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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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내 아버지를 참 미워했었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까지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대화도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무뚝뚝한 아저씨였다. 나는 일평생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확신했기에 마음껏 아버지를 미워하고 비난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같은 인생을 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공격적인 무언과 경멸의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시위했다.

나중에, 나중에. 20대 중반이 넘어서 세상을 몸으로 배우게 되고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측은하고 지질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 그때서야 나는 내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철없던 내가 지녔던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나는 내가 걸어온 저 궤적, 아버지를 미워하다 뒤늦게 이해한 후에 철없던 시절을 뉘우치는 저 과정을 낱낱이 그린 타인의 이야기를 읽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수는 있겠지만, 이토록 폐부를 찌르고 나조차 잠시 잊었던 내 무형의 감정들을 선명하게 담아낸 이야기가 있을 줄 몰랐다.

 

다니구치 지로가 1994년에 발표한 작품 [아버지]는 소설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가 주는 울림과는 다른, 훨씬 깊고 진득한 여운과 감상을 준다. 사람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담긴 이야기는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혹은 몸짓)과 담담하고 침착한 대사의 조화 위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하는 주인공의 결정적인 사건 혹은 미묘한 순간을 붙잡아 그림으로 옮기고 카타르시스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한 대사로 독자와 교감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주인공이 십수년 만에 고향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와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기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찾아가지 않았던 주인공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 땅을 밟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이 그에게 남긴 상처와 허무 그리고 오해를 차근차근 되짚어 가는 회상과 고향이라는 공간이 주는 아련한 정취가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창조한 작품들의 힘은 세밀한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한 묘사다. 그의 묘사는 단순히 시각적인 풍경을 잘 그린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풍경과 대사로 독자의 마음 깊숙이 작품의 분위기를 전이시킨다. 강렬한 자극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음에도 독자는 쉽게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곤 고독함을 느꼈던 청소년기의 주인공이 홀로 조깅을 하는 아침 풍경, 엄마를 잃는다는 두려움에 내달렸던 거리,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심경 속에 마주한 장례식장 등 주인공의 정서를 함께 따라 마치 나의 기억을 더듬어 가듯, 읽어가듯 작품을 보게 된다.

 

작품의 중간 중간, 나는 참 많이 울었다. 20여 년 전의 작품인데도, 이 작품을 그린 작가는 내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데도, 내 일기장의 기록을 그린 것 같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나는 펑펑 울며 페이지를 넘겨갔다. 이토록 깊은 흡인력은 이미 대가 혹은 명장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다니구치 지로의 빼어난 그림과 묵직한 스토리텔링이 결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른 만화만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만화는 독자의 시간을 가뿐하게 사로잡는다. 하지만 독자가 느끼는 감동까지 가볍다고 추측한다면 오해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특히 이 작품 [아버지]는 결말에 이르러, 분초에 따라 흘러가는 영상이나 활자에 감상을 고정해둔 글자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감동을 남긴다.

 

아침 안개가 풀잎을 적시듯, 아버지의 마음을 고요히 스며들 듯 느끼게 하는 이 책의 뒷표지에는 박인하 교수의 추천사가 이렇게 실려 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와 또 아버지가 될 남성들에게 원한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더하고 싶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모든 자녀들, 아버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니가 없어진 후로 로코를 돌본 게 누군지 아나? 니 아부지였다.
와 그랬는지 아나? 니가 언제 돌아오더라도 기뻐할 수 있게 해주려고 했던 기라."

외삼촌의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다. 어두운 창고, 외삼촌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술은 살아있는 기라 항상 신경써서 돌봐줘야 하는기라. 누룩방이나 술독 벽 같은 데도 잘 살펴보고 말이다. 니가 정성을 들여서 말을 걸어주면 술도 화답해서 좋은 술이 되는 기다.
22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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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해줄까요 - 닥터 호르헤의 이야기 심리치료
호르헤 부카이 지음, 김지현 옮김 / 천문장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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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가 사람이라고 지칭할 때, 거기엔 두 가지 존재가 있다. 눈에 보이는 외면만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 사람이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그의 몸을 가리켜 부른다기보다 그의 생각, 사상, 말 등 그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가리킬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이 내면이라는 게 보이지 않다보니 사람들의 눈은 종종 외면에만 머물러 혹은 붙잡혀 내면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몸을 씻고 향수를 뿌리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고 아플 때는 약을 먹고. 그렇게 우리의 외면은 다듬어지고 관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외면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내면은 방치되기 십상이다. 외면이 번듯해지고 잘 가꿔지면 내면도 그에 따라 갈 것 같은데,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오히려 반대라는 걸 느낀다. 내면이 번듯해야 외면이 따라간다는 것을, 오히려 외면과 내면의 괴리가 클수록 사람은 갈등을 느끼고 번민하고 고뇌하지 않는가.

