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되는 말, 득이 되는 말
쓰다 히데키 & 니시무라 에스케 지음, 김아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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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동서고금 불변의 진리. 요즘 같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예민한 세대일수록 '말'은 엄청난 화력의 무기가 되기 쉽다. 사람은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정보에 더 쉽게 반응한다는 연구결과까지 들지 않더라도 나쁜 말이 얼마나 강한 파괴력을 가지는지 공감하지 않는 이 없으리.

 

 

일본에서 유명한 상담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저자들이 합심해서 책을 낸 동기도 '말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말이 무기가 되는 상황이다. 나쁜 말은 타인이 자신에게 혹은 자신이 타인에게 전달할 때만 무기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독이 된다. 내가 뱉은 나쁜 말에 나 자신도 상처 받는 법. [독이 되는 말 득이 되는 말]은 나도 살고 남도 살기 위해 말에서 가시도 빼고 돌도 빼고 이리저리 다듬은 다음에 꿀까지 바르라고 권한다.

 

 

-불쾌한 정보는 전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에서 어떤 정보를 가르쳐 주었는데 도리어 상대방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 때가 있다.

이는 그 정보가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내용이어서 그렇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선심을 쓰는 척하며 일부러 불쾌한 정보를 흘리는 사람도 있다.

p59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얼마나 많은 말실수를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지 알게 된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고 읽기도 쉽다. 한 권을 읽는 짧은 시간동안 그간의 내 말버릇을 책에 비춰 보는 건 매우 유익한 일이다. 다만 저자가 일본인이다 보니 일본사회의 관점이 매우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감사는 한 번 이상 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앗, 역시 일본 사회! 라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내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건 문제가 있지만 몇 분 간격으로 감사를 거듭하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게 한국 아닌가. 일본적 정서에만 적용될 듯한 내용이 있으니 너무 이 책의 안내를 있는 그대로 따라하는 건 좋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실용서로 매우 충실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가끔 부적절한 예로 보이는 내용들이 있긴 하지만, 잘못된 대화와 바로 잡은 대화를 함께 실어 우리들의 일상적인 대화들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안내하는 페이지들은 분명 재미도 있고 도움도 된다. 책이 100이라도 읽는 이에 따라 결과는 10에서 1000까지 천차만별이 되는 법. 부드럽고 매력적인 대화가로의 변신을 꿈꾼다면 두시간만 내서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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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설득당하는가 - FBI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심리학
조 내버로 & 토니 시아라 포인터 지음, 장세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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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멘탈리스트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패트릭 제인은 탁월한 프로파일러다. 외모, 말투, 자세, 손짓, 눈빛 등등 그저 잠깐의 대화를 나누거나 옆에서 잠시 지켜보는 것만으로 다른 이들의 성격, 성장 배경, 현재 환경, 감정 상태 까지도 정확히 읽어내곤 한다. 뿐만 아니라 숨기고 있는 말을 내뱉게 만드는 능력도 대단하다. 마법같은 그의 능력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다. 그의 활약상을 시청하다보면 절로 그런 능력에 흥미가 돈다. 저런 능력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어디서 저런 걸 따로 배울 수 있나? 어디 나도 한번??

 

  인간은 진짜를 숨기는 데 가장 탁월한 동물이다. 전 생명체를 통털어 인간보다 본모습을 더 잘 감추는 존재는 없다. 일부러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자주 본심을 숨긴다. 옷가게 사장은 남는 게 반이 넘어도 손님에게는 늘 '남는 게 없다'고 말하고 부장의 싫은 부탁 앞에서 사원은 늘 '괜찮습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생존이 달렸는데 어쩔 수 있나. 날이 갈수록 본심을 숨기는 방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우리가 죄다 패트릭 제인이 아닌 이상에야 그 속에 들어있는 본심을 확인하는 것 역시 더욱 어려워진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우리 속담은 인간 본성을 꿰뚫는 불변의 진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상황이 이쯤되니 이런 책에 관심이 안 갈수가 없다. [우리는 어떻게 설득당하는가]. 간단한 인사만으로도 어느새 나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까다로운 거래처와도 수월하게 거래를 진행하는 사람이 있고 난감한 상황도 부드럽게 처리하는 묘한 능력의 사람이 있다. 특별히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똑똑한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그런 이들은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하는걸까? 무엇이 결정적인 설득력이 되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FBI 츨신의 국제 협상가이자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조 내버로는 이 보이지 않는 설득력에 대한 답을 책으로 냈다. 그는 인간이 말 속에 감춘 내밀한 속사정이 몸짓, 표정, 외모 등의 비언어에서 발현된다고 말하며 신간 [우리는 어떻게 설득당하는가]에서 이 비언어의 세계를 읽는 (동시에 비언어적 능력을 발휘하는) 비언어적 지능을 발달시킬 방법들을 제시했다.

