구원’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두가 평등한 길로, 평등한 세상으로. 

 

 약용의 입 속에 돋던 꿈같이 고요하고 물같이 평등한 나라, 예루살렘 어느 곳에 있다는 골고다 언덕에서 바람과 석양에 기우는 가나안 땅은 결국 허균의 이야기 속 나라 율도와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멀리 문장으로 임할 수 없는 나라를 생각할 때, 임금은 그림과 현실의 중간을 가늠했다. 목측할 수 없는 나라의 임금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인데, 저마다 가고자 하는 세상은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79쪽

 

 김홍도는 <최후의 심판> 그림 속에 숨은 비밀을 임금에게 보고한다. 300년 전에 과학의 힘으로 나라를 바꾸었던 장영실이 이 그림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림 속 13명의 인물 중 가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장영실이며, 이는 밀라노에서 직접 확인하고 왔다며 고한다. 300년 전 장영실은 조정을 떠난 후 아무도 모르게 밀라노로 건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만난다. 과학을 다리 삼아 뜻을 함께한 두 학자는 밀라노에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다빈치는 장영실을 그림 속에 넣어 그렸다는 것. 더구나 예수의 뒤로 보이는 산세는 인왕산이었다.

 

 조선 너머 너른 땅에서 살아갔을 장영실을 생각했다. 가본 적 없는 남의 나라에서 장영실은 조선의 긍지로 과학의 삶을 살다 갔을 것이다. 밀라노에서 별무리를 이끌고 날마다 혁신하는 삶을 살았을지 몰랐다. 현주일구에 비쳐든 해그림자를 따라 하염없는 사색으로 유일무이한 조선을 세상의 중심으로 원했을지 몰랐다. 그 삶은 한 덩어리 고뇌를 싣고 너른 세상에서 대동을 외치며 살다 갔을 것이다.
229쪽

 

 그러나 그림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보이지 않는 위협도 함께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둡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어디든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프리메이슨’이 조선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과 장영실은 이를 경계하고 경고하기 위하여 3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림으로 다시 조선에 돌아온 것이다.
 때마침 궁궐을 시작으로 향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향기가 없어지면서 미각을 잃고, 감각의 상실을 느끼기 시작한 임금은 국가에 큰 재난을 느낀다.
 
 위협은 또 있었다. 전라도에서 순교했던 여령에게는 도향이라는 딸과 함께 도몽이라는 아들도 있었다. 도향의 오빠인 도몽은 어머니의 순교를 지켜본 후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초라니패에 합류한다. 초라니패(박해무, 배손학, 김혁수, 김순, 이하임, 도몽)는 서학을 향한 핍박의 칼날에 희생된 저마다의 사연으로 나라에 복수를 하기 위하여 떠도는 자들이다. 이들은 임금이 향기의 회복을 위하여 벌인 연회에 공연단으로 잠입하여 시해를 꾀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해는 도향의 신기 어린 연주에 방해를 받아 실패로 끝나고 초라니패는 사헌부 감찰어사 최무영이 이끈 금위영 나장과 내금위에게 토벌당하여 모두 죽는다.

 

 

 김홍도의 목에서 임금이 풀 수 없는 의문과 의혹과 의심의 파편들이 무뚝뚝하게 들려왔다.
“하오나 <최후의 만찬>이 중요한 것은 빵과 물고기로 지은 오병이어 기적이 아니옵니다 .이교도의 아가페를 굴복시킨 인간 예수의 참된 눈빛을 바라보소서. 희생과 순교의 의미가 물처럼 출렁이며 그 물은 만 가지 별을 품고 있사옵니다. 순수한 결정만이 세상을 정화하고 조선이 잃어버린 향기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아마도 장영실은 훗날 조선이 처할 불운을 미리 내다보며 그림 속에서 파우스트 폴의 숙명으로 조선을 다독이고 있을 것이옵니다. “
(중략) 임금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파우스트 폴이라고 했느냐?”
“아마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옵니다.”
“비밀결사 조직이라고 둘었다. 조선에도 누군가 그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고...“
임금이 말을 아꼈다.
349쪽

 

청나라를 거쳐 윤지충에게 전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약용의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졌다. 임금을 경계로 좌우로 갈라선 여섯 신하와 여섯 외인들의 엇갈린 모습은 다빈치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카메라 옵스큐라 속에 모두는 <최후의 만찬>으로 맺혀 있었다.
407쪽

 

 정약용은 카메라 옵스큐라에 비친 임금을 중심으로 좌측의 여섯 신하, 우측의 여섯 일당(초라니패)의 구도를 보면서 삶과 죽음, 선과 악, 생성과 소멸 등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언제나 존재하는 동시성의 가치들을 발견한다. 임금 역시 그림 속에 담긴 것은 결국 동시성의 가치가 아니겠느냐는 김홍도의 보고를 듣고 깊이 사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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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율도국을 꿈꾼다. 임금으로부터 연약한 여령인 도향까지 모두가 그러하다. 가나안 땅으로, 구원의 처소로, 모두가 평등하고 자기 가치를 확인하며 존재를 존중받고 박해나 눈물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으로 건너가려는 각 인물들이 고뇌와 여정을 이 소설은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야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소설이 아니다. 한 쪽 노를 가지고 보트를 젓듯이,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를 맴맴 돈다.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버둥거리는 소설이라 스펙터클한 이야기 전개에 매력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답답하게 읽힐 수 있다.

 

 엑셀을 밟고 달리는 드라이브가 아니라 창문을 열어두고 손등을 스치는 미풍을 감지하는 사람에게, 아마 이 소설은 더 즐겁게 읽힐 것이다. 서학이라는 신앙과 그를 향한 핍박이 대두되지만 실상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한 종교 탄압이 아니다. 바꾸려는 자와 간직하려는 자, 다음 세상으로 떠나려는 자와 다음 세상을 부정하는 자, 죽음으로 삶을 증명하려는 자와 생존으로 죽음을 건너가려는 자. 어느 나라든, 어느 시대든 사상과 이념이 충돌하는 곳마다 이런 충돌이 벌어진다. 허균의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율도국이 예루살렘과 가나안의 모습에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력이 좋고 조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저 건너편의 나라까지 확장되는 이야기의 흐름이 좋았다. 그런데 너무나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들이 연이어, 어느새 정말 소설 같은 소설로만 느껴졌다. 이 상상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개연성, 입증물이 없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난입해 버린다. 다빈치와 장영실의 조우에 적응이 되지도 않았는데 프리메이슨에 파우스트 폴까지, 감당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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