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權府’ 국정원 40년]

“김정남 체포 사전에 몰랐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 인터뷰… “마약·테러 등 국제범죄 분야 역할 강화”

주간동아’는 지난 5월28일 국정원 고위 관계자를 만나 6월10일로 창설 40주년을 맞는 국정원의 현안에 대해 취재했다. ‘주간동아’는 공식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국정원측은 “국가 정보기관은 언론에 드러나서도 안 되지만 인터뷰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표명했다. 따라서 ‘주간동아’는 국정원의 입장을 존중해 인터뷰 대상자의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익명의 고위 관계자 인터뷰’로 처리했다.

 

-신임 원장 취임 이후 직원 출퇴근 풍속도가 바뀌었다던데…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원장은 원래 출퇴근 시간 개념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직원들 때문에 (재실 등을) 9시 출근, 6시30분 퇴근에 맞춰놓고 있을 뿐이다. 사실 정보기관 직원에게 출퇴근 개념은 의미가 없다. 일이 없으면 쉬어야 하지만 일이 있을 때는 24시간 근무도 불사해야 한다. 대개 간부들은 오전 7시면 나오지만 철야 근무한 직원들은 11시나 12시에 나와도 되는 곳이 정보기관이다. 원장 취임사는 새벽에 켜진 창문의 불빛을 보고 정말 나라를 지키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면서 국가에 대한 무한책임을 강조했다.”

 

-원장 취임사는 ‘예방정보’를 강조했는데 그 의도는 무엇인가.

 

“예방정보가 아니라 어떤 사태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강조한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인용 보도한 예방·예고 정보라는 용어는 사용한 적이 없다. 우리 나라가 처한 안보상황과 국익 손실 및 대형사고 등을 미리 예측해 대처할 수 있는 정보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안보 차원의 예방활동을 강조한 것인데 이것이 정치권과 관련한 국정 예보(豫報)로 와전되었다. 사실 예측이라는 것은 정보활동의 ABC 아닌가.”

 

-국정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원장 프로필을 보면 차장 재임중 대공정보 수집과 마약·테러 분야에서 큰 변화를 이끈 것으로 되어 있던데…

 

“아무래도 수사를 전공했으니 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세계화 시대에는 앞으로도 국제범죄, 마약, 테러, 위폐 분야에 정보수사기관의 조직 역량과 역할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국정원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5월) 부산에서 한·중 정기화물선을 통해 1000억 원대 히로뽕을 들여온 밀수조직을 검거한 것도 6국(외사보안국)하고 부산지부가 공조한 것이다.”

 

-일본에서의 김정남 체포·추방 사건을 우리측 정보기관은 알고 있었는가.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 일본측에서 체포 후 정보협력을 요청한 일도 없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재독 송두율 교수와 관련해 역대 원장들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 여러 증거로 볼 때 국정원은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 원장은 전문가인 실·국장의 판단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이번 인사의 기준은 무엇인가.

 

“차장급 인사는 전문성과 능력·청렴성·개혁성을 고려해 내부 발탁을 원칙으로 한 결과 차장 네 분이 모두 내부 인사로 채워졌다. 국정원 40년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다만, 1차장이 원장의 J고(전주고) 후배라 밖에서 말이 좀 나왔는데 1차장은 원내에서 아무런 반대가 없는 인물이다. 그 다음이 기조실장인데 과거 이 자리는 외부에서 왔든 내부 인사든 정권과 가까운 사람이 맡아왔다. 원장이 사심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를 가지고 ‘장난’을 칠 수도 있다. 그런데 원내에서 신망받고 업무에 정통한 선임자로 정하다 보니 장종수 실장(강원도 고성)이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인사는 큰 문제가 없다.”

 

-40주년인데 특별한 기념행사나 직원 사기 진작책은 있는가.

 

“40주년이든 50주년이든 정보기관이 기념일이라고 떠드는 것은 좋지 않다. 6월10일은 휴일이어서 6월9일 청사에서 간단한 기념식을 갖는다. 다만 기념일을 전후해 직원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고 불우한 전직 직원들을 위로하는 조용한 행사를 내실 있게 치를 계획이다. 그밖에 기념사진전과 ‘홈 커밍데이’도 잡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총성 없는 전쟁 “A급 정보를 찾아라”
세계 각국 경제·산업·기술 등 정보 수집 혈안… 국정원도 年 수만 건 챙겨

냉전의 붕괴와 더불어 90년대부터 시작된 세계화의 흐름은 한국의 국가 정보기관에도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부여했다. 세계화 시대의 특징은 세계와 지역 그리고 북한과 대내 문제를 동시에 연계해 봐야 하는 과제를 정보기관에 안겨주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해외 경제`-`산업 정보 및 과학-기술정보 수집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91년부터 시작된 경제·과학분야 석·박사 특별채용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경제전의 정보목표인 ‘해외 경제·산업·기술 정보’ 수집은 이제 국가정보기관 본연의 기본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한국 같은 자원 빈국은 해외정보 수집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국정원은 그동안 우방국에서의 이런 활동을 대개 ‘대북 첩보 수집’이라는 핑계로 위장해 왔다. 경제보다 군사적 안보가 우위인 시절에는 우방국 정보기관도 그런 핑계를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냉전이 무너진 이후 세계가 치열한 경제정보전을 치르는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다. 실제 한국은 현재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이른바 ‘산업스파이 국가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현재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의 정치·경제·군사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있다. 또 250개가 넘는 국정원의 해외 정보목표 중에서 경제·과학 정보 목표는 40개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년에 수집되는 수만 건의 해외정보 자료 중에서 경제·과학 정보는 2%를 넘지 못하는데다 이마저 A·B급은 아예 없고 90% 이상이 D급이고 1년에 30여 건만 C급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결국 국정원이 100여 개 국가의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모두 수집하였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같은 셈이다. 국정원의 ‘백화점식 정보목표’에 의한 정보활동이 안고 있는 취약성이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총성 없는 전쟁 “A급 정보를 찾아라”
세계 각국 경제·산업·기술 등 정보 수집 혈안… 국정원도 年 수만 건 챙겨

