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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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창조적인 존재다. 창조할 때에 자기 자신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순수한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이루어냈을 때 사람이 느끼는 희열보다 더 강한 건 없다. 밀레니엄을 넘어서면서 증폭되어온 사회 전반의 우울증이나 무기력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창조하는 대신 소비에만 몰입하도록 만드는 환경과 구조에 있다. 이에 대한 미약한 돌파구로,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취미 생활에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다.

 

 요리나 미술(그리기), 수공예 등 행위의 결과물이 눈에 보이는 활동도 있지만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활동도 있다. 독서가 그 대표적인 예다. 무언가를 ‘읽기’의 행위는 소비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그리고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단순한 소비 활동에 그칠 수 있지만) 읽기는 분명한 창조다. 이승우 소설가가 쓴 에세이 [소설가의 귓속말]은 왜 읽기가 창조 행위인지를 분명히 알려준다.

 

 


 문장을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에, 이제까지의 전 삶(에 의해 형성된 감각)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현재의 상태 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중략) 우울할 때와 명랑할 때 읽는 책이 같은 감상을 줄 리 없고, 열여섯 살 때와 쉰아홉 살에 읽는 책 역시 그럴 것이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문자 텍스트의 숙명이다.
55쪽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객석의 조건과 도서 환경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내가 보지 못하는 다른 쪽, 그리고 내 눈 앞의 기둥 앞에서도 누군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르게 문장을 번역해서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읽는 독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56쪽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그 해석과 감상의 결과는 제각기 다르다. 작가가 쓴 책에 담긴 문장들이 독자라는 렌즈를 거쳐 각 개인의 고유한 결과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이승우 소설가가 [소설가의 귓속말]에서 쓴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문장의 속성(책 54쪽)’은 언어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마다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읽기가 창조 행위라는 걸 어떻게 말로 입증(정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오던 나에게 이 책은 근사한 증거가 된 셈이다.

 

 [소설가의 귓속말]은 이승우 소설가의 신간이다. 소설 쓰기에 40년을 매진해 온 이승우 작가가 바라본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그런 소설을 쓰기 위하여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작가의 삶 등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년에 [모르는 사람들]을 읽은 뒤로부터 이승우 작가의 완전한 팬으로 노선을 정한 나는 그의 신간 [소설가의 귓속말] 앞에서도 내내 팬심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우’라는 이름 만으로 이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을 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첫 꼭지부터 [소설가의 귓속말]은 이 책을을 읽을만한 가치를 쏠쏠하게 보여준다.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정말, 첫 장부터 재밌다.

 

 

 

 최근에 책쓰기 카페를 통해서 만나게 된 예비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분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건,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으면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해부하여 글자로 드러내지 않으면 정말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승우 소설가 역시 [소설가의 귓속말]에서 소설 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로 ‘소설가 자신을 파헤치는’ 쓰기를 언급한다. 이런 소설 쓰기의 생리를 글쓰기의 특징 전체로도 확장해 보면 ‘글을 쓰면서 힐링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이해가 된다.

 [소설가의 귓속말]에서 이승우 소설가는 소설가로서의 철학이나 의식들을 담았는데 그 중에는 토마스 만, 허먼 멜빌 등 국내외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언급도 많다. 영감을 어디서 어떻게 얻는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무수히 고민한 주인공이 이승우 소설가 자신이기에 책 속의 글들이 더 진심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객석의 조건과 도서 환경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내가 보지 못하는 다른 쪽, 그리고 내 눈 앞의 기둥 앞에서도 누군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르게 문장을 번역해서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읽는 독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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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라이팅 훈련 : 스토리 라이팅 - 2nd Edition 영어 라이팅 훈련
한일 지음 / 사람in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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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피디 중에 수학과를 나온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취미는 수학 문제집 풀기다. 일을 하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학 문제집을 푸는 걸로 힐링을 삼는다고 한다. 누군가는 레고를 조립하고 누군가는 프라모델을 만들어서 진열하듯 자기에게는 수학 문제들을 한 장, 한 장 풀어 다 푼 문제집들을 쌓아 두는 게 비슷한 느낌의 취미 생활이라고.