 

이렇게 내면의 가치를 인식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한 가지 벽에 부딪힌다.

그럼 무형의 내면을 어떻게 다듬고 관리할 것인가하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심리학자 호르헤 부카이는 무형의 내면을 비추어보는 도구로 이야기를 택했다. 내면의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심리학의 이론 혹은 실천적 지침 등으로 다가가는 대신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로는 우화로 때로는 동화로, 때로는 네팔의 어느 수도승에게서 들어볼법한 이야기 50편이 책 [이야기해줄까요]에 들어있다.

 

호르헤 부카이가 심리치료에 사용한 이야기를 엮은 [이야기해줄까요]는 데미안이라는 한 청년이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호르헤 부카이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데미안은 불만 많고 고집 센,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그와 비슷한 고민과 고통을 안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는 나는 누구인지, 왜 나는 이렇게 용기가 없는지, 나는 왜 이렇게 못났는지, 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지, 내 마음의 평온은 어떻게 해야 생기는지, 행복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부조리하고 폭력적이고 가식적인지등등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한번 이상은 꼭 떠올렸을 고민들을 토로한다. 그리고 호르헤는 그의 고민에 따라, 나 자신과 나아가 사람들의 내면을 비춰 보여주는 여러 이야기들을 통하여 각각의 고민에 대한 나름의 길과 해법을 제시한다.

 

날개를 펴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으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 모험이 없으면 날개가 있어도 평생 단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다.

보석은 보석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마음에 깊이 와 닿았던 메시지들이다. 하지만 50편의 이야기 중에 정말 소름 끼치도록 처절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이고도 날카로운 이야기가 있었는데 바로 [죽었다고 생각한 남자]였다. 내가 지금 이미 죽었다고 오해하고, 나 편할대로 나 자신을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비극을 자초한 그런 사람은 아닌지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타인의 충고를 기뻐 반기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그래서 이렇게 해보라, 저렇게 해보라는 훈수는 때로 부담스럽다. 어느 때는 반발도 산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옛날에 이런 왕이 살았는데 이렇게 이렇게 되었어~’라는 거울은 참 다양한 것들을 비추어 보여준다. 이야기의 거울을 곰곰이 들여다보며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때묵은 나를 다듬어보는 일. 호르헤 부카이의 [이야기해줄까요]가 주는 근사한 기회다.

 

 

 

‘누가 알아주기나 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서로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나만 바보가 될 수는 없지.’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혼자 웃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모든 걸 내려놓고 즐기지 못한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파티에서 춤을 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바보다. 지금보다 더 바보가 되지 않은 이유는 바보짓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가 24시간뿐인걸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나 자신에게 진솔해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면 나는 훨씬 더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관대하고 상냥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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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자수 - 소중한 이를 더욱 특별하게 하는 자수 한 땀
장정은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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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5학년 쯤이었나, 그때 한창 자수가 유행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패션잡지에, 티셔츠에 수를 놓아 개성있는 패션을 입어보라 어쩌라는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었을 정도였다.

나는 그때 순 눈대중으로 해바라기를 수놓는 법을 익혀서는 하얀색 니트에 수를 놓아서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내게 가르쳐 준것은 나는 수놓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한 가지였다. 그 이후에 다른 무늬를 더 배워보겠다거나 해보겠다는 일은 일체 없었을 뿐더러 자라면서 단추달기, 찢어진 곳을 임시방편으로 꿰매어 입기 정도 말고는 수놓기에 관심도 인연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가, 그저 단순히 나의 취향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인가.

부쩍 자수에 눈이 간다. 특히 아이보리색이나 하얀색 천에 소박하지만 명랑한 색감의 꽃이나 무늬들이 수놓인 것들을 볼 때면 절로 마음이 즐겁다.

 

눈으로 보면서 마음이 자꾸 즐거워지다보면 신기한 일이 생긴다. 눈으로 보기만 할게 아니라 내가 내손으로 해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슬금슬금 솟아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자수는 어렵다. 어릴 때 해봐서 너무나 잘 알지.

그래서 단번에 복잡하고 어려운 스티치나 도안에 도전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오랜만에 자수에 도전해보려는 나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좋은 가이드가 필요하다. 이것만큼은 꼭 지키면 될 일이다. 눈을 흡족하게 해주는 어여쁜 도안이면서도 스티치는 가능한 쉬울 것!

 

[선물자수]라는 책을 통해 다시 '자수'에 도전해보게 된 것은 참 행운이다.

비교적 쉬운 스티치로 단정하고 예쁜 도안과 소품들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만족스런 일인지 모른다.

