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죽을 때 무슨 색 옷을 입고 싶어?
신소린 지음 / 해의시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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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그랬고 [디어 마이 프렌드]가 그랬다. 나이가 몇 살이든 지금 우리는 저마다의 노년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런 질문을 들게 하는 작품이 최근들어 부쩍 눈에 띈다. 노인인구 비중이 부쩍 증가하면서 노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역시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그 전에 노년의 삶에 대하여 고찰한 문학 작품이나 영화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늙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이 자명한 사실이 요즘처럼 커다란 소리로 울림을 주는 시대는 이전에 없던, 우리가 처음 만나는 시대이다.

 

 그 전에는 보통 ‘노화’를 방지하는 그러니까, 늙음을 지연하거나 거부하는 형태로 우리는 늙음을 다루는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방향이 매우 달라졌다고 느낀다. 늙음을 거부하는 건 무의미하다. 보톡스나 영양제 따위로 늙음은 지연되지도, 숨겨지지도 않는다. 시간과 노화의 관계는 너무나 정직하다. 하루가 가면 하루만큼 늙는 법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만큼 우리는 늙어간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결과는 대동소이하다. 나는 노인이 되어간다.

 

 아직 젊은 내가 ‘나는 노인이 되어간다’라고 해봤자 실은 크게 체감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무릎에 난 상처가 20대에는 이틀 만에 아물었다면 30대에는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는 정도. 사람이란 경험의 존재라 무엇이든 체감해보지 않으면 도무지 그것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느끼지를 못한다. 늙음이 얼마나 나의 세상을 바꾸는지를 체감하는 건 그것이 내 아버지나 어머니의 문제, 내 할머니의 문제 등으로 치환될 때다.

 

 신소린 저자는 [엄마는 죽을 때 무슨 옷을 입고 싶어?]를 쓴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좋은 마지막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엄마에게 선물한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쓸수록 뭔가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오히려 제가 선물을 받았거든요. 죽음으로 삶을 완성하는 데는,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의 인생에 중심을 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렇게 내가 선물하려 했던 죽음에서 ‘엄마가 원하는 죽음’으로 화두가 바뀌었어요.
‘엄마는 죽을 때 무슨 색 옷을 입고 싶어?’라는 질문은 이 책의 화두를 꺼내는 동시에 더 많은 질문으로 이어지게 해주었어요.
- 프롤로그 <엄마의 행복한 장례식> 중에서

 

할머니의 치매를 간호하는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노인과 늙음과 노년의 삶을 구체적으로 대면하게 된 신소린 저자는 우리가 저마다 도착하게 될 그 끝점에 대해 쓰게 되었다. 그 끝점에는 할머니가 가장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엄마와 이모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당도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당도할 끝점이라면 저자는 생각했다. ‘엄마가 원하는 죽음’으로 끝점을 장식하게 하고 싶다고.

 

 엄마가 원하는 장례식, 엄마가 원하는 끝은 무엇인지를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어느새 그 속에서 오고가는 소망과 바람, 기대 등은 엄마만의 것이 아닌 할머니의 것, 엄마와 이모들의 것 그리고 저자의 것으로 확대된다. 저자는 죽음과 노년의 삶을 준비하는 태도를 이 작은 에세이집에 뭉클하게 녹여냈다.

 

40대인 나는 작은 글씨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70대 엄마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힘들다고 한다. 90대 할머니는 5센티미터 문턱에 걸려 넘어지셨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가 불편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생활 터전이 젊은 시절에 멈춰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젊음이 정상이고 늙음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공간이나 디자인은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널려 잇는 것 같다.
우리가 평생,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가 지나온 젊음이 아니라, 다가오는 늙음일 것이다.
100세가 되면 어떤 것들이 필요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34쪽. 1장> 황천길 될 뻔한 ‘5센치’ 효도

 

 늙음도 공부해야 한다는 이 말이 참 좋았다. 누리고 즐기고 가꾸어야 할 것은 젊음만이 아니다. 어쩌면 청춘보다 노년이 훨씬 길어진 지금에야말로 우리는 늙음을 누리고 즐기고 가꾸기 위하여 대비와 공부가 필요하다.