백화점식 정보활동 약점… 해외정보 90%가 D급

 

이처럼 국정원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이는 해외 정보자산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북한이라는 존재가 갖는 안보위협에 있다. 정치·군사 정보 가치의 감소와 경제·과학 정보 가치의 증대라는 정보환경의 변화에도 국가 정보기관의 ‘메인 롤’(main role)은 대북 정보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이 국정원의 고정관념이다. 이런 이유로 국정원은 우리 나라가 놓인 안보적 특수환경과 정보환경의 변화를 감안해 정보역량을 적절히 배분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첩보 사상 가장 어려운 상대’(미국 CIA의 표현)라는 북한을 체계적으로 들여다보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이라는 자긍심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의 대외적인 위상은 국력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보기관의 활동영역은 크게 정보수집(Collection), 분석(Analysis), 공작(Covert Action;Clandestine Operation), 방첩(Counter-intelligence)의 네 분야로 나뉜다. 우리 나라 국가 정보기관의 경우 이 네 가지 활동영역의 정보역량이 집중된 분야가 바로 대북정보 분야이다. 우리는 흔히 대북정보라고 간략히 부르지만 이 안에는 정보수집뿐만 아니라 분석·공작·방첩 활동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인류 첩보 사상 가장 어려운 상대로 인식돼 왔다. 따라서 국정원의 정보활동 대상에서 북한보다 우선 순위를 갖는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해외 정보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의 해외 정보활동은 대북 정보자산을 축적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이를테면 국정원의 ‘해파’(해외파견) 요원들은 주재국의 정세 파악과 주재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임무말고도 주재국의 북한 ‘해파’ 요원을 감시하고, 주재국과 북한의 관계를 점검하며 이를 활용해 북한을 들여다볼 요원을 파견하거나 국내에 우회 침투하는 스파이(간첩) 활동에 대한 방첩 임무 등을 맡아야 한다. 이밖에 대통령이나 VIP가 주재국을 방문하면 경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는 국정원이 다른 나라의 국가 정보기관보다 여전히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국정원의 ‘해파’ 요원이 ‘슈퍼맨’이 아닌 다음에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정보수집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정보기관의 정보수집과 관련한 역할과 기능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북정보만 하더라도 과거와 달리 김대중 정부의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촉면’이 확대되면서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북한 또한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한때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역일꾼 등 자국인에 대한 소환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경제난 극복에 나서면서 많은 ‘외화벌이 일꾼’들을 내보내고 있다. 자연히 남한의 많은 기업인·민간단체·언론 등과 빈번히 접촉하고 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소중한 ‘정보 수집선’인 것이다. 즉 과거처럼 은밀한 첩보수집활동을 하는 국가 정보기관만이 북한측과 ‘접촉선’이나 ‘정보 수집선’을 유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또 대북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도 지났다.

 

따라서 국정원은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생성되는 대북정보를 조직화하는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국정원이 수집하는 경제정보, 과학`-`기술정보 가운데는 개별 기업에게 유용한 정보가 있을 수 있고, 또 개별기업들이 수집하는 정보 중에는 해당 기업에는 필요치 않지만 국가적으로 유용한 정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국가 정보기관은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별 기업과 단체 그리고 언론 등이 소장·사장시키는 정보를 조직적으로 엮어내 체계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대북정보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정보자산을 조직화·체계화했을 때 국정원은 그동안의 북한 일변도에서 눈길을 돌려 정보역량을 적절히 배분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그럴 때 국정원은 비로소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가치 있는 해외정보’ 수집과 대 테러, 국제범죄, 산업기밀 보호관리 등에도 힘을 기울일 수 있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총성 없는 전쟁 “A급 정보를 찾아라”
세계 각국 경제·산업·기술 등 정보 수집 혈안… 국정원도 年 수만 건 챙겨

정보환경 급변, 업무는 그대로 ‘효율성 낙후’

 

마약의 확산과 국제적 테러의 증대 그리고 ‘총성 없는 경제전’에 대처하는 국가정보기관의 역할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임무의 효율적 수행도 훨씬 더 어려워진다. 갈수록 세계는 넓고 정보기관이 할 일은 많아진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위협과 역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내외 정보 수집 업무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국정원의 현재 위상은 “과거에 비해 정보환경이 달라졌고 국정원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졌는데 임무는 그대로다”(중간간부 S씨)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과거에는 정보기관에 힘이 있었기 때문에 정보가 몰렸다. 가만히 있어도 ‘갖다 바치는 정보’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정보는 검찰이나 언론보다 못하다.”

