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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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종의 며느리 순빈 봉씨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길 수는 있으나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 측은지심조차 제한적이어서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정도의 안타까움에 그치고 말았다. [채홍]의 주인공이자 역사와 사랑에 대한 작가의 메신저인 순빈 봉씨. 그 아이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감정에 "그저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은 너무 거창하다. 그런 고백은 그녀가 아니라 곤장 마흔 대를 맞으며 죽어가는 정인을 두고 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형장으로 달려와 자복한 궁녀에게야말로 어울린다. 열 여덟 살의 달뜬 춘심, 오만하고 철없는 그 갈구와 열망을 사랑, 그것도 역사가 낳은 비극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 나의 실패는 내가 '어리석은 본능을 옹호하고 덧없는 욕망을 지지하는, 오직 인간의 편인 문학'의 사람이 아닌 까닭인가 보다.

순빈 봉씨는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빈이었다. 휘빈 김씨가 요술에 의지하여 지엄한 왕궁의 법도를 어지럽힌다 하여 폐위한 뒤 세종은 천하일색이라는 순빈 봉씨를 두번째 며느리로 맞았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본래 학업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아버지와 두 오라비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고명딸이었다. 당연히 그 버릇이 어련했을까. 열 여덟의 그녀는 세자빈이 대체 무얼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채 궁으로 들어와 앉게 된다. 말을 타고 저잣거리에 나가 오라비들과 돌아다니며 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누리며 갖은 사랑을 다 받았던 그녀에게 애당초 궁중 생활이 잘 맞을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의지처가 되어주어야 할 하나뿐인 남편인 세자는 어려서부터 세종의 엄격한 훈육 아래 하늘 아래 오직 '인의예지'가 전부인 인간형이라 순빈 봉씨가 바라는 감정적인 소통이 불가한 사람이었다. [채홍]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의례가 지엄한 궁중의 법도 아래 궁녀들과 내시들은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모두 거세당한 채 한평생 살아야 했던 곳이 조선의 궁궐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왕후 조차 너무 귀하신 몸이라 날을 정해두고 합방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정서적인 모든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단단한 율례 속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순빈 봉씨는 이러한 숨막히는 궁 생활 속에서 외로움에 시들어가다 어느 궁녀에게 마음을 의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마음이 몸이 되어 서로 정을 통하고 이에 소문이 퍼져 세종은 결국 순빈 봉씨를 심문 끝에 그녀를 폐위시킨다.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 빈으로 하여금 아내의 예를 저버리고 불경지설을 함부로 토로하게 했고? 이미 친영의 격식을 갖추었으니 육례에 어긋남이 없거늘, 그토록 친정의 가솔이 그리우면 귀녕의 절차를 논하면 될 것을, 무엇이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를 만큼 큰 문제란 말이오?"

"그걸 저하께서 정녕 모르셔서 소첩께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지금 격식과 의례와 절차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격식, 의례, 절차..... 정말로 그것으로 사람이 살아진다 하더이까? 그것만으로 살 수 있다 하더이까?"

봉빈의 눈에 문득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흡사 담벼락을 향해 헛된 팔매질을 하는 듯한 답답함에서 비롯된 분루이기도 했지만 정녕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목석같은 사내를 향한 간절한 읍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이 일목요연하고 몰인정했다.

p105

세자가 바쁜 만큼 봉빈은 외로웠다. 빈궁에 머물 때는 그나마 질투도 하고 애도 태우고 사랑을 얻을 곰곰궁리도 했는데, 그 모두가 사라져 텅 빈 마음에 깃드는 것은 오직 지독한 외로움뿐이었다. 종학으로 나오면 격식을 따지지 않고 끼니 때마다 겸상도 하고 의례적인 것들은 작파하고 필부필부처럼 스스럼없이 오가며 복잡한 절차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웃고 울고 사랑하려 했는데.... 간절히 그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렸기에 기대가 깨어진 뒷마음은 더욱 쓰리고 아팠다.