  

 '비언어'라는 것이 워낙 방대하고 또한 여전히 연구 중인 분야가 많기 때문에 정확한 공식을 제시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 거짓말을 할 때에는 눈이 왼쪽을 바라본다든가 하는 등의 세간에 알려진 많은 팁들은 사실이 아닌 것들도 많고 사실인 것들도 때에 따라서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며 저자는 공식을 제시하기보다 비언어의 흐름을 읽는 데에 더 중점을 뒀다. 또한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비언어적 능력 중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것은 '진심'이라는 마음가짐임을 자주 강조했다. 그는 '감정은 논리를 앞선다'고 하면서 부정적 비언어를 읽어내고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보라고 권한다. 이 책이 '비즈니스 심리학'으로 주체성을 잡고 있기 때문에 주로 비즈니스 환경의 예를 들어 설명하긴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비언어적 지능은 업무능력이라기 보다 인격을 갈고닦아 빛나게 하는 자기계발 능력으로 보는게 더 옳겠다.

  

 늘 자기 몫은 못 챙기는 실속 없는 사람이나 번번이 남에게 뒤통수를 잘 맞는 사람에게도 이 책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 더 넓게 한번쯤은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먼저는 '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하루 종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책이니까. 그렇게 나를 비롯한 내 환경의 비언어들을 읽고나면 이제 조금씩 이 책이 설명했던 설득의 비언어를 발휘하게 될 터다. 그렇게 되면 뭐 드라마의 패트릭 제인처럼 심령술사를 방불케 하는 초능력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특별한 능력의 매력적인 사람에는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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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도둑 놈! 놈! 놈! 읽기의 즐거움 6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개암나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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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장 자끄 상페의 꼬마 니콜라는 나에게 굉장한 자극이었다. 아, 그 유쾌하고 천진하고 개구진 이미지들, 그 구미 돋는 에피소드들. 생각해보면 꼬마 니콜라의 세계는 나한테 친구였다. 나는 나홀로 집에의 케빈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어른 도둑들에게 맞서거나 구니스의 무리들처럼 대단한 보물을 발견하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몸을 던질 수는 없다. 나의 현실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세계들도 나에게는 친구였다. 그러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런 가까이 하기엔 초큼 위험한 친구들이라고 봐야 했다. 아주 친근하고 부딪히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그런 친구는 따로 있었다. 꼬마 니콜라 같은.

 

 

프랑스와 독일 문학은 물론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이론적으로 줄줄 읊을 능력은 없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프랑스는 몰랑몰랑한 푸딩의 느낌이 늘 어려 있고 독일은 투박하고 건조하지만 편안한 느낌이 번져 있다. 나에게 프랑스의 꼬마 니콜라를 연상케 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우체국 도둑 놈놈놈]은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와 독일, 두 친구를 대표한다. 꼬마 니콜라처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세계도 어쩔 수 없는 말썽꾸러기들이 주인공이다. 작가가 그린 한 무리의 이 영민한 아이들은 유리창깨기나 물건 훔치기 등 비생산적인 일에 힘을 빼지 않는다. 치려면 대형사고를 빡!!! 쳐야지. 이들은 감히 실종된 소녀를 찾겠다고 덤빈다. 꼬마 니콜라의 소박하고 낭만스런 장난기에 비하면 박력이 잔뜩 들어간 아이들이다.


실종된 소녀를 쫓아 우체국 도둑까지 잡게 된 이 친구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그린 이 야무진 아이들은 소녀도 찾고 학교에서 그들의 정의로운 도전을 인정 받는다. 아이들의 맹랑한 시도는, 단순한 눈요기가 아닌 스토리 전개의 한 부분으로 적극 등장하는 작가의 그림 때문에 더 재미있다. 그의 글은 담백하기만 한데 그의 그림은 담백한데다 유연하고 해학적이면서 유쾌하다. 이 그림은 초등학생들에게 장난스러운 이 이야기가 조금 더 흥미롭고 다이나믹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아마 이 작가의 이러한 천진함은 안데르센 상, 린드그렌 상을 수상하게 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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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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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충격적인 경험이었는데, 예전에 미싱용 윤활유를 보리차인줄 알고 마셔버렸던 적이 있었다. 너무 목이 말랐던 한여름 오후, 마침 컵에 말간 보리차가 담겨 있길래 꿀떡 삼켰더니 기름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쯤에야 '아, 이거 기름이구나' 느낌이 왔다. 옆에서 화들짝 놀라신 아버지는 왜 기름을 마시고 있냐며 내 손에 쥔 컵을 빼앗아 가셨다.

