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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안전보위부

◆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정일 겸임? / 제1부부장 ? (제1부부장 김영룡이 부장대행이었으나 수년전 숙청)
◆ 평양특별시 서성구역 연못동 22층건물 (모란봉구역에도 청사가 있음, 창광산여관등 안가 다수)
◆ 국가정치보위부->국가보위부(82년 명칭개정)-> 국가안전보위부(93년 명칭개정)
◆ 반탐과 국내사찰이 주임무
◆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해 보이지만 국가정보원보다 담당 임무 범위가 좁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안전기획부)에 해당하는 사찰 및 첩보기관이다. 1973년 사회안전부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1987년 국가보위부장 이진수의 사망이후 보위부장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김정일이 겸임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주임무는 반탐 (국내방첩)으로 북한 내의 정치 및 사상동향 이상자 및 외국 간첩을 적발하는 조직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김부자 비방사건 수사 및 정치범수용소 관리, 반국가 행위자 및 대간첩수사, 공항·항만 등의 출입통제 및 수출입품 검사와 밀수 단속, 해외정보 수집·공작, 호위사령부의 협조아래 김정일을 비롯한 고위간부 호위 등의 임무를 맡고 있다. 따라서, 적극적인 대외 공작은 국가안전보위부의 주임무가 아니다. 다만, 반탐 임무와 관련하여 중국 동북지방, 홍콩, 마카오 등지에 해외조직도 운영한다.

조직 체계로는 부장아래 조직·수사·검열 등 수명의 부부장이 있고 산하에 행정체계에 따라 도(직할시)·시(군) 보위부를 두고 리단위에 까지 보위부원이 상주하고 있으며 기관·기업소 등에도 보위부 요원을 파견하고 있다.

특히 국가안전보위부 제2국은 해외반탐국 (82년창설)이다. 제4국은 해외공작을 책임지고 있다고하며 제8국은 일본 출신 북송교포를 담당한다고 한다. 제2국-해외반탐국은 모두 4과로 구성되는데 1과는 유럽, 2과는 북미, 3과는 총괄, 4과는 동아시아를 담당한다. 대외공작을 담당하는 노동당 35호실 등의 별도 조직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국정원보다는 임무 관할범위가 좁은 편이다.

국가안전보위부의 해외공작원 (2국 요원중 해외활동자) 한명에 공작토대 구축을 위한 협조자, 즉 `앞잡이'는 최고 10명까지 둘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는데 임의로 둘 수는 없다. 협조자의 신분과 가족사항, 사상, 이용가치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 변절 가능성이 없다는 심증을 굳힌 뒤 상부의 결재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정식 협조자로 거느릴 수 있다. 협조자 포섭에 필수불가결인 공작금은 공작원마다 매달 미화 50달러가 지급되었다고 한다.

◆ 국가안전보위부 요원 양성과정 (내외통신 자료를 요약 전재)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국가보위부 정치대학' (보위대학)은 특수공작원을 양성하는 곳이다. 각종 특수훈련으로 전천후 공작원을 만드는 곳이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이곳은 당원만이 입학할 수 있으며 당이나 기관 등에서 필요로 하는 정치간부를 양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보위대학 정문에는 학생들이 무장 경비원과 함께 경비를 서고 교원부터 후방부성원 (대학 직원)까지 모두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다닌다. 학생들외에는 모두 군인신분이며 평소에는 사복을 입고 다닌다. 학생들은 졸업하면서 군사칭호를 받는다.

보위대학은 5년과정으로 `정치학' `군사학' `심리학' `인간사회철학' `사회주의경제학' 등 12과목을 배운다. 그중 제일 중요하게 취급하는 과목은 `정치학'이다. 국가보위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혁명역사'라든가 `로작'같은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여 투철한 사상으로 정신무장해야 한다. 입학후 처음 1학기동안은 제식동작같은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2학기가 되면 학과가 나뉘어진다. 이때 학생의 의견은 참고하지 않는다. 다만 1학기때의 성적과 적성 등을 살려 임의로 배치할 뿐이다. 2학년에 올라가면 `군사학'이론을 한 학기동안 배우고 다음 학기때에는 보충훈련을 받는다.모든 훈련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입을 모아 이런 구호를 외친다. "투지전 전격전 섬멸전으로 충성으로 보답하자" 그런 다음 `왁' 소리를 질러 기합을 올리고 훈련을 시작한다.

`군사학'은 크게 투지훈련 심리훈련 사격훈련 장비훈련으로 구분된다. 투지훈련에는 항공육전 (낙하) 도하 일격필살법 정찰술 방화훈련 (불속 뚫기) 등이며, 심리훈련에는 심리술 미행술, 사격훈련에는 사격술과 저격술, 그리고 장비훈련에는 화기통신기 차량 등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이 가운데 사격훈련이 흥미롭다.사격훈련은 우선 보총 (장총)과 권총쏘는 법을 배운다. 보총중에는 자보 (자동보총)와 반자보가 있으며 사격거리는 500m 기준에 30발이 격발된 보총을 연발 4발 단발로 조절해 놓고 쏜다. 권총은 브로닝 (총알이 돌아가면서 나가는 총)이나 떼떼 (소련제) 또는 붉은별 38호 (떼떼권총을 북한에서 개량하여 만든 총) 등을 사용한다. 사격술을 배울 때 우선 조준판을 3개월동안 이용한다. 50m거리의 과녁에 빈총을 들이대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 다음 이렇게 소리친다. "8번 명중!" "2번 명중!" 빈총으로 하니 흔적이 남을 리도 없고 모두들 명중했다고 큰소리친다. 과녁은 미국인 모습을 그린 다음 그 아래 심장처럼 동그라미를 그려놓는다. 사격술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라면 저격술은 사람을 살린 채 저항을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사람을 살려서 정보를 얻어내야 할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저격술에는 목표물이 취하고 있는 자세에 따라 조준하는 곳이 각각 다르다. 목표물이 서 있을 때에는 지상에서 20~60cm를, 앉아 있을 때에는 10~20cm를, 엎드려 있을 때에는 5~10cm를 맞춰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이런 원칙은 야간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기준이 지상이 아니라 얼굴이 된다. 특별히 위장하지 않는 한 조금이라도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걸 기준으로 5~10cm정도 밑으로 쏘면 쉽게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 심리훈련은 심리를 읽거나 그걸 이용하여 조종하는 법을, 미행술은 글자 그대로 상대방을 몰래 따라가면서 행적을 파악하는 법이다. 미행술은 상당히 수준높은 능력이 필요하며 공작원들에게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술이다.



2) 보위사령부 (보위사, 인민무력성 대열정치안전보위국)

◆ 보위사령관 원응희 대장
◆ 사령부 - 평양시 대성구역 용북동
◆ 감시·수사 ·체포· 도청등으로 반혁명음모 감시하는 부대
◆ 한국의 기무사령부에 해당
보위사령부는 한국의 기무사령부 (보안사령부)에 해당하는 부대로 군내 감시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령관은 원흥희 대장이다. (사진은 원응희 대장)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에서는 정치장교들이 군내부의 감시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북한은 이와 별도로 보위사령부를 설치해 놓고 있다. 총정치국을 비롯한 군내 정치부서와 보위사령부의 임무를 비교하자면 정치부서가 주로 선전,선동에 치중하고 일상적인 당성, 충성심 평가에 주력하는데 반하여 보위사령부는 도청 등 보다 비밀 감시에 치중하고 있다. 또한, 정치부서들이 실제 수사, 체포에 관련된 임무는 처리하지 않는데 반하여 보위사령부는 수사, 체포 등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결국 일반 사회는 국가안전보위부, 군 내부는 보위사령부가 각각 담당하는 체제이며, 국가안전보위부와는 분리된 별도의 지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보위사는 김정일이 군부대를 방문할 때 경호하는 일도 담당한다. 군관 (장교)과 장령 (장군)들이 사용하는 전화를 도청하고 이들에 관한 주민등록 업무도 맡는다. 즉 군관과 장령들의 자녀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갈 때 필요한 주민등록 문건을 발급하는 것이다. 군인과 군인가족의 주민등록을 사회안전성에서 관할하지 않고 보위사에서 관할하는 것은 군사보안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중·러 국경지역과 휴전선과 인접한 전연 지역 (전방 지역)에서는 군인과 민간인의 이동 상황을 점검하며 군 복무 기피자를 색출하는 일도 한다.

보위사령부는 구 인민무력부 직속국 형태로 설치되어 있어 총참모장, 총정치국장, 후방총국장등과 유사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정식명칭은 분명하지 않으나 구 인민무력부 시절 정치안전국, 대열정치안전보위국, 정치안전대열보위국 등의 이름으로 불리운 것 같고 96년에 정식으로 보위사령부로 확대되었다. 평양시 대성구역 룡북동에 있는 보위사령부 지휘부는 평양외국어학원과 울타리를 맞대고 있다. 그외 평양 시내에 독립청사가 분실 격으로 몇 군데 개설되어 있다. 보위사의 기원은 48년 인민군이 창설될 때 반탐(反探) 조직으로 만든 안전기관이다. 안전기관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내의 간첩과 반당·반혁명 분자를 색출하는 일을 했다. 60년대말 김창봉 숙청시의 활약으로 인해 안전기관은 정치안전국으로 독립했다. 70년 정치안전국은 보위국으로 명칭을 바꾸고, 96년 다시 보위사령부로 승격했다. 89년부터 현재까지 원응희 대장 (前 공군 및 反항공사령부 정치위원)이 보위사령관을 맡고 있다.



◆ 보위사의 조직

-1부 조직계획부 전체 업무를 통제, 군단과 사단 이하 각 보위부대로 내보내는 지휘 문건 발송
-2부 수사부 간첩과 반당·반혁명 분자를 색출
-3부 예심부 2부가 색출한 범죄자를 전문적으로 심문
-4부 감찰부 탈영과 군사 물자 절취·횡령 등 군 관련 범죄 담당
-5부 사건종합부 2·3·4·6부가 다루는 사건을 분석·평가
-6부 미행부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한 범죄자를 추적
-7부 기술부 장령들의 집과 자택 그리고 주요 호텔 전화를 도청
-8·9·10부 군수공장과 인민무력부 내의 특수기관을 담당. 군관들에 대한 주민등록 업무도 관장
-11부 국경검열초소, 외국에 파견되는 북한 무관과 인민무력부 산하 외화벌이 일꾼을 감시
이밖에 간부부는 보위 군관을 선발하고 임명하는 일을 맡는다. 정치부는 보위사령부원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곳으로, 보위사 속의 보위사라고 할 수가 있다. 보위사 직할 기관으로는 과거 국가안전보위부 휘하에 있던 3개 국경 경비 여단과 김정일이 군부대를 방문할 때 경호를 맡는 경호대(군관 3백명으로 구성)가 대표적이다. 신의주를 비롯한 국경 지역에 있는 국경 검열 초소 60여 개와 군인들의 편지를 검열하는 검열대(1개 대대의 여군으로 구성)도 직속 기관이다. 그외 보위부대원을 양성하는 보위대학 등이 있다. 모든 북한군 부대에는 보위 군관과 비밀 정보원이 들어가 있다. 군단과 사단에는 군단 보위부와 사단 보위부가 있어, 군단장과 사단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점검한다. 군단장과 사단장은 실병력 지휘관인 만큼 이들이 사조직을 구성해 반김정일 결사체를 구성하는지, 또는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에 변화가 있는지를 주로 감시한다. 연대와 대대에는 보위 군관이 1∼3명씩 파견된다. 군사분계선 안에 들어가는 민경중대에는 부대원들의 월남을 막기 위해 소대와 중대 안에도 보위군관을 배치하고 있다.

◆ 보위군관 양성과정 (내외통신 요약 전재)

보위 군관 선발은 보위사를 위해 비밀 정보원 노릇을 한 사병을 대상으로 엄격한 신원 조회를 거쳐 이루어진다. 보위 군관 후보로 뽑힌 병사들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고 보위대학에 입교하는데, 서약서에는 본명과 가명을 쓰고 지장을 찍는 것이 특징이다. 남포직할시 강서 구역에 있는 보위대학에서는 이들을 4년간 교육한 뒤 중위 또는 상위 계급을 주고 보위 군관에 임명한다. 보위군관과 비밀 정보원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해석을 붙이지 않고 6하원칙에 따라 정보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훈련받는다. 때문에 보위군관과 비밀 정보원들은 1년 이상 시간을 갖고 요주의 인물의 일거수 일투족과 만나는 사람 등을 점검해 사건화한다. 이러한 추적을 통해 작성한 보고서를 올릴 때는 마치 간첩이 접선하듯, 은밀한 방법으로 주고받는다. 보위대학은 보위부원들에 대한 보수 교육도 담당한다. 대대를 담당하는 보위 군관은 보위대학 재직반에서 2년간 교육받아야 연대이상 부대의 보위 군관이 될 수 있다. 보위사와 각 군단 보위부 책임자 (중장·소장)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위대학의 2년제 연구반 과정을 거쳐야 한다.



3) 인민보안성(人民保安省)

◆ 인민보안상 백학림 차수
◆ 평양특별시 서성구역 소재
◆ 한국의 경찰청에 해당
◆ 사회안전성 -> 사회안전부 -> 사회안전성 -> 인민보안성
인민보안성은 한국의 경찰에 해당하는 조직이다. 독립된 성(省)으로 존재하므로 행자부(내무부) 소속의 외청에 불과한 한국 경찰보다는 격이 높다. 사회안전부도 인민무력부성처럼 사회안전성으로 명칭이 개정되었다가, 2000년 4월 다시 인민보위성으로 명칭을 개정했다고 한다. (사진은 백학림 차수)

특히, 인민보안성의 간부들은 정규군과 동일한 군사칭호 (군계급)를 받고 또 간부중 일부가 정규군 부대와 순환 근무를 하게되므로 한국 경찰보다는 전투 임무에 능숙한 편이다. 과거 사회안전성 시절에는 하급 경찰조직원은 사회안전원이라고 불렀었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행정구역단위 도-시/군 별로 설치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파출소에 해당하는 최하급 제대는 분주소이다.

일부 자료에서는 전시에 노농적위대도 지휘한다고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인민경비대의 지휘계통도 대단히 애매하지만, 인민보안성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96년 한국에 표류한 조선인민경비대 하사들을 북한에 송환했을 때, 이들에 대한 환영식에 사회안전상 백학림 차수가 참석한 것으로 내외통신에 보도된 것을 봐도 조선인민경비대가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과 모종의 관련의 있음을 알 수 있다.