p195

성동(열다섯 살 된 사내아이)이 되도록 세자는 여인을 알지 못했다. 음양의 이치에 대해 배우기는 했으나 그것도 학문적인 흥미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는 다만 피로했다. 제아무리 즐거이 감당하는 책임과 의무라도 잠시 놓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도피처가 세 명의 승휘, 후궁들이었다. 그들은 김씨만큼 집안이 좋지 않았고 봉씨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총명하거나 강건하거나 지혜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책임질 것도 의무감을 느낄 일도 없었다. 명분을 따지고 격식을 차리며 규범과 규율을 들먹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승휘들을 만나러 갈 때면 세자는 어린 날 숨바꼭질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요구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저항 없이 순정하며 경계 없이 수용하였다. 그 뭉근한 평온이야말로 완벽했다. 사랑이라는 불완전하고 변덕스런 마음 따위로는 절대 흠집 낼 수 없는 옥구슬의 세계였다.

p275



사랑이 과연 독인가? 나를 괴롭고 고통에 못이겨 쓰러지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서? 과연 내 목숨까지 달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내 옛사랑을 돌이켜 볼때 사랑은 독이 아니다. 사랑이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할 때는 결단코 독이 될 수 없다.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랑은 어느 시대에건, 누군가에게건 삶이 된다. 사랑이 독이 되는 때는 오직, 그 사랑에 이해와 희생이 결여되었을 때 뿐이다.

나는 순빈 봉씨의 사랑이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녀를 죽인 게 아니다. 사랑이 죄라서 그녀가 죄인인 것이 아니다. 이해와 희생을 모르는 철없는 춘심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극중에 궁녀들의 형을 관리하는 내시 김태감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까지는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눈 먼 사랑의 열정을 들어 내시인 김태감은 자신의 불능에 대한 두려움과 젊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왕의 물건을 훔쳐 정을 통하던 내시에게 전하다 발각된 궁녀가 등장한다. 이런 행실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기가 사랑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작가는 순빈 봉씨의 입을 통해 말한다. 사랑은 순간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죽음에 내어주었지만 생을 뜨겁게 관통했던 사랑만은 고스란하다고. 한순간 뜨겁게 사랑하고 뒤돌아서면 끝인 찰나의 열망일지언정 고스란히 남는다라....... 다 태워버리고 까맣게 재만 남아도 그것이 고스란히 남았다고 할수 있을까. 소설의 제목이 '채홍 - 무지개'인 까닭은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고 작가는 적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태양을 받아 반짝인다. 태양이 없이는 무지개도 없다. 태양(법도와 질서)이 반짝일 때에야 비로소 그 앞에서 무지개(감정)도 반짝인다.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순빈 봉씨가 가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은 실로 대단한 남존여비의 세계였고 특히나 궁은 그 대단한 사상의 핵이었다. 궁녀들 간의 동성애가 유행한 것은 그 잔인한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그네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또한 순빈 봉씨가 그렇게 굴레 밖으로 대탈주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여린 마음과 외로움을 헤아려주지 않은 문종의 부덕이다. 그러나 욕망 앞에 솔직한 것과 사랑에 솔직한 것은 다르다. 사랑하는 이와 한 이불 속에서 정을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내 정인이 다른 사람의 이부자리에서 노닥이는 것에 활화산같은 분노가 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나만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나를 사랑해야 이치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천륜(부부와 부자)에 어긋나지 않은 때에야 '사랑'이라는 영원하고 항시적인 것이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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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거짓말 - 명화로 읽는 매혹의 그리스 신화 명화의 거짓말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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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표지에 등장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기분이 나빴다.

아니야, 이런 미인형이 아니잖아. 좀더 두툼하고 풍성한 살집을 자랑해야지. 어디 이렇게 매끈하고 수려한 등과 다리 라인을 자랑하는 여인을 당시에 미인이라고 쳤겠어. 응??