 

현재 국정원 해외·대북 파트에서 생산하는 자료는 국외일일정보(대외비), 해외산업경제정보·주간해외시사정보(국책민간연구소 배포), 최근 북한동향(국방부 등 배포), 월간 테러정세(검찰·경찰 배포) 등이다. 이 가운데 ‘국외일일정보’는 전 세계 쭛쭛지역에 파견한 ‘해파’ 요원들의 1일2건 정보보고를 분석·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1일2건의 할당식 업무는 ‘외신 짜깁기’의 주범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 점은 국내파트도 마찬가지다. 1일 정보활동 제도는 보고를 위한 정보수집, 심층 정보활동의 제약이라는 폐단을 낳는다. 이 때문에 I.O.(정보관)의 신분이 드러나곤 한다. 따라서 국정원은 국내외 일일정보 보고활동은 경찰에 맡기고 장기활동으로 들어가 정보의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업무의 전문화를 위해서는, 직렬과 직위만 있을 뿐 직급이 없는 CIA처럼 관리직과 전문직으로 나누어 승진 때문에 전문성을 포기하거나 또는 전문성을 갖춘 직원이 승진을 못해 계급정년으로 옷을 벗는 바람에 전문성이 사장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또 스파이들이 ‘총성 없는 경제전’이 벌어지는 해외로 눈길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권이 국정원의 ‘발목’을 잡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며 국정원도 정치 개입의 유혹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정치공작 산실’ ‘무소불위 권력’ 씻기지 않는 오명… ‘정보기관’ 본연 임무 찾아 서서히 양지로

본인은 국가안전보장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을 발휘하여 국가에 봉사할 것을 맹서(盟誓)하고, 법령 및 직무상의 명령을 준수·복종하며, 창의와 성실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국가정보원의 신입 직원들은 원장 앞에서 국가정보원 직원법(제15조)에 규정된 이런 선서를 해야 한다. 1999년 1월21일 개정된 국가정보원 직원법(법률 제5682호)에 따른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가정보원으로 다시 태어난 뒤에 생긴 변화한 풍속도 중 하나다.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신입 직원을 어두운 암실에 집어넣고 선서를 하게 했다. 안에 있을 때는 물론 퇴직한 뒤에도 지득(知得)한 기밀을 절대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보안서약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것은, 이 특정직 공무원은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내고 업무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사표를 근거로 국정원은 직원에게 ‘사고’가 생기면 언제든지 “우리 직원이 아니다”라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다. 국내외에서 비합법적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 발각되거나, 또는 북한에 잠입해 특수공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는 이런 ‘사고’가 흔치는 않지만 특수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 같이 익명(匿名)으로 존재한다. 수천 명의 직원 중 정무직인 원장과 1·2·3차장 그리고 기조실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공보관만이 신원(身元)을 공개할 수 있는 특수 집단이다. 심지어 죽어서도 이들의 신원은 비공개이고 더러는 신원(伸寃)하지 못한 억울한 죽음으로 남기도 한다. 그래서 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청사 내에 보훈탑이 있어 순직자 4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중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당한 최덕근 영사처럼 일반에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어떤 임무를 수행하다 죽었는지 베일에 싸여 있다.

 

전쟁에 대비한 무력집단인 군(軍)을 빼고는 평시에도 이처럼 보안과 익명을 생명으로 삼는 집단은 없다. 그것이 이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익명에의 정열이 조직을 유지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에의 정열과 맹목적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들은 국가안보를 정권안보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 국정원이 6월10일로 창설 40주년을 맞이했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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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 ‘옷‘은 미제 ‘사람‘은 일제

 

1961년 중앙정보부가 생긴 것은 한국의 국가정보기관 역사에서 크게 두 가지 의의를 갖는다. 첫번째 의의는 중앙정보부의 출범으로 전략적 차원의 국가정보기관이 처음 생겼다는 점이다. 45년 8월 광복 후 중앙정보부가 창설될 때까지 군과 경찰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정보기관은 전술적 또는 부문 정보기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명칭에서부터 권한에 이르기까지 미 중앙정보국(CIA)을 모델로 한 중앙정보부(KCIA)는 명실상부한 국가정보기관의 형태를 띠었다.

 

또 다른 의의는 해외정보 수집 기능을 갖춘 중앙정보부의 출범으로 비로소 해외정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해외정보(대북정보 포함)에 대한 경험은 군이 전술적 필요성에 의해 정보를 운영한 것이 전부였다. 대북 전술 첩보조직이었던 첩보부대(HID)와 특무대, 그리고 헌병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앙정보부 창설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그 모델이던 CIA였다. 비록 규모는 비교가 안 되지만 특히 조직과 기구 편제 면에서 중앙정보부는 선진 정보기관인 CIA 모델을 답습했다. 문제는 하드웨어는 모방할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모방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런 점에서 중정 창설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고, 영향력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 된 것은 군의 정보 경험과 일본식 첩보수집과 공작에 대한 이해였다. 즉 하드웨어(조직)는 미국식이었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인력)는 일제시대 때 군과 경찰에서 경험을 전수받은 군과 경찰의 그것, 즉 일본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정보의 최종 사용자가 된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말해 ‘옷’만 미제(신식)일 뿐 사람은 일제(구식)였던 것이다. 다음은 안기부 차장을 지낸 L씨의 증언이다.

 

“정보에 대한 일본식 이해는 만주사변에서 일본군, 특히 헌병 장교의 역할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의 기본 임무는 조작과 공작이었다. 즉 현대적 의미의 CA(Covert Action)였다. 그러다 보니 중정의 초기 운영도 음모적인 시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중정이 창설된 후 70년대 중반까지 대북 정보를 포함한 해외정보를 담당한 사람은 일본군 헌병 출신의 이철희 차장이었다. 중앙정보부 시절 그의 정보관(情報觀)은 일본식 정보개념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관에도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즉 정세를 조작하고 이를 위해 정치문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주임무였다.”