4) 노동당의 공작 및 첩보 조직

◆ 노동당 작전부 ◆ 노동당 통일전선부 ◆ 노동당 대외연락부 ◆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 소재: 평양특별시 모란봉구역 전승동 노동당 3호청사 (대외정보조사부는 별도 청사에 있음)
(3호 청사가 평양시 대성구역 합장동에 있다는 설도 있음)
노동당의 공작 및 첩보조직은 각 첩보조직간에 서로 비슷한 명칭으로 자주 이름을 변경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착각하기 쉽다. 예를들어 현재의 대외연락부는 과거의 대외조사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과거의 대외조사부는 현재 대외정보조사부(노동당 35호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외연락부의 과거 명칭인 사회문화부와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과거 명칭인 문화부는 이름이 비슷하지만 관계가 없는 별도의 조직이다. 이하 노동당 공작 및 첩보조직에 대한 설명내용은 내외통신 98년 8월20일자 기사를 기초로 각종 공개자료를 비교검토해서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



① 노동당 작전부(作戰部) (참조: 유고급 잠수정 침투사건)

◆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열 대장

◆ 노동당 연락부 산하 연락소에서 독립 -> 노동당 작전부

◆ 간첩 호송 및 침투, 파괴공작, 요인암살을 담당

작전부는 대남 및 대외공작부서로서 남한과 제3국에 비합법적으로 침투하는 공작요원을 일정한 장소까지 안내하는 임무와 요인 암살 및 납치, 무인포스트 매몰, 군사정찰 폭파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노동당 작전부는 구 노동당 연락부의 일부로 존재하다가 독립한 조직이다. 구 노동당 연락부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존재했던 부서로 대남공작원의 남파가 주임무였다. 오늘날의 노동당 작전부는 구 연락부 산하의 연락소 및 그 상급지휘부서만을 분리독립시킨 것이다. 98년 꽁치급 잠수함 침투사건이 바로 노동당 작전부가 수행한 작전이다. 작전부 부장은 前인민군 총참모장 오극렬이 맡고 있다. (사진은 오극렬)

작전부는 한국내 고정 간첩으로부터 정보 획득이나 임무 부여, 대남침투요원의 안내와 호송, 요인저격·납치 등을 맡고 있으며 유사시 한국의 후방교란과 전략무기 습격·파괴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또한 한국내 도로나 전기공사 등 주요 기간산업 현황에 대한 정보도 수집한다.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씨 피살사건을 작전부 소행으로 추정하는것도 이들의 임무와 관련한 개연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작전부는 1개조 3명씩, 1년에 4개조 이상을 남파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파기간은 대개 1주일정도이며 단순호송이 아닌 기타 작전에서는 3개월까지 연장되기도 한다.

노동당 작전부는 7개 혹은 10개의 연락소를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당 작전부 산하 7개 연락소 중에 414연락소를 제외한 6개 연락소는 이미 80년대 초반 노동당 연락부 시절부터 존재하던 것이고 그 뿌리는 한국전쟁까지로 올라간다. 최근까지 노동당 작전부의 연락소는 7개로 알려졌으나 내외통신의 98년 자료에 따르면 10개의 초대소 (연락소)를 두고 있다고하며 청진 고성 남포 해주 등에 하나가 아닌 두 개식의 초대소가 있다고한다. 내륙에는 개성과 사리원에 있다. 평양의 3호청사 (노동당 3호청사)는 북한의 각종 정보, 사찰기구가 위치한 곳이다) 근처에 있는 414연락소는 노동당 작전부의 실무적인 지휘본부이다. 이 414연락소에는 국외에 있는 북한 간첩에게 지령을 보내는 통신시설을 비롯하여 각종 독극물의 제조소 등 간첩활동에 대한 지원시설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414연락소에는 지원임무를 맡은 약 1000명의 인원이 소속되어 있다. 98년 침투한 유고급 잠수정은 원산에 있는 313연락소 (구 632군부대) 소속으로 보도되었는데 이 313연락소가 바로 동해안을 담당하고 있다. 서해안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해주연락소 (구 755군부대)이며 남해안은 남포연락소 (구 753군부대)가 담당하고 있다. 서부전선은 개성연락소 (구 217군부대)가, 동부전선은 사리원연락소 (715연락소, 구 250군부대/평양)가 담당하고 있다. 청진연락소 (구 459군부대)는 일본을 담당하고 있다. 노동당 작전부는 중요시설을 탐지하거나, 남파되는 간첩을 호송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고 있다. 노동당 작전부의 하부조직자체가 바로 각 침투경로별로 구성된것에도 그 성격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노동당 작전부는 간첩을 DMZ이나 해안선을 통해 우리나라로 직접 침투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여러 간첩기구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노동당의 간첩들을 두가지로 분류할 때 전투원과 공작원으로 분류하는데 이중 전투원이 바로 노동당 작전부 요원을 의미한다.

◆ 노동당 작전부 요원 교육과정 (이 항목은 내외통신의 관련 기사를 요약한 것임)

노동당 작전부 산하에는 간첩양성기관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구 금성정치군사대학, 구 695군부대)이 평양시 용성구역 신미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대학은 전투반 공작반 양성반으로 나뉜다. 전투반에는 안내반 기관반 항해반 통신반이 있고 공작반에는 해외과 국내과로 나누어져 정보수집 연락공작 요인암살 납치반이 있다. 양성반에는 전투반 공작반을 졸업후 다년간 실전공작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도원이 되기 위한 재교육을 받는 과정이다. 선발기준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우선 고등중학교 4학년때 성적이 우수하고 출신 성분이 양호한 학생을 전국에서 약 2천명 정도 선발, 최종적으로 1백80∼2백명 정도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일반대학 1∼2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을 비정기적으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학생들은 매우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 실전에 배치된다.

교육과정은 우선 일상적인 정치사상교육 즉 당과 수령을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사고의식을 가진 친위전사로 교육시키고 있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기초적인 훈련을 단련하기 위해 태권도는 평균 3∼4단 이상이며 수영은 먹을 것만 있으면 바다나 강에서 수십 시간 이상은 살 수 있도록 육성하고 있다. 또 하루 저녁 약 1백50리 정도는 지형지물에 관계없이 5∼6시간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전술 및 비합법 훈련의 내용으로서 육상에서 이루어지는 유격전술훈련, 습격, 매복, 암살, 납치훈련, 전투조훈련, 각종 군사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유격전술훈련은 유사시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 산악 및 도시 게릴라전법을 말한다. 습격훈련은 일정한 목표물을 불시에 매복 기습하며 암살 납치 또는 소규모 인원으로 다수를 테러하는 것이다. 전투조훈련은 2∼3명이 한 개조를 구성해 중요시설폭파, 군사정찰, 고정간첩간의 연락공작 및 일정한 장소까지의 안내와 공작장비지원, 암살, 납치 등의 훈련을 말한다. 각종 군사장비를 다룬다는 것은 육상에서 움직이는 각종 수송수단을 다루는 법, 아주 작은 권총에서부터 비반충포까지 발사할 수 있는 등의 기술을 말한다. 해상전술훈련에는 항해전술 엔진운전법 통신송수신 수중폭파 수중잠수훈련 등이 있다. 항해전술훈련이란 배가 정확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항법, 즉 군사학적 측면을 접한 항해사 기술과 선박엔진 운전법 선박통신을 자유자재로 교신하여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5톤급 이상 2백톤급 이하의 선박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단독으로 운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과정이 끝나고 간첩으로서 본격적인 침투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 노동당 작전부 요원 침투방법 (이 항목은 내외통신의 관련 기사를 요약한 것임)

공작조 안내조 해상조들의 침투장비와 수송수단을 본다면 공작조는 일반권총과 방음권총(소음권총) 사각수류탄 자살용독침과 독약 공작자금 휴대용 무전기들을 휴대한다. 안내조는 체코식 기관권총 또는 AK·M16소총과 사각수류탄 비상식량 단파무전기와 초단파무전기 야시경 수중잠수장비가 있다. 해상조는 1인당 AK소총과 수류탄 비상식량을 휴대하고 있다. 공동수송장비로는 모선과 자선이 있는데 모선에는 쌍신고사포를 선수와 선미에 각 1정씩 장착하고 방사포 대전차수류탄 7호발사관 5정, 무반동포 대대기관총 4정, 무전기 3대 등 비상식량을 적재하고 있다. 자선인 반잠수정에는 대대기관총 1정, 7호발사관 1정, 대전차수류탄 3개, 한국해군과 교전시 최악의 경우 군함정에 충돌하여 폭파시킬 수 있는 자폭용TNT 30kg과 무전기를 적재하고 있다.

침투경로는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합법적 또는 반합법적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제3국인 일본 홍콩 등 외국을 경유하여 한국에 침투 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휴전선을 통해 비합법적으로 남한에 침투하는 경우로서 80년대 이후 휴전선 경비 및 장애물이 강화되어 현재 육상침투는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셋째, 해상을 통한 방법으로 동·서·남해로 주로 많이 침투하고 있다. 해상침투시에는 주로 모선과 자선을 이용하는 방법이 채택되는데 모선의 승선인원은 20∼25명이며 80∼1백톤급 미만으로 자선을 선미에 적재할 수 있고 최대속력은 45∼50노트이다. 이 배의 특징은 겉으로는 일본어선과 유사하고 무기류들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자선인 반잠수정은 승선인원이 최대 7명이고 최대속력은 57노트이며, 반잠수정의 특징은 선체에 레이더전파 흡수페인트로 도색해 레이더로 포착하기가 어려우며 완전 잠수상태 (최대 침하시)에는 높이 20㎝와 넓이는 40㎠ 정도의 공기흡입구만 노출된 상태에서 항해할 수 있다. 침투때에는 모선을 이용하여 육상으로부터 40마일 계선에 모선을 정박하고 18 ∼19 시 사이에 자선을 분리하여 안내조 2명, 공작조 2명, 자선조 3명이 반잠수정으로 남한의 레이더 공백구간을 침투 지점으로하여 침투하게 된다. 이때 육상으로부터 30마일까지는 완전부상으로 속력 30노트로 접근하다 30마일부터 속력 12노트로 반잠수상태로 육상으로부터 12마일 계선까지 접근한후 12마일부터는 완전잠수해 6노트의 속력으로 해안선 1천m ∼ 5백m 까지 접근한다. 안내조와 공작조는 반잠수 수영으로 해안선에 통상 21∼22시 사이에 도착 육상활동을 하게 된다. 최근에는 잠수함을 이용하는 등 과거와는 전혀 다른 침투방법도 시도하고 있다.



② 노동당 통일전선부(統一戰線部)

◆ 통일전선부장 김용순 겸직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 문화부 -> 통일전선부 (83년-)

◆ 공개적인 선전 및 정치공작을 담당

82-83년 이전에는 노동당 문화부로 불려졌다. 통일전선부는 선전, 대남방송, 삐라배포, 해외친북조직 관리 등 공개적인 선전·선동공작을 펼치는 부서이다. 이와같은 심리전 임무외에도 남북대화업무도 관할하고 있다. 노동당 4개 실무부서 가운데 정치적으로는 으뜸부서로서 부장은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인 김용순이 겸직하고 있다.

통전부의 주요 활동은 해외교포나 동포들의 포섭공작, 한국내 민간단체를 대상으로한 통일전선 구축 등이다. 또한 크고 작은 대남제의, 남북대화·교류 등의 업무도 모두 통전부 소관사항이며, 한국내 주요 인사들의 방북사업도 통전부에서 관장하고 있다. 북한이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정치협상회의 범민족대회 등과 범민련·범청학련 등의 활동도 통전부에서 관장하고 있는 공작업무 가운데 하나이다. 일례로, 한국의 특정 사회단체 관계자나 종교인이 북한측 관계자의 초청장을 받고 방북하게 될 경우 그의 방북동기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일단 통전부의 공작 대상이 된다. 북한의 대남전위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祖平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戰線)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은 모두 통전부의 외곽단체이다. 최근년에 모습을 드러내 활동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 아·태평화위원회나 한국내 지하당으로 조작 선전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民民戰)도 통전부 소속이다. 심지어 정당의 간판을 달고 있는 사회민주당이나 천도교청우당, 종교단체의 명패를 달고 있는 기독교도연맹 불교도연맹 종교인협의회 등도 모두 통전부의 관리와 지시를 받고 있다. 남북대화나 교류 등으로 낯익은 전금철 안병수 이종혁, 서울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해진 박영수 등 대남전위기구 간부들의 실제 소속직책과 직급도 통전부의 부부장급이다. 통전부가 다른 3개 부서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업무의 특성상 부서의 요원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드러내놓고 대남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인데, 이같이 공개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대남업무는 모두 통전부에서 다루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통전부는 비교적 군부와도 사이가 가까운데 통전부 측이 최근 군부와 합세하여 대외연락부 요원들을 대폭 숙청한 바 있다고 한다.



③ 노동당 대외연락부 (對外連絡部)

◆ 대외연락부장 강주일 (전 부장 강관주는 숙청)

◆ 노동당 (대남)연락부 -> 노동당 사회문화부 -> 노동당 대외연락부(98년-)

◆ 노동당 지하당 조직, 정치사회단체 침투공작 (약칭 연락부:사회문화부의 후신)

대외조사부(사회문화부)는 남한내 노동당 조직을 유지·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 것이 주임무이다. 약칭은 연락부이다. 과거 작전부의 상급부서이기도 했으며 한때 대남연락부로 불리던 부서도 바로 이 조직이다. 대표적인 대외조사부 간첩은 할머니 간첩 이선실이 있다.

대외조사부는 대남공작을 전담하는 부서로서 직접침투 또는 해외 우회침투를 통해 한국내의 주요 인사 암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의 정보수집, 유언비어 유포, 유사시 민중봉기 여건 조성, 고정간첩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전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강주일이 대외연락부장으로 발탁되면서 통일전선부가 관할하던 조총련관리업무도 대외연락부에서 인수했다. 한편, 대외연락부 직속기구이던 대성총국은 외화벌이 전담기관이자 김정일의 비밀금고 역할을 하고 있는 39호실로 이관됐다.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은퇴한 거물 여간첩 정경희가 87년까지 부장으로 있던 부서도 연락부였다. 대외연락부는 산하에 남조선지역, 남조선 사회지도층, 해외 등을 담당하는 과(課)를 두고 있다. 주요 임무는 간첩(공작원) 남파, 공작원 밀봉교육, 한국내 고정간첩 관리, 한국내 지하당 구축, 한국내 불온사상 유포 및 민심교란 등 다양하다. 92년 10월 제14대 대선을 2개월 앞두고 터져나온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주역인 여간첩 이선실, 신세대 공작원으로 불리는 무장간첩 김동식(95.10, 충남 부여서 체포), 15대 대선직전 적발체포된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이 모두 대외연락부 소속이다.



④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35호실)

◆ 대외정보조사부장 ? (전 실장 권희경은 수년전 숙청)

◆ 평양특별시 창광거리 소재

◆ 조사부 -> 대외조사부 -> 대외정보조사국(부)

◆ 제3국에 간첩파견하고 해외거점을 운용(대외정보조사부의 후신)

원래 조사부였으나 82~83년 공작부서 전면 개편시 대외조사부(RDEI)로 개칭되었고, 그후 대외정보조사국으로 확대 개편되었던 것 같다. 최근 다시 35호실이란 명칭으로 개칭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35실은 대외정보조사부의 단순한 위장명칭의 하나인것 같다.해외간첩공작, 국제·대남테러공작 등이 대외정보조사부의 주요 임무이다. 대표적인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간첩은 단국대 교수 무하마드 깐수(정수일)와 88년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가 있다.

대외정보조사부는 우리나라보다는 제3국에 침투하는 간첩을 주로 관리하고 있다. 대외정보조사부는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 매수해 한국내 투입시키는 등 대남우회침투 활동을 주로 한다. 대사관 직원 상사원 등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는 경우도 흔하다.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지역과 베를린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 공작거점을 두고 있다. 87년의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파사건,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사건 등이 대외정보조사부 작품이다. 교수간첩 무하마드 깐수의 소속이 대외정보조사부이었고, 잠비아주재 대사관소속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귀순한 차성근씨도 작전부에서 대외정보조사부로 차출된 공작원이었다. 대외정보조사부 책임자는 현재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前모스크바주재 대사 출신인 권희경이 그 부장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권희경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수일은 레바논계 필리핀으로 위장 입국했으며,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수로 근무했을 정도로 완벽하게 위장했던 간첩이었다. 외모가 중동사람 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오리지날 한국인이다. 국내에서 신라-서역 교역사의 전문가로 활약했고, 그가 직접 쓴 글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내용출처 : war.defenc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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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새좌표와 변화방향
김상협기자 pppdemo@munhwa.co.kr
냉전종식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후 각국 정보기관은 안보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군사안보에서 경제안보로 강조점을 이동시킨 것이다. 국가경제경쟁력 강화가 ‘국가생존’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다. 이에 맞춰 산업정보활동이 정보기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로 부상하는 추세다.

