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러리엄
로렌 올리버 지음, 조우형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드라마(만화 원작)의 주인공 호타루는 연애세포가 죽은 직장녀다. 퇴근 후 남자를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보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아무거나 대충 걸친 채 마루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이키는 게 더 좋은 여자다. 남녀 간의 밀고 당기는 감정소모도 귀찮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예쁘게 차려 입는 데에도 취미가 없다. 혼자라도 세상은 살만하고 곁에 누가 있으면 신경 쓰이는 일 투성이라 끈적한 관계는 이쪽에서 먼저 사양이다. 세상은 이 여자를 건어물녀라 부른다. 비쩍 마른 거란 말이지.

 

17년하고도 11개월 동안 레나의 세계가 그랬다. 바짝 마른 그것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혼자다. 밥을 주는 누군가는 있어도 정서적으로 먹이고 입히는 누군가는 없다. 남편이나 친구도 없다. 함께 살고 대화를 나누고 종종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함께 웃지만 그들은 동거인이나 직장 동료 혹은 지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세계가 그렇다. 부모는 아이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친구는 친구에게 절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해리포터의 세계에서 ‘볼드모트’라는 이름이 가진 극한의 공포 -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는 레나의 세계에서 ‘사랑’이 짊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세계의 사람들은 18살이 되면 반드시 ‘치료’를 거친다. 정부는 아모르 델리아 너보사가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인간의 중추신경에서 거세해 버린다.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질병 ‘아모르 델리아 너보사’의 예방이라는 미명 아래 삶의 모든 것이 통제되는 그 곳, 포틀랜드. 건어물녀 건어물남의 천국을 찾는다면 바로 여기, 건조하고 삭막한 포틀랜드가 있다.

 

 

[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의 작가 로렌 올리버는 이미 사춘기 소녀의 애잔한 성장기 속에 사랑과 선택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적이 있다. 두 번째 작품인 [딜러리엄]에서는 그 고민의 폭이 보다 광활해졌다. ‘사랑은 무엇일까’ 단순히 호흡이 가빠지고 극심한 망상과 정체성 혼란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 및 식욕부진과 불면증을 동반해 결국 사람을 망치고 마는 어떤 것일까. ‘사랑이 없다면 인류는 안정한가’, 사랑이라는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인류는 합리적이고 완전하고 안정한 세계를 구현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진실 속에서 살고 있는가.’ 내가 믿는 모든 사람은 과연 믿을만한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지식은 어디까지가 완전한 진실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알 수 없는 공포와 고독함에 시달리는 나는, 나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이 겨우 17년하고도 11개월을 살았을 뿐인 외로운 여자아이 레나에게 쏟아진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독자는 레나와 더불어 이 막막한 질문 세례 속을 바짝 긴장한 채 달려간다.

 

그러나 옹골찬 책 두께와 진지한 질문 폭격에 미리 질려 책의 첫 페이지를 열지 못할 정도로 겁먹는 이는 없어야 한다. 어쨌든 이 책은 ‘사랑’이야기다. 남들의 타박과 멸시에도 아랑곳없이 딸에게 전적인 애정을 쏟은 엄마의 사랑이야기이자,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절대 겪게 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그녀를 지키려는 청년의 사랑이야기다. 그 사랑이 결코 질병이 아님을, 오히려 또 다른 세계, 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완전한 세계로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여자(더 이상 여자아이가 아니다)의 사랑이야기다. 그러니 일단 책을 펴자. 레나가 알렉스를 만나는 장면부터는 아마 책을 놓으라고 옆에서 누가 사정해도 놓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병은 나를 죽일 거다. 이게 나를 죽일 거다. 나를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다.

P255

한밤중에, 알렉스와 키스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온 레나의 독백 중에서

 

 

그렇다. 사랑은 우리를 죽인다. 20년을 살아온 사람은 20년의 시간이 죽고 30년을 살아온 사람은 30년의 시간이 죽는다. 내 머릿속의 이성이 죽고 상식이 죽는다. ‘사랑’이 나를 덮치기 전까지 내게 소중했던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죽는다. 사랑은 끝내 우리를 다 죽일 것이다. 그리고 곧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무언가로, 생기 있게 빛나는 누군가로.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 없던 적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내가 모르는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이제 겨우 시리즈의 첫 권, 레나는 이 ‘사랑’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사랑을 지켜내기 위한 사투의 길이 끝날 즈음, 레나는 그녀를 괴롭히던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것이고 사랑 안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에서든, 단순히 스펙타클한 연애소설의 관점에서든 우리는 그녀의 세계를 그린 이 시리즈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