프리랜서 아나운서인 장정은씨가 펴낸 이 책은 21개의 크고작은 자수 아이템의 도안과 제작법을 담고 있다.

아기옷이나 일반티셔츠 등 의류를 비롯하여 카드, 장식용 액자, 거울, 주차 번호판 등 일상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소품들에도 자수를 활용하여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너무 어려운 스티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보들이 신중히 한 땀 한 땀 도전하다보면 무난하게 완성할 수 있어, 누구든지 수록된 작품들을 구경하다보면 당장이라도 따라하고 싶어서 손이 간질간질해질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퇴근하고 늦은 밤 혼자 방에 앉아 있다가 정말 난데없이 바늘에 실을 꿰었다.

아무 준비물도 계획도 없이 불현듯 도전한 자수라서, 책에서 가장 쉬운 스티치를 찾아, 가장 무난한 도안을 따라 그리고 책이 안내해주는 대로 따라갔다.

수틀도 없고, 천도 빳빳하지 않은 티셔츠였지만 뭐 어떠랴. 갈매기 같은 M자가 나오고 엄한 곳을 꿰매어 다음날 아침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했지? 라고 생각했지만 뭐 그것도 어떠랴.

조용한 한밤중에 손을 움직여 홀로 집중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재미이고 힐링이 된다는 걸 배웠다.

저자가 쓴 '조금 엉성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가 참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다.

 

이제는 수틀을 구해보련다. 수틀도 구하고 빳빳한 천도 구해서 [선물자수]에 실린 작품들을 하나 하나 따라해보려고 한다.

나에게 힐링이 된 자수들이 누군가에게도 특별한 선물이 될수 있다면 그것도 너무 좋은 일일거다.

완벽하게는 못해도 적어도, 누군가가 받고 예뻐해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는 날까지, [선물자수[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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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 다큐 3일이 발견한 100곳의 인생 여행
KBS 다큐멘터리 3일 제작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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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함이요,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보기 위함이니, 보면 모으게 되나, 다만 헛되이 모으는 것은 아니어라"

 

조선 후기 문인 유한준의 말이다.

아는 것은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보기 위하여, 그리하여 알고 사랑하고 보게 된 것을 모으게 되니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라 한다.

 

알지 못하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알고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아야 그것을 모으고 소중히 품게 되는데, 그래야 헛되이 흘러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 인생이 남는 법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이것이 참 어렵다. 모여지고 고여지고 쌓이지 못하고, 무엇이든 쉽게 흘러가고 금방 사라지고 잘 버려지고 무너지는 것에 더 익숙한 게 우리 세상이지 않나. 진정보다 헛된 것을 더 편안해하고 즐거워하는 탓에 우리는 보려고도 하지 않고, 사랑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다큐멘터리 3일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 자그만 땅에서 부대끼고 요동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만드는 공간과 시간과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모아 만든 그 영상을 보면서 어느 때에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도전을 받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런 생명력을 느낀 시청자는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많은 한국인이 이 프로그램에 공감하고 동감했기에 10년간 제작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그 익숙하고도 낯익은, 아주 사소하고 무가치하게 보였던 풍경들을 새롭게 조명해 온 <다큐멘터리 3>. 이 프로그램이 담았던 공간에 대한 기록이 책으로 엮여 나왔고, 나는 이 프로그램을 사랑했던 만큼 이 책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직전에 나는 경주에 다녀왔다. 고루하고 익숙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경주는 너무나 새롭고 아름답고 빛나는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경주로부터 모아온 소중한 것, 진짜 경주의 얼굴을 간직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것이 실은 얼마나 다채롭고 신선한 풍경을 가지고 있는지를 발견한 후에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의 목소리가 더 마음 깊이 와 닿았는지 모른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애정을 담아 새롭게 조명해 낸 제작진의 10년의 노력에는 존경을 보내며, 어느 한 장소도 소홀함 없이 각각의 풍경이 품고 있는 의미와 가치들을 정성스럽게 기록해 주어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다. 단순한 장소 소개가 아니라 한 편의 에세이처럼 글이 아름다워서 영상으로 볼때와는 또 다른 감동과 느낌을 전해준다.

휴가나 여러가지 이유로 국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이 책을 만나기를 바란다. 단순히 몸이 떠났다가 몸이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으로 떠나가서 마음으로 알고 사랑하고 보고, 그 모든 순간을 모아오는 진짜 여행을 이 책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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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박종평 지음 / 꿈결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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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의 출근길을 뉴스로 읽으면서 나는 가장 먼저 이 책을 떠올렸다. [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이 책은 탄탄한 사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이순신의 일생을 글로 옮긴 책이다. 웬만한 소설보다도, 드라마보다도 더한 흡인력이 있어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연 그 날 몇 시간만에 끝까지 다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남긴 삶의 기록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순신을 향한 끝없는 흠모와 경외를 아끼지 않고 글에 담은 저자의 문장도 아름다웠다.