 할머니의 치매를 간병하는 엄마와 이모들의 에피소드, 엄마와의 대화, 할머니와의 에피소드 등으로 꾸며진 이 책은 늙음과 죽음을 무척 유쾌하고 명랑하게 바라본다. 죽음이란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결국 당도해야 할 끝점이기에 어떻게 대비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다른 색깔로 펼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야기한다.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가족 전체를 병들게 하는 병으로 악명 높은 ‘치매’가 가족 속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관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 점도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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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공 찰떡이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심화(1.2.3급) 30일 개념 기본서 - 특별부록: 그림으로 읽는 한국사 연표, 전문가의 한 방 정리, 빈출 키워드&선택지
시나공 한국사 연구회 지음 / 길벗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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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익이나 토플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는데 한국어능력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는 그렇게 마음이 간다. 왜 그럴까? 언젠가는 꼭 한국어능력시험 그리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쳐봐야지, 그래야지, 그런 마음은 있는데 정확한 동기부여가 안 되니 만날 '봐야지'만 하고 안 보고 사는 듯...

 

이번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 교재를 처음 봤다. 신기한 건 시나공에서 만든 교재도 처음이라는 사실. 처음 교재를 보는데 '나에게는 아직 30일이 남아있소' 이 말이 얼마나 재밌던지. 이순신 장군 정도의 기개를 활활 불태우면서 공부해야 하는건가 싶었다. 겨우 한 달 가지고 이게 된다고? 반신반의하며 책을 열다가 책 내용을 보면서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 그래, 한국어능력시험도 2주면 준비할 수 있다는 후기가 줄을 잇는 판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한 달이면 준비할 수 있다는 건 왜 말이 안되겠는가. 결국 마음의 문제다.

 

 

- 시나공 찰떡이해 속 특이점 하나> 빈출 키워드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마음만 있으면 안된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거지. 시나공에서 만든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찰떡이해] 앞부분에는 시나공이 이 교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대략 설명한다. 실제 수험생들인 독자 테스터가 있고 그룹 인터뷰도 하고 실제고 독자들이 시나공 교재로 공부해서 합격률이 얼마나 되는지 측정까지 하면서 교재를 만든다. 베이킹만 과학이 아니라 한능검 셤공부도 과학이다. 마음과 전략이 모두 있으면 목표달성을 하기가 훨씬 수월해지는 건 당연지사.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찰떡이해]에는 특이점이 두 개가 있다. 한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든 브로마이드나 내지 속 형광펜 처리, 도표 등등은 그동안 여타의 다른 교재에서도 많이 봤고 익숙하다. 그런데 30회 이후 최근 47회까지의 기출문제의 모든 키워드를 추출ㆍ 분석하여 빈출 키워드로 이론을 구성, 시작 전 핵심 키워드 제시, 본문과 정리표에 이어지는 핵심 키워드를 모은 <반출 키워드>와 핵심이론을 정리 요약한 <한방정리> 소책자는 진짜 굿굿!!! 책 속의 책 형태로 삽입되어 분리해서 사용할수 있는 작은 책자들인 이 두 권 덕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찰떡이해]를 공부할만한 재미도 있고 효율도 돋는다.

 

 

시나공에서 교재를 수험생 입장에서 세심하게 만드는구나 싶었던 게, 한능검이 어디에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를 정리해주거나 30일 계획표를 짜서 실어주고 올해 바뀐 한능검 내용과 시험일정까지 이 책 한권에 다 넣었다는 점이다. 한능검을 봐야지 마음만 있고 구체적인 계획이 아무것도 없었던 나조차 '어, 그래, 해볼만 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 이 정도면 뽐뿌질 제대로 오는 교재다.

당장 한능검셤을 급하게 준비해야 하거나 올해는 꼭 한능검 봐야하는 분들, 꼭 시나공 교재로 공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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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들 - 허용오차 제로를 향한 집요하고 위대한 도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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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결혼할 때 사셨던 세이코 시계는 아직도 건강하다. 디자인도 심플하고 너무 예뻐서 일하러 갈 때 종종 그 시계를 차곤 한다. 사실 시알못이라 뭐가 좋은 시계고 나쁜 건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그동안 세이코 시계를 몇 번 수리하면서 아주 오래되었고 믿을만한 시계라는 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이야 시계란 악세서리, 시간은 휴대폰으로 확인하는 시대다. 시계라는 기계와 시간이라는 개념이 귀하거나 값비싼, 구하기 힘든 어떤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런 시대를 열기까지의 역사를 흥미롭게 정리한 책이 있다. [완벽주의자들]. 이 책은 시계로 시작해서 시간으로 마친다.

