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드 파리 청소년 모던 클래식 1
빅토르 위고 지음, 박아르마.이찬규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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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에는 이 비극의 주인공이 콰지모도라고 생각했다. 에스메랄다가 베푼 단 한번의 호의에 구원을 얻은 불쌍한 꼽추, 콰지모도. 괴팍하고 사납지만 순수하고 강인한 영혼을 가진 이 생명체가 이 비극의 주인공이라고만 여겼다. 에스메랄다는 허영에 눈이 먼 멍청한 여자였고 클로드 부주교는 비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변태 아저씨로만 생각했다. 아... 그러나! 명작이 왜 명작이던가. 언제 읽어도 그 시대의 것인양 생생하고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인양 새로운 작품이 명작아닌가. 콰지모도의 비애에 흠뻑 취해보자 싶어 다시 읽게 된 노트르담 드 파리(노틀담의 꼽추가 아니다!)는 역시 명작이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번역본이 대부분 '노틀담의 꼽추'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이 작품의 처음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콰지모도다. 첫 씬부터 병신 교황으로 등장해 비장한 엔딩까지 장식하는 인물인만큼 당연히 그 주목을 안 받을 수 없겠다. 하지만 이 콰지모도의 등장에 앞서 콰지모도가 노트르담의 영혼 중 하나가 되도록 포석을 깐 이가 있었으니 바로 클로드 부주교다. 콰지모도가 노트르담에 살 수 있도록 거둔 사람이며 에스메랄다를 향해 뒤틀린 연정을 품고 결국 그녀와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진중하다못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부주교야말로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비극의 시작이자 중추다.

 

 

콰지모도나 에스메랄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부주교는 당연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식의 경악할만한 인물이겠지만, 부주교의 성장과정과 그의 환경을 생각해볼때 이 부주교가 에스메랄다에게 펼친 잘못된 방식의 사랑과 그의 선택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남들보다 비상한 머리, 혈육에 대한 엄격한 애정(여기에는 콰지모도까지 포함), 진지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그에게 '신부'라는 직업은 최선인 동시에 최악이었던 것 같다. 몸의 욕망조차 학문의 힘으로 이겨내는 타입의 천상 학자인 이 사람에게 '신부'는 최선의 직업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겠지만 정서적으로는 최악의 환경에 그를 가뒀다. 사람들과 접촉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그의 환경은 그의 폐쇄성을 더욱 강화했고 신부라는 직업에 받는 경외는 자연스럽게 그의 고압적이고 오만한 성품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가진 '혈육에 대한 엄격한 애정'이 내재한 그의 깊은 고독은 어떤 출구도 만나지 못한 채 35년을 갇혀있었다. 그 자신도 몰랐던 이 깊은 고독이 에스메랄다를 향해 폭발하면서 노트르담 드 파리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당연하게도) 그의 애정을 거부했고 난생 처음 뼈아픈 거절을 경험한 이 부주교는 결국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야 만다.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족 - 동생과 콰지모도-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소유하려고 했으나 이런 방식의 연모가 끝이 좋을리가 없다. 난생처음 겪는 애정과 애증(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도, 증오해 본적도 처음이리라) 속에 이 불쌍한 총각은 결국 사고를 친다. 그래서 사람이 책만 보면 안된다. (만일 클로드 부주교가 시장의 상인이나 하다못해 거리의 악사였다면 아마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이토록 기형적인 연정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선택은 구구절절 틀린 것이었고 에스메랄다는 그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나는 노트르담 구석구석 서린 그의 고독함에 연민을 느꼈다. 이 불쌍한 사람. 자신의 외로움을 자신마저 알아주지 못했던 가여운 사람. 당신도 노트르담의 가련한 영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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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리엄
로렌 올리버 지음, 조우형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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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드라마(만화 원작)의 주인공 호타루는 연애세포가 죽은 직장녀다. 퇴근 후 남자를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보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아무거나 대충 걸친 채 마루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이키는 게 더 좋은 여자다. 남녀 간의 밀고 당기는 감정소모도 귀찮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예쁘게 차려 입는 데에도 취미가 없다. 혼자라도 세상은 살만하고 곁에 누가 있으면 신경 쓰이는 일 투성이라 끈적한 관계는 이쪽에서 먼저 사양이다. 세상은 이 여자를 건어물녀라 부른다. 비쩍 마른 거란 말이지.