?牟痢??국내 정치사찰에 정보기관의 역량을 총집중하는 동안 세계는 멀찌감치 앞서 나갔다. 10년전, 5년전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과학기술정보및 산업정보활동을 대폭 강화할 것’이라는 선언은 공수표가 됐다. 시스템개혁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안듣는 사람 자르고, 충성도에 따라 자기 사람만 심어놓으면 개혁이 저절로 될 줄 알았던 게 실패의 이유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1기인 ‘고영구 원장-서동만 기조실장 체제’에서도 이같은 우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정원 개혁방향으로 먼저 제시되는 게 인적청산이다. 국장급의 50~80% 교체설, 국정원 직원 2000명 감축설이 사실이라면 시스템 정비없이 인적 청산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후가 뒤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스템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의 제시가 선결적 과제다. 21세기에 걸맞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인적자원과 물적토대를 갖춰야함은 물론, 정보생산과 활용의 시스템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세계는 치열한 경제정보 전쟁중〓경제정보분야에 관한 한 현 국정원의 물적토대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국내분야의 경제담당파트를 해외분야로 옮기는 청사진 정도만 나왔을 뿐 전문인력양성 방안, 편제변화 등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세계 정보전쟁의 양상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겨우 발동을 거는 수준이다.

실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93년 브라질 국제입찰에 참가한 자국내 기업에 경쟁외국기업의 뇌물제공 정보를 지원, 입찰에 성공케 했다. 산업정보를 민간회사와 공유하는 문제도 서슴지 않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지난해 북한의 핵프로그램 시인사실을 자국기업의 주식매매활동을 감안해 발표시기를 조정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의 경우도 민간기업에 대한 산업정보의 지원이 관행으로 정착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스라엘은 모사드(중앙안보정보부·MOSAD)의 임무중 산업기술 첩보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57년 라캄(LAKAM)을 설립, 절취 등 비합법적 공작들도 활용하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6일 “미국의 경우 첩보위성을 통한 통신감청과 온갖 정보를 자국 기업에 전달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타국과 자동차협상을 할 때 통신감청을 통해 상대국의 협상전략을 알려주는 식이라는 것이다. 또 CIA의 경우 전세계에 망을 갖추고 해당국가의 방송청취, 과학자들의 세미나, 학회지, 신문스크랩, 공개세미나에서의 발표 등을 실시간으로 취합, 해당 정부부처는 물론 기업들에 전달해오고 있다. 이 관계자는 “산업스파이라고 간첩작전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열린 자료조차 활용할 인력이 편제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염돈재 신임 1차장은 산업정보활동의 방향(도표참조)으로 경제및 산업정책 수립에 필요한 국제경제동향 등을 지적한 바 있다.

◈해외정보분야 강화 방안은〓현재 국정원 직원 분포를 보면 해외담당(1차장산하)과 대북담당(3차장)을 합쳐도 국내담당(2차장)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다. 정보선진국에 비하면 대단히 기형적인 구조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과거 정치사찰 등에 힘을 쏟은 게 국내담당이 비대해진 이유다. 새 수뇌부의 의지가 강한 만큼 국내분야 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국회 정보위의 함승희(민주당)의원은 “정보기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정보활동의 위축은 불가피하다”며 “국내담당을 축소할 게 아니라 이들을 턱없이 인력이 부족한 해외분야로 돌리는 데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제시한다. 무조건적인 ‘축소지향’이 아닌 효율적인 체제개편과 인적정비에서 해답을 찾자는 제안이다. 현재 해외정보분야는 최소한의 필요인력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편제도 요식행위에 그치고 단순 정보수집에 국한된 상황이다. 이들에 대한 재교육과 훈련이 절실하며 우선적으로 새 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한 인식공유가 필요하다. 또 “해외정보만을 수집하라는 것은 정보기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국정원 내부 직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할 것으로 지적된다.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새 정부의 국정원은 동북아경제중심체 건설 지원의 막중한 임무도 추가돼 있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첫 국정토론회에서 “국정원은 동북아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연구,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는 게 붕괴된 휴민트의 복원. 중국, 북한, 일본을 무대로 한 정보각축전에 사활을 걸어야할 형국이다. 더구나 한반도가 냉전의 최후보루라는 점에서 국정원의 냉정한 판단이 요구되는 바이다.

휴민트와 현지 정보망 구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미 CIA의 조지 테닛 국장이 취임일성으로 강조한 바 있다. 수많은 위성과 첨단도청장비를 바탕으로 시긴트(sigint·신호정보), 엘린트(elint·전자정보), 이민트(imint·영상정보)에 관한 한 부러울 게 없는 미국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의외다. 이는 아무리 위성사진을 판독해도 결정적인 판단에는 휴민트가 관건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 국정원의 휴민트는 붕괴 직전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 특히 97년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총풍’ 사건 와중에 공작원 ‘흑금성’의 존재가 드러난 이후 와해되기 시작한 휴민트가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협기자 jupiter@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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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들어가본 아주 특별한 일터
[zoom up] 20.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 홈페이지(www.nis.go.kr)에는 1961년 중앙정보부가 발족한 이래 국정원이 걸어온 역사가 정리돼 있다. 거기에 빠지지 않고 쓰여 있는 것이 역대 대통령의 국정원(예전엔 중앙정보부.안기부) 방문 기록이다. 국정원이 대통령의 지시.감독을 받는 대통령 직속 기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상 처음으로 언론에 문을 열어젖힌 '국정원의 일터' 속으로 들어갔다.

◆달라진 국정원=지난해 7월 김승규 원장이 취임한 뒤 국정원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국정원의 모든 부서는 4월까지 젊은 직원들로 '주니어 보드'를 구성했다. 이들의 역할은 각종 참신한 아이디어를 모아 부서장에게 직접 전달.반영하는 것이다. 기강이 엄격한 정보기관이지만 '하의상달(下意上達)'로 수직적 의사구조를 보완해 좀 더 살아 움직이는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원장.고위 간부와 일선 실무자들의 면담도 늘었다. 한 팀장급 직원은 "요즘엔 현장 실무자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라고 했다. 덕분에 '의전대기'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의전대기'란 자기 업무가 끝났는데도 윗분이 퇴근할 때까지 예의상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회의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회의 자료가 간소화됐고 시간도 20분 내외로 단축됐다. 전문가를 불러 특강도 한다. 그동안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등을 초빙해 20여 차례의 특강을 했다. 김 원장은 취임 이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선진 정보기관'을 국정원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과학정보.산업보안.국제범죄 관련 활동 등을 국정원의 핵심 업무영역으로 설정했다. 불요불급한 인력을 정보수요가 많은 분야에 집중 재배치하는 등 조직을 쇄신하고 있다.

◆전문성 갖춰야 생존=한 교육담당 직원은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국정원으로 오겠다는 사람, 자기 과시욕이 있는 사람은 사절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개인 평가를 매우 엄격하게 하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며 "계급 정년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 보는 것만큼 안정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국정원 직원의 정년은 5급 이상은 60세, 6급 이하는 57세이다. 하지만 직급별로 계급정년이 있다. ▶2급 5년 ▶3급 7년 ▶4급 11년 ▶5급 15년이다. 이 기간 중 승진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한다. 인터뷰에 응했던 직원들은 "국정원은 더 이상 권력기관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폼 잡을 일도 없고, 더 이상 폼 잡을 수도 없다고 한다. 3년차 직원 오모(30)씨는 "친구나 친척을 만나도 직장을 밝히지 못한다"고 말했다. 해외 파트에서 정보 수집 일을 하는 박모(39)씨는 "사명감을 갖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적응하기 힘들다"고 했다. 역시 새내기 직원 문모(29.여)씨도 "결혼식 때 주례선생님에게 부탁해 남편과 내 직장 소개를 모두 뺐다"고 했다. 북한 파트에서 일하는 송모(29)씨는 "주말에 어디 먼 곳에 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주말에도 전화를 받으면 1시간 안에 업무에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당연히 밤중에도, 주말에도 휴대전화를 켜놓고 산다. 수영장에 가서도 지퍼 비닐백에 휴대전화를 넣고 전화 수신 여부를 계속 체크하는 직원들도 있다.

◆선배님 가라사대=인사업무를 맡고 있는 김모(35)씨는 "조직내 상하관계는 일반적인 대기업보다 엄격한 편"이라고 했다. 윗사람들에게는 깍듯이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직책이 있는 선배에게는 직책을 붙인다. 그럼, 선배는 후배를 어떻게 부를까. 해외 파트의 박씨는 후배들에게도 'OOO씨'라는 일반적인 호칭을 쓴다고 했다. 반면 국내 방첩 분야에서 일하는 변모(41)씨는 "OO야" 하는 식으로 그냥 이름을 부른다. 어떤 파트는 후배들이 퇴근할 때 사무실 전등을 끄고 마지막에 나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위계질서가 있다. 회식 문화도 파트별로 약간 차이가 있다. 해외 파트 박씨는 "국내 파트보다는 덜 마신다"고 했다. 방첩 분야의 변씨는 "예전 이문동 시절에는 퇴근길에 한잔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여기(내곡동)는 워낙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술자리를 같이하기 힘들어졌다"며 "과거에 비해 폭탄주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칼 퇴근'은 없다=구직자들이 요즘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이유 중 하나가 비교적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에서는 정시 출퇴근이 쉽지 않은 것 같다. 7년차 직원 김모(35)씨는 "오전 8시 이전에 출근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라며 "윗분들은 더 일찍 나온다"고 했다. 해외 파트 박씨는 보통 오전 7시~7시30분에 출근, 오후 8시 전후 퇴근한다. 그는 "말이 공무원이지 우리는 일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방첩 파트의 변씨는 "그래도 융통성은 있는 편"이라며 "전날 야근했으면 다음날은 '일찍' 정시 퇴근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서경호.임장혁 기자


*** 신입사원 "700m 상공서 낙하산 메고 뛰어내렸죠… 할만 하던데요"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올해 1월 국정원에 입사한 이모(여.23)씨는 고교 시절부터 정보요원을 꿈꿨다. 대학 전공으로 정치외교학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 4학년 1년간 국정원 공채시험을 준비했다. 시험 과목에 '종합 교양' 과목이 있어 평소 대학 수업을 들을 때도 시험 준비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이씨는 "종합교양 과목은 출제 범위가 있는 듯 없는 듯해서 국정원 시험 대비 학원에도 다녔다"고 말했다. 논술 기법도 따로 익혔다(하지만 이씨와 함께 인터뷰한 다른 두 명의 신입직원의 경우 국정원 입사를 위해 별도의 학원 강의를 들은 경험이 없었다. 시험 준비기간부터 구체적인 준비방법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씨의 영어 실력과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토익은 900점대, 대학 학점은 4.3 만점에 4.0 안팎이라고 했다. 그는 정확한 토익점수나 학점은 공개하지 않았다. 뭐 그런 것까지도 보안이냐는 질문에 "사소한 정보도 조각조각 모으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당차게 답했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이씨의 무술 실력이었다. 그는 합기도 2단, 태권도 1단을 딸 정도로 꾸준하게 몸을 단련해 왔다고 한다. 얼마전 700m 상공의 헬리콥터에서 낙하산 메고뛰어내리는 공수훈련도 동기들과 함께 받았다. 뛰어내릴 때의 소감을 묻자 그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할 만했다"고 했다. 국정원에 들어와 농구.배구 등 각종 운동도 처음으로 배웠다. 합숙 교육기간 중 자유시간에 하는 동아리 활동으로는 밴드부를 골랐다. 요즘 베이스기타를 치며 동료와 한창 음악을 맞춰보고 있는 중이란다.

서경호 기자


*** 국정원 Q&A


Q:국정원 전체 직원수는 얼마나 되나요?

A:보안 문제로 밝힐 수 없다. 국가정보원법에는 "국정원의 조직.소재지 및 정원은 국가안전보장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돼 있다.

Q:올해 7급 공채는 모두 몇 명이나 뽑나요?

A:그것도 밝히기 곤란하다.기간 요원인 7급의 매년 채용규모가 알려지면 전체 직원 규모를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Q:신입직원 급여는 어느 정도인지.

A:정확한 금액은 국정원 예산과 관련된 사안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 예산 심의도 국회정보위원회에서 비공개로 한다. 채용설명회에서는 '대기업 수준'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수당을 포함하면 같은 직급의 공무원 급여보다 약간 많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직접 입사해서 확인해봐라.

Q:그럼 도대체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은 뭡니까.

A:음…. 글쎄다. 이건 공개해도 될 것 같다.국가와 국민을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선배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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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김기환 (본명 김기삼)

1984년도 서울법대 진학, 1993년도 졸업
1993년도 안기부 입사, 대공정책실, 해외조사실(1국), 국제정책실, 비서실, 전략실 등 근무
2000년 10월 퇴사. 2004년 5월 현재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에 망명 신청.

-----------김기환 전 국정원 직원 1차 양심선언--------------- 

원제: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전직 국정원 직원의 양심선언)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가면 뒤에 가려진 김대중 정권의 醜惡하고 僞善적인 본모습을 국민 여러분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지난 5년간, 김대중 정권이 民族과 歷史 앞에 저지른, 지울 수 없는 犯罪行爲를 저의 양심을 걸고 여러분에게 밝힙니다.

김대중이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대북 정책을, 그토록 오랜 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 근본 이유는 노벨상에 대한 지독한 老慾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하여 해외 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의 김정일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습니다.

먼저, 김대중 정권이 국정원을 동원하여 벌인 노벨상 공작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김대중의 노벨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지난번 최규선 게이트의 녹취록과 노벨상 공작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습니다. 최규선이 공개한 '블루카펫 프로젝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보고서가 실지로 거의 그대로 실행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규선과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을 전담한 김한정이라는 인물은 둘 다 유종근 전 지사와 가까운 사이로, 이미 이전에 함께 이 일을 추진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대중의 노골적인 노벨상 욕심은, 그의 첫 인사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은 초대 의전비서관으로 권영민 주 노르웨이 대사를 내정했다가, 일주일만에 교체하는 헤프닝을 벌였습니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겨냥하고 권영민 대사를 의전수석에 내정했으나, 그가 대사 재임중 DJ의 노벨상 수상을 방해한 사실이 확인되자 곧바로 낙마시킨 것입니다.

국정원이 노벨 평화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국정원 해외조사국(1국) 동구과 북구팀의 주 임무는 노벨상에 관한 업무입니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YS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지만, 수상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DJ의 수상 저지에 주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이종찬씨는, 부임 초부터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지난번 일요신문에 밝힌 바와 같이, 이원장은 YS 정권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최종X 말레이시아 공사를 소환, 조사하였습니다. 최종X 공사는 지난 1995년, 노벨상 활동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최모 주 노르웨이 대사를 소환 조치하기까지 했었던 인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국과 노르웨이는 한때 불편한 외교관계를 가지기도 했었습니다.