 

이처럼 서구식 정보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치 안정이 최우선 목표가 되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초기 기능은 정보기관 본연의 길에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국내보안·정보 분야보다 비교적 정치적 영향을 덜 받은 해외 정보 분야에서도 체제 반대세력을 감시하는 것이 주임무가 되어 버릴 만큼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정치공작 산실’ ‘무소불위 권력’ 씻기지 않는 오명… ‘정보기관’ 본연 임무 찾아 서서히 양지로

1980년대 : 국가안보와 정권안보의 동일시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정치체제의 변환과 함께 명칭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면서 중앙정보부는 중대한 변환을 맞이한다. 그러나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동일시하는 정보기관의 전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안정이라는 정보기관 존립의 최우선 목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기관 내부로 눈길을 돌리면 이철희씨와 같은 리더십이 퇴진하고 일본군 색채의 운영방식이 퇴색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었다.

 

1980년대 안기부 운영방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들 수 있다. 이는 정보기관인 안기부가 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정치현실을 강제하는 통치기구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을 의미한다. 1987년 1월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드러난 것처럼, 안기부는 80년대 정치 안정에 영향을 주는 중대사건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어 대책을 마련하는 등 정국 운용을 주도했다. 이는 전통적 의미의 정보수집 및 분석기능을 뛰어넘어 정보수집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정책 집행결과를 점검 조율하는 기능까지 장악한 것을 의미했다. 즉 정보수집, 정책대안 모색, 집행, 모니터, 피드백(feed-back)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안기부가 개입한 것이다.

 

이처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힘을 가진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안기부의 ‘국정 개입’은 안기부의 위상과 이미지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로 인해 국가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즉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 그리고 제5공화국의 나쁜 이미지와 연계해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주도하는 법 위에 군림하는 기관, 정보를 자의적으로 운용하고 국가 안보가 아닌 정권 안보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인상이 국민에게 각인되었다. 그 유산은 지금까지도 정보기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국정 개입’으로 인한 또 다른 부정적 영향은 정보수집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했다는 점이다. 안기부 본연의 기능인 정보수집 기능이 정책수립 기능과 혼재함으로써 정보 운용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정책수립 기능 쪽에 더 쏠렸다. 정보 사용권자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그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보수집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해 비밀정보를 비밀수단으로 수집하는 전문적인 기능으로서의 정보수집에는 소홀해졌고, 훈련 등으로 정보수집을 위한 자산을 축적하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정보자산의 축적과 같은 일은 장기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었으나 이를 소홀히 함으로써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문민정부 : 국가안보와 정권안보의 혼동‘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도 안기부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일단 안기부에 대한 통제 형식을 띠었다. 김영삼 정부는 94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법을 개정해 국가보안법 제 7·10조(찬양-고무·불고지) 수사권 및 보안감사권을 폐지하고, 방첩·대테러·국제범죄조직 업무를 추가해 94년 2월 국제범죄신고상담소를 개소했다. 또 94년 6월에는 국회 상임위로 정보위원회가 설치되어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 의한 정보기관의 통제가 시도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사라져 정보수집과 정책수립 기능이 분리되었다. 안기부는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서울 남산과 이문동 청사에서 근무해 온 ‘두 지붕 한가족’ 시대를 끝내고 95년 9월 내곡동 통합 신청사로 이전하기도 했다. 안기부는 통합 신청사 준공을 계기로 PC통신 하이텔에 대국민 정보서비스 창구를 개설해 ‘국민에 안기는 안기부’를 표방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안기부법 개정 이후 줄곧 정보위를 상대로 재개정을 추진했고, 결국 김영삼 정부는 96년 12월 야당과 재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기부법을 재개정해 국보법 제7·10조 수사권을 원상 회복시켰다. 또 각종 정치개입 사례와 예산 횡령(여당 선거자금 불법 전용) 사건, 그리고 북풍공작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국회 정보위의 통제를 받는 문민정부하에서도 안기부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정보기관의 예산을 여당 선거자금으로 빼돌리는 등 구태를 답습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 개혁은 IMF 긴급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의 운명과 비슷한 ‘외화내빈’의 실패로 끝난 셈이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정치공작 산실’ ‘무소불위 권력’ 씻기지 않는 오명… ‘정보기관’ 본연 임무 찾아 서서히 양지로

‘국민의 정부‘하에서 국가정보원으로

 

선거에 의한 50년 만의 여야 정권교체라는, 안기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 상황’ 속에서 출범한 이른바 ‘국민의 정부’의 안기부 개혁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98년 2월25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3월5일 제22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취임한 이종찬은 ‘작지만 강력한 정보기관’을 표방하며 명칭을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NIS)으로,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써온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을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원훈(院訓)으로 바꾸고, 총원의 11.1%를 줄이는 등 조직과 기능을 대폭 개편했다. 국정원은 이종찬 초대 원장에 이어 천용택·임동원·신건 4명의 원장을 맞이했다.

 

4명의 원장 중 이종찬 초대 원장은 정규 공채 1기 출신으로 누구보다 국정원을 잘 아는 처지였지만 ‘손에 피를 묻히는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이원장은 안기부 개혁이라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비밀정보기관 조직의 생리상 거부감이 큰 외부 인사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외부에서는 이것을 ‘거물 정치인’인데다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으로서 ‘인력 풀’의 용량이 큰 그에게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점령군’쯤으로 간주했다. 특히 수십 년간 지속된 폐쇄 조직을 개방형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포함한 그의 행보는 종종 ‘정치적 행보’로 인식되었다.