기름을 그것도 공업용 기름을 거침없이 들이키고 나서는 물론 가장 먼저, 헉;;; 설마 내장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보다 나중에 조금 더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보리차와 미싱용 기름의 색이 그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름 눈썰미가 좋아서 물건을 잘 구분한다고 자신하며 살았던 나였는데 보리차와 미싱용 기름의 빛깔이 감쪽같이 닮았다는 걸 온몸으로 부딪혀 배우게 될 줄이야.... 물 같은 기름, 기름 같은 물. 마셔보기 전에도 (내가 기름을 물이라고 인식하던 그 순간에도) 기름은 기름이고 물은 물이었으나 내 인식 속에서 기름이 물이었다가 다시 본질인 기름의 모습으로 돌변했던 이 순간의 과정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인식) 속에 파고들어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 실재로부터의 충격이자 내 예상과 감각을 뛰어넘는 현실과 실재의 충돌이었다.

 

 

[로쟈와 함께읽는 지젝]이 왜 그렇게 어렵고 난해했을까. 로쟈와 함께 지젝을 읽고 나서 나 혼자 지젝을 읽으면 더 좋으리라 짐작했던 나는 틀렸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보다 혼자 읽는 지젝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더 재밌었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를 진단한 슬라보예 지젝에게 아직 실재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이 실재를 접하고 난 이후에 느낄 그 삭막함과 황량함을 따서 '실재의 사막'이라는 감각적인 제목을 붙였겠지만 이 책을 '실재의 사막'이라기보다 '실재의 오아시스'에 더 가깝다. 삶을 화려하게 하는 쪽은 가상화된 현실일지 모르나 삶을 생동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척박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사상이, 그의 글과 생각이 마음에 든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아니어서가 아니다. 지금 세계의 주류와 그 지배층의 검은 속내를 들추고 그것은 거침없이 드러내서만도 아니다. 세계1차 대전의 잔혹한 시대의 끝에서 젊은이들에게 의식과 사유의 확장을 격려했던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를 연상케하는 울림이 그의 글 속에 있어서이다. 지젝은 911 테러라는 명제를 확고부동하게 놓아두고 그 앞뒤 (과거와 미래)로는 움직이되 그 바닥 혹은 그 허공에 있는 모든 공간을 과감하게 파헤치고 끈질기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라'는 주문을 걸고 있다.

 

 

'생각하라'는 화두는 사실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책에서 나아가 광고에서까지 우리는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접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디어에서 '생각하라'고 주문할수록 우리는 길을 잃는다. 무엇이 생각인가?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미래를 내다보는 것,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만이 우리시대,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생각의 전부일 수 없다. 과거는 어제의 현실이었고 내일은 미래의 현실이므로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뒤집어봐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과연 테러인가.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가. 누구의 전쟁인가. 아니, 이것이 전쟁이라고 할수 있는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의 글와 메시지에 부응해 나의 현실에 어디까지가 실재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재라고 밝힌 전부를 나의 실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밝힌 실재 역시 뒤집어 볼 일이다. 극한의 회의 속에서 실존을 구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몫만은 아니다.

 

세계가 더 긴밀하게 연결될수록 국가와 기업 뿐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서로 유기적으로 더 가깝고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 흐름은 지구가 그 자체로 부서져 근본적으로 와해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숙명이다. 지구라는 별에 발 붙이고 사는 인간들의 숙명이다. '생각하라'는 숙명. 보리차로 인식하고 있던, 저 컵에 담긴 황금빛 액체가 정말 구수한 물인지 아니면 미싱용 기름인지 아닌지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만으로 알 수 없으면 마셔봐야 한다. 분명 보리차일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혀와 생각에 미끄덩하고 기분나쁜 충격이 올지라도, 마셔봐야 확인된다면 마셔봐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주문은 그것이다.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전부라고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무엇이 실재인가 손을 더듬어 컵이라도 손에 쥐어 볼 것인가. 911테러는 그것을 목도한 만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와 곧 우리의 생각 내부에서의 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었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젝의 말처럼 궁극적 위협으로부터 적어도 우리 자신이 그 위협에 동조하는 일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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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죄악, 탐식 -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플로랑 켈리에 지음, 박나리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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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뉴스를 읽다가 경악했다. 뉴스의 주된 내용인즉, 살이 일단 찐 후에는 어떻게든 살을 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찌기 전에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세상에나... 전세계 다이어터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많은 다이어트에 실패했던 것인가 싶기도 하고. 삼순이 말처럼 '세상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것이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쉽다. 많이 먹지 말고 맛있는 것을 조금만 먹으라고. 어떤 여자 연예인은 '딱 세 입만 맛있다'고 말하며 그 뒤로는 맛이 없으므로 더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해 그 프로를 함께 시청하던 나와 친구 모양을 코웃음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맛있는 음식일수록 더 많이 먹게 되지 않던가. 입에 쓴게 몸에 좋다는 건 상식이지만 입에 달면 손이 더가는 것 역시 상식이다. 미식은 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이 미식과 대식, 나아가 먹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욕망인 탐식은 그래서 인류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 아주 긴밀한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나보다. '식'이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탐식'의 역사 또한 전혀 이상하거나 생소할 게 없다. 프랑스 역사학자 플로랑 켈리에는 이 탐식의 역사에 주목했다. 그런데 그냥 많이 열렬히 먹어치운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다. 탐식을 죄라고 규정한 유럽의 종교 사회에서 유럽인들은 외면할래야 할 수 없는 '배부름과 맛'의 세계에 어떻게 탐닉해 왔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 역시 종교적인 엄격함과 그 속에 은밀히 자리해온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제7대 죄악, 탐식] 이다.