 뭔 별난 취미도 다 있다. 저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맙소사 이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이야.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 STORY WRITING] 2nd Edition은 취미로 삼기에 딱 좋은 영어 쓰기 훈련 교재다. 영어 문제집이라고 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이 책은 영어 문제를 맞추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영어 쓰기 기술을 기르는 게 목적으로 탄생한 책이니까.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에 대한 개정판으로 나온 책이 이 책이다.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 STORY WRITING] 2nd Edition의 장점은 단연 ‘재미’다. 정말 재밌다. 아주 쉬운 단계서부터 서서히, 영어 문장 구조에 따라 표현을 늘려가며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쓰기 훈련을 하게 만드는 책인데 확장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고 이해가 쉬워서 자꾸만 다음 장으로 진도를 빼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5개 챕터에서 문장 훈련을 하고, 거기서 쌓인 표현들을 한데 모아 스토리 라이팅 훈련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반복되는데, 단연 가장 재미있는 건 스토리 라이팅 부분이다.

 

 

 

 

 

 영어로 쓰기 훈련을 위한 책이지만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 STORY WRITING] 2nd Edition을 다 풀어보면 쓰기만 아니라 읽기에도 상당히 좋은 작용을 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책으로 쓰기 훈련을 한 후에 영문 소설을 읽어보니 문장 구조가 더욱 빠른 시간 내에, 더 매끄럽게 파악이 된다.

 어릴 때 영어 일기를 써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이거 진짜 재미 없다’고 느꼈던 게 표현의 한계 때문이었다. 한국어로 머리를 맴도는 말들을 속 시원하게 영어로 쓰지 못하는 게 답답해서 결국 안 쓰게 되더라. 그때 받았던 조언이 일기쓰기부터 하지 말고 표현 가능한 범위를 확장한 다음에 일기를 써보면 재미있어질 수 있다는 거였는데, 지금 이 책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 STORY WRITING] 2nd Edition을 풀고 나서야 그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었단 걸 느낀다.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전략 없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부터 해버리면 영어로 쓰기에 흥미만 잃고 나가떨어져 버리기 십상이다.
 영어 문장을 전략적으로 해체하여, 뼈대를 잡은 후 살을 붙여나가는 확장 방식으로 쓰기를 훈련하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 STORY WRITING] 2nd Edition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영어 쓰기를 체계적이면서도 쉽게 익힐 수 있게 해준다. 안 그래도 방콕으로 몸살을 앓는 많은 분들에게 [영어 라이팅 훈련 스토리 라이팅 STORY WRITING] 2nd Edition을 추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어 쓰기 공부에 빠져들거라고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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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들 창비세계문학 2
리처드 라이트 지음, 김영희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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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미국 독자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공 비거 토마스가 ‘살인까지 하도록 만든 건 나 자신’이라고 소리치는 결말에 이르러 그를 변호하던 맥스조차 말을 잇지 못했는데, 아마 그 때의 맥스의 표정이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의 표정이었으리라. 백인 여성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낸 걸로도 모자라 그 사체를 난로에 넣어 태워버린 후, 그 여성의 집에 납치범을 가장하여 편지를 보내기까지 한 스무살 흑인 남성의 대범하고도 파격적인 범죄 행각도 충격적이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은 그 사건의 이면에 도사린 증오의 면면을 파고드는 저자의 묘사에서 온다.

 

 

 [미국의 아들]은 아주 깊고 예리한, 가혹한 인종차별의 실태와 그 결과를 그렸다. 리처드 라이트가 발견한 인종차별의 가장 파괴적인 본질은 현대사회 특히 현대 산업사회의 특성에 있다. 찰리 채플린이 1914년 <모던 타임스>에서 풍자한 인간의 도구화, 사물화는 리처드 라이트가 [미국의 아들]을 발표한 1940년에는 더욱 심화된 상태였다. 리처드 라이트는 ‘비거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라는 글에서 비거 토마스는 흑인일 뿐 아니라 백인이기도 하고, 세상 어디에나 있다고 썼다. 미국 뿐 아니라 나치 독일과 제정러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비거 토마스’의 감정 상태, 그 감정을 촉발한 사회 요소와 구조, 이 모든 것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며 촉발되는 피해자들과 범죄자들을 예리하게 관찰한 리처드 라이트는 그 관찰의 결과인 [미국의 아들]이라는 소설로 발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종의 문제를 다룬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미국의 아들]은 곧 산업사회의 아들이다. 인간을 철저하게 소외시켜 처절한 고립감과 열등감에 파묻고 결국 분노에 사무쳐 비윤리적이고 변태적인 일탈 행위에 이르게 만드는 우리들의 사회.