 

이종찬 원장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육사 16기 이원장 동기생 천용택 2대 원장이 맨 먼저 한 일은 외부 출신 차장을 내보내고 내부인사들로 보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방형에서 폐쇄형으로 선회하는 것을 의미했다. 상당수 직원들은 이런 조처에 내심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6개월을 지나야 업무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는 국정원을 맡아 이제 막 일을 시작할 때쯤인 7개월 만에 대통령 정치자금과 관련한 실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군인, 외교관, 관료를 거치는 동안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략가인 임동원 3대 원장에 대한 평가는 매우 양극적이다. 임원장 부임 당시 대공정책실장을 지낸 국정원 간부 K씨는 당시 이렇게 평가했다. “임원장은 국정원장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두루 섭렵한 분이다. 이런 분이 원장으로 오기는 처음이다. 앞으로 국정원의 업무 특성상 중요한 군 및 청와대와의 조화로운 업무 협조와 내실 있는 조직 운영이 예상된다.” 국정원 조직의 골간이 해외정보·국내보안·대북 분야를 각각 담당하는 1·2·3차장제로 3분된 것에 비추어 사실 임원장의 경력은 중정·안기부 시절을 포함한 역대 국정원장 중 최적임자였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안팎에서 모두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가장 흔한 비판은 DJ ‘햇볕정책’의 전도사인 임원장이 대북분야만 챙기고 국내보안 쪽은 외면했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힘은 생산 정보의 질량(質量)과 비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임원장 체제에서 국내파트는 해외·대북 파트보다 과거에 비해 힘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적극적인 정보수집활동을 선호하는 국내 I.O.(정보관) 가운데 상당수는 임원장의 조직 운영방식에 비판적이었다. 이런 비판은 여당 쪽에서도 컸다. 최근 여권에서 발생한 정풍 파문 때 민주당의 한화갑 최고위원은 이런 말을 했다.

 

“과거의 여당은 확실히 행정부보다 우위에 있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공공연히 열고 ‘안가’회의 결과를 발표했고 행정부에서 시행했다. 당에서 국정운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대처했다. 우리는 민주국가의 모범을 보이느라고 정보기관과의 유대가 끊어졌다. 당과 그런 협의가 없다. 정보를 솔직히 모른다. 정보는 청와대와 정부가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할 청와대가 나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여당의 현주소고, 과거와의 차이점이다.”

 

한최고위원의 발언은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정보기관과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당 내, 특히 동교동계 구파 내에서는 여당에 일절 정보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국내정치 정보수집활동 자체를 현저하게 위축시킨 임원장의 조직운영 스타일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임원장 재임중 동교동계 구파로 권노갑씨의 측근인 K 전 의원의 기조실장 부임설이 끊임없이 나돈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은 중간간부 S씨의 증언이다.

 

“K 전 의원이 여권 실세의 힘으로 기조실장으로 오려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실세가 기조실장은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가신이 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의를 받은 대통령께서 임원장에게 ‘K 전 의원을 기조실장으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는데 임원장이 ‘정치인 출신 외부 인사가 그 자리에 오면 줄 대기 등 내부 부작용이 커진다’고 완곡하게 거절해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임원장이 외풍을 막은 것은 평가해야 한다.”

 

임원장의 조직 운영 및 인사가 가져온 작지만 중요한 변화는 그가 원장으로 부임할 때 외부 인사를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관행은 신건 현 국정원장으로 이어졌다. 신원장은 단신으로 입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임 원장이 임명한 비서실 직원을 아무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게다가 신원장은 1차장(최명주, 전북 출신), 기조실장(장종수, 강원)을 내부 인사로 발탁해 기존의 김은성 2차장(서울, 원적은 전남), 김보현 3차장(제주)과 함께 차장급 간부 전원을 내부 인사로 보임했다(기조실장은 1급이지만 정무직이기 때문에 통상 차장급으로 간주한다). 차장급 4명 전원을 내부 출신으로 보임하기는 국정원 40년 역사상 처음이다. 다음은 이번 인사에 대한 국정원 간부 Y씨의 평이다.

 

“이번 인사를 계기로 앞으로 차장까지 외부 인사가 원내에 들어오기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공채 출신 원장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원장 대망론’까지 조심스럽게 점칠 만큼 정치적 중립을 이뤘고 이제 그럴 만한 연륜도 되었다는 것이 내부의 평가다.”

 

앞서의 중간간부 S씨는 “현행 법체계에서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은 정보의 최종 사용권자인 대통령과 운영권자인 원장의 의지에 달렸는데 현 대통령은 정보기관이 적법활동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정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런 점에서 국정원이 과거와 달리 정권안보가 아닌 국가안보를 위해 운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국정원이 정권안보와 국가안보를 혼동하지 않는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정치공작 산실’ ‘무소불위 권력’ 씻기지 않는 오명… ‘정보기관’ 본연 임무 찾아 서서히 양지로

한국 국가정보기관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역대책임자

성명

재임 기간

출신교

부.원장 취임 전/후 주요 경력.사건

1대
김종필

61.5.20~63.1.6
(1년 8개월)

육사8기

육균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준장 예편/국무총리

2대
김용순

63.1.7~63.2.20
(2개월)

육사3기

육군첩보부대장, 중장 예편

3대
김재춘

63.2.21~63.7.11
(5개월)