책은 중세의 신학자들이 규정한 '탐식은 죄'라는 명제에 대한 해설로부터 출발한다. 성경 어디에도 탐식이 죄라는 부분은 없었다. 먹어선 안될 음식을 구분한 하나님의 법은 신학자들의 필요에 의해 어느새 먹는 것을 탐하는 것이 곧 죄라는 해석으로 귀결되고 이러한 신학자들의 규율은 이후 유럽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프로테스탄트 문화인 북유럽과 가톨릭 문화인 남유럽에서 식사와 미각적 쾌락의 관계는 여전히 다르다. 덴마크에서 돼지고기는 맛보다 유연성이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사회학자 클로드피슐러가 진행한 최근의 조사(2008)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잘 먹는다는 개념을 쾌락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식품의 산지와 연결시키는 반면 영국에서는 영양분과 비타민, 약으로서의 식품에 연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본문 p85~86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먹는 것을 신분에 따라 나뉘었다. 평민들은 언제나 배를 곯았던 탓에 '코케뉴'라는 환상의 나라에 대한 민담이 널리 퍼졌다. 반면 귀족들은 무한정 먹고 살을 찌우는 것으로 미덕을 삼았다. 특이한 것은 신부와 같은 성직자들 역시 귀족처럼 엄청난 식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탐식을 죄로 정의하는 규율에 많은 해석의 차이를 용납해, 식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왔던 가톨릭 시대는 15세기를 지나면서 금욕적이고 원칙적인 개신교와 부딪힌다. 탐식에 관대했던 가톨릭을 비난하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유럽의 탐식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이후 점차로 '대식'은 경멸 당하고 '미식'이 사회 주류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오늘날에 이른다.

 

저자는 2000년에 걸친 유럽 탐식의 역사를 설명하고 이를 위해 문학, 미술 등의 자료들을 꼼꼼히 열거하고 인용한다. 특히 책에 실린 선명한 미술작품들은 음식에 탐닉해온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재미있는 점은 그간 중세 미술작품들 대부분이 아름다움이나 위용, 감동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책에 실린 탐식의 그림들은 전반적으로 감동보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게 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음식에 심취해 정신없이 먹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울 턱이 있나. 그들 스스로 죄라고 못박은 탐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고발당하고 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방탕한 대식과 16세기 이후 발달한 미식 문화가 이미 지나간 역사라고만 할수는 없다. 탐식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거리에 가득찬 온갖 음식점과 티비 광고에서 연이어 흘러나오는 식품 광고들. 신문과 잡지 심지어 블로그마다 맛있는 음식점과 먹음직스런 식품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마시고 씹고 먹고 즐기길 열렬하게 권하는 한편에선 건강을 위해 살을 뺄 것을 걱정하는 이 사회가 두툼한 살집을 자랑해야 아름답다고 여겼던 유럽 중세와 크게 다를 것이 무언가.

 

 

식욕과 미각적 쾌락이라는 섭리는 본능적인 신체적 욕구와 번식하고 번성하여라는 신성한 명령에 부응하는 셈이라고 했다. 예수회 신부 뱅상 우드리가 서술한 내용도 이와 유사하다.

"자연은 우리가 필수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하게끔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식물의 섭취는 미각의 쾌락과 연관되어 있는데, 미각의 쾌락이 없었다면 약을 먹을 때 느끼는 혐오감을 음식을 먹을 때에도 느꼈을 것이다."

본문 p99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먹는 즐거움이 인간으로서의 다른 존엄을 깡그리 무시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죄가 아닐까. 먹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든 삶이 먹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칠면조 두 마리를 먹어치우고 저녁 식사를 하러가는 왕이나 좋은 식재료와 요리법, 훌륭한 쉐프들을 줄줄이 꿰면서 그와 같은 해박한 식견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은 저급하다고 폄훼하는 미식가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제7대 죄악, 탐식]은 '먹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본능적이고 절대적인가를 알려주는 동시에 어디까지 사람을 추하고 방탕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 맛(식)을 사랑은 해도 맛에 미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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