 

17년하고도 11개월 동안 레나의 세계가 그랬다. 바짝 마른 그것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혼자다. 밥을 주는 누군가는 있어도 정서적으로 먹이고 입히는 누군가는 없다. 남편이나 친구도 없다. 함께 살고 대화를 나누고 종종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함께 웃지만 그들은 동거인이나 직장 동료 혹은 지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세계가 그렇다. 부모는 아이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친구는 친구에게 절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해리포터의 세계에서 ‘볼드모트’라는 이름이 가진 극한의 공포 -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는 레나의 세계에서 ‘사랑’이 짊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세계의 사람들은 18살이 되면 반드시 ‘치료’를 거친다. 정부는 아모르 델리아 너보사가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인간의 중추신경에서 거세해 버린다.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질병 ‘아모르 델리아 너보사’의 예방이라는 미명 아래 삶의 모든 것이 통제되는 그 곳, 포틀랜드. 건어물녀 건어물남의 천국을 찾는다면 바로 여기, 건조하고 삭막한 포틀랜드가 있다.

 

 

[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의 작가 로렌 올리버는 이미 사춘기 소녀의 애잔한 성장기 속에 사랑과 선택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적이 있다. 두 번째 작품인 [딜러리엄]에서는 그 고민의 폭이 보다 광활해졌다. ‘사랑은 무엇일까’ 단순히 호흡이 가빠지고 극심한 망상과 정체성 혼란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 및 식욕부진과 불면증을 동반해 결국 사람을 망치고 마는 어떤 것일까. ‘사랑이 없다면 인류는 안정한가’, 사랑이라는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인류는 합리적이고 완전하고 안정한 세계를 구현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진실 속에서 살고 있는가.’ 내가 믿는 모든 사람은 과연 믿을만한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지식은 어디까지가 완전한 진실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알 수 없는 공포와 고독함에 시달리는 나는, 나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이 겨우 17년하고도 11개월을 살았을 뿐인 외로운 여자아이 레나에게 쏟아진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독자는 레나와 더불어 이 막막한 질문 세례 속을 바짝 긴장한 채 달려간다.

 

그러나 옹골찬 책 두께와 진지한 질문 폭격에 미리 질려 책의 첫 페이지를 열지 못할 정도로 겁먹는 이는 없어야 한다. 어쨌든 이 책은 ‘사랑’이야기다. 남들의 타박과 멸시에도 아랑곳없이 딸에게 전적인 애정을 쏟은 엄마의 사랑이야기이자,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절대 겪게 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그녀를 지키려는 청년의 사랑이야기다. 그 사랑이 결코 질병이 아님을, 오히려 또 다른 세계, 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완전한 세계로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여자(더 이상 여자아이가 아니다)의 사랑이야기다. 그러니 일단 책을 펴자. 레나가 알렉스를 만나는 장면부터는 아마 책을 놓으라고 옆에서 누가 사정해도 놓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병은 나를 죽일 거다. 이게 나를 죽일 거다. 나를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다.

P255

한밤중에, 알렉스와 키스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온 레나의 독백 중에서

 

 

그렇다. 사랑은 우리를 죽인다. 20년을 살아온 사람은 20년의 시간이 죽고 30년을 살아온 사람은 30년의 시간이 죽는다. 내 머릿속의 이성이 죽고 상식이 죽는다. ‘사랑’이 나를 덮치기 전까지 내게 소중했던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죽는다. 사랑은 끝내 우리를 다 죽일 것이다. 그리고 곧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무언가로, 생기 있게 빛나는 누군가로.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 없던 적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내가 모르는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이제 겨우 시리즈의 첫 권, 레나는 이 ‘사랑’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사랑을 지켜내기 위한 사투의 길이 끝날 즈음, 레나는 그녀를 괴롭히던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것이고 사랑 안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에서든, 단순히 스펙타클한 연애소설의 관점에서든 우리는 그녀의 세계를 그린 이 시리즈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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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우) - 김용택 시인의 풍경일기 여름
김용택 지음, 주명덕 사진 / 늘푸른소나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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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직도 가끔 나는 그렇다.

비가 그야말로 콸콸콸콸 쏟아지는 그런 까만 날이면 샤워를 하듯 비를 맞고 싶어진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자주 그랬는데, 특히 여름방학 때 그랬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고무줄을 하다가, 모래밭에서 철봉을 타다가, 학교 뒤뜰 잔디밭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면 나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았다.

달아오른 뺨이 식고 온몸을 세차게 부딪혀오는 빗방울이 내 귓속에 잔뜩 들어와 앉는다.

그렇게 잠시 비를 맞는 동안 어디 냇물에라도 뛰어들었다가 나온 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는다. 그리고 날이 갠다.

어둑어둑한 그늘이 저만치 날아가고 햇살이 축축해진 옷 위에 닿으면 나는 마치 부활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와 햇살이 뒤섞인, 야생의 동물이라도 된 듯한 그 살아있는 냄새.