육사5기

육균방첩부대장, 소장 예편

4대
김형욱

63.7.12~69.10.20
(5년 3개월)

육사8기

준장 예편/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
(이후 사망 선고)

5대
김계원

69.10.21~70.12.20
(1년 2개월)

군사영어학교

육참총장, 대장 예편/비서실장

6대
이후락

70.12.21~73.12.2
(3년)

군사영어학교

소장 예편, 비서실장/김대중 납치사건 연루

7대신직수

73.12.3~76.12.3
(3년)

전주사범

국법무관,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8대
김재규

76.12.4~79.10.26
(2년 10개월)

육사2기

중장 예편, 보안사령관/박정희 시해사건으로 사형

9대
이희성

윤일균

79.10.30~79.12.12
(2개월)

79.12.13~80.4.13
(4개월)

육사8기

공군대학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
(부장 서리)

공군 준장 예편
(직무대행)

10대전두환

80.4.14~80.7.17
(3개월)

육사11기

보안사령관, 합수부장
(부장서리)/대통령

11대
유학성

80.7.18~82.6.1
(1년 11개월)

정훈1기

대장 예편/5.17 사건으로 구속수감

12대
노신영

82.6.2~85.2.18
(2년 8개월)

서울대
법대

고시 행정과, 외무장관/국무총리

13대
장세동

85.2.19~87.5.25
(2년 3개월)

육사16기

경호실장, 중장 예편/ 용팔이 사건 등으로 3회 구속

14대
안무혁

87.5.26~88.5.6
(1년)

육사14기

준장 예편, 국세청장/14대의원

5대
배명인

88.5.7~8812.4
(7개월)

서울대
법대

고시 사법과, 법무부 장관

16대
박세직

88.12.5~89.7.18
(8개월)

육사12기

소장예편, 안기부 2차장, 총무처 장관

17대
서동권

89.7.19~92.3.30
(2년 8개월)

고려대
법대

고시 사법과, 검찰 총장

18대
이상연

92.3.31~92.10.8
(6개월)

특수전학교

정훈정보학교 교관, 안기부 1차장

19대
이현우

92.10.9~93.2.25
(4개월)

육사17기

정보사령관, 경호실장/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

20대
김 덕

93.2.26~94.12.24
(1년 10개월)

서울대
법대

외국어대
교수/통일부총리

21대
권영해

94.12.24~98.3.4
(3년 3개월)

육사15기

소장 예편, 국방부장관/ 북풍공작 등으로 구속

22대
이종찬

98.3.5~99.5.25
(1년 3개월)

육사16기

소령 예편, 중정 총무국장, 4선 의원

23대
천용택

99.5.26~99.12.24
(7개월)

육사16기

합참전략기획본부장, 국방부 장관

24대
임동원

99.12.24~01.3.26
(1년 3개월)

육사13기

통일원 차관, 외교안보수석, 통일부 장관/통일부 장관

25대
신건

01.03.27~01.4
현재

서울대
법대

중앙수사부장, 법무부 차관, 안기부
(국정원)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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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세코스에만 눈독 영어권 선호 中東등은 기피
[매일경제 2004-06-3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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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팀 대수술 (2)◆

'청ㆍ비ㆍ총'. 외교통상부에서 출세의 지름길로 통하는 코스, 즉 청와대 파견 근무자, 장ㆍ차관 비서관, 총무과(현 인사과) 출신들이 보직과 승진에서 유리 하다는 것을 지칭한 말이다.

실제로 현재 외교부 핵심 보직의 상당수가 '청비총' 출신이고 최근 인사에서도 이 말은 다시 한번 입증됐다.

김선일 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외교부의 엘리트주의가 다시 한번 도마에 오르고 있다. 본부 사무관들이 김선일 씨 납치 여부를 묻는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받 아넘긴 것도 따지고 보면 뿌리깊은 엘리트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해석되기 때문 이다.

외교업무를 수행하는엘리트'에게 대민 서비스는 귀찮은 사족일 수 있다. 잘 해도 티는 안나고 '욕' 먹을 일만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 교민서비스 업무를 맡고 있는 영사직은 기피부서다.

한 외교관은 "영사로 발령이 나면 대부분은 인사에서 '물먹었다'고 생각한다" 면서 "영사 업무는 인력은 부족한데 교민의 요구 수준은 너무 높아 잘해야 본 전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외교부가 최근 외부전문가를 초빙하는 개방형 임용제 대상에 재외국민영사국장 을 포함한 것도 '뜨거운 감자'를 손에서 놓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영사업무에 대한 불만으로 현지 교민사회와 대사관이 대립하 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동남아지역 한 교민회 간부는 "기본적으로 영사서비 스는 수동적"이라며 "조력범위라는 것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처리하려 한다" 고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테러나 살인사건 등 사고다발지역에서도 영사서비스 가 예방보다는 사후 수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최영진 외교부 차관은 "영민한 직원들을 영사국에 배치하겠다"고 밝 히기도 했다. 또 영사국을 영사실로 승격하고 영사업무 담당 차관보를 신설하 며, 영사직에 인사혜택을 주는 방안 등도 검토하고 있다.

2001년 말에도 외교부는 중국에서 한국인 마약 사범의 처형 등으로 영사업무 전담 차관보 신설 등의 개선안을 내놨지만 흐지부지된 적이 있다.