1998년 8월, 이종찬 원장은 비서실 산하에 대외협력보좌관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김대중의 공보비서 출신인 김한정이라는 인물을 특별 채용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원장에게 直報하면서 비밀리에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지난번 최규선 게이트에서 마이클 잭슨 공연 유치와 관련하여 국정원의 K박사로 거론되었던 자가 바로 김한정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청, 휴전선에서 평화의 음악회 개최를 추진했는가 하면,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민주 투사로서의 인생역정, 외환위기 극복 등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책자를 발간하고 국제적인 세미나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현지에서는 김대중의 인생역정을 美化한 김대중 傳記를 공금을 들여 북구어로 번역해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국정원의 스웨덴 파견관 이병X(정규 11기) 참사는, 1999년 초 계급정년으로 옷을 벗게 되자 이러한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소란을 부린 적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김대중의 국제적인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넬슨 만델라를 방한 초청하려 했으나, 만델라가 거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9년 초, 북구와 유럽에 출장을 갔다오기도 하는 등 정열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에서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1999년 5월 말, 이종찬 원장이 갑자기 옷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후임 천용택 원장은 어떤 연유인지,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 활동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부임 일주일만에 김한정을 퇴사시켰습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로 돌아간 김한정은 사업을 계속 진행한 결과, 1999년 7월, 김대중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약 5개월 후, 김한정은 1999년 12월,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파격적으로 영전되어 현재까지 김대중을 최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김한정이란 인물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는 김대중의 최측근 심복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KINDS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여, 몇 가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일보 2002년 8. 26일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김홍업에게 면회를 가서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준다고 합니다. 한국일보 2002. 2. 25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한화갑 고문에게 전화를 걸어 박지원 특보의 재기용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2002. 1. 25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 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월간중앙 2000. 3월호 기사에 의하면, 박지원씨가 박선숙 공보비서와 함께, 김한정을 가장 아낀다고 합니다. 이희호는 김한정을 가르켜 "내 배에서 안 나았지만, 내 아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김한정은 경남 마산(창원)출신으로, 서울의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 재학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2년 대선까지 김대중의 공보비서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해서, 2000년도에 김한정이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재임하면서 벌인 노벨상 공작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한정은 박경태 주 노르웨이 대사, 김남X 주 노르웨이 국정원 파견관, 그리고 국정원 1국 동구과 북구팀 박노X 팀장에게 직접 지시하면서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 공작의 일환으로 노벨위 부위원장이자 5인 심사위원회의 일원인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를 비밀리에 방한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톨셋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안내를 맡은 사람입니다.

또한 김한정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주교에게 거액을 제공하고 김대중의 노벨상 추천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라모스 호르타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된 사람입니다. 김대중이 그동안 동티모르에 경제적인 지원과 더불어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연유도 노벨상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한편, 김한정은 노르웨이와 남아공에 해외 홍보관을 신설, 파견하여 현지에서 해외홍보 주력하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에 홍보관을 파견한 이유는 不問可知일터이지만, 남아공에 홍보관을 신설한 이유는 만델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5년간, 이 정권이 "홍보공화국"이라고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해외 홍보에 치중한 이유도 바로 노벨상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2000년 8월, 김한정은 노벨상 결정에 막후 영향력이 있는 보네비크 노르웨이 전 총리와 저명 음악인 등 3명을 극비리에 방한 초청하였습니다. 이들 노르웨이 총리 일행은 국정원 담당 직원에 의해, 비밀리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김대중을 예방한 후 노르웨이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웨이의 인권상인 라프토상 수상 결정이 났고, 이어서 노벨상 수상 결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보네비크 전 총리는 지난 2002년 1월, 두 번째로 노르웨이 총리가 된 후, 또 다시 방한하여 김대중의 극진한 환대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한정의 이러한 공작활동을 보조한 자로 조준X란 인물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전 헌법재판관 조승형의 조카로, 김한정과 같은 시기에 이종찬 원장에 의해 특별 채용되어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함께 근무했습니다. 그는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을 보조하다, 2000년 8월 국정원을 퇴사하였으며, 현재는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까지 김한정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청와대를 자주 사칭하다가 경찰청 조사과(사직동팀)의 내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정원에서 노벨상 공작은 흔히 "S"공작으로 일컬어졌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구과 박노X 팀장과 김남X 노르웨이 파견관이 실무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공작은 해외조사국(1국)의 최조영 국장(정규 6기, 외대)과, 이영길 국장(정규 9기, 육사 26기) 재임 기간 중에 주로 이루어 졌습니다.

공작을 지휘했던 최조영 국장과 이영길 국장은 그 후 각각 주 쿠웨이트 대사와 핀란드 대사로 영전되어 나갔습니다. 이영길 대사는 2001년 4월, 1국장에 부임한 지 8개월만에 해임되었기에, 특히 입을 막아야 할 필요가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YS 정권에서 안기부 출신이 대사로 영전되어 나간 것은 이병호 차장이 전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간 것이 유일한 예입니다. 박노X 팀장(정규 17기)은 그 후 선배들을 제치고 선두주자로 동구과장으로 승진하였고, 현재는 서구과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 김한정은 미국 뉴저지주의 럿거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귀국할 당시 전세집도 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종찬 원장은 그를 국정원의 安家 아파트에서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이례적인 특별한 대우였습니다. 지금 김한정은 집을 몇 채나 장만했을 뿐만 아니라, 100억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의 모든 돈줄을 그가 쥐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어서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저지른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얻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지만, 사실 여부를 모두 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둡니다.)

지난 1999년,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김대중은 자신의 업적과 경륜을 해외에 적극 홍보하면서 노벨상 수상 분위기 조성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999년 7월, 김대중은 수상자 11명 가운데 6명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진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손에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노벨상 사냥에 나섰습니다. 김대중은 이제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만 마련할 수 있다면, 노벨상을 목에 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김대중과 김정일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 졌습니다.

지난 1999년 말, 온 세상이 새 천년의 기대에 한창 들떠 있을 즈음, 김대중과 김정일은 극비리에 뇌물 뒷거래 협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뒷돈의 규모는 美貨로 15억 불입니다. 인류가 뇌물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이후 최고의 뇌물 액수이자, 앞으로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기록일 것입니다.

현대에서 이 뒷돈을 대었습니다. 지난 번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제기한 현대상선의 4,000억 원은 이 돈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현대상선 대출금 일부가 정상회담 先金으로 건너갔고, 대부분의 뇌물 잔금은 2000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0년 3월과 6월에 벌어졌던 현대의 왕자의 난은, 정주영이 이 돈을 대기 위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것입니다.

이 돈은 1,000만원권 수표 형태로 국정원에 넘겨졌고, 국정원은 주로 외교행낭을 이용하여 독일·프랑스 등 6개 지부를 통해 이돈을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행낭의 책임자는 처음에는 최조영 1국장이었다가, 2000년 9월경부터는 박경탁 단장으로 바뀌었고, 실무자는 고강X 사무관이었습니다. 박경탁 단장(11기, 목포 문태고)은 2001년 4월, 이 정권에서 최단기간 내에 국장으로 승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던 인물입니다.

박지원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는 그는, 국장이 된지 2년이 다 되가는 지금도 승진필요 최소 년한을 채우지 못해 2급으로 있다고 합니다. 박국장의 이례적인 승진은 당시 시사저널에 기사화 되기도 했습니다. 고강X 사무관(목포 문태고)도 그 후 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행낭 담당자가 승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해외로 빠져나간 이 돈은 현지에서 주로 유로화로 환전되어 북쪽으로 전달되고, 이 수표는 다시 국내로 반입되어 국내에서 현금화되었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유로화로 환전하는 일과, 수표를 再반입하는 작업에는 우리나라의 유로화 책임자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유로화 책임자는 한국계 유럽(프랑스 ?) 국적을 가진 40대의 여인으로, 하이얏트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김대중, 정주영, 김정일이 직접 관여했을 것이며, 이들은 각각 김한정, 김정남, 정몽헌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박지원, 임동원, 이기호 등 지금까지 김대중 옆을 지키고 있는 인사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청와대를 떠났다가도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대중은 대북 커넥션에 관련이 있는 인사는 배신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그의 주위에 묶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分身인 김한정 제1부속실장과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남은 이 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 극비 접촉을 하였을 것입니다. 김한정과 김정남은 2000년 4월 10일 경,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남북 뒷거래 협상을 최종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들은 2000년 10월과 12월, 노벨상 수상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노벨상 단독 수상 문제 등을 협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1년 5월 초,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도, 김한정과 김정남은 일본에서 접촉하기로 약속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0년 들어, 김대중과 김정일은 뒷돈 거래 협상을 대충 일단락 지으면서, 각본대로 본격적인 국내외 분위기 조성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김대중은 1999년 12월 말, 부임한 지 6개월 밖에 안된 천용택을 경질하고, 임동원을 국정원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천용택은 자기 부인(김아미)이 옷로비 사건에 연루된 것을 무마시키려고 검찰 출입기자 몇 명을 국정원에 초대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DJ의 대선자금 등 민감한 정보를 누설하는 촌극을 벌인 데다, DJ를 "김대중이가..."라고 부른 게 일주일 후에 밝혀져 不敬罪로 잘린 것입니다. 천용택은 제가 겪어 본 국정원장 중 가장 자질이 저열한 자였습니다. 그는 김대업 義人(?)에게 5억 원을 주고 매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0년 1월,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선 후 제1당이 되고 나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겠다고 처음으로 운을 떼었습니다. 2000년 2월, 김대중은 일본 도쿄방송(TBS)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김정일을 "識見 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워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2000년 3월, 독일 방문한 자리에서는 대규모의 대북 경제지원을 주 내용으로 하는 충격적인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발표는 미국과 사전교감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결렬한 분노를 샀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분위기 조성 작업과 함께, 김대중과 김정일은 2000년 1월부터 중국 등지에서 남·북간 비밀회담을 추진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회담을 주도했고, 김보현 전략국장이 실무를 맡았으며, 서훈 경협1과장이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김보현 전략국장과 서훈 과장은 남북정상회담 후, 각각 신설된 3차장과 남북회담조정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지금도 현직에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김용순 대남비서가 주도하고, 임동옥(춘길) 아태 제1부위원장이 실무를 맡고, 권민(호웅) 참사가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남북은 각각 박지원과 송호경을 얼굴마담으로 기용하였습니다. 지난 2000년 4·13 총선 직전, 김대중은 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당초 남북은 일요일 오후에 발표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김대중은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월요일 아침으로 발표시점을 늦추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의도는 자명합니다. 단기적으로는 4·13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 1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중기적으로는 노벨 평화상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대북 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삼아 호남당의 한계를 탈피하고, 궁극적으로는 정계개편을 획책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단기와 장기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회칠한 가면 뒤에 숨겨진, 인자한 김대중의 악마적인 모습에 대해 믿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과 싸우기 위한 전략물자를 수송해야 할 국정원의 행낭이 적의 군자금을 보급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우실 줄 압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김정일은 김대중의 뇌물을 받아, 高爆장치 등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심 물자를 파기스탄, 카자흐스탄, 프랑스 등지에서 구입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이 돈으로 카자흐로부터 40대의 신예 미그기를 도입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잠수함과 탱크 등 첨단무기를 구입하였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지난 서해교전시 장열하게 전사한 우리 해군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일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북한이 작년부터 달러화 유통을 금지시키고, 유로화로 결제수단을 변경할 수 있었던 것도 뇌물로 받은 유로화 덕택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북한은 그동안 약세를 면치 못하던 유로화에 대해(2000. 8월, 30%절하) 우리보다도 훨씬 더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습니다. 2000년도에 북한에 넘겨진 15억불 상당의 유로화는, 지금 현재의 환율로는 20억불 가치로 평가 절상되어 있습니다.

최근 현대에 지원한 34조 원의 공적자금 중에서, 현재 2조원이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상선은 주력 알짜배기 업종인 자동차 운반선 사업을 15억불에 매각하였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송금하기로 한 금액과 이러한 액수가 일치하는 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대중은 국민의 血稅로 이루어진 공적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것입니다. 김대중은 리베이트의 일부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겠지만, 상당부분을 북한에 賂物로 바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받아 북한에 지원하고, 북한으로부터 금강산과 개성공단 독점사업권을 代價로 받은 것입니다. 북한은 현금을 받아 챙기고 위장평화 생색을 내줌으로써,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북한의 대남 일꾼들이 한결같이 "현대는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이 大馬不死 대우그룹을 해체한 것과, 김정일이 "김우중이 가장 악질적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북한의 소위 대화일꾼들이 우리의 경제원조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가 더 많이 주었다."고 강변하는 이유도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김대중이 목에 건 자랑스런 노벨상은 실로 북한 동포들의 피눈물과 절규,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血稅가 어루러져 응결된 結晶體인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은 殘雪같이 남아 있는 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과거 추악한 범죄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년여간 찬바람 부는 현실 속에서 어렵게나마 국가정보원 직원의 명예를 걸고 외롭게 이러한 일들을 추적하여 왔습니다. 비록 저는 이 모든 일들을 모두 검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제가 얻은 정보가 眞實에 가깝다고 확신합니다. 예전에 어느 분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깨어 있는 민족이라야 自由와 繁榮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實體的 眞實을 확인하는 작업은 국민 여러분들께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2월, 전직 안기부 직원 김기환 드림


-----------김기환 전 국정원 직원 2차 양심선언--------------- 

제목: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


정보공개에 부쳐,

사랑하는 國家情報院 동료, 선·후배 여러분!

저는 오늘 전직 직원으로서, 우리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保安을 위배하는 일을 저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保安을 지키는 일보다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욱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여 전, 회사를 나온 저는 이 정권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혼자서 많은 煩悶의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들을 알아 낼 수 있었고, 이제 국민들과 함께 이 정보를 공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저의 결심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

國家情報院 동료, 선·후배 여러분,

저는 지난 5년간 여러분들이 당한, 그리고 앞으로 5년간 더 당할지도 모를,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너무나도 잘 이해합니다. 2년여 전, 저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퇴사를 결심했지만, 그러한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비통한 마음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인고의 세월을 참고 온 보람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민족의 운명은 여러분들의 어깨 위에 달려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시고 끝까지 살아남아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 글로 인해 실명이 거론된 분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양해 있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국민 여러분께 다시 드립니다.

조국의 안보 현실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짙은 핵구름이 한반도 상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깨어 나셔야 합니다.

어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뒷거래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그 내용을 접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예전에 “김대중은 뒤돌아서면 거짓말을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어제 김대중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뻔뻔스러움에 아연할 따름이며, 영원히 구제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대북 뒷거래가 이루어졌으며, 그 금액은 미화로15억불이라고 주장합니다. 김대중은 4.13총선, 노벨상, 그리고 정계개편을 겨냥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었습니다. 지난 5년간, 금강산관광 대금 등을 포함하여, 현대가 북한에 보낸 돈은 약 30억불에 달합니다. 특검을 통한 철저한 수사만이 이러한 뒷거래를 확실히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규명을 위한 국민 여러분들의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저는 지난 번 국민 여러분들께 드리는 편지에서, 이 악마적 정권의 위선의 가면 뒤에 숨겨진 김대중의 참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번 편지에서 저는, 이 정권에서 소위 “햇볕정책의 전도사”라고 불렸던 임동원씨의 가면을 벗겨, 그의 진면목을 국민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그 동안 임동원씨에 대해 세간에 수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출신 배경이 어떻다든지, 육이오 전쟁 중의 행적이 어떻다든지, 육사 입학시 거물 간첩 최덕신이 신원 보증을 섰다든지 등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국정원에서 재직하면서 직접 보고 들었던, 그러나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임동씨의 의심스런 행적에 대해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판단은 전적으로 국민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저는 이 악마적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의 권력 핵심에 북한의 고정 간첩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같은 교활한 자는 남쪽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남북대화에 응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 동안, ‘만약 간첩이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하고 혼자서 남몰래 이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임동원이 간첩일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6월 서해사태 시, 임동원씨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우발적인 사태”라고 예단하면서, 김정일의 지시와 개입을 부정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북 첩보에 의하면, 김정일은 지난 99년 6월 서해교전 후, 북한 해군사령관에게 “1년간의 시간을 줄테니, 반드시 보복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북한 해군은 보복 역량을 기르는 데에 시간과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1년안에 그 지시를 이행하지는 못하고, 3년이 지난 후에야 그 명령을 정확히 수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임동원씨가 서둘러 북한을 감싸고 돈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간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임동원씨가 맹목적으로 북한을 감싸고 돈 것은 비단 그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99년 서해교전시에도 임동원씨는 북한의 의도적인 “영해 침범”을 굳이 “단순 월선”이라고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북한의 도발을 호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지난해 6월, 육사 교수모임에서도 한반도 긴장고조의 책임을 미국의 전쟁협박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김정일을 두둔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을 정도입니다.