번데기를 벗어던진 나비가 젖은 날개를 말릴 때 이런 느낌일까. 껍질을 깨고 막 볕을 만난 병아리가 이런 느낌일까.

김용택 시인의 강연회를 찾아가서 물었다.

"선생님... 여름이 뭔가요? '여름은 000다' 라고 써주세요"

이 책을 들이밀었다.

선생님은 아주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적고 웃으셨다.

'여름은 눈이 안온다.'

ㅎㅎㅎㅎㅎㅎㅎㅎ

여름엔 비가 온다. 그래서 기쁘다. 얼마든지 비에 젖고 야생의 동물처럼 폭삭 젖은 몸을 햇볕에 말릴 수 있는 그런 계절이다.

이 기쁜 '비'라는 제목의 에세이에는 그러나 자연이 주는 기쁨, 계절이 주는 뿌듯함만 있지 않다.

'미쳐 버린 매미', '많이 굽은 소나무' 등 경고와 교훈의 메시지가 함께 있다.

물론 봄, 가을, 겨울의 다른 시리즈도 그랬긴 하지만 (미쳐 버린 매미 때문인지) 유독 이 에세이에서는 열광하는 햇살아래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있다.

이 책이 좋은 건 그 때문이다. '비' 때문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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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 -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사랑의 순간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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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잎차를 마시고 있었다.

쓰지도 떫지도 않은 순한 찻물을 가만가만 삼키며 시를 마셨다.

시를 읽는 사이 내 마음도 가만가만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은근히 떨리는 가슴

설레임을 채 감추지 못해 살풋 허리를 휜 내 속눈썹.

애써 교태를 부리거나 진하게 멋을 내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사랑에 가슴이 뛰었다.

시집의 끝에서 시인은 그랬다.

살아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감동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

시인은 거기 살아서

세상에 대한, 예술에 대한 감동을 잃지 않고

끝내 여전히 스무살의 그것 같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손등이 짜릿하고 뒷목의 솜털이 곤두서는

핑글팽글 어지럽고, 오래 참았던 숨을 짧은 한숨으로 토하게 하는 그 아찔한 긴장

그러나

어디있나요, 보고 싶답니다, 언제 오나요

순하고 선하고 조용하고 얌전하고 여린 기다림, 애틋함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 어떤 이는 예쁜 말이 적힌 시집의 한 장 한 장을 잘라내어

꼭 거기다 편지를 쓰곤 했다.

시인의 말과 그이의 정겨움이 거기서 부둥켜 안고

나에게로 와 내 마음까지 끌어안곤 했던 그 어떤 이의 편지

나는 내 편지를 여기 이 시집 [속눈썹]에 적고 싶어졌다.

아무 그림도 장식도 없는 하얀 바탕에

조개 속껍질처럼 은근하고 눈물나는 이 싯구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싶어졌다.

여전히 사랑의 그 생생한 아찔함과 감동으로 살아있는

이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을 한데 묶어

꽃다발처럼 보낸다면,

어느 가뭄의 논바닥처럼

건조한 내 마음도 그 사람들의 마음도 우리 같이

눈부신 꽃향기에 파묻혀 사랑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깜박 속았지

한낮에 붉은 입술

땅이 푹 꺼졌어

눈 떠보니

가만히 닿던

그 서늘함

흔적 없었지

거짓말이었어

꿈이었지

한낮의 꿈

붉은 너의 입술

산을 열고

돌로 쪼개고

흙담을 허물고 나와

너는

내 마음속

가장 어둔 곳을

살짝 치켜세운

속눈썹 같은

한송이 꽃이었다네

-본문의 한 편

'한 낮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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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지의 부엌
니콜 모니스 지음, 최애리 옮김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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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인간, 사회적 인간, 도구적 인간 등 인간을 규정하는 여러 특성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자연스럽고 오래된 것이 ‘먹는 인간’일 것이다. 생각을 하든 몸을 움직이든 어쨌든 인간은 먹어야 한다. 인간의 춤과 그림, 말조차 시작되지 않았던 그 때에도 인간은 분명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어왔다. 그래서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을 만든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의 말은 인간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한 문장일지 모른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이 시대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고도로 발전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엄청난 과학과 예술의 수준 생각해 보라. 요리마저 과학과 예술이 된지 오래인 지금, 사람들은 이 발전된 요리를 매일같이 먹는다. 요리법 자체의 발전, 건강식이 대중화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재료와 엄청난 노력을 들여 세심하게 조리한 요리를 (경제적 환경 등에 따라 매우 크게 차이가 나긴 하지만) 맘만 먹으면 누구나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람들은 요리(먹는 것)를 ‘사랑’의 매개로 혹은 도구로 때로는 사랑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인식해 왔다. 이제 요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먹는 행위(음식)뿐 아니라 즐기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를 정서적으로도 살아있게 만드는 영혼의 에너지원까지 된다. 사람들이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에게 ‘요리’는 그런 것이다.