 

 베이킹을 하다보면 0.05g까지 재야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는 전자저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맛있는 먹거리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건 전적으로 정밀한 계량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벽주의자들]이라는 책은 말한다. 정밀성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발명된 것이라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편집증적인 외곬수들의 몰입과 기술이 ‘정밀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완벽주의자들]은 이 정밀성 탄생의 원류를 ‘시계’로 잡았다. 정밀한 시계가 많은 선원과 선박들을 구하고 정확한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기능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은 보다 더 정밀한 세계로 나아간다. 사이먼 윈체스터는 ‘보다 더 정밀함’을 위하여 허용오차 제로를 향해 나아갔던 지난 수백년의 역사를 소설처럼 써내려갔다.

 

 [완벽주의자들]이 제일 마지막 장인 <10장 균형의 필요성에 대하여>에는 ‘세이코’ 시계가 등장한다. 뱃사람들의 항해를 위하여 정밀함의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마중물이 되었던 시계는 1900년대 일본에서 제국의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저자는 세이코 시계라는 인위적 정밀함과 대비되는 자연미가 동시에 숭상되는 일본을 예로 들며, 정밀함이라는 기술이 우리의 세계를 낫게 하지만 그 기술만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인류는 흔히 매끈하게 마감된 경계선, 완벽한 베어링, 공학계만 아는 평평함의 수준에 감탄하고 집착하지만, 자연의 질서 역시 똑같이 중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연이 세상을 장악해서 정글의 새파란 풀이, 어린 푸른 대나무가 모든 발명품을 휘감아 덮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땐 허용 오차가 영국 실링의 두께이든, 양자의 직경보다 작든 아무것도 상관없어진다.
 정밀하지 않은 자연 앞에서는 모든 것이 비틀대고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밀하다고 해도.
 407쪽

 

 

 이렇게 모든 꼭지를 마감한 후에 맺는 말에서 이 책은 시간과 현대의 정밀성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간의 계측 여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계측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세상, 심지어 중력까지도 달라진다. 시간은 자연이고 정밀하지 않다. 그것을 자신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계측하려는 사람들이 이 정밀하지 않는 시간 때문에 정밀한 기계를 만들어낼 뿐이다.
 단순한 교양서, 역사서인줄 알았는데 기술만 이야기한 책이 아니다. 우리가 정밀함을 구하는 이유는 정밀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것 아닌가.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책의 머리말에 있는 이 말이 굉장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과학의 목적은 무한한 지혜의 문을 여는 게 아니라, 무한한 실수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
-베를로트 브레히트 - <갈릴레오의 삶>(193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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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비상구 - 기후위기 시대의 에너지 대전환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4
제정임 엮음 / 오월의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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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생존을 위한 앎을 호소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마지막 비상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의 학생과 교수진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 매체 <단비뉴스>가 2017년 9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연재한 탐사보도 <에너지 대전환, 내일을 위한 선택>을 묶은 책이다.

 

 “이런 상상도 못했던 사태는 우리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책 182쪽 후쿠시마에 거주했던 현지인의 전언

 

 대형 산불이나 태풍과 같은 이상 기후, 후쿠시마 원전 같은 역대급 사고들의 뉴스를 읽으면서도 이게 내 현실의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다. 책의 중반을 읽다가 후쿠시마 이주민의 전언을 읽고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해서 반쯤 누운 자세에서 일어났다. 상상도 못했던 사태가 너무나도 많이 벌어지고 있어서 현실감이 없었던 것일까? 


 기후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사건‧사고를 전하는 국제뉴스의 댓글란에는 ‘적어도 내가 살 동안에는 지구가 버텨주겠지’ 따위의 반응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이미 백세 시대에 접어들었다. 싫든 좋든, 칠십 세가 넘으면 죽음을 직면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3막을 준비하고 꾸역꾸역 백세를 생존하게 된 사람들이란 말이다. 기후 위기와 에너지 전환에 대한 관심과 고민은 후세를 위한 고결한 배려나 선택 같은 게 아니다. 이는 오늘 당장의 문제이며 내 생존이 걸린 이슈다. [마지막 비상구]에 실린 기사들이 궁극적으로 호소하는 건 ‘지금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당장 우리부터가 멸종’하게 된다는 명료한 현실이다.