반면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 관련 부서나 공관에는 근무 희망자가 집중되고 있다. 외교부 내에서도 엘리트 코스로 인정받는 워싱턴 대사관이나 북미국의 경우 특정대학 특정학과 출신이 아니면 지원도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소수정예주의는 인력 수급에도 미스매칭을 야기한다. 북미국과 아태국은 항상 외교현안이 많아 과로를 호소하는 반면, 외교업무 비중이 낮은 실국들은 일손 이 남아도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점은 지난 1~5월 진행된 외교부 혁신 컨설팅 에서도 지적된 사항이다.

'폼나는' 지역 근무만 선호하는 문제는 외교관 출발점인 외무고시에서부터 시 작된다. 2부시험 중 외국어 선택과목에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일본어 등만 포함돼 있고 세계 5~10위권 사용인구를 가진 아랍어와 힌디어, 포르투갈어 등 은 아예 제외돼 있다. 외교관들이 중동지역 근무를 꺼리는 것도 위험지역이라 서 뿐만 아니라 언어ㆍ문화적 배경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비판에 대해 전ㆍ현직 외교관들은 외교부가 엘리트의식이 팽배할 만큼 ' 권력기관'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한 전직 외교관은 "영사업무 서비스가 부족한 것을 엘리트주의로 몰아붙여선 안된다"며 "속지주의 영향도 있고 예산도 부족 하고 여러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과장급 현직 외교관도 "외교부가 전반적으로 개혁의지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 지만 그렇다고 검찰이나 국정원처럼 권력기관 개혁 차원에서 보는 것은 억울하 다"고 말했다.

외교부 내에서는 대사급 30%를 외부에서 아웃소싱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역차별 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 고위 외교관은 "그런 논리라면 국방부도 외부에 별 30%를 떼줘야 할 것"이라며 직설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윤상환 기자 / 박만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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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동 청사 안에는 이름도 사진도 없는 46개의 위패를 모신 보국탑이 있다. 순직한 46명 중 이름과 얼굴을 남긴 사람은 1996년 귀가 중 괴한에게 저격당해 숨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주재 최덕근 영사뿐이다. 국정원은 언론의 교육시설 취재에 처음으로 응했지만 직원들의 얼굴과 실명 공개는 허용하지 않았다. 나침반 모양의 국정원 마크를 가슴에 단 신입요원들이 태권도 수업을 받고 있다. 왼쪽 상단의 국정원 엠블럼은 국정원의 영어명칭(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의 첫 글자를 형상화한 것으로 마크와 함께 사용된다.


24일 경기도 판교 인근의 국가정보대학원 정문 앞. 여느 대학원과 달리 베레모를 쓰고 검은 선글라스로 시선을 감춘 경비원이 무장 경계를 서고 있다. 이곳은 국가정보원 신입요원을 비롯해 국정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각종 직무교육을 하는 국가 보안 시설이다. 청와대 경호실.외교부 등 일부 부처 직원들의 보안 교육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중앙일보는 국정원의 협조를 받아 국정원 새내기들이 민간인 티를 벗고 정보요원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국정원 교육 시설과 신입요원의 교육 과정이 언론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후 2시 대학원 체육관의 무도장. 국정원 신입요원들의 태권도 수업이 시작됐다. 남녀 구분 없이 주먹을 쥔 채 엎드려 팔굽혀 펴기로 몸을 풀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겨루기'에 들어갔다. 태권도에 비해 옆차기와 주먹을 자주 사용하는 게 눈에 띄었다. 태권도 7단의 김모 사범은 "실전에 도움이 되는 동작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연습시킨다"고 했다. 보통 득점 위주의 태권도 경기에서는 발등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앞돌려차기가 자주 등장한다. 타격할 때 소리가 커 득점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 사범은 "발차기에서는 옆차기와 뒤후리기를 중시하며, 근접해서 싸울 때 도움이 되는 주먹 타격도 강조한다"고 했다. 신입요원들은 교육을 받는 동안 모두 유단자가 돼야 한다.

같은 시간 다른 강의실에서는 또 다른 그룹의 신입요원들에게 '기억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국정원 측은 정보 활동을 하면서 꼭 필요한 사항을 기억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교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비법'을 좀 알려 달라는 기자에게 교육 담당자는 인간의 다섯 감각기관을 최대한 활용해 마치 '영화를 보듯이' '사진 찍듯이' 혹은 '녹음하듯이'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고 소개했다. 교육 과정엔 기억술 외에 '독심술(讀心術)' 등도 있었다.

이에 앞서 오전 11시 대학원 대형 강당에 '게릴라'가 나타났다. 문화게릴라로 불리는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두 시간 동안 '연극 감상법' 특강을 했다. 이씨는 오이디푸스와 햄릿 등 꼭 알아둬야 할 연극을 거론한 뒤 "나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이지만 여러분도 경계인"이라며 "경계인은 당파성이 없어야 하며,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해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국정원은 연극 이외에도 뮤지컬.오페라 등 다양한 분야의 외부 특강을 교육 과정에 포함시켰다. 교육 담당자는 "세상만사를 두루 알고 있어야 업무를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든 간에 말이 통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신입요원에게 골프를 가르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강의를 받는 신입요원들은 모두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서류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일률적으로 지급한 교육생 복장이었다. 올 1월에 입사한 이들은 현재 상반기 합숙훈련과 하반기 직무별 전문교육을 거쳐 내년 현업에 배치된다. 곧 해양훈련을 받을 예정인데 '생존 수영법'도 배운다. 생존 수영은 평영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수영법으로 가장 오랫동안 헤엄칠 수 있다고 했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목발로 힘겹게 이동하는 신입요원이 눈에 띄었다. 헬기를 타고 700m 상공에 올라가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공수훈련을 하다 다쳤다고 한다. 가끔 부상자가 발생하는 공수훈련을, 군인도 아닌 이들이 왜 할까.