 

 


이 청년의 운명을 결정할 때 이 법정이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청년의 범행이 우발적으로 행해지긴 했지만 터져나온 감정은 이미 존재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년의 생활 방식이 곧 범죄였다는 점, 이번 범죄는 메리 돌턴을 살해하기 한참 전부터 존재했다는 점, 이번 범죄의 우발적 성격은 이 청년이 베일 뒤에 숨어 살다가 그 베일을 갑자기 확 찢어버리는 식으로, 그리하여 원한과 소외감이 폭발하여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미국의 아들] (큰글자)책 2권 176쪽

 

 비거 토마스는 변변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교양조차 익히지 못했다. 가정 내에서조차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는 주변인들과 그 어떤 소통과 교류도 나누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 소외된 채 살아왔다. 그런 비거 토마스가 인간다운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인물은 맥스였다. 그를 변호하는 데에 지원한 유태인 변호사 맥스와의 대화를 통하여 비거는 비로소 자기가 살인까지 하게 만든 자기 안의 자신을 입밖으로 꺼내는 데에 이른다. 맥스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면서 비거는 ‘살인까지 하게 만든 그것이 나다’라고 선포하듯 말하고 사형대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자신에게 말로 보여주어야만 자기가 한 것들이 무가치한 것들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살인은 자신이 선택한 행위였고 그것을 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인정 없이는 도저히 죽을 수도 없었던 비거 토마스의 정체성은 이토록 빈곤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하여 일말의 후회나 죄책감조차 없는 절대 악인. 그 악의 동기는 악감정이었고 그 악감정은 꽃 같은 생명을 앗아갔다. 자기 정체성을 알고 찾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공급받지 못했고 그럴 기회조차 박탈당한 비거 토마스를 통해 작가 리처드 라이트는 악인의 행위 자체도 흉악하지만 그런 악인을 배양하는 사회는 얼마나 더 흉악한 것인지를 묻는다.
 
 최근에 한국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을 기함시키는 범죄들로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이춘재나 오원춘 같은 연쇄살인범들이나 n번방의 박사들, 그리고 혐오범죄나 분노범죄가 번갈아가면서 뉴스가 되었다. 속된 말로 별 거지같은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제 웬만한 범죄들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정도. 그런 시국에 [미국의 아들]은 특정 인종이 받은 사회적, 국가적 핍박과 탄압이 아니라 인간을 착취하는 거대한 착즙기 같은 산업사회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읽힌다. 맥스가 비거 토마스의 변호를 맡은 이유는 그의 우발적 범행에 참작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거 토마스와 같은 범죄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그 범죄 동기를 낱낱이 해부하여 범죄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개혁하는 데에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둔다면 두 번째 메리 돌턴이나 베시(비거가 죽인 두 여성)는 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고인은 그 또래의 대부분의 소년보다 어립니다. 깊고 폭넓은 삶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에게 감정의 분출구는 일과 성, 단 두 가지였습니다. 이것들마저도 피고인은 가장 나쁘고 천한 형태로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큰글자) 2권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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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그릇 - 3만 명의 기업가를 만나 얻은 비움의 힘
나카지마 다카시 지음, 하연수 옮김 / 다산3.0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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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의 4월은 신기하고 묘하다. 날카로운 바람, 단단한 흙. 햇빛이 비추는 곳마저도 따듯하기보다 건조해서 봄은 대체 어디쯤 오는지 애를 태우던 게 3월이었다. 그런 산이 홀연히 변한다. 꽃나무의 이파리들이 말 없는 새의 부리 마냥 유순하게 돋고, 바람은 오늘 처음 태어난 것처럼 소나무의 손바닥에 뺨을 맞대어 온다. 그러면 산 전체가 소리들로 가득 찬다. 굵은 가지들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깨어나느라, 새들이 바지런하게 먹이를 구하느라, 봄꽃을 보겠다고 줄줄이 찾아온 등산객들이 산의 어깨를 밟고 오르느라 시끄럽다. 방학을 끝낸 학교마냥 별안간 소란해지지만 끝내 산 자체는 고요하다. 척박한 겨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산은 봄볕의 너그러움을 차분하게 받을 줄도,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을 품을 줄도 안다. 이렇게 받고 품어서 다음 계절로 향하는 순리를 아는 덕이다. 어느 여름에는 태풍으로, 어느 겨울에는 큰 불로 몸살을 겪었으므로 산은 태연하다. 천지의 이치를 경외하고 곤핍한 시기를 두려워할 줄 알기에 4월의 생장生長에 감사하면서 담담히 다음 계절을 예감할 뿐이다.
 몰라보게 변한 산의 4월을 바라보면서 왜 그 옛날 선비들이 산수화를 아꼈는지 알게 된다. 대나무를 닮고 싶어서 대나무를 그리고, 난초처럼 살고 싶어 난을 그렸던 그들의 시선은 산에 닿아서 저 산과 같은 그릇이 되고자 했으리라. 그들은 가고 없으나 산은 남아서 옛사람에게 보여주었던 모습 그대로 지금 나에게,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고민거리가 있을 때 산을 찾는 걸까?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를 고민할 때 우리가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산은 저 산만이 아니다. 짧게는 몇 백년, 길게는 몇 천년을 거쳐 우리에게 산이 된 책들이 있다. 책을 쓴 저자들마저 지금 없는데도 책은 남아서 우리와 만난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고전이 된 책들 중에 명나라 최고 정치가인 여곤의 사상을 집대성한 『신음어(呻吟語)』가 있다. 