 

 


 

 모든 일엔 대가가 있다. 에너지 사용이 공기로 호흡하는 일처럼 쉬워진 우리 시대에 미세먼지 때문에 외출시에는 꼭 마스크를 쓰게 되었고 전력을 공급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부작용이 삶을 무너뜨리게 된 건 우연일까. 쉽고 편하게 에너지를 공급하고(받고) 그를 통하여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하기 위하여 지나온 시간들의 대가가 바로 이 현실이다. [마지막 비상구]는 이 현실을 아주 명명백백히 취재하여 독자 앞에 제시한다. 기후 위기에 무척이나 둔감한 한국, 한국 원전의 문제점, 핵마피아의 유착과 비리 사례 등 일반 독자나 보통의 시민으로서는 접하기 어렵거나 접할 수는 있더라도 무지 애를 써야만 하는 현실의 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보도 기사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며 독자가 자연스레 일깨우게 되는 건 기후 위기와 에너지 전환의 문제는 어느 한 국가나 특정 도시인이 아닌 세계 공동이 대응해야 할 문제라는 점 그리고 특히 한국인이 더욱 민감하고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 한국인이 더욱 민감하게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하느냐? 현재의 우리는 너무나 둔감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물자를 아끼고 환경 보호에 애를 쓰는 나조차 [마지막 비상구]를 읽기 전에는 몰랐다. 한반도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대지가 아니라는 사실, 경주와 포항의 원전은 너무나 오래되었고 위태롭다는 사실, 더구나 노후한 설비를 운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안일하고 안전에 불감해 있는데다 사고시 주민들을 구할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매뉴얼조차 없다는 사실, 한국이 세계에서 온실가스 배출 7위이며 플라스틱 사용량은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원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원전 기술의 탁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술이 탁월하다고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괜찮을 거라는 낙관으로는 후쿠시마 원전을 덮쳤던 ‘쓰나미(와 같은, 모든 종류의 자연 재해)’를 예측할 수도, 방어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원전을 가동하면서 생기는 핵폐기물 소위 원전쓰레기를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핵폐기물은 썩지도, 분해되지도 못한다. 콘크리트 창고 안에 최소 10만 년간 봉인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런 쓰레기를 만들어서 땅 속에 묻어두겠다는 생각자체가 이젠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 최소한의 10만 년의 관리가 필요한 맹독성위험물질을 우리가 만들고 묵인하는 건 무책임한 일(책 105쪽)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원전이 아무리 탁월한 기술로 값싼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물을 만들어내는 이상 이제 원전은 다른 에너지 생산 기술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핵폐기물의 위험을 절감하는 시민은 왜 이다지도 적은가?  


 [마지막 비상구]의 2장 찬핵 세력의 거짓말을 읽으면서 정말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부분은 한수원을 비롯한 원자력 관련 기관이 언론 집단에게 뿌린 보도 협찬비 내역이다. ‘안전한 원자력 발전’이라는 인식을 만들기 위해 언론사들은 수백억 원을 받고 방송과 인쇄물을 통해 그들의 나팔수 노릇을 했다. 그 돈이 과연 어디서부터 온 돈일지를 생각하면 부아가 난다.

 

 고영철 제주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2018년 3월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는 언론의 본질적 역할이 무너졌다는 것”이라며 “원전 문제처럼 중요한 이슈에 대해 언론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고 대가성 기사를 써댄다면 시민들은 왜곡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책 239쪽

 

 그래서 시민들은 다양한 채널로부터 정보를 얻고 스스로 옳은 방향을 생각해 나가야 한다. 그런 다음 움직여야 한다. 온오프라인으로 온갖 채널이 범람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편향적인 시각을 갖기가 더욱 쉬워졌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비상구]와 같은 책은 말한다. “시장 지배력이 큰 언론사들이 자본의 입맛에 맞춰 에너지 전환의 진실을 왜곡하는 상황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언론이 이 문제에 바르고 강한 목소리를 내주고,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지속 가능한 미래를 고민해주신다면 더할 수 없이 기쁘겠습니다. (책 521쪽)” 물론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을 무조건 믿고 지지하자는 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기사는 다만 하나의 가능성을 알릴 뿐이다. 기후 위기와 원전 위험에 대한 현실적 진단과 에너지 전환이라는 청사진.