한편, 임동원씨는 김정일을 비난하고 북한의 민주화운동을 주장하는 황장엽 선생에게는 거의 연금상태나 다름 없는 처지로 몰아 넣으면서, 일체의 외부 활동을 금지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황 선생님은 그동안 가고 싶은 곳을 갈 수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는 철창 없는 감옥생활을 강요 당해왔습니다. 소위 노벨상을 수상한 인권대통령이라는 이 정권아래에서 황선생님의 기본적 인권은 철저히 짓밟혀 왔습니다. 국정원은 관리와 보호라는 미명하에,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가했던 것입니다. 지난번 황 선생께서 미국에 가서 증언하겠다는 하자, 임동원씨는 “국정원에서 나가라.”고까지 협박하면서, 죽음으로 내모는 조치조차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 졌을까요?

박지원의 워커힐 호텔 난동 사건

제가 임동원씨를 결정적으로 의심하게 된 것은, 퇴사할 무렵 동료에게서 전해들은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00년 9월, 북한의 김용순이 전격 방문했을 때, 워커힐 호텔에서 환영 만찬이 벌어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박지원 문화부 장관도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찬이 끝나갈 즈음, 잔뜩 만취한 박지원씨가 갑자기 난동을 부려 행사장이 난장판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국정원에는 빨갱이 새끼가 두 놈 있다. 너희 놈들은 정권이 바뀌면 청문회에 서게 될 꺼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지원이 말한 “빨갱이 새끼 둘”이란, 두 말할 나위 없이 임동원씨와 김보현씨를 지칭합니다. 그가 그렇게 난리친 이유는 남북정상회담 협상과정에서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임동원씨와 김보현씨의 언동에서 간첩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지원 난동 사건의 배경에 대해 제 나름대로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박지원은 한빛은행 대출비리 사건으로 코너에 몰려 있었고, 실제로 워커힐 난동사건이 있은지, 약 10일후에 문화부 장관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 이미 국정원에서는 “민심 수습을 위해 박지원을 잘라야 한다.”고 청와대에 보고 했었습니다. 박지원은 이러한 동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시 임동원 원장에 대해 감정이 극히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박지원씨의 입장에서는 임동원씨가 자기에게 칼을 겨누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임동원씨와 박지원씨를 비롯한 동교동계는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후 임동원씨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 가자, 동교동쪽에서는 2000년 8월 경, 의약분업 실패 등을 이유로 대면서, “국내 정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장을 동교동계 핵심 측근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 즈음, 실제로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가고, 국정원 직원 30여명이 통일부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직접 “남북정상회담의 후속조치가 더욱 중요하다.”고 교통 정리를 하는 바람에, 이 문제가 유야무야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후속조치란 것이 북쪽으로 뇌물 잔금을 보내는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임동원씨와 동교동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소개하겠습니다. 1999년 12월,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당시 원장 비서실장이던 최기춘씨(현 대공정책실장, 정규 10기, 전주고)에게 “왜 이 주위에는 왜 전라도 사람 밖에 없나?”라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조실에서는 부랴부랴 이영O 강원지부장을 비서실장으로 불러 올렸습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 납니다만, 이영O라는 분은 강원도 출신으로, 국내 부서에서 경제분석에만 전념한 책상물림이라 비서실장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영O 실장은 2001년 4월 신건 원장이 취임한 후에는 감찰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데, 그 자리 역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임동원씨와 박지원씨를 비롯한 동교동계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 허물어져가는 이 정권의 권력의 주 축을 떠받치고 있는 그 두 사람이 서로 말이나 주고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쨋거나 그 날 워커힐 호텔에서 박지원씨가 벌였던 해프닝은 불문에 붙여졌습니다. 내가 짐작하기론 이 사건은 청와대에도 보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 직원끼리만 쉬쉬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이 일로 인해 임동원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임동원씨에 대한 수사국의 내사 동향

퇴사후 저는 우연히 수사국 선배에게서 “임동원은 간첩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잘 아는 수사국의 어느 동료 직원이 오랫 동안 임동원을 내사해 왔는데, 99년 12월 임동원이 갑자기 원장으로 부임해 오자, 담당 과장과 상의한 후, 보관하고 있던 파일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그 수사국 직원 이름이 하세O이며, 부산출신으로 86년 경 수사 기본과정으로 입사하였고, 현재는 사무관(5급)이며, 실지로 99년 12월 말, 본부에서 경기지부로 전근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본부에 근무하는 수사국 사무관 직원이 이유 없이 지방으로 전출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수사국의 경우, 지방에서는 서기관 진급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세O 직원을 만나 임동원씨에 대한 내사자료의 존재여부와 내사시기, 내사진행 정도, 소환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 등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개인적으로 자료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나같이 퇴사한 후배에게 극비에 속하는 보안사항을 털어 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하세O 직원이 임동원씨를 내사해 왔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수사국 직원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저는 임동원씨의 내사 동향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임동원씨의 간첩 협의에 대한 의혹을 더욱 깊이 가지게 되었고, 혼자서라도 이 일을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동원과 북풍사건

그 후 저는 공개된 자료를 찾아 보면서, 임동원씨의 행적에 대해 검토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연히 지난 1998년 월간 신동아에 실린 권영해 전부장의 공소장에서 임동원씨의 대북접촉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권영해 부장은 1998년, 소위 북풍사건의 법정 진술에서 “임동원은 아태재단 사무총장 신분으로, 95년 10월경부터 중국의 장성호텔 등지에서 안병수 등 북측 아태위 인사들을 수차례 접촉해 왔다.”고 진술했습니다. 저는 이 공소장을 보면서, 이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1998년 4월, 소위 북풍사건이란 것을 일으켜서 한나라당을 쳐죽일듯이 난리를 치다가 ,“왜 갑자기 덮어 버렸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당시 권영해 부장 등 관련 피고인들의 입에서 임동원의 간첩행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자, 청와대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파고 드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검찰에게 “사건을 덮어라.”라고 지시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가 듣기로는, 당시 수사 검사들은 안기부의 공작파일 등 핵심 증거자료는 참조하지 못하고, 외부 자료 없이 오로지 관련 인사들의 증언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당시 수사 검사들은 “솔직히 우리도 대북관련 문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고 하며, 그래서 대북관련 사항은 덮어 두고, 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풍 사건에 대해 제가 국정원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대북조사국에서는 임동원씨의 대북접촉 첩보를 여러차례 입수했다고 합니다. 북풍 사건의 공판장에서 권영해 부장이 북한의 간첩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던 허동웅이라는 자의 입에서 “임동원이 북한 쪽을 돕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진술이 수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대북조사국은 97년 초 임동원씨에 대한 이러한 혐의점을 정리하여 수사국으로 관련 자료를 이첩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수사국에 근무하는 모 전라도 출신 직원이 이러한 동향을 민주당으로 유출시켰다고 합니다. 소위 북풍 사건을 둘러싸고 안기부와 민주당간의 정보 전쟁은 이미 97년 초부터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에서는 천용택과 정동영이 이 정보 전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수사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체적으로 임동원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북조사국으로부터 임동원에 대한 공작자료를 이첩받았을 것입니다. 권영해 부장은 수사국과 대북조사국으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보고 받아 임동원씨의 간첩활동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권영해 부장이 소위 북풍사건이란 것에 휘말렸던 것도 자기 나름대로는 확신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처럼 선거 직전에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권영해 부장이 조기에 석방된 것도 석연치 않는 점입니다. 사실 저는 그후 권영해 부장과 김대중간에 엄청난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은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임동원씨의 의심스런 여러 행적들

사실 이 정권이 들어서기 전, 임동원의 역할이 이렇게까지 막중하게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정권에서, 대북정책에 관한한 임동원씨는 과히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청와대 외교 안보수석에서 시작하여,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다시 통일부장관, 그리고 탄핵을 받고서도 다시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청와대로 재입성하는 저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안보관련 수장을 완전히 한바퀴 사이클링한 것입니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국정원의 대북 부서를 마치 제 부하 다루듯 취급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북한과의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황장엽 선생님도 김대중과 임동원을 “북한과 깊숙히 결탁한 관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정권 초기, 이종찬 원장과 나종일 차장은 햇볕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 임동원씨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안보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을 제거하고 난 후, 임동원씨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이른바 햇볕정책이라는 허울아래 가히 굴욕적이라고 할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습니다. 박재규, 홍순영, 정세현 등 역대 통일원 장관뿐 아니라 모든 안보관련 수장들을 자기 사람으로 임명하면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난 2000년 4월, 엄익준 차장이 죽기 전, 임동원씨는 엄차장의 손을 잡으며, “이 다음에 장관으로 천거하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면 어떻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관자리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임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권 초기, 대북 첩보수집 부서에서는 “남북관계가 잘 풀릴려면, 임동원이 책임 있는 자리에 나서야 한다.”는 북한쪽의 첩보가 수시로 입수되었습니다. 북한이 남쪽과 대화할 때, 남쪽 대표가 북한 출신이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사전에 북한과 입을 맞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동원씨가 간첩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입니다.

잠시 시계를 꺼꾸로 돌려, 임동원씨의 옛날 행적을 몇 가지만 더듬어 보겠습니다. 임동원씨는 지난 91년 남북합의서 체결시, 우리측 실무 대표로 북한을 십여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북한측에서 그에게 누이와의 만남을 몰래 주선해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때부터 임동원씨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임동원과 북한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후 임동원씨는 이른바 훈령조작사건을 언론에 흘려, 대북 강경론자인 이동복 특보를 낙마시킨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입니다.

94년 초, 임동원은 김대중이 설립한 아태재단의 제2대 사무총장으로 앉았습니다. 94년 7월, 북한의 김용순은 마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아시아 태평양 평화 위원회’라는 것을 발족시키고 공개적으로 아태재단과의 교류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북한이 이러한 용어를 선택한 점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만 하더라도 북한은 주체사상을 주장하던 시절로, ‘아시아 태평양’이라는 용어는 그들에게는 생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아시아 태평양”일까요?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추지 않고는 붙이기 힘든 명칭이 아닐까요?

임동원이 아태재단의 사무총장으로서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임동원과 김용순은 95년에서 97년까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임동원과 김용순은 동갑 나이이지만 서로 개인적인 스타일은 판이합니다. 그런데도 둘 사이는 대화가 아주 잘 통합니다. 저는 또한 임동원씨가 북한의 대남문제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임동옥(춘길) 아태위원회 제1부위원장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의심을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임동옥은 임동원씨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임동원씨의 대북 커넥션을 밝히는 것이, 그의 간첩혐의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임동원의 행적에는 너무나도 의심스런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는 항상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병적으로 보안에 신경쓰면서, 뭔가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과잉 보안의식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부하직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보좌관에게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김대중 정권 초 이종찬 원장 시절, 임동원씨는 이상스럽게도 손발을 맞추어야 할 안보관련 고위 인사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석연치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해야 할 안보 장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때부터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은 직속 상관인 나종일 차장과 이종찬 원장을 제치고,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과 직거래하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명령과 복종을 중시하는 국정원의 분위기로 볼 때, 이러한 일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1999년 하반기 천용택 원장 시절,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임동원은 미국을 방문하여 페리 전 장관 등 미측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문제 등을 논의했습니다. 그 때에도 임동원씨는 자신의 행적과 협의내용을 극비에 부치고, 국정원 파견관을 의도적으로 따돌렸습니다. 당시 최덕O 샌프란시스코 파견관은 임동원의 방미 활동을 제대로 파악, 보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용택으로부터 “철수하라.”라는 질책까지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임동원씨는 자신의 통역관에게 “누구에게도 통역내용을 발설하지 말하.”고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최덕O 영사는 해외조사국 (1국) 북미과장시절 일을 너무 깐깐히, 열심히 하는 탓에 부하 직원에게 인기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2001년, 저는 그 분이 위장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직업병으로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런 분이 동향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임동원씨는 극비리에 행동해야만 했을까요?

2000년 초, 임동원은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모든 해외 파견관들에게 대북 비선 접촉라인을 개척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 파견된 통일부 직원(통일관)이 국정원 몰래 대북 비선라인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통일관은 대북 브로커인 최수진 흑민경 사장이란 자를 통해 아태위의 김완수 참사와 연계해 일을 진행했었습니다. 이때 이러한 동향을 보고받은 임동원씨는 필요 이상으로 격노 했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해도 자신의 부하 직원이었던 통일부 직원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임동원씨의 그러한 과잉 반응은 도무지 의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으로 재직할 동안 가장 고통을 받았던 직원들은 단연 북한국 분석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국 동료들로부터 “도대체 원장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푸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북한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정보 보고서를 올려도, 북한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내용이면, 어김 없이 질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임동원이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북한국의 분석관들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전혀 생산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가 우리 나라 정보기관의 수장이 맞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을까요?

임동원씨의 대북 커넥션 의혹

저의 견해로는 , 2001년 3월에서 8월까지의 기간 동안은 임동원씨와 북한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3월 초, 김대중 대통령은 성급하게도 한반도 팀이 채 구성되지도 않은, 준비 안된(?) 미국을 방문하여 처참한 외교적 실패를 안고 돌아 왔습니다. 뒤에 알려진 바를 참고해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 때 김정일의 3월 남한방문과 평화선언 문제 등에 대해 미국의 양해를 구하려고 무리하게 방미를 추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가 실패하고 있는 것을 본 북한은, 즉시 계획되었던 “장관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보를 발표했으며, 3.27일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에서 밀려나자마자, 이틀 후인 3.29일 모든 남북 관계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점입니다. 3월중순 방북했던 김한길 장관에게 오사카 탁구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던 북한이,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직에서 경질되자마자 일체의 남북접촉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중앙일보 최원기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이 시기에 북한에서도 김용순이 체포되는 등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이 시기에 남북간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숨가쁘게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임동원씨가 사태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후에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2001년 3월 말 임동원씨는 이임하면서, 당시 대북 전략국 김만O 1단장에게 남북정상회담 녹음 테이프를 파기하라고 지시 하였다고 합니다. 김만O 단장은 자신의 부하 직원인 박모 과장, 윤모 팀장 등에게 자료 파기를 지시했으나, 이들이 “책임질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당시에는 이를 파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테이프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지, 아니면 결국 파기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테이프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전O 1과에서 잠시 근무하던 중 정상회담 녹취록은 읽은 적은 있습니다. 이 녹취록은 1급비밀로 분류되어 5~6부 정도 발간되었고, 청와대 등에 배포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녹취록이 테이프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쨋거나 저는 이렇게 중요한 자료를 서둘러 파기하려고 한 임동원씨의 저의가 아주 궁금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의 내용에 관해서는 그동안 언론에 간헐적으로 흘로 나온 것도 있고,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기도 하여 제가 길게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정상회담이라면 당연히 남북 정상인 김대중과 김정일이 모든 사항을 직접 논의해야 옳을 것인데, 녹취록의 대부분은 임동원씨의 발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북 정상간에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은 보이질 않고, 마치 임동원씨가 남북 양쪽의 중개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요?