 여곤과  『신음어』를 알게 된 건 일본 최고의 경영 컨설턴트인 나카지마 다카시가 쓴 [리더의 그릇]이라는 책 덕분이다. 3만 명의 기업가를 만난 나카지마 다카시는 성공하는 삶과 기업 경영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비결은 오늘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노하우가 아니었다. 여곤이 30여 년을 써서 펴낸  『신음어』의 많은 부분이 이미 조직 경영과 가치 있는 삶의 정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 년에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는 다독가로도 유명한 나카지마 다카시는 500년 전 탄생한 명나라 최고 고전인 『신음어』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풀어내 우리 시대가 절박하게 찾고 있는 진짜 리더, 21세기 성인聖人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리더의 그릇]에서 저자 나카지마 다카시와 여곤은 시종일관 ‘침착하고 깊이 있는 마음‘을 갖자고 피력한다. 감정 과잉, 감동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그래서 모든 것이 과잉된 나머지 무력해지고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진 우리에게 침착하고 깊이 있는 마음이란 대체 무언지, 감을 잡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책은 17장에 달하는 작은 주제와 그보다 더 세밀한 주제들로 촘촘하게 구성을 짜고 독자를 이끈다. 1장 성명편으로부터 17장 사장편에 이르기까지 저자와 여곤의 목소리가 번갈아 말을 건다. 생각은 깊게 하되 행동은 과감하게,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마음으로 상대와 세상을 살피고, 명예와 사리사욕 보다 덕을 구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장, 한 장을 넘어가면서 처음에는 모호했던 인물의 이미지가 점차로 구체화되고 선명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내가 이 책을 만나, 이 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인연에 탄복한다.

 

 

 여곤은 공자나 맹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덜 대중적인 인물이다. 『신음어』 역시 사람을 성인과 현인 등으로 구분하고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로만 보면 그 이전의 동양 사상들과 비교해 큰 특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지키기 힘든 것들을 지키라고 강조하는(책 36쪽) 철학자다. 공기와 햇빛을 잊고 살 듯 너무 중요한데 놓치고 사는 것들의 진짜 의미를 일러준다. 특히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더욱 그렇다. 삶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며 살아낸 순간들의 총합이다. 여곤 그리고 『신음어』를 설명하는 나카지마 다카시의 목소리는 ‘사람과 삶에 대한 메타인지’로 귀결된다. 

