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단에 선 제임스 본드.' 무슨 007영화 제목 같은 이야기냐 하겠지만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 과 3학점짜리 전공선택 '국가 안보와 정보'의 수업이 펼쳐지는 연희관 108호. 수업 도중 하나밖에 없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와 학생들이 낮선 '침입자'를 향해 일제 히 시선을 돌렸다. 기자의 뒤를 이어 사진기자가 따라 들어와 대뜸 카메라 프래시를 터 뜨리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때 '제임스 본드'는 황장엽망명사건을 예로 들어 언론의 선정적 보도 때문에 제3국에서 탈북자를 데려오는 공작이 어려워졌다는 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한참 국익을 외면한 언론의 폭로주의를 질타하던 참에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기자가 들이닥쳤던 것.
'제임스 본드'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했다. "탈북자가 우리 영토로 들어왔다 면 우리 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제3국에 있다면 국제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북한인도 우리 국민이다'며 인도를 강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중국이나 러시아는 인권을 별로 기대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왜 황씨를 빨리 데려오지 않 느냐고 성화를 부렸다. 그 바람에 탈북자를 조용히 빼오던 길까지 다 막혀버렸다. 국가 정책에는 공개 영역에서 다룰 것이 있고, 가려진 부문에서 준비할 것이 있다. 가려진 부 문에서 정책을 준비하는 곳이 바로 정보기관이다. 이제 국민과 언론도 가려진 부문에서 준비할 정책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수업이 끝난 뒤 한 학생을 붙잡고 강사가 누구인 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정민우라고 이름을 밝힌 정외과 4학년생은 "국정원에서 공작분야 책임자를 지낸 분으로 안다"고 대 답했다. 이어 정군은 "정보기관을 막연히 정치 사찰기관으로만 알았는데, 실례를 들어가 며 강의하는 교수님 덕분에 정권 안보보다는 국익을 위해 더 필요한 기관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 강의는 우리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문제의 본질로부터 얼마나 멀어 지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황장엽사건 등 비밀공작 '아슬아슬' 공개
'제임스 본드'의 본명은 정영철씨(56)다. 정씨는 고려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68년 공채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31년간 해외공작 부서에서 근무했다. 이중 마지막 4년을 국장(1급) 으로 일하고 올해 2월 은퇴했다. 수업이 끝난 뒤 정씨를 붙잡고 강의하게 된 배경을 물 었다.
"이 과목은 원래 문정인교수가 하던 것이다. 그런데 문교수가 보직을 맡게 됨으로써 폐강 할 처지가 됐다. 그런 참에 내가 은퇴하자 문교수가 강의를 맡아달라고 부탁해 맡게 됐 다. 강의 준비기간이 채 한달이 못돼서 2월 한달은 강의안을 만드느라 거의 밤을 새웠 다. '국가정보원 직원법'에 따라 재임중 취득한 비밀을 누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로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미국의 CIA, 러시아의 FSB를 예로 들어 강의안을 만들었다. 연세 대에서 학사학위를 갖고 강의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한다."
'이한열열사 사망 12주기'를 기념하는 검은 현수막이 펄럭이는 백양로를 따라 내려와 잔 디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씨의 입에서는 '공작'(工作)과 '비밀 공작'(covert action)이라 는 용어가 쏟아졌다.
"공작은 영어로 operation인데, 군에서는 '작전'으로, 정보기관에서는 '공작'으로 번역한 다. 군에서 작전을 거론하듯 정보기관에서 공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북 한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물리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과연 우리가 국군 을 '치안유지군'으로 파병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그 일은 미국이나 UN만이 할 수 있 다. 그러나 우리도 공작은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공작역량 강화가 국가정보원의 최대 과제가 되고 있다. 나는 이런 부문을 학생들에게 알리려 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서도 '비밀 공작과 외교' 등이 정식 학과목으로 강의되고 있다. 다행히 고려대 정외과에 서도 관심을 표현해 올 가을부터는 고려대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맡게 될 것 같다."
한편에서 학생운동의 열사를 기리고 다른 한편에선 정보기관학이 강의되는 모습은 대학 가의 폭도 이제는 꽤 넓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