"정신훈련을 위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뛰어내리면 국가에 대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교육 담당자의 대답이다.

서경호 기자<praxis@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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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국정원이 주선한 안보견학에 참여, 4월25일 백령도에 도착했다. 국정원은 백령도에 자체 연수원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인사들을 초청, 안보의 중요성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유명 교수를 초청,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에 대한 강의도 있었지만 분단지대를 직접 견학토록 함으로써 안보현실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지리적 분단, 이념 분단, 민족적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에 대해서도 자세한 해설을 곁들였다.

 

김oo 국정원 안보연락관은 백령도에 입항하기 전부터 출항을 완료할 때까지를 주관, 분단국의 안보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노력했다. 인천과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공해상으로 운항하는 순간 우리의 해군이 완벽하게 경비를 서주는 것도 설명했다. 그 뿐 아니라 군부대를 방문, 국방현장을 확인하는 프로그램도 짜임새 있게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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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제임스 본드' 교수님 됐네
국정원 前'해외공작 전문가' 정영철씨 연세대서 강의

'대학 강단에 선 제임스 본드.'
무슨 007영화 제목 같은 이야기냐 하겠지만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 과 3학점짜리 전공선택 '국가 안보와 정보'의 수업이 펼쳐지는 연희관 108호. 수업 도중 하나밖에 없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와 학생들이 낮선 '침입자'를 향해 일제 히 시선을 돌렸다. 기자의 뒤를 이어 사진기자가 따라 들어와 대뜸 카메라 프래시를 터 뜨리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때 '제임스 본드'는 황장엽망명사건을 예로 들어 언론의 선정적 보도 때문에 제3국에서 탈북자를 데려오는 공작이 어려워졌다는 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한참 국익을 외면한 언론의 폭로주의를 질타하던 참에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기자가 들이닥쳤던 것.

'제임스 본드'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했다. "탈북자가 우리 영토로 들어왔다 면 우리 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제3국에 있다면 국제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북한인도 우리 국민이다'며 인도를 강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중국이나 러시아는 인권을 별로 기대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왜 황씨를 빨리 데려오지 않 느냐고 성화를 부렸다. 그 바람에 탈북자를 조용히 빼오던 길까지 다 막혀버렸다. 국가 정책에는 공개 영역에서 다룰 것이 있고, 가려진 부문에서 준비할 것이 있다. 가려진 부 문에서 정책을 준비하는 곳이 바로 정보기관이다. 이제 국민과 언론도 가려진 부문에서 준비할 정책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수업이 끝난 뒤 한 학생을 붙잡고 강사가 누구인 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정민우라고 이름을 밝힌 정외과 4학년생은 "국정원에서 공작분야 책임자를 지낸 분으로 안다"고 대 답했다. 이어 정군은 "정보기관을 막연히 정치 사찰기관으로만 알았는데, 실례를 들어가 며 강의하는 교수님 덕분에 정권 안보보다는 국익을 위해 더 필요한 기관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 강의는 우리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문제의 본질로부터 얼마나 멀어 지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황장엽사건 등 비밀공작 '아슬아슬' 공개

'제임스 본드'의 본명은 정영철씨(56)다. 정씨는 고려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68년 공채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31년간 해외공작 부서에서 근무했다. 이중 마지막 4년을 국장(1급) 으로 일하고 올해 2월 은퇴했다. 수업이 끝난 뒤 정씨를 붙잡고 강의하게 된 배경을 물 었다.

"이 과목은 원래 문정인교수가 하던 것이다. 그런데 문교수가 보직을 맡게 됨으로써 폐강 할 처지가 됐다. 그런 참에 내가 은퇴하자 문교수가 강의를 맡아달라고 부탁해 맡게 됐 다. 강의 준비기간이 채 한달이 못돼서 2월 한달은 강의안을 만드느라 거의 밤을 새웠 다. '국가정보원 직원법'에 따라 재임중 취득한 비밀을 누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로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미국의 CIA, 러시아의 FSB를 예로 들어 강의안을 만들었다. 연세 대에서 학사학위를 갖고 강의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한다."

'이한열열사 사망 12주기'를 기념하는 검은 현수막이 펄럭이는 백양로를 따라 내려와 잔 디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씨의 입에서는 '공작'(工作)과 '비밀 공작'(covert action)이라 는 용어가 쏟아졌다.

"공작은 영어로 operation인데, 군에서는 '작전'으로, 정보기관에서는 '공작'으로 번역한 다. 군에서 작전을 거론하듯 정보기관에서 공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북 한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물리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과연 우리가 국군 을 '치안유지군'으로 파병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그 일은 미국이나 UN만이 할 수 있 다. 그러나 우리도 공작은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공작역량 강화가 국가정보원의 최대 과제가 되고 있다. 나는 이런 부문을 학생들에게 알리려 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서도 '비밀 공작과 외교' 등이 정식 학과목으로 강의되고 있다. 다행히 고려대 정외과에 서도 관심을 표현해 올 가을부터는 고려대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맡게 될 것 같다."

한편에서 학생운동의 열사를 기리고 다른 한편에선 정보기관학이 강의되는 모습은 대학 가의 폭도 이제는 꽤 넓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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