그러나 이 작품은 1890년대의 작품이었고, 이 그림 속에서 입맞춤을 나누고 있는 남과 여가 피그말리온과 그의 조각상 갈라테아 라는 것을 안 것은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건 남자가 피그말리온이고 여자가 갈라테아인데, 이렇게 매끈하고 아름답게 생긴 조각상이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기도 덕에 진짜 사람이 되었다는 신화가 아니다. '스스로의 창조물에 욕정을 품고 마침내 사랑을 이루려는 남자를 화가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확실히 이는 인형에 대한 사랑이나 시간과도 통한다.' 중요한 게 여기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구현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는 사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이 둘의 뒷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욱 아름답지 않아진다.




당신은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나? 얼마나 알고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잘,... 사실은 전혀 모르는 쪽에 가깝다.'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 물론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등등 이런 유명한 이름들은 알고 있지만 그리스 신화집을 읽다가 집어치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에 이름만 알고 있는 게 전부. 왜 번번이 집어 치웠냐고 물으신다면,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복잡한 족보 때문이라고 하자. 다 접어두고 일단 제우스가 마음에 안 든다. 헤라도 그렇고. 막장 연속극을 이미 오래 전부터 찍고 계신 두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 추천만화나 소설로 그리스 신화가 등장할 때면 내심 긴장이 된다. 혹시, 동심을 어둡게 하는 이상한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응? 하며 걱정을 하곤 한다.

나에게 그리스 신화란 이런 것이라서, 참으로 알기도 버겁고 이해하기는 더더욱 버거운 존재였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이 신들을 그토록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낸 화가들의 그림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프로디테가 불륜의 화신이라면서 왜 그리 아름답게 그려놓았는가? 불륜에 재주가 있으려면 절세미모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라도 있었던 거야?

이렇게 그리스 신화 앞에서만은 유독 배배 꼬여있던 나의 시선을 시니컬한 유머로 툭툭 건드린 사람이 [명화의 거짓말]의 저자 나카노 교코다.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이라는 전작을 통해 독특한 미술 읽기 시각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를 페이지 위에 올리고 난도질을 했다. 그녀에 의하면 명화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 대부분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애 앞에 앞뒤 못가리고 무너지는 인물들이 다수이며 결벽증이 엄청나다거나 아예 도덕 관념을 상실한 존재도 있다.

그런 그리스의 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사람이. 그들은 위엄있고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신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지만 본질은 인간과 같다.

나카노 교코는 먼저 신화를 들어 설명한 뒤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어 이해를 돕는다. 화가들이 완성한 환상적인 그림 속에 인간의 추접한 모습을 간직한 그리스 신들이 있다. 하늘 위에 운집한 그리스 신들의 영광도 그녀의 해설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대신 나카노 교코의 블랙 유머를 입는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해묵은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이 그리스 신화 아닐까. 화가 뿐 아니라 수많은 음악가, 조각가 등 엄청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그리스의 신들 속에는 아름답지 않은 인간이 있다. 책 첫 장에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진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담다. 하지만, 거짓 역시 그렇다.' 진실과 거짓, 둘 다 아름답다. 그러나 진실은 아프고 거짓은 즐겁다. 아마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오랜 세월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는가. 아프지만 아름다운 진실보다 즐겁고 아름다운 거짓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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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 쏙 성경, 성경 쏙 이슬람
박요한 지음 / 코람데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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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나에게 '이슬람'이란 그렇게 험상궂고 무서운 단체가 아니었다. 사막과 먼지의 중동,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났고 성경의 처음 무대도 거기인데 악감정을 가져서 뭐할텐가. 그런데 2004년 즘이었나? 이슬람 무장단체에 피랍된 한국인이 공개처형되고 그 동영상이 유투브에 떠돌았다. 어쩌다 그 동영상을 클릭하게 된 나는 정말 그야말로 정신이 고꾸라질듯한 충격을 먹고는 그후로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성지를 향해 절을 하는 유순한 등을 떠올리는 대신 가장 먼저 총이 떠올랐고 끝이 구부러진 그들의 칼이 떠올랐고 알라 외에는 없다!고 외치며 살육도 불사하는 그들의 전투적인 포교가 그들에 대한 나의 감상들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들, 이슬람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교리가 과연 폭력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언제나 그 공포스런 선입견 뒤에 슬그머니 나타났다. 알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알려고 해본 적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손사래를 치며 덮어두고 비난과 암묵적인 멸시를 하는 것은 과연 나의 신앙에 적합한 것일까.

