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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평점 :
소설 속의 세계는 현실보다 생생했다. 저스티스맨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의 풍경은, 어떤 이슈가 되었든 으레 개판이 되고 주제 따위 산으로 보내버리는 인터넷 게시판들의 난잡한 표정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소설 속에서, 인터넷 카페에 모여 익명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이들을, 나는 오늘 아침 인터넷 뉴스 댓글에서도 보았고 어느 인기 블로거의 포스팅 댓글에서도 보았으며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에서도 보았다. 도선우의 소설 [저스티스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이게 우리 현실이고 우리 자신이고 나인 것이다.
유교 문화권이어서 그런 것일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덕이니, 윤리니, 정의니 이런 것을 논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가 아니라 익명으로. 동시에 익명이라는 우산 아래 숨어 파렴치하고 몰지각한 나아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맨 정신으로 뱉기 힘든 이야기들도 서슴없이 늘어놓기를 즐겨한다. 그저 나의 관점이나 취향 정도를 표출하는 정도면 그래도 양반이다. 인터넷에 흥건한 오만가지 말들 속에 단연 손꼽히는 오만함은 이것 같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만 옳다는 이 오만함은 대체 무엇을 기반으로 하는 걸까? 어떤 대단한 정의를 지녔기에 저렇게 주장할 수 있을까? 모두가 다 자신만의 정의를 주장하면서 벌어지는 혼돈의 아비규환은 역설적으로 여기에 진짜 정의는 없음을 증명한다.
도선우 작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자처해 온 혼란과 역설을 소설로 옮겼다. 이 세계에서 죄 없는 자는 누구도 없다. 모두가 죄인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다. [저스티스맨]이라는 작품 속에서 누군가는 응징하는 자로, 또 다른 누군가는 징벌을 받는 자로 등장하지만응징 하는 자조차 정의가 아니며 죄 없는 자라거나 절대적 피해자라고 규정하기 애매하다. 작품 속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 간에 이 애매한 관계, 한 쪽이 일방적 가해자이고 다른 쪽이 일방적 피해자라고만 할 수는 없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 심지어 모두가 악인이다. 선한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익명의 누리꾼들은 누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괘념치 않는다. 물고 뜯고 씹고 즐기기에 충분한 이야깃거리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 몰지각한 행태는 또 다른 혼돈을 낳고 이 혼돈 속에서 정의롭지 못한 저스티스맨이 잉태되고 탄생한다.
정의가 사라진 세상에서 정의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닐지 모른다. 나에게 정의는 누군가에겐 불의가 되는 것이 세상임을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불의의 세상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은 정의구현을 외치지만 정의가 있어야 정의구현이 될 일이다. 이제는 정의가 아니라 합의를 구해야 할 때 아닌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면 적어도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인 이상 한 마음으로 합의할 수 있는 접점은 분명 존재할 테니까. [저스티스맨]이 정의는 없는 현실을 아프게 꼬집어 준 이후, 정말로 우리 사회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는다.
심금을 울리는 기사 몇 줄이면 보잘것없는 그들의 영혼 따위 헐값에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진실 여부는 사실 판단의 대상도 아니었다. 천박한 감성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은 풍족한 것 같았으므로 진짜 삶을 바라보는 무게 있는 시선 따위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에 속하지 못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맹목적으로 타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배척했다. 그러니 그것은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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