 

 

 


 삶은 거대한 곡선이다. 너무나 커서, 이 곡선의 궤적을 걷는 자에게 그건 직선으로 보인다. 마치 우리가 사는 공간은 평지이지만 지구는 둥근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곡선은 언제나 직선으로 보인다. 눈 앞의 것에만 매달리고, 얽매이고, 당장의 이익만을 좇는 건 직선의 삶이다. [리더의 그릇]의 두 저자는 그래서 생각하기를 권한다, 깊게 생각하기를. 당장 앞에 있는 것과 표면으로 드러난 것만을 바라보는 대신 멀리 보고, 이면으로 들어가 살피는 눈을 갖기를 권한다. 멀리 보기에 위기와 기회 모두에 흔들리지 않고, 이면을 살피기에 위선이나 쭉정이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렇게 ‘침착하고 깊이 있는 마음’으로 빚어진다.

 

 [리더의 그릇]을 읽으면서 넉넉한 산길을 걷는 듯이 마음이 흡족했다. 여곤과 나카지마 다카시가 제안하는 이상적인 인물에 한참 못 미치는 자신이 부끄럽지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지난날의 내 실수들이 민망하지도 않았다. 꾸짖고 야단치듯 꼬집는 게 아니라, 침착하고 진실 되게 이상형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정말로 그렇게 살아야 되겠구나.’를 느끼게 하니 “교육이란,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심어주는 행위(책 50쪽)”라고 쓴 나카지마 다카시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게 독서의 목표임을 강조했던(책 111쪽) 여곤의 집필 목적이 충분히 이뤄지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 그 깊은 곳을 살피는 세밀한 시선에 기대하지 못한 위로까지 건넨다.

 

 

 

 

 

 이 책에는 신의도 없고, 실속도 없고, 그저 권력만 쫓을 뿐인 정치가들을 경계하는 구절이 무척이나 많다. 코로나19가 집콕독서에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준 지금은 대한민국의 선거철이기도 하다. 자기 성찰과 삶의 태도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하여 [리더의 그릇] 보다 더 적합한 책이 많지 않을텐데, 심지어 이 책은 쭉정이 후보를 골라내는 돋보기까지 되어준다. 여곤은 타락한 정치가와 정치계에 실망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여 그 치열한 성찰의 결과로  『신음어』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리더의 그릇]이 들려주는 여곤의 목소리에는 참되고 깊이 있는 인물과 그런 인물들이 경영해 가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 그득하다. 아마 이 갈망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우리들이 지닌 소망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 인물이 정재계에 출현하기를 기다리는 지금, 어쩌면 이런 인물은 아주 작은 곳으로부터, [리더의 그릇]과 같은 책을 보며 성찰하고 공부하는 작은 리더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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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증언 - 소설로 읽는 분단의 역사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0
이병수 외 지음, 통일인문학연구단 기획 / 씽크스마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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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 국적의 한국인인 소설가 김석범이 1957년 발표한 소설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김석범은 일본 국적이라는 방패를 쓰고 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으나 한국 작가들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그래서 이 작품은 꽤 오랜시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유일한 작품으로 존재했다.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순이 삼촌]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몇 년 전에 [까마귀의 죽음]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은 아직 생생하다. 80년생 이후의 세대들에게 제주도는 그저 여행하기 좋은 섬, 힐링 삼아 떠나고 싶은 지역 정도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시간동안 제주도를 취급해온 시선은 너무나 난폭하고 험악한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 동안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의 공포였고, 그 이후부터 한동안 제주도를 향해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꺼낼 수 없는 탄압이었다. 옥빛 바다에 둘러싸인 섬의 역사에 나는 경악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기억과 증언]을 읽고 나는 경악한다. 4·3사건의 무대는 제주도만이 아니었다. 대구에서도, 여수와 순천에서도, 연천, 포천, 가평, 진도, 지리산.....

 

 [기억과 증언]은 ‘분단’을 주제로 한국의 역사를 조망하는 책이다. 몇 십 년 전의 역사를 이 시대의, 현재형의 문제와 숙제로 당겨오기 위하여 이 책의 지은이들은 ‘소설’을 도구로 썼다. [기억과 증언]을 쓴 통일인문학연구단은 통일이 단순한 정치 경제적 통합을 넘어 ‘사람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휴전선으로 잘린 건 한반도의 지형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절단부에서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낫지 않아 고름이 난 채로 한반도는 불통의 길 위를 침묵하며 걸어왔다. [기억과 증언]은 이 침묵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함을, 말로 꺼내어 주고 받아야 치유되고 이런 치유의 과정 없이는 진정한 통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한다.