 

 

교양삼아 성경을 읽었다는 어떤 스님처럼, 나도 그래서 교양삼아 코란을 읽어볼까 했다. 그러던 차, 코란 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책 [꾸란 쏙 성경, 성경 쏙 이슬람] 이다.

선교회에서 시무하던 박요한 선교사는 이슬람에 대한 많은 연구 끝에 이 책을 내 놓았다. 동일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출발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 저자는 각 종교의 경서인 성경과 코란을 비교, 대조하면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두 종교 사이를 파고 들었다. 총 5가지 주제에 따라 나뉘어 있는 각 장에서는 성경과 코란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 그러나 조금 다른 설명들, 코란에는 있으나 성경에는 없는 것들 그리고 성경에 있지만 코란에 없는 것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있다. 저자가 처음 머리말에서 쓴대로,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성경과 코란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어서 둘의 차이와 비슷한 점을 파악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이 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꾸란이 실려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처음, 저자의 머리말을 읽고 난 뒤에 나는 성경과 코란에 대한 지극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비교와 대조를 기대했다. 실제로 저자는 이슬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듯한 눈치여서 그런 내용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성경과 코란의 비교, 대조가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위에 쓴 대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코란과 이슬람이다. 코란과 성경을 내용상으로 비교하고 대조한 것은 체계적이고 상세하지만 냉철하거나 객관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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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십이지신 이야기 뱀 한중일 비교문화 십이지신 시리즈 4
이어령 책임편집 / 열림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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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겨울 바람에 바싹 얼어버린 감나무 가지에 까치가 날아와 앉는다. 동네 어르신들은 아침 햇살에 매달리는 까치 울음에 '좋은 손님이 오시려나.' 눈웃음을 지으신다. 그러나 어쩌다 까마귀가 길게 목소리를 흘리며 서쪽으로 날아가기라도 하면 침을 뱉는다. '재수없게 왠 까마귀가 울어'. 길조 까치와 흉조 까마귀는, 그러나 북태평양의 시베리아에서는 창세의 신으로 추앙받고 아랍에서는 부를 가져오는 귀한 새로 여겨지기도 한다.

까치나 까마귀나 다 거뭇한 날개를 가진 새들일뿐더러 더구나 한국 까마귀나 시베리아 까마귀나 다 같은 까마귀일텐데, 까마귀 입장에서는 참 억울할 일이다. 여기 사는 까마귀는 재수없다는 소리를 숙명처럼 듣고 사는데 어데 까마귀는 신으로 대접받으니 기실 문제는 까마귀에 있는게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이겠다.

 

 

인종과 종족의 차이, 환경과 역사의 차이는 이와 같이 그 문화를 들여다볼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나 산천과 동식물에 관련한 신화와 전설에는 거기 살고있는 사람들의 오랜 생활양상과 관습, 가치관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가 십이지신의 각 동물을 주제로 동아시아의 민속문화를 분석해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는 [문화로 읽는 십이지신]은 한국, 중국, 일본. 반만년 이상의 시간 동안 공존해온 이 세 나라(지역)의 같은 듯 매우 다른 문화를 아시아 공통의 '십이지'라는 문화 코드 속에서 풀어가고 있다.