2001년 4월, 김대중은 신임 신건 원장에게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전면 중단한 이유를 분석 보고하라”고 지시, 대북전략국의 안태O 종O과장이 중심이 되어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안과장은 국정원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사람으로 유능한 직원이었는데, 그 즈음 미국 대사관 직원에게 보안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대중은 그 당시 북한이 남북관계를 단절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국정원에 그런 지시를 내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김대중은 ‘김정일이 이미 받을 것 다 챙기고, 이제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은 자신이 방미하여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해 김정일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정원의 대북 관련 직원들만 감쪽같이 속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히 김대중의 악마적 통치술이 발현된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쨋거나 임동원씨가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2001년 4월 이후, 남북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이 때부터 몇 달간 임동원씨의 북한에 대한 자세도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젼에 출연해서는 대북 전력 지원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퍼주기’와는 상당히 다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2001년 5월,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체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난번 편지에서, “이 때 김정남이 일본에서 김한정을 만나기로 약속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2001년 6월, 김정일은 북한 상선이 우리 영해와 제주해협을 통과하도록 지시하여, 의도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유발하였습니다. 아마도 김정일은 우리 정부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해군이 어떻게 대응해 나오는가를 떠보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시기 임동원씨는 북한의 파터너인 김용순의 입지를 강화해 주려고 딴지를 걸고 있었고, 김정일은 임동원씨의 입지와 태도를 시험해 볼려고 의도적으로 저강도 도발을 감행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풀어서 설명드리자면, 간첩과 간첩을 부리는 자간에 의사 전달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001년 8월, 8.15 방북 대표단 문제에에도 임동원씨는 예상외로 대표단 파견에 반대하였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 말썽 많았던 대표단 파견은 김대중이 북측의 전화를 받고 직접 결정하여, 임동원 장관에게 지시한 것입니다. 2001년8월 14일 아침까지만도 대표단 파견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다가, 임동원이 오전에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지시를 받은 후 대표단을 구성한 것입니다. 8월 14일 오후에 부랴부랴 대표단을 구성하다 보니, 온갖 “오싸리 잡놈”이 다 끼인 대표단이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북시 행동요령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행할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급조된 대표단이 북한에 가서 벌인 행각은 아직도 국민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한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은, 대표단 파견 과정에서 당시 북한쪽 일꾼들 사이에서는 “이제 임동원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말들이 오갔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그 이전까지는, 또는 그 이후에는 임동원이를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맺음말

국민 여러분, 이상으로 제가 임동원씨를 간첩이라고 의심하게 된 이유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 없이, 저의 주관적인 판단을 공개하는 데 많은 부담을 느끼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나라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인지라,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글을 발표하게 됨었음을 국민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들에게는 아마도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의 수장이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저의 주장이 무척 황당하게 들릴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에서는 이러한 엽기적인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 났었다는 사실을, 지난 번 저의 편지에서도 확인하셨을 줄 압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동안 김정일이 우리를 그렇게 “우습게 보고, 깔본 이유”를 짐작하시리라고 봅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에 대해 대단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척간두에 있는 듯 하기도 하고 누란의 형국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김정일은 “미군만 없다면, 3일이면 남한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안보 불감증에 빠져 있습니다. 김정일은 “통일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느스레를 떠는데, 우리 국민들은 안보 거부감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떤 놈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까요?

저는 임동원씨가 서독의 브란트 수상의 개인 수행비서였던 권터 기욤이나, 지난해에 죽었다던 베트남의 부응옥 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임동원씨의 위치와 역할로 볼 때 그들보다도 훨씬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봅니다. 며칠 전, 임동원씨는 “햇볕정책의 모든 업적은 대통령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에 대해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김대중의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의 권력 핵심에는 크고 작은 간첩들이 너무나도 많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최근 이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의 할아버지가 해방직후 빨갱이로 활동하면서, 자금조달을 위해 위조지폐를 제조하다 검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 정권 내내 모든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한 핵심 인사의 형이 북한에서 고위층으로 있으며, 오래 전부터 김대중과 활발히 연계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보를 검증하지는 못했지만, 정황으로 보아 근거없는 말은 아닐 것으로 믿습니다. 심히 우려스럽고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국군 기무사의 모 간부가 청와대의 모 인사의 간첩혐의를 조사하다, 강제로 전역 조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국정원 수사국의 모 직원도 청와대의 모 인사의 간첩 혐의에 대해 수사 계획을 작성해 올렸지만, 부서 상관으로부터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하는 질책을 받고 사건을 덮었다고 합니다. 이 정권에서 간첩이 검거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아니 득실 득실거립니다. 문제는, 간첩 떼거리들이 권력에 앉아 있기 때문에 못잡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간첩을 검거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조국의 안보가 극히 위태롭습니다. 저는 지난 2000년 7월 월간조선에 실린, 이대용 공사가 쓴 “월남 적화과정과 요즈음 한국사회”라는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글에는 우리와 일란성 쌍둥이라 불리는 월남이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의 내용이 진실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언젠가 “수사국의 간부들도 그 글을 회람하고 있다.” 말을 듣고 “아직도 영 희망이 없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말, 북한의 땅굴을 밝혀내기 위해 힘쓰시던 어느 애국자가 수원 부근에 있는 땅굴 현장에서 과로로 숨졌다고 합니다. 땅굴을 밝혀내야 할 국방부와 국정원은 오히려 갖은 방법으로 민간 땅굴 탐사자들을 방해하고 박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남침용 땅굴을 발견하고자 하는 분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싸이트(www.ddanggul.org)가 저들의 방해로 인해 접속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깨어나야 합니다. 자유는 공기나 물처럼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애국 시민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 국민만이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저의 이 외침이 부질 없는 메아리로 그칠 때, 우리 조국의 운명은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3년 2월, 전직 안기부 직원 김기환 올림.


추신:

사랑하는 국정원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지난 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악마적 초상을 공개한 데 이어, 우리가 원장으로 모셨던 임동원씨의 가증스러운 초상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는 아마도 제가 조직을 누를 끼치는 철없는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분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퇴사한 후에도 국정원 직원이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 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조직을 지키고 싶고, 조직이 바로 선 모습을 보고 싶기에, 필요 최소한의 내용만 공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감히 요청드립니다.

존경하는 국정원 동료 여러분,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들 사이에서는 “조국의 안보를 조선일보에 맡기고 있다.”는 자조적인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조국의 안보니 통일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남의 이야기인양 치부하고, “월급봉투와 월초수당에 목을 메는 초라한 월급쟁이의 쪼들린 삶”을 살아 온 우리들을 발견해 왔습니다.

저는 대의에 목숨을 거는 자랑스런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당당한 자세를 지니는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겸손한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저의 행동이 아무런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길을 갈 것이며, 저의 결심을 후회하지 않으렵니다. 여러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김기환 전 국정원 직원 3차 양심선언--------------- 

제목: 도청문건 관련 전직 국정원 직원의 주장


국민 여러분께 또 다시 드립니다.

조국이 엄중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현실을 올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면서, 무거운 심정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위선과 기만,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여러분들께 밝힌 바 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송금, 그리고 임동원의 간첩혐의를 밝힌 저의 글에 대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간악한 무리들은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를 부도덕하고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저들의 졸렬한 대응에 괘념치 않습니다만, 때가 되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저들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우여곡절 끝에 특검제가 도입되어 진실 규명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고 있습니다. 특검제를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 여러분들의 뜨거운 조국애가 발현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하신 판단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고 경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편지에서, 전직 국정원 직원으로서,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 최소한의 내용만 공개하고자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도청 문건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 지도자들이 공공연히 거짓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자제하고 있을 수만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거짓은 죄악입니다. 하물며 일 개인의 거짓도 용서될 수 없는 것이거늘, 국가가 조직적으로 거짓을 조장한다면 더욱 더 두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거짓말이 국가 권력으로 옹호되고 권장되는 사회에서, 교육부 장관을 열 번 바꾸고, 교육개혁을 백 번 외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나라가 어찌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진정 후세대들에게 부끄러운 우리들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정원의 도청 문건과 관련하여, 신건 원장은 이제까지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국정원장으로서 그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의 거짓말은 이제 인용(認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습니다. 저는 그의 거짓말을 들을 때마다, 국정원 직원의 업보(業報)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제는 민주당 대변인과 청와대 비서실장마저도 이 지긋지긋한 거짓말 행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은 지금의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무조건 우기면 된다."는 저들의 천박하고 저열한 발상에, 치가 떨리도록 분노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거짓에 대해 단 한 번만이라도 엄정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도청문건은 국정원에서 작성한 자료가 맞습니다. 이 문건은 국정원 내에서 "메모보고"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한 때는 "물가정보"라고 불린 적도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줄여서 "메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보고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유통되어지는가를 여러분들에게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해 9월, 한나라당에서 도청문건을 폭로한 후, 신건 원장은 과학보안국(8국)을 해체하고, 12국을 신설하면서 일부 인원과 기능을 수사국과 외사국에 이관한 바 있습니다. 저는 과보국이 해체되기 이전의 상황을 중심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메모보고서는 국정원 내에서 가장 민감한 보고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국정원내에서도 이 보고서를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90년대 중반, 국정원의 국내정보 부서인 대공정책실에서 부서장의 보좌원으로 재직하면서, 이 보고서를 직접 담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메모보고서는 과학보안국(8국)에서 생산합니다. 과학보안국은 국내 통화와 국제 통화를 도·감청하는 부서입니다. 업무의 성격상 국정원 내에서도 음지(陰地)중의 음지라고 여겨지는 부서입니다. 국정원 직원들조차 과학보안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국정원의 진정한 힘의 원천(源泉)이 과보국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과보국에 근무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부서의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 부서는 3교대로 운영되었습니다.(그 후 4교대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확인은 못했습니다.) 24시간 내내 대한민국의 모든 유무선 통신을 무차별 도·감청합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는 감청도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은 불법으로 도청이 이루어집니다.

도·감청의 분야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주로 정치적인 내용이 많습니다만,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쳐 도·감청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제가 대공정책실에 근무하던 당시, 대구대학교의 학내문제와 관련 재단측과 반재단측이 오랫동안 분쟁하였습니다. 재단측의 모 인사가 외국에서 국내로 전화하는 내용이 오랫동안 이 보고서에 실렸습니다. 당시 반재단측의 주요 인사가 이번에 교육부장관에 오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무선전화도 도·감청이 가능합니다. 한국통신의 011- 전화는 오래 전부터 도청된다는 것은 국정원 내에서는 상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국정원 직원들은 011-에 가입하기를 꺼려해 왔습니다. 저는 퇴사하기 전인 지난 2000년도에, 기조실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무선전화 감청장비를 구입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무선 전화의 도·감청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보고서의 형식은 지난번 한나라당이 언론에 공개한 그대로입니다. 통화자들의 대화를 그대로 녹취한 것이 아니라, 통화 내용을 개조(改組)식으로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평가나 해석은 달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원 통화자의 발언내용을 살립니다. 문체(文體)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세련되지 않은 문체일수록, 외부에 유출되었을 때 국정원 문서가 아니라고 부인(否認)하기 쉽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과보국은 도청한 자료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온라인으로 각 부서에 배포합니다. 이 보고서는 배포선(配布先)에 따라, 각 부서의 부서장 실에 특정되어 있는 컴퓨터 단말기에 자동적으로 뜨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인쇄는 안됩니다. 도청한 자료 중에서 극히 민감하고 중요한 것은 메모형태로 작성하여 인편으로 차장실에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 메모는 B5보다 적은 조악한 용지에 거칠게 인쇄된 것입니다. 이 또한 유출에 대비한 것입니다.

보고서 량이 많지 않는 해외 부서의 경우 보좌원이 아침마다 중요한 내용을 추려 필사(筆寫)하여 부서장에게 보고합니다. 보고서 량이 많은 대공정책실의 경우, 이 보고서를 필사하는 직원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필사를 전담하는 이 직원을 흔히 메모보좌관이라고 부릅니다.

메모보좌관은 정보를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대개 서기관(4급) 고참이 담당합니다. 제가 퇴사하기 전인 지난 김대중 정권 초에는 정치과 출신 6급 직원이 한동안 이 일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메모보좌관은 대개 아침, 오후, 그리고 퇴근 전 등 하루에 세 차례 정도 보고합니다. 한 번에 보고하는 분량은 10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메모보좌관은 무척 피곤한 자리입니다. 아침 보고를 위해, 매일 새벽에 출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종인 골방에 혼자 않아, 모니터만 쳐다보며 무미 건조하게 베끼는 단순 작업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보면, 눈은 침침해지고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힙니다. 남의 말을 엿듣는 데 남다른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속된 말도 "할 짓"이 못됩니다. 그래서, 이 보직을 마치고 나면, 대개 진급을 시키는 것이 관행입니다.

메모보좌관이 필사한 메모는 부서장이 먼저 읽고, 부서장이 다 읽고 나면, 통상 부속실의 보좌원이 부서 내에 유통시킵니다. 보좌원은 먼저 부부서장들에게 이 보고서를 일일이 전달하여 회람시킵니다. 부서장의 특별한 지시 사항이 있을 경우, 관련 담당 과장에게 전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담당과장이 직접 부속실에 와서, 부서장의 지시 사항을 확인하고, 메모를 다시 메모해 가야 합니다.

메모보고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복사하거나 찢어갈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집니다. 이 또한 외부 유출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통을 마친 메모보고서는 보좌원이 책임지고 파기합니다. 민감한 자료이기 때문에 따로 관리대장(管理臺帳)도 없습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폭로한 자료는 이렇게 파기되어야 할 것이 파기되지 않고 바깥으로 나온 것을 다시 워드로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생산 부서인 과보국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 대공정책실에서 유출된 듯 합니다.

이렇듯이, 메모보고서는 내용이나 형식뿐만 아니라 생산목적이나 활용방법 등에 있어서도 일반 정보 보고서와는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이는 대통령이나 원장 등 상부(上部)에 보고할 목적으로 작성되는 보고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원재료가 되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메모보고서의 내용을, 분석 부서에서는 정보 보고서의 생산에 참고하고, 수집 부서에서는 추가 첩보 수집에 활용합니다.

저는 국정원의 도·감청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의 헌법과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불법이던 아니던, 도·감청이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내에서 암약하고 있는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남파간첩과, 수만명으로 추정되는 김정일의 똘마니들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도·감청보다 더한 불법적인 방어활동도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불법적인 도·감청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도 이해하실 줄 압니다. 그것이 국정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국가 안보가 아니라 정권 안보를 위해 불법적인 도·감청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간첩을 잡아야 하는 국정원이 간첩 잡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사찰이나 하고 있으니 당연히 욕을 먹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있었으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할 책임자들이,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는, 처연한 코메디는 여기서 그쳐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에 검찰에 체포되어 조사 받고 있는 심모 과장이라는 분은, 이 보고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분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분은 대공정책실 학원과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능력 있고 민완한 정보관이었습니다.

지난 80년대에 학원 문제가 시끄러울 때, 그 분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번 포상과 특진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동기(정규 16기)에 비해 진급이 빨랐고, 선후배들간에도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지역 차별로 인해 오랫동안 부이사관으로 진급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2000년, 대북전략국(5국)에 황선생님 관리과가 신설되었을 때, 대공정책실 경제과에서 옮겨와 겨우 과장으로 진급했었습니다.

이건모 전 감찰실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도청문건과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분은 감찰실장으로 재임하면서 여러 가지 무리하게 일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강직한 분으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지난 2000년 5월 말, 천용택 원장이 부임했을 때, 출신 지역을 믿고 조직을 우습게 여기던 최모 감사관(2급) 등 목포상고 출신들을 전격적으로 척결하기도 하였습니다. 2001년 4월 초, 신건 원장이 부임했을 때는,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었던 정성홍 전 경제수집 2과장의 비리 조사자료를 가지고, 신건 원장에게 독대(獨對) 보고했다가 광주지부장으로 좌천되었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신건 원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검찰의 조사는 분명히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입니다. 조사하여야 할 국정원의 도청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도청문제를 조사한 자체 감찰보고서의 유출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말한 대로, "이번에 검찰을 꽉 쥔" 것이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국민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울러, 이 기회에 한나라당에게도 몇 마디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이 대선 직전 이 문건을 폭로하여 표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큰 오판(誤判)이었습니다. 한나라당에서도 아시다시피 국정원의 도·감청은 지난 김대중 정권에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한한 한나라당도 깨끗한 손(Clean Hand)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구태정치라는 역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재였습니다.