 

 

 분단 문제 해결을 위하여 소통과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보고서 격의 책인 [기억과 증언].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소설’에 기대고 있다. 휴전은 역사적 사건이며 분단 문제는 우리의 현실인데 어째서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이 여기에 끼어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소설이 주는 다분한 감상과 감정에 기대자는 것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억과 증언]은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이 필요했기에 여러 소설을 파고든다. 빨치산,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대구 10.1, 국민보도연맹, 마을전쟁 등 육하원칙에 의거한 공적 정보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한국사의 아픈 사건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하여 [기억과 증언]은 여러 소설들을 빌려온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연수의 [뿌넝숴] 등 이름이 익숙한 작가들 뿐 아니라 나에게는 무척 낯선 최용탁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조갑상의 [물구나무서는 아이] 등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에서 비롯한 다양한 사건과 문제들을 주제로 한 소설 18편이 등장한다.

 

 왜 소설을 렌즈삼아 한국사를 들여다보는가?

 

 위에 열거된, [기억과 증언]이 연구하고 분석한 한국사의 고통스런 사건들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사를 배우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영향을 주는, 내가 받은 유산이자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것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의 기록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자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단’의 문제를 나의 현실 문제가 아닌 별나라의 골치 아픈 이슈로 치부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학은 역사와 나 사이의 간극을 단숨에 메꾼다. 문학은 쓰는 자는 물론 읽는 자로 하여금 다른 존재가 되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뿌넝숴]를 읽으면서 주인공 ‘나’에게 몰입하고, [순이 삼촌]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묘사하는 ‘순이 삼촌’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체감해본다. 그 주인공이 중국인이든, 나와 성별이 다르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학의 힘이다. 그래서 [기억과 증언]은 소설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고, 분단의 상처라는 걸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 수면 아래 깊은 곳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다이버처럼, 육하원칙의 이면으로 들어가 사실적이고 예리하게 그 역사의 본질을, 그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억과 증언]이 소설이 주는 감상에만 몰입했다는 건 아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므로 소설에만 기대면 이 책의 집필 의도와 다르게 실제 역사를 왜곡하거나 그 무게를 가볍게 혹은 너무 과장되게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감정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위하여 철저하게 경계하듯 각각의 보고서를 써나갔다. 당시의 사건을 체험한 개인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하여 소설을 인용하지만 실제 사건의 흐름, 시간의 순서와 영향들을 사료에 의거하여 정당하고 균형감 있게 서술한다.

 

 여순 사건의 전말을 읽으며 나는 이제 ‘여수 밤바다’를 낭만적으로만 부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예감을 했다. 국민보도사건의 일을 읽을 때에는 마치 영화에서 간첩이나 탈북자들을 살해할 때 보았던 장면이 겹쳐 소름이 돋았다. [기억과 증언]은 독자로 하여금, 분단과 관련하여 한반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교과서에 기재되는 글자, 피가 흐르지 않는 유물이 아니며 이 모든 일은 피와 뼈가 있는 사람의 일이자 우리가 현재형으로 겪고 있는 트라우마이고 이제는 청산해야 하는 유산이자 빚임을 충분히 깨닫도록 만든다.

 

 이 책 한 권 덕분으로 나와 대립하는 상대를 무조건 적폐, 친일, 친중 등으로 매도하며 비난 일조로 몰아붙여 매장해버리는 정치권의 난폭함이 오래된 역사를 가진 행태임을 알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어만 바뀔 뿐이다. 분단 시기에는 빨갱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흑백 논리와 공격성,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과 집단 히스테리 등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태 역시 분단 당시의 여러 사건들에서 기인한다. 이 모든 것들이 분단이 남긴 유산이었음을.

 

 통일인문학연구단의 말처럼 유산은 누리는 것도, 갚아야 할 것도 있다. 우리가 사회적 유산을 누렸다면 그 유산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분단이 남긴 문제는 과거, 우리 이전의 세대들이 못한 일로 남으면 안 된다. 우리 세대가 지금 바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여야 한다. [기억과 증언]은 우리 세대가 무엇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우선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한국인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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