내년 용의 해를 맞이하기 때문일까. 용으로 거듭나 승천하기 전의 꿈틀꿈틀 '뱀'이 이번 네번째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위에서 까마귀가 으례 '재수없다' 소리를 듣고 사는 것처럼 뱀 팔자도 그렇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심하다. 까마귀는 돌을 던지고 마는 정도지만 (그나마도 날아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뱀은 온갖 저주를 다 듣고 살뿐 아니라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 알을 많이 낳은 뱀의 생태적 특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뱀을 정력의 화신으로 자리잡게 했단다. 그래서 뱀은 종종 산채로 잡혀서 독한 술 독에 담겨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종교나 기타 여러가지 속설들 때문이 크겠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뱀은 일단 징그럽게 생겨서 정 받기가 어렵다. 차가운 피부에 팔다리 없이 기어다니는 몸, 새파랗고 찢어진 눈, 날카롭게 휘날리는 혀. 서정주는 그의 시 [화사]에서 뱀의 야생적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했지만 글쎄, 이번만큼은 그의 미적 감각에 동의할 수가 없다. 비호감과 혐오 사이를 아슬아슬 하게 오가며 오랜시간 눈총을 받아온 뱀은 과연 언제부터 이런 가혹한 대접을 받게 되었을까.

 

아주 멀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 속에서 뱀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위치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뱀은 아주 깨끗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지혜로운 동물이기도 한 반면에 징그럽고 사악한 동물로 가능한 한 멀리하고 꺼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민속에 뱀에 관한 인식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뱀은 죽은사람의 영혼, 명부의 수호신, 간교한 지혜와 애욕, 다산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민간신앙에서는 업신, 당신의 수호신으로 모셔진다. 또 민속예술의 주제, 민간 의료의 주요한 약재로 쓰인다. 반면에 징그러운 요물로서 배척하는 상사일의 풍속도있다.

p212 한중일 뱀과 종교적 예식 - 천진기

 

 

수호신 - 불사불멸, 재생 뱀은 비록 그 외모나 행동거지가 아름답지는 못하나, 시대에 따라 달리 서로 부정과 긍정의 반복과 혼효 등 다른 상징으로 여러 다양한 의미를 아우르며 조형 미술 속에 등장한다. 오랜 세월 열두 띠 동물의 하나로도 한자 문화원 나름의 의미를 이어왔다.... 고대 유물 중에서 조각과 공예, 회화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를 두루 살필 수 있다.

p96 한중일 회화 속의 뱀 , 이원복

 

 

오래전, 뱀은 중국에서는 창세신으로, 한국에서는 다산과 정력의 상징으로, 일본에서는 풍요를 관장하는 수신으로 군림했다.

농경사회에서 뱀은 알을 한꺼번에 많이 낳는 그 생태적 특성 때문에 풍요와 다산을 가져오는 동물로 여겼다. 남근을 닮은 머리와 몸통의 생김 때문에 한중일의 설화, 신화 등에서 뱀은 종종 변모한 남성 혹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창세신, 여와와 복희가 뱀 형상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구려 벽화 등에 자주 나타나는 현무 역시 뱀 형상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아 뱀이 십이지신 중의 하나로 이름만 남겨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성시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한 동물로 오랜기간 저주를 받아온 서양 문화 속에서도 뱀은 풍요의 상징이라는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데 특히 이집트에서가 그렇다. 파라오가 쓴 관을 보시라. 클레오파트라가 괜히 뱀을 단짝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

 

 

[문화로 읽는 십이지신 이야기 뱀]은 오랜기간 괄시 받아온 뱀의 허물을 한 겹 벗기고 '뱀'이라는 동물적 특성이 우리의 민속 문화 속에서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알려준다. 한국과 중국, 일본 각국의 문화가 조금씩 다른 데, 이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천진기, 이원복, 이나가 시게미 등 각국의 논객들은 회화, 조형 예술, 설화, 종교 등등 문화의 각 부문별로 주제를 나눠 뱀과 관련한 자료들을 제시하며 문화 속의 뱀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가 그러더라. 내가 이 책을 골똘히 읽고 있는 것을 보더니 '왜 하필 뱀 이야기를 읽고 있어?' 하며 지나간다.