선거가 불리하다고 하여, 국익(國益)과 당리(黨利)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을 한 것은 비난받아야 할 일입니다. 밝히려 했다면 전모를 당당하게 다 밝히던가, 아니면 영원히 덮었어야 했었습니다. 자신들에 유리한 내용만 선별하여, 단계적으로 질금질금 흘리면서, 선거에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한 것은 책임 있는 정당의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진실을 밝힐 의지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검찰에 당당히 나가 협조해야 마땅한 일이지, 지금처럼 여론이나 살피면서 미적거려서는 안됩니다.

이 기회에 신건 국정원장에게 몇 마디 권고 드립니다. 이제까지 신건 원장께서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국민을 상대로 무수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제 재임(在任)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지금이라도 그 동안의 거짓말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십시오. 그 길만이 국정원을 살리고 자신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힘없는 저를 국정원직원법으로 고소하는 따위의 유치한 짓은 삼가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국가정보원 직원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저의 글로 인해 명예가 손상될지도 모를 과학보안국을 비롯한 국정원 직원 여러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욕먹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김정일의 마수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더 나은 환경에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머지 않아 찾아올 것입니다. 이 모든 소동(騷動)은 국가정보원이 바로 서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아픔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담담히 받아들이는 용기도 필요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다시 한 번 더 촉구 드립니다.

2003년 3월,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환 올림.


-----------전 국정원 직원 4차 양심선언--------------- 

<<무기의 그늘, 부패의 온실>>


1) 글을 시작하며

국민 여러분들께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지난해 발표한 세 차례의 글을 통해 김대중의 위선과 기만, 그리고 임동원의 간첩 혐의 및 국정원의 도청 실태를 밝힌 바 있습니다.

저는 지난해 세 번째 글에서 “마지막이길 바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다시 펜을 들면서 그러한 저의 다짐을 깰 수밖에 없는, 비통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제가 국민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리는 이유는 개인적인 영달이나 사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저의 글이 혹시라도 국민 여러분들께 뭔가 가르치려 들거나 훈계하려는 것으로 비추어질까 두렵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단 하나의 목적은, 오로지 우리 모두가 지난 날을 바로 알고, 오늘 날을 다함께 걱정하고 염려하며, 다가올 날을 올바로 설계하자는 차원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글에서 김영삼, 김대중 정권 시절에 벌어진 무기도입 관련 비리 의혹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밝히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군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선량한 군인들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오늘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의 이 글이 그런 대다수의 선량한 군인 여러분들께 누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납품 비리 수사

지난해 12월, 청와대 직속의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이원형 전 국방부
품질관리소장과 이영우 AM코퍼레이션 대표, 정호영 한국 레이콤 회장 등을 구속하고 천용택 전 국방장관 등을 소환, 조사하였습니다.

이번에 특수수사과가 수사한 주요 사건은 대략 다음 세가지 사업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오리콘(Oerliken) 대공포 계량 사업
2. 케이블 어셈블리 납품 사업
3. 해군 견인소나장비 납품 사업

지난해 국방부의 장교들이 청와대에 투서한 편지가 계기가 되어 이번 무기비리 수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군내에 양심적인 젊은 군인들이 남아 있음을 확인한 것은 큰 위안이라 할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전체 무기비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아직 제대로 진상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일부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기에 몇가지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리콘(Oerliken) 대공포 계량 사업 비리 의혹

이 사업은 총560억의 사업비를 들여 청와대 주위와 수도권에 배치되어 있는 GDF-001대공포의 성능을 개량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개요는 지난 98년 기원전자의 정호영이 천용택 장관에게 로비하여 사업권을 획득한 후 대부분의 사업비를 착복하였고, 이원형 품질관리소장에게 로비하여 하자 있는 제품을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공포는 스위스 Oerliken사에서 제작한 것으로서, 정확한 명칭은 GDF-00 135mm 이연장 대공포입니다. 이 대공포는 레이다 유도 방식의 대공포라고 합니다. 지난 75~78년간 36문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이 대공포는 도입 당시 성능이 매우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포대가 대공포 2문과 수퍼 플레더마우스(Super Fledermaus) 사통레이더 1대로 구성되는데, 수방사에서 18개 포대를 운영,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방부는 당초 638억의 사업비를 책정, 이 대공포의 소모부품 국산화 사업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호영이 천용택에게 로비하여 부품 국산화 사업을 성능개량사업으로 변경하고 사업권을 획득했다고 합니다.

도입한 지 20여년이 지난 대공포의 성능을 개량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한 측면이 있었지만, 대공포를 전혀 만들어 본 적도 없는 회사에게 성능 개량사업을 맡긴 것이 더 큰 문제였다고 합니다.

지난 2002년 성능개량 사업을 종료하였는데, 사업 종료후 오리콘 대공포의 성능이 사업 이전보다 오히려 더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성능 개량사업이 아니라 성능 개악사업이 된 것이지요.

성능 개량사업 후 목포물을 포착하는 데서부터 사격에 이르는 전 과정을 수동으로조작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성능개량 사업을 한답시고 기존의 레이더를 못쓰게 만든 데 있다고 합니다.

정호영은 지난 92년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후, 기원전자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컴퓨터 보안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기무사에 납품하면서 군납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 정호영의 기원전자는 주로 통신장비의 비화기를 제작하여 국방부에 납품하는 군납 사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기원전자에는 송응섭 고문(육사 16기, 육군대장), 이학건 사장(육사 16기,육군준장) 등 천용택의 육사 동기 2명을 비롯하여, 예상오 (육사 22기, 육군소장), 김정호(육사 23기, 보안사준장), 유보선(육사 25기, 국방부차관) 등 고위 군출신 인사들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보선 국방차관이 국방부 내 입단속을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케이블어셈블리 납품 관련 비리 의혹

이 사건은 연합정밀 대표 김인술이란 자가 문일섭 획득실장과 이원형
획득정책관에게 로비하여 국방부에 납품되는 각종 케이블어셈블리의 납품 사업을 따내는 과정에서 빚어진 비리 의혹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대표적인 비리 의혹은 육군의 통신장비 획득사업인 SPIDER에 들어가는 케이블어셈블리와 커넥터의 납품을 가로챈 사건이라고 합니다.

SPIDER에 들어가는 케이블과 커낵터는 100여종인데, 당시
광남텔레콤(대표:홍정휘)이 대부분을 국산화하였고, 한국레이콤 (대표:정호영)과 셀렉트론(대표:함태환)이 23종의 케이블을 수입, 납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일섭과 이원형이 주 계약자인 삼성전자(현삼성탈레스)를 협박하여 기존 납품 업체인 광남텔레콤의 납품 계약을 취소시키고, 납품 업체를 연합정밀로 교체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납품업체가 교체된 후 삼성전자의 성진용 사업담당 부장이 연합정밀의 상무이사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또 다른 비리의혹 사건으로는 이원형이 연합정밀에게 특혜를 부여하기 위해 국산화 규정을 수정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원형은 37국산화 규정이라는 단서 조항을 신설하여 “현재 어떤 업체에게 독점 지정되어 있는 국산화 제품 중 국산화율이 85% 이하인 품목의 경우, 다른 업체에게도 다시 국산화 지정을 할 수 있다.”는 항목을 추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규정을 삽입함으로써, 현대모비스(현로뎀)에서 생산하는 케이블 에셈블리37종과, 대우종합기계와 삼성테트윈에서 생산하는 K-9자주포와 K-200장갑차용 케이블43종의 계약을 취소시켜, 납품업체를 연합정밀로 교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합정밀에게 특혜를 부여하기 위해 납품 업체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이원형이 연합정밀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능 미달의 제품이 납품 되었다는 의혹도 자연히 따르게 되었지요.

참고로, 지난 2001년 국정감사시 한나라당 박승국 의원과 민주당 정대철 의원 등이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뇌물을 받고 덮어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김인술 연합정밀 대표가 지난번 경찰청 특수수사과 조사에서 이러한 내용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견인 수중 음파탐지 장비(견인소나시스템) 납품관련 비리 의혹

견인수중음파탐지장비(Towed Sonar System)란 구축함에 사용되는 최첨단 수중 음파탐지 장비라고 합니다. 구축함은 자체의 소음으로 인해 바다속의 음향을 정확하게 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견인 소나 장비를 2Km 후방에 끌고가면서 수중 음파를 탐지한다고 합니다.

엠텍(대표:최창선)은 해군의 Sonar System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지난98년 대우통신이 부실화하면서 대우통신의 방산사업부가 엠텍과 머큐리사로 양분되면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합니다.

엠텍은 94-99년간 300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견인소나시스템의 개발을 완료하고 해군에 납품하고 있다고 합니다. 엠텍은 이미 지난 2000년부터 KDX-1, 2 사업에서 7척 분량의 견인소나시스템을 납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장비는 해군이 요구하는 성능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견인 케이블이 종종 끊어지는가 하면, 감아 올리는 윈치가 자주 고장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원형 품질관리소장이 이와 관련하여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최창선은 지난해12월 16일 구속되었으며, 수사도중 자해 소동을 벌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수사 결과

지난 2004년4월 2일, 서울중앙지법은 이원형 전 국방부 품질관리 소장에게 징역 6년에 추징금 1억 6,000만원을, 정호영 한국레이콤사 회장에게는 징역1년을 각각 선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특수수사과의 수사는 기대에 크게 미치는 못한 졸작이었습니다. 비리의 본질에는 아예 근처에도 접근해 보지 못하고 헛다리만 긁다가, 또 하나의 “태산경동서일필”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김대중 정권 시절에 저질러진 모든 무기 관련 비리에는 천용택 국방장관, 문일섭 획득실장, 이원형 획득정책관 등 호남 군맥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천용택은 무기도입 비리 뿐만아니라, 군납, 군인사, 군시설공사 등 모든 군관련 비리의 최종 결정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그가 처벌을 면한 것은 부실 수사였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실형을 선고받은 이원형은 평소 주위로부터 괜찮은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김대중 정권의 무기 비리에 대해 총대를 멘 것입니다. 현재 수의를 입고 있는 그의 심경이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3) 권영해의 미스트랄 도입 비리 사건

들어가면서

그동안 무기도입(획득사업)과 관련한 비리 의혹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비밀의 장막 뒤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비밀은 부정을 낳기 마련입니다. 절대 비밀은 절대 부정을 낳습니다. 무기도입 사업이 역대 대통령들의 비자금 마련 창구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습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사건들은 전체 무기비리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주 사소한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릴 부분도 전체 무기 비리 가운데 몇가지 대표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우리 정부가 지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1백 수십조를 투입, 추진하고 있는 율곡사업과 방위력 증강사업의 핵심적인 위치에 권영해 전 국방장관/ 안기부장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천용택 전 국방장관/국정 원장을 비롯한 호남 군맥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특히, 지난 98년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김대중과 천용택은 권영해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권영해의 무기 비리들을 덮었습니다. 물론, 김대중 정권에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비리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나라 무기 도입사상 최악의 비리 사건이자 최대의 국제 사기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산 미스트랄(Mistral) 휴대용 대공 미사일 도입 사업부터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미스트랄 도입 사업은 너무나 많은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시급을 요하는 사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여 엄청난 사업비를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미스트랄 3차 사업이 결정했던 97년은 극심한 외환위기 상황 이었습니다. 당초 2,800억 정도로 예상했던 사업비가 사업 집행시인 98~99년도에는 환율인상으로 인해 4,800억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권영해와 김영삼

구체적인 사건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이야기이지만, 먼저 권영해와 김영삼간의 관계를 잠시 되돌아 보겠습니다.

지난 1998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의 비화문민정부 기사는 김영삼 정권 시절 권영해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고도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 초기 권영해 국방장관은 군내 하나회를 척결하는 선봉장 노릇을 하면서 김영삼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지난 93년 말, 권영해는 율곡비리 사건에 자신과 친동생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잠시 낙마하였다가 한국야구연맹(KBO) 총재를 거쳐, 94년 12월 김현철의 후원으로 다시 안기부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권영해는 92년 5월 김현철의 장인인 김웅세 롯데월드 사장을 통해 김영삼에게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를 전후하여 권영해의 부인은 국군 중앙교회에서 김영삼이 다니던 충현교회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때 권영해는 김영삼에게 거액을 바치고 국방장관 자리를 예약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사에 의하면, 지난 93년 정권 교체기에 권영해 국방차관은 거취를 묻는 부하 직원에게 “나는 신경쓰지 말고 나가는 사람들이나 잘 챙겨주라.”며 자신의 낙점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국군 중앙교회의 장로였는데, 자신의 국방장관 취임 축하 예배에서 김영삼에게 아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김영삼 대통령을 대한민국에 보내셨으니, 저는 제사장 아론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공개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권영해는 안기부장으로 재임중에도 군내에 별로 배경이 없는 공군 출신의 이양호를 국방장관으로 천거하고,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뒤에서 직접 모든 무기도입 사업을 주물렀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만만한 이양호가 린다 김과 결탁하여 백두/금강 사업에 끼어 들자, 얼마 가지 않아 잘라 버렸습니다. 그 후 김영삼 정권의 안보분야는 줄곧 그의 독무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권영해는 안기부장으로 재임 중, 안기부 청사 내에 있는 공관으로 국방부 핵심 인사들을 수시로 불러 들여 직접 지시를 내렸고, 국방부의 인사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국방부에서는 “우리 나라에 국방부 장관이 둘이 있다. 권영해 안기부장이 사실상 국방장관이고, 김동진 국방장관은 차관이다.”라는 자조적인 말들이 흘러 나왔다고 합니다.

권영해와 이영우

이번에 구속된 AM코퍼레이션 대표 이영우라는 자는 권영해의 오른팔 이자 개인 심부름꾼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무기 브로커 중 한 명입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이원형은 권영해 밑에서 무기도입의 실무를 담당했으며, 지난 김대중 정권 시절 자행된 모든 무기도입 비리의 최고위 실무 책임자 중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권영해와 이영우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영우는 뉴욕에서 보험 영업(외판)사업을 하던 교포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의 부인은 뉴욕에서 뷰티서플라이 가게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흔히 말하는 가발장사를 했다는 말이지요.

권영해가 아직 군에 있을 때, 그의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는데, 그때 이영우가 그 딸을 돌봐주면서 서로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한때 시중에는 권영해와 이영우가 인척지간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아마 사실이 아닌 듯 합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샙니다만, 권영해가 안기부장 시절에는 주미 안기부 파견관이었던 최명주 공사라는 자가 권영해의 딸을 돌봐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98년 정권이 바뀌자 최명주는 그 일로 인해 전라도 출신(전주고) 이면서도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최명주는 지난 2001년 4월, 나종일의 후원으로 국정원 차장으로 승진 했습니다. 그는 임동원과는 사이가 좋지 못해 서로 부딪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데, 지난해 제가 글을 발표한 후 그는 저를 “죽여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영우는 권영해의 아파트 옆집에 살면서 권영해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는 권영해의 심부름으로 프랑스를 수십 차례나 갔다왔다 했습니다. 이영우가 프랑스 무기 도입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최대의 브로커로 알려진 것도 이러한 연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영우는 AM 코프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미스트랄 도입 사업의 에이젼트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이 사업을 하기 전에는, F-16 전투기의 시뮬레이션 장비를 1대 납품한 것 이외에 전혀 실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영우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도 천용택 장관, 문일섭 획득실장, 이원형 획득정책관 등과 상당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고, 박지원과는 뉴욕에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영우는 미트트랄 사업을 성사시킨 후 프랑스로부터 산업기사 작위(훈장)를 수여받았다고 합니다. 이영우 이외에 이 훈장을 받은 사람으로는 조중훈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있다고 합니다.