 


 

 [마지막 비상구] 3부는 국내외의 성공적인 에너지 전환 사례를 취재했다. 스웨덴, 독일, 한국의 제주도와 서울 등지에서 태양열, 풍력 발전소(발전기)의 운영 사례를 꼼꼼하게 담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가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시끄럽게 한 태양열 발전에 대해서 정성을 들여 알아보고 공부해봐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생긴다. 더불어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덮으며 이 책이 쏘아올린 ‘에너지 전환 문제에 대한 환기’라는 결실과 함께 이런 보도집을 완성하기 까지 쏟은 기자들의 노력에 감탄을 느낀다. 모든 일이 돈과 권력이라는 기준과 프레임으로 짜깁기되고 있는 지금, 이런 기사와 책들로 말미암아 보통 시민의 눈은 정말 주시해야 할 것을 주시하고, 주목해야 할 것을 주목하고 종국에 행동으로 움직여야 할 때 함께 움직이게 되기 마련이다. 


 지속가능하고 존속가능한 지구에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 지금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소박한 소원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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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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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좋았던 어제, 엄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다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잠시 신호대기 중이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보시던 엄마는 차가 멈춰 있는 동안은 말이 없으시더니 차가 출발하자 조용히 혼잣말을 하셨다. “그런데 왜 전쟁기념관이라고 했을까? 나는 항상 저 말이 이상했어. 전쟁을 기념해야 하는 건가? 무슨 좋은 날처럼?” 나는 대답으로 적당한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운전만 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쟁은 기념해야할 게 아니니까.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쇠에 생긴 녹은 쇠에서 나서 쇠를 먹어치운다. 자전거 어딘가에 작은 녹이 슬었을 때, 그걸 내버려두면 결국 자전거 전신이 다 녹이 슬어 버린다. 녹슬어 폐물이 된 자전거처럼 전쟁은 녹이 되어 우리를 먹어 치워왔다. 전쟁은 사람에게서 나서 사람을 먹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말 수만 마디로 전쟁의 포악함을 설명한들 그것을 직접 겪어보는 단 몇 초의 순간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전쟁기념관을 세우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들을 꾸준히 쓰고 발표하고 읽고 토론하면서 생각과 기억 속에 전쟁의 이러저러함을 간직하려 한다. 우리는 저토록 무서운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탓이다.

 

 

 


 

 

 전쟁이 정말 두려운 이유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후에 남겨지는 것들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남고 싶지만, 살아남은 이후에 겪어야 할 일들이 더욱 혹독한 게 전쟁 아닌가. 심하게 녹이 슨 자전거는 아무리 닦아도 녹슨 흉물로 남듯이, 전쟁이라는 녹이 삼킨 후에 남겨진 폐허란 어떻게 바라보아도 폐허일 뿐 새로운 시작이니 희망이니 평화니 하는 빛나는 것들로 감히 덧칠할 수 없다. 그 폐허는 하인리히 뵐이 [천사는 침묵했다] 속에서 묘사한 청소하는 장면과 같다.

 

 

 그녀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고투를 계속했고, 물 양동이를 부지런히 날랐다. 속으로는 무의미한 짓거리라는 걸 알았다. 청소를 할수록 지저분한 얼룩이 드러났고, 부스러기가 자꾸만 새로 떨어져내렸다. (중략)
 엄청나게 많은 먼지와 석회가루가 다시 떨어질 테고, 그렇게 바닥에 쌓인 석회가루가 물을 먹으면 다시 소생해서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하얀 얼룩으로 변할 테고, 그런 얼룩은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터였다……
책 174-175쪽

 

 