 

 

초록색 뱀이 에스라인을 자랑하고 있는 표지 때문일까, 혹은 '뱀'이라는 글자 자체만으로도 거부감을 느끼는 가치관 때문일까. 어쩌면 이 책은 '뱀'을 주제로 잡고 있기 때문에 꺼려질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뱀을 읽는 것은 뱀이 가지고 있는 사악함, 징그러움을 읽자는 것이 아니다. 까마귀를 바라보는 눈이 시대마다 지역마다 그 환경과 역사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그를 통해 각 시대와 지역의 문화 그리고 사람을 읽게 되는 것처럼 이 책이 그렇다. 문화를 읽고 사람을 읽는 책이다. 그러니 '뱀'이야기라고 해서 경기를 일으키지는 말기를..... 읽어두면 두고두고 (잡다한 지식과 넓고 얕은 앎 자랑에) 도움이 될 꺼리들이 가득하니 읽고나서 후회는 없는 유익한 책이다. [문화로 읽는 십이지신 이야기] 이전의 시리즈를 찾아보게 할 뿐더러 앞으로 나올 시리즈마저 기대하게 하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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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고양이와 늙은개 내 어린고양이와 늙은개 1
초(정솔) 글.그림 / 북폴리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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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그런 느낌도 든다. 프랑스 감독이 찍은 로맨틱코미디영화의 제목같다. <내 어린고양이와 늙은개>.

발랄한 표지와 산뜻한 민트색 띠지는 편안하면서도 다정하게, 마치 고양이나 강아지의 체온처럼 다가왔다.

귀엽고 소박한 느낌의 그림이 예쁘고 발랄해보여서 나는 분명 웃기는 책이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초(정솔)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웹툰 '내 어린고양이와 늙은개'를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코믹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들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책을 열면서부터, 정확히 첫 에피소드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울어버렸다. 그냥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도 아니고 코만 훌쩍인 것도 아니다. 굵은 눈물 방울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져내리고 눈 앞이 흐려져 페이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매번 눈물을 닦아내고 읽어야 할 정도로 울었다.



너무 오래 쓸쓸하게 하지 말아요.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힘껏 껴안아주길 바래요

그때도 늦지 않게 따라 나설수 있으면 좋겠어요......



주인의 입장에서 그려지기도 하고, 강아지나 고양이의 입장에서 그려지기도 하는 이 만화는 소박한 그림체로 빚은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크고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체온, 그들의 배려, 그들의 관심, 그들의 애정, 그들의 삶이 생생해서 마치 우리집에서 반려동물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래서 반려동물이라고 하는구나. 이래서 가족이라고 하는구나. 마냥 예쁘게만 포장해서가 아니라, 그 동물들의 생각, 심정, 작은 감정 하나까지도 와 닿아서 작가의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인지 공감했다.





너는 정말 갑작스럽게 나에게 왔어.



왜 여기 있을까. 누가 그랬을까, 무슨 일일까. 이렇게 예쁜데....

그런 생각의 정리를 미처 할 틈 없이 나는 너를 끌어안고 있었단다.



소나기처럼 찾아온 너는 봄비처럼 사랑을 줬어.

조건 뿐인 세상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온 힘으로 나를 사랑해 줬지.



아가, 알고 있니? 너는 내 세상을 바꿨단다

이렇게 세상이 회색이었다면, 너는 야금야금 색을 칠해준거야.

아가야, 내 강아지야

걱정없이 살아다오.

아프지 말아다오.

언제나 이렇게 사랑해다오.



보물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에피소드 _ 내 보물아)



뒷면 띠지에 어떤 누리꾼의 리뷰가 적혀 있다. '반려동물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봤으면 하는 만화.'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 반려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꼭 한 번은 봤으면 하는 만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내려다보는 높이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길강아지와 길고양이들을 쫓아내는 입장에서 그들을 볼 뿐 그들의 눈높이로 인간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반려동물을 좋아하지 않아도, 단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고 관심도 없더라도 나는 권하고 싶다. <내 어린고양이와 늙은개>,정솔 작가가 그리는 순대와 낭낙이 그리고 많은 반려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나보라고.



갑자기 유기견에 애정을 갖거나 길고양이의 생태에 관심을 쏟게 되지 않아도 충분하다. 어린고양이와 늙은 개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에피소드에 코끝이 찡했다면 그것만으로 이 책을 읽은 감동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보물인 줄 모르는 사람에서 보물임에 동감하는 사람으로 격상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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