 

책의 첫 머리는 저자의 전언으로 시작한다.

420년 전, 1597년 정유년은 리더 이순신, 장수 이순신, 경영자 이순신, 아들 이순신, 아버지 이순신에게 견딜 수 없는 온갖 고통이 1년 내내 밀어닥친 지옥 같은 해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겨 냈고 불멸의 신화를 썼습니다. (중략)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무엇도 할 수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이순신은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넘쳐 가족과 이웃, 국가와 민족까지 녹여낸 사람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삶의 시작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본문 8-9

 

이순신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저자는 이순신의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위대한 가치를 먼저 짚어낸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을 사랑했고, 가족을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고 나라를 사랑했다. 그는 그저 말로만 백성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랑은 뿌리까지 온통 진실한 것이어서, 가족을 돌보고 백성을 부양하고 왕을 섬기고 조선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실질적이었다. 그의 아주 구체적이고 진실한 사랑 덕에 백성과 왕이 그리고 온 나라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거북선이나 조총을 만든 일과 버려진 섬과 나라의 목장을 이용해 백성과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소금을 굽게 한 일, 또 승려를 이용해 구리를 모으는 방식 등은 모두 발상의 전환이 만든 기적들이다.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백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며 공존하고 공영하는 일거양득의 지혜였다. 이순신이 만든 기적과 배경와 지혜와 원천은 지독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지도자의 고독에서 비롯되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가슴에 품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홀로 내내 앉아 있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홀로 높은 수루에 기댔다. 온갖 생각에 어지러웠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홀로 아픔을 견디면서 결국에 그는 언제나 이제야 온갖 생각 끝에 얻어 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삶의 주인공이 겪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온갖 생각을 다 했고 그 생각의 결과로 기적을 만들어 냈다.

1593년부터 1596년까지 이순신은 전투와 경영에서 모두 성공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성장과 복지를 같이 이루었고 끊임없는 경영 혁신과 창조 경영을 해 나갔다. 성장과 복지, 경제와 국방, 혁신과 창조의 세 영역에서 삼위일체를 만들며 모두가 승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경영자이자 지도자이자 장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 백성과 군사는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싸우는 군사가 되었다. 또 때로는 어부, 때로는 농민, 때로는 노동자가 되어 힘을 모았다. 서로가 서로를 함께 살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이순신을 향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순신의 솔선수범이 성공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본문 190-191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400여 년 전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감동으로, 진정한 리더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이 시대에 과연 저런 리더는 어디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울었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그 밤에 리더는 언제나 혼자였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혼자가 된 리더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들과 시대와 나라에 대해 가슴을 치며 고민하고 고민하다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생각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불러온 그의 치열한 고민은 단 한번의 패배도 없는 완전한 승리를 만들었고 백성과 군사를 함께 살게 했다. 이순신의 옆에서 백성과 군사들은 목숨만 부지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으로부터 이 시대를 견뎌낼 신념과 용기를 받아 먹었다.

죽음조차도 사람과 나라를 지키는 데에 온전히 바친 이순신의 무서우리만치 헌신적이고 완벽한 인생은 읽는 것만으로 내내 경탄과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그 어떤 드라마나 소설보다 명백하고 분명하게 이순신 생애의 가치와 무게를 보여준다. 삶의 수많은 고비와 변화 속에서 이순신이 무엇을 느꼈고 어떤 선택을 내렸으며 그에 대한 결과들까지 세밀하게 기록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순신의 심정을 가깝게 느끼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과 그 사랑만큼 강한 실력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살다간 이순신이라는 인물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대로 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얻기 위하여 고민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을, 나는 이순신의 삶에서 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 이순신의 일생을 켜켜이 담고 나서 책 제목을 참으로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우리 자신이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또한 이 나라가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를 또 한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이 깊어 차마 몇 개의 단어로 이 책을 단정지을 수 없었나보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세 개의 짧은 단어에 너무나 많은 꿈과 바람이 넘실거린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리더, 지금 우리가 원하는 세상, 지금 우리가 원하는 나라, 지금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

 

어제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내가 지지했던 후보는 예상대로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떠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 대한민국을 이끌 19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누가 앉아도 힘든 자리이고 누가 해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가 갈래갈래 찢어지고 난폭하고 흉흉해진 민심을 이어 붙이길 바란다. 한 국가의 수장다운 실력과 덕으로서 새롭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길 부디 응원할 뿐이다.

그러하기에, 19대 대통령께서도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여기에 다 담겨 있으므로.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가슴에 품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홀로 내내 앉아 있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홀로 높은 수루에 기댔다. 온갖 생각에 어지러웠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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