 전쟁 중에 아기를 잃은 레기나는 전쟁의 포화로 석회먼지를 뒤집어쓴 침실을 청소하려 나섰다. 그러나 양동이로 끝없이 물을 퍼나르며 침실 바닥으로 떨어진 먼지와 쓰레기들을 치웠지만 깨끗한 물을 퍼서 들어올 때마다 기이함을 느꼈다. 청소하지 않은 바닥은 고르게 어두운 색으로, 청소한 바닥은 도리어 얼룩덜룩해져서 추레하고 볼썽 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이 고역을 끝낸 후에 남는 건 녹초가 된 몸과 무의미한 짓거리를 했다는 마음의 괴로움이다. 폐허는 치우고 치우고 또 치워도 쉽게 깨끗해지지 않는 오물이다. 폐허가 된 마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스 슈니츨러는 서점 관리인 자격증에 합격하고 휴가를 즐기던 중에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그와 어머니가 함께 살던 집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주택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한가한 휴일의 그 날, 한스의 인생은 한스와는 상의도 없이 전혀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었다. 학교와 책 밖에 몰랐던 한스는 참전 중에 결혼을 하고 결혼한 아내와는 제대로 된 신혼 생활도 하지 못한 채 열차 폭격으로 아내를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도, 가족도, 그가 알던 풍경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무너진 건물, 불타서 식은 재, 석회가루와 돌 부스러기, 축축한 오물 그리고 냄새였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고 하지만 폐허가 된 한스의 마음 속에서 비극은 현재진행 중이었다. 아니, 한스의 마음 뿐 아니라 모두의 마음 속에서 저마다의 비극이 진행 중이었다. 하인리히 뵐은 전쟁 자체의 폭력을 고발하는 대신 전쟁 후에 남겨진 폐허의 이면을 면밀히 묘사함으로써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하게 전쟁의 비극을 그려냈다. 보통 사람들의 비극을 묘사하는 장면마다 빠지지 않는 건 오물 냄새다. 하인리히 뵐은 눈으로 그려지는 풍경 속에 눈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냄새를 입혀 전쟁 후의 폐허를 전달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면 신을 찾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신을 부르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소식 앞에 신은 대체 무얼하고 있냐고 원망한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 신의 말은 죽었고 그 침묵의 크기만큼 전쟁은 소란하다. 어쩌면 사람을 먹어치우는 전쟁이 그토록 시끄러운 탓에 신은 그 자신조차도 원치 않는 침묵 속에 빠지는 건지도 모른다. [천사는 침묵했다]에는 신을 머리를 진창에 처박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종교적 임무를 띠고 나치당에 들어가 부역한 피셔 박사는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안전 속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지식인이다. 전쟁 중에 ‘인생이 근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던 인물이며 전쟁이 끝난 후로는 만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서 역겨울 정도라고 독백한다. 그러나 억세게 운수가 좋은 이 사람 역시 오물 냄새를 벗어나지 못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행태를 통해 구축한 재물을 넣어둔 금고를 여닫을 때마다 그는 돈에서 냄새를 맡는다. 사창가라는 개념이 떠오르는 냄새, 피 냄새, 오물 냄새.

 

 

 

 이런 오물 냄새 속에서 한스는 레기나를 만나 서로의 아픔을 동감하며 두 번째 사랑을 결심하는 한편 나치 부역자인 피셔 박사는 천사를 짓밟고 선채로 승승장구한다. 폐허가 된 사람들과 청산되지 못한 전쟁의 흔적, 건물의 잔해더미에서 돋은 풀포기 같은 사랑. [천사는 침묵했다]는 전쟁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 그 이면의 고통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미약한 뿌리를 간신히 내린 풀꽃 같은 희망도 있지만 천사를 진창에 틀어박고 자신들은 고고하고 역겨운 삶을 이어가는 적폐도 있다. 비애로 가득한 전쟁의 참담함보다 우리가 더 면밀하게 바라보아야 할 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이상으로 파괴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천사를 침묵했다]를 통해 청산해야 할 것은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그의 작가적 양심은 무척이나 단호하고 날카로웠고 이는 그의 작품과 사회 활동에 잘 드러난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 하나인 [천사는 침묵했다] 말미에 실린 임홍배 교수의 작품해설은 작가 하인리히 뵐의 활동과 그의 작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대 초반에 전후의 폐허문학을 돌이켜보면서 하인리히 뵐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언명한바 있다. 전후 냉전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았던 뵐은 독일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뵐의 문학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에 대한 탐색은 그만큼 더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249쪽 

 

 

 뵐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평생에 걸쳐 탐색하는 데에 빌린 도구는 문학이었다. 사람의 존재는 언어라는 형체를 입고, 이 언어가 직조되어 완성된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살아있다. 생물이다. 자연 생태계에는 생물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과 유형의 생물이 공존하여 생태계가 더욱 건강하고 보다 오래 존속된다는 개념이다. 문학의 생태계에도 생물 다양성이 적용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류의 문학이 공존하는 세계는 보다 건강한 언어들의 세상이지 않을까. 전세계의 다양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굴, 재평가하여 한국 문학계에 공급하고,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다시 그리려는 창비세계문학의 시도는 바로 이 생물 다양성의 개념과 통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려 했던 뵐의 작가적 지향점 역시 이러한 시도와 통한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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