 

“먹는다는 건 요리의 시작일 뿐이지! 맛과 질감과 냄새와 그 모든 즐거움이 그저 관문에 불과한 거야.

진짜 훌륭한 요리는 그런 것을 넘어 마음과 정신에 호소하는 거란다. 예술과 자연과 철학에 대해 명상하게 하는 거야.
미식가의 마음에 힘을 주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거지. 그저 먹기 위한 음식은 결코 만들지 말게.”

p201 요리가 시가 될 때

 

 

여기 혼자 먹고 혼자 사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다. 친구도 있고 일도 있고 집도 있는 이 여자는 다만 음식을 혼자 먹을 뿐이다. 남편이 살아 있었던 시기에조차 그들 부부는 늘 따로 따로 밥을 먹었다. 특별히 감정적인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환경이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을 뿐. 그런데 남편이 죽고 우여곡절 끝에 향하게 된 중국에서 만난 중국 요리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했잖습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점일 겁니다. 함께 먹는다는 거요.”

“저는 혼자 먹어도 상관없어요. 여행 중에는 늘 혼자 먹었고, 매트가 죽은 후로는 언제나 혼자 먹는데요.”

“안됐군요. 제가 좀 바꿔봐야겠습니다.”

“당신은 바꿀 수 없어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p204 요리가 시가 될 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요리가, 그저 몸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방법일 뿐이라면 요리는 결코 지금과 같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외롭지만 외로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두 남녀가 중국 전통 요리를 매개로 만나고 서로 보듬는 과정을 그린 [칸지의 부엌]이 중국 전통 요리 철학에 대해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책은 중국 요리 철학을 중심으로 요리와 사랑, 그 둘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그렸지만 사실 스타일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나라의 전통 요리란 다 그럴 것이다. 요리란 인간과 함께 살아온, 인간 그 자체. 가족이 있고 연인이 있고, 또한 사모하는 왕과 스승, 친애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들이 그들 전통 요리마다 녹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중국인과 유대인 혼혈이면서도 중국 전통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샘과 사고로 죽은 남편이 다른 여자로부터 낳은 아이를 찾아 중국에 도착한 매기를 내세워 요리에 녹아있는 가족과 사랑, 전통과 역사를 한 권으로 엮어냈다. [칸지의 부엌] 이 한 권 속에서, 편협한 시선과 소외 속에 외로움을 밥처럼 먹고 살아온 남자와 가장 깊은 곳에 상처를 밀어넣고 고독을 가족으로 여기며 사는 여자는 그렇게 중국에서 만나고 요리와 음식, 전통과 역사, 가족과 사랑을 함께 배운다. 이 책은 그 둘이 모든 의미에서의 ‘칸지의 부엌’에 이르며 끝난다.

 

 

“난 영 꿈만 같네요.” 그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꿈만 같아요."

그녀는 쌀이 끓는 것을 지켜보았다. “뭘 만드는 거예요?”

“칸지에요. 제일 간단하고 기본적인 거지요. 하지만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마치 사랑처럼요." 그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의 눈길이 옷을 뚫고 몸을 뚫고 마음속을 곧장 들여다보는 듯했다.

p403 칸지의 부엌 중에서

 

혼자 먹는 습관을 바꿀 수 없다고 선언했던 여자는 어느 새 한 식탁에서 온 가족이 둘러 밥을 먹는 풍경에 익숙해지고 누군가가 곁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남자는 가장 중요한 결전의 그날, 여자에게 자기 곁으로 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 둘의 변화는 더불어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부르고 밥 짓는 푸근한 향내가 몸과 마음을 감싸 안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그 가족 전부를 훈훈하게 끌어안는다.

 

여행길에서 느끼는 매기의 심리나 전남편이 남긴 아이에 대한 매기의 감정 변화가 무척 아쉽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국 요리에 효과적으로 담았다는 면에서는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자칫 ‘요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 잡스러워지기 쉬운 소설이 요리 소설인데 오히려 덤덤한 어조의 분위기가 중국 요리 그리고 요리 소설의 매력을 잘 살렸다. 화려한 느낌의 중국 요리를 ‘소박’하고 가정적인 전통 요리로 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잔잔한 매력적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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