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 호스
마이클 모퍼고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대포보다 사람이 못한 곳이 있다면, 전쟁터 말고 어디를 떠올릴 수 있겠어.

지금이야 핵 미사일 한 방 날리겠다는 으름장을 놓을 기세만으로도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 발발 기는 세상이지만 말야.

그때는 정말 그랬을 것 같아. 대포를 옮기는 말이 다치건 죽건, 사람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건 말건, 일단 중요한 건 적지에 포탄을 시원하게 날려줄 대포였겠지. 진흙에 발이 얼고 피로와 굶주림에 차례로 동료들이 죽어나가도 사람도 동물도 어쩔 수가 없이 그 상황을 견디고 내가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었을거야.

 

마이클 모퍼고의 다른 소설 [굿바이 찰리 피스풀]도 그랬고, 아마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그럴거라고 생각해. 전쟁, 그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실화를 길어내 거기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재탄생시키는 작가. 나에게는 이 작가가 그래. [굿바이 찰리 피스풀]을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애틋하게 읽었기 때문에 말야, 도입부, 구성, 인물과 엔딩까지 다 내 마음에 진하게 남은 작품이라 나는 그 작품 한 편에 이 작가 아저씨가 참 좋아졌어. 무엇보다도 있잖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 이미 다들 잊어버린채로, 있을 곳을 잃고 시간의 강바닥 아래로 깊이 가라앉은 일을 애써 건져내는 그 아저씨의 노력이 참 대단해보여. 묘비명 하나, 빛바랜 작은 사진 한 장도 그냥 지나치질 않아. 거기에 얽힌 아련한 기억들, 분명 그 때 그 시절에 그 세계를 온통 차지하고 있었을 많은 이야기들을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우리 눈 앞에 복원해내는 그 솜씨는 참 멋있어.

 

사실 [워 호스] 벌써 30년이나 된 작품이야. 나랑 나이가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왠지 이 소박한 이야기가 더 짠하게 느껴지네.

어른들을 위한 전쟁소설이라기보다, 아이들에게 더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정서를 가진 동물소설이야. 조이라는 말이 주인공이고, 이 멋지고 고귀한 생명체는 인간들의 전쟁에 휘말려 갖은 고생을 다하게 돼. 가엾게도 말이지. 그래도 사람 복은 타고난 말인가봐. 첫 친구였던 앨버트를 시작으로 조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그 중에 프랑스 소녀 에밀리의 애정은 특히나 대단했지. 앨버트가 아직 소년일 적에 조이가 군대에 팔려갔는데, 이후에 조이는 군마로 프랑스 격전지를 헤매다 영국군령의 동물병원으로 오게되고 거기서 든든한 청년으로 자란 앨버트와 조우해. 그리고 그 다음은, 모두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대로 둘은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고 평안한 일상에 안착하지.

 

전쟁에서 프랑스군, 독일군, 영국군의 부대를 두루 돌면서 조이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죽음을 접해. 사람이고 말이고 구분없이 죽어나가는 게 전쟁터잖아. 조이는 존경하는 동료였던 탑손도 잃고 조이가 좋아했던 군인들의 죽음도 지켜보았어. 그 과정에서 조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정신적 고통을 느꼈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아. 다만 작가는 조이의 귀로 들어오는 군인들- 인간들의 대화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남겨.

 

"너희는 친구니까 말해 줄게. 나는 연대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야.

미친 건 다른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들은 모르고 있지.

전쟁에 참가해 싸우면서도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몰라. 그게 미친 거 아니니?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를 수 있지? 상대편이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고,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그들은 나더러 미쳤다고 하지.

너희 둘은 내가 이 어리석은 전쟁에서 만난 생명체 가운데 유일하게 이성적인 동물이야.

너희가 이곳에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도 나처럼 끌려왔기 때문이겠지.

용기만 있다면 이 길로 도망가 다시는 안 돌아올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군인들이 나를 잡아 총으로 쏴 죽일 테고,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은 평생 수치스럽게 살아야 할 거야.

난 미치광이 노병 프리드리히로 행세하며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거야."

p130

 

독일군의 초췌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한두 시간 뒤에는 서로를 죽이려고 발버둥 칠 거야.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내 생각에 하느님도 그 이유를 잊어버렸을지 몰라. 잘 가게. 우리가 직접 보여준 셈이야. 그렇지 않나?

서로 믿기만 한다면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것 보여 준 거야. 믿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게 전부인데, 안 그래?"

키 작은 영국군은 밧줄을 잡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한두 시간 정도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해 준다면 이 불행한 상태를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텐데."

p 158

 

전쟁에 뛰어든 군인들 대부분이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심지어 마이클 모퍼고가 그린 전장에는 죽이고 파괴하는 걸 즐기는 군인은 아무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 돼. 엄청난 생명들을 희생하면서 말이야. [굿바이 찰리 피스풀]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모퍼고는 이런 참상에 대해 꼭 신에게 물어보고 싶나봐. 신이시여, 당신은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겠지요. 왜 이런 죽음이 필요한가요. 이 참상이 남긴 상처와 고통과 희생은 어디서 치유받고 채움받아야 하나요.

 

종전 후에, 조이는 앨버트와 함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와. 앨버트는 사랑하던 메이지와 결혼을 하고 예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 그런 평안한 마지막을 전하면서 조이가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아. 우리는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진짜 영웅들은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 묻혀 있다...... 가슴 한 가운데가 가라앉는 슬픈 말이야.

 

이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영화가 개봉되어다고 해. 사실 나는 소설이 너무 동화같아서 영화가 그리 기대되지는 않아. 어떤 분위기의 영화일지 대충 짐작이 가서 그럴까. 하지만 영화화로든 무엇으로든, 돌아오지 않고 거기 묻힌 영웅들을 추억하는 이야기는 늘 환영이야. 그것이 이렇게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아련함을 남겨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내내 마음이 저리더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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