미스트랄 vs. 스팅어

미스트랄은 프랑스 국영 방산업체인 마트라(Matra)사 제품으로서, 미국 휴즈(Hughes)사의 스팅어(Stinger)나 북한의 SA-16와 같이 저고도 방어를 위한 휴대용 대공 유도 미사일입니다.

당시 미스트랄은 아직 실전에서 성능이 확인되지 않았고, 스팅어보다 무게가 두 배 가량이나 더 나가 두, 세 사람이나 동원되어야 운반할 수 있는 데다, 삼각대로 고정시켜 발사해야 하기 때문에 산악이 많은 우리 나라의 작전 환경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미스트랄은 스팅어보다 기당 가격도 훨씬 더 비싸서 경제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또한, 마트라사는 계약상으로 미사일의 핵심 기술을 우리에게 이전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미스트랄은 국제 무기시장에서 대만이나 카타르 등에 시험용으로 300기정도 수출된 것이 고작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특수부대조차도 자국의 미스트랄이나 제블린, 스타버스터를 쓰지 않고 스팅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가격이 싸고 시험과 실전에서 이미 그 우수성이 충분히 입증된 스팅어를 도입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당시 스팅어는 실전에서 300여회 이상의 격추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팅어는 아프간 반군이 소련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스팅어는 무게가 15kg 정도로 병사 한 사람이 운반할 수 있는 데다, 견착식 사격이 가능할 뿐만아니라, 야간사격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 우리의 작전 환경에 적합하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스팅어는 명중률에서도 경쟁 미사일 가운데 최고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스팅어는 자동 재발사 기능(Automatic Refire Capability)이 갖추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적군기의 교란 방어장치(Flare Decoys)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스팅어에는 피아기 식별장치(IFF, Identification Friend or Foe)이라는 탁월한 장점이 있었는데, 이는 미 NSA가 운용하는 인공위성의 코드로 아군기를 자동적으로 추적하여(Lock on) 아군기와 적군기의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최첨단 기능이었습니다. 이 피아기 식별(IFF) 기능은 한미 양국군의 연합작전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습니다.

당시 휴즈사는 우리 군(ADD)에 미래의 저고도 미사일(PSAM) 기술뿐만 아니라, 고고도(高高度) 방어체계인 PAC과 연계한 기술이전도 약속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삼성항공과 LG정밀 등과의 합작 생산과 향후 제 3국으로의 수출까지도 파격적으로 보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군내의 의견도 절대 다수가 스팅어를 선호했습니다. 스팅어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도입 기간이 다소 길다는 것이었으나, 그에 대해서도 휴즈사는 단축이 가능하다는 약속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90년대 초, 권영해가 미스트랄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자 군내에는 격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특히, 해군의 경우 주로 미군의 무기체제를 채택하고 있어, 미스트랄이 기존 해군의 무기체제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우리의 해군 함정에는 발사 장치대가 없어 조준사격이 곤란하고 함정의 이동에 따라 안정사격이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주윤돈 해군 조함사업단장 (준장, 해사 19기)은 “우리 함정에는 프랑스의 미스트랄이 맞지 않는다.”며 격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권영해는 “함정을 뜯어 고쳐서라도 미스트랄을 배치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합니다. 그 후 93년 8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권영해는 직권으로 주윤돈 제독을 보직해임 시켜버렸다고 전해집니다.

권영해는 국방장관이 된 이후엔 이영우를 아예 가락동의 자기 호화 아파트의 옆집으로 이사시켜 아침, 저녁으로 만났습니다. 이영우는 권영해의 심부름으로 프랑스를 제집 드나들듯 왔다갔다 하였습니다.

또한 권영해는 자기의 동향(경주) 후배인 최동진 소장(육사25기)과 이홍환 준장(육사 26기) 등을 육군본부와 교육사 시험평가 부서에 주로 배치시켜 무기 도입비리에 이들을 이용하였습니다. 최동진 장군은 최근까지 국방부 획득실장이란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한편, 권영해는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신모(명미상) 박사라는 사람 등을 통해, 미스트랄 미사일과 스팅어 미사일의 비용효과지수 (Cost/Efficiency Index)를 조작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96년 7월, 성능시험 평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KIDA는 미스트랄의 경우 96년도 데이터를 적용하고, 스팅어는 91년도 데이터를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미스트랄의 명중률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반면, 스팅어의 명중률은 의도적으로 낮추어진 것입니다.

국방연구원은 가격, 절충교역, 명중율 등에서 미스트랄이 스팅어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조작 평가하였습니다. 스팅어의 장점들은 고의적으로 무시되고, 미스트랄의 장점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내었습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한심한 부정이 총체적으로 저질러진 것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권영해는 안기부장으로 재직시에도 수시로 국방부 획득부서 관련 간부들을 안기부장 공관으로 불러 직접 프랑스산 무기와 장비의 구입을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97년 1월 중순과 하순, 주한 프랑스 대사와 톰슨사 부사장, 톰슨사 에이젼트인 백동립 등을 안기부 청사내 공관으로 초청했고, 국방부 간부들도 함께 불렀습니다. 이 자리에는 국방부의 하복만 장군이라는 사람도 배석시켜 프랑스 장비를 구입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권영해와 천용택, 그리고 미스트랄

미스트랄과 스팅어는 한국에서 세 번에 걸쳐 경쟁하였는데, 세 번 모두 미스트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국제 무기시장에서 이상스럽게도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미스트랄이 스팅어를 이긴 것입니다.

미스트랄의 1차 도입은 지난 92년에 이루어져 900기가 공군 기지와 일부 육군에 배치되었습니다. 미스트랄의 2차 도입은 지난 94년에 이루어져 360기가 해군 함정에 배치되었습니다.

미스트랄 3차 도입은 97년 말에 계약이 성사되어 1278기를 직도입하고, LG IT에서 1153기를 국내 개발하는 것으로 하는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물론, 규모가 가장 컸던 3차 사업이 문제 또한 가장 심각했습니다.

더욱이 3차 사업은 워낙 졸속으로 진행하다보니 당초 예산액도 책정되어 있지 않은 사업을 강행하였습니다. 당시 외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시급히 추진해야 할 이유가 없었는 데도 말입니다.

미스트랄의 3차 도입이 결정되기 이전,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권영해는 “미국이 스팅어를 구매하라는 압력을 넣는다.”며 교묘하게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언론플레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조선일보 97.6.15.자 사설은 「한미 미사일 논란」 이라는 제하로 미국을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권영해는 또한 “1, 2차 도입 때는 미국이 스팅어 판매를 거부했다.”고 거짓 선전을 해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10월 13일, 국방부는 “스팅어가 아니라, 미스트랄을 도입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프간 미스트랄 3차 도입 계약은 97년 12월 3일 이루어졌습니다.

김영삼의 최종 결재는 9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에 있었습니다. 이때 청와대로 결재를 받으러 들어간 권영해는 김영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개국이래 최고의 성군이시다.”며 극단적인 아부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지난 98년 초, 이 문제로 인해 미국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김대중 정권의 인수위에서는 사업의 집행을 정지시켰습니다. 당시 분위기 모르는 국민회의 김경재 의원(순천)이 천용택 국방장관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대면서 강력히 시정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용택과 문일섭은 들은 척도 않고 별도의 재심의 없이 사업을 강행하였습니다.

지난 98년 3월 29일, 준장, 대령 등 4명으로 구성된 국방부의 인수조사팀(Acceptance Inspection Team)이 프랑스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측은 생산 공정이나 생산 제품은 보여주지도 않고, 포장이 끝나 선적 대기중인 나무상자만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수조사팀은 물건 검사는 하지도 못하고 관광과 향응만 즐기다가 귀국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제출한 귀국 조사보고서는 이 “뜨거운 감자”를 서로 떠넘기는 내용으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당시 인수조사팀은 계약서에 기재된 것과 규격과 외관이 다른 “성능 개량탄”이 도입될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조달본부에 정식으로 서면 통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달본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문일섭은 이러한 사실을 묵인하였습니다.

지난 98년 6월 28일, 3차 사업의 첫 선적 500기가 포항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때 실무자들은 인수확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들어온 물건이 계약서상의 제품과 중량, 속도, 사거리, 시커 등에서 상이한 제품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97년 12월 작성된 계약서에는“모든 물건이 신제품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약 계약된 물건과 다른 물건일 경우, 2개월 전에 통보하고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실무자들이 “당초 계약한 물건과 다른 물건이 들어 왔다.”고 항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측은 “제품의 외형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디지털 전자 첨단 공학을 도입하여 성능을 향상시킨 것이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기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또한, 프랑스 측은 “인수조사팀에게 이미 성능개량탄(미스트랄II) 이 갈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계약상의 의무를 위반한 것은 아니다.”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주한 프랑스 대사와 무관은 뻔뻔스럽게도,“한국은 참 운이 좋은 나라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한국만 유일하게 새로 개량된 미스트랄 II를 들여 왔다.”고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천용택의 국방부는 이러한 사기극에 무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이들을 방조하였습니다.

미스트랄 II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모델이었습니다. 마트라사의 연 생산능력은 약 2000기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97년에는 업그레이드는 고사하고 단 1기의 생산 실적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3차 도입시 인수받은 미스트랄은 계약서 상의 설명서(Spec)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때, 도입된 미스트랄의 제작 일련번호가 1991년 도입되었던 것과 순서가 일치하여 제고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기술력으로는 도입탄의 성능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국방부는 도입탄이 신형탄인지 제고탄인지 확인하기 위해 1999년 9월, 재차 조사팀을 프랑스로 파견하였습니다. 당시 2발을 시험 사격하고 난 후 성능개량탄으로 인정하고 잔여분의 도입을 승인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미 국가안보국(NSA)이 재고탄임을 확인해 주었다고 합니다. 나토국의 모든 항공기와 미사일에는 미 NSA의 피아식별(IFF) 코드가 부여된다고 합니다. 미 NSA의 확인에 의하면, “98년 도입된 미스트랄의 IFF 코드는 90년 말에 부여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NSA는 “지난 97~ 98년에는 마트라사가 미스트랄을 전혀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IFF 코드를 부여한 사실이 없다.”는 점도 확인해 주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측의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이로써, 프랑스가 재고되어 있던 미스트랄의 제조일자와 제조번호를 조작하고 시커와 노즐 등 일부 부품을 교체한 후 업그레이드시킨 개량기종 미사일 (미스트랄II)이라고 사기를 친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후 국회에서도 이 문제를 여러차례 다루었지만, 증거가 부족한데다 육군이 철저히 은폐로 일관함으로써 비리가 묻히게 되었습니다.

미스트랄의 추진체(Booster) 수명이 10년에서 12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현재 육, 해, 공군에 배치되어 있는 대다수의 미스트랄은 이미 수명이 다했거나 거의 끝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스트랄의 추진체를 교체하는 데에는 기당 2~3,000만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해 국방부는「신궁」이라는 국산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국방부는 2004년부터 미스트랄의 추진체를 교체할런지, 아니면 아예 신궁으로 교체 배치할런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쪽이든 당분간 우리 하늘은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스트랄과 한미동맹

권영해가 이렇게 “미친지랄”하듯이 미스트랄에 집착한 이유는, 프랑스와 비밀리에 합의한 막대한 중계수수료(커미션)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제 무기시장에서의 중계수수료는 사업비의 2% 내외 정도이고, 많아야 5% 이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규모가 큰 사업일수록 중계수수료의 비율은 낮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미스트랄의 경우 중규모 이상의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커미션이 평상의 경우보다 거의 열 배 가량이나 높았다고 전해집니다.

참고로, 스팅어의 경우 FMS(Foreign Military Sale) 방식으로 도입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FMS의 경우, 커미션의 상한선은 5만불로 묶여 있으며, 중계 컨설팅료도 1 내지 2% 이내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미스트랄의 경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소액인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FMS 방식의 무기 도입을 거부할 때, 흔히 가격이나 미국 측의 까다로운 기술 이전조건 또는 무기 구입선 다변화 등의 구실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FMS 방식으로는 커미션을 거의 먹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음이 공공연한 비밀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정리하면, 미스트랄 도입 사업은 부도덕한 프랑스의 국영 군수업체, 국내의 무기업자, 국방부의 관계자, 그리고 정책 결정자가 총체적으로 결탁한 전형적인 비리였습니다. 프랑스는 서방 선진국 가운데 가장 부패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개통된 프랑스산 고속철 도입 사업은 아직도 비리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동부지역 전자전 장비, 천마 레이다와 미사일, 군의 통신 장비체계인 스파이더, 해군 함정에 탑제된 각종 장비 등 프랑스산 장비와 무기에는 언제나 비리 의혹이 따라 다녔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스트랄 사건은 단순히 무기비리 차원을 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스트랄이 한미동맹 관계를 격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한국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한국에 우수한 자국산 미사일을 배치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수준을 넘어, 이 사건을 동맹의 배신으로 받아들이고, 동맹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도층의 부패로 인해 우리 안보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한미동맹 관계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방위력을 증강하려던 사업이 오히려 우리의 방위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권영해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기념관 앞에서 총살되어야 마땅합니다.(계속)


4) YS-DJ 정권의 비리 의혹 사업들

위에서 설명드린 미스트랄 도입 사건은 권영해가 저지른 무수한 무기도입 비리의 대표적인 한 예에 불과합니다. 권영해는 이미 노태우 정권에서 율곡사업을 추진하면서 여러가지 비리의혹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권영해는 미스트랄 이외에도 김영삼 정권 말기에 몇 가지 무기 도입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아마도 김영삼의 퇴임후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렇게 서둘러 추진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다음에 설명드릴 8가지 무기도입 사업은 권영해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서, 김대중 정권의 인수위에서 사업 추진을 중단시켰으나 천용택 국방장관과 문일섭 획득실장이 집행을 강행했던 사업들입니다.

1. Mistral 휴대용 대공 유도탄 도입 사업
2. 백두 통신감청 정찰기/금강 영상정보 수집 정찰기 도입 사업
3. M-270 다연장로켓(MLRS)/ATACMS 지대지 미사일 도입 사업
4. 이스라엘제 Surcher 무인항공기 도입 사업
5. CAP-10B 훈련용 경비행기 도입 사업
6. BO-105 경전투헬기 도입 사업
7. 동부지역 전자전 장비 도입 사업
8. 인도네시아산 CN-235-200M 수송기 도입 사업

이 사업들 가운데 미스트랄 도입 사업은 이미 자세히 설명드렸기에 제외하고, 나머지 사업들을 대강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두 신호 감청기/금강 영상 정찰기 도입 사업

이 사업은 린다 김의 “몸로비” 보도로 인해 비교적 세간에 늘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백두는 감청장비를 탑재한 통신정보 수집 정찰기 도입 사업이고, 금강은 영상레이다(SAR, Synthetic Aperture Rader)를 탑제한 영상정보 수집 정찰기 획득 사업입니다.

당시 공군은 노후화하고 성능이 떨어진 RF-4C와 RF-5A 정찰기를 대체하고, 우리의 독자적인 정보획득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이 사업들을 추진하였습니다.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백두 사업비는 2,400여억원이고, 금강 사업비는 2,800여억원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지난 1997년 11월 계약이 체결되었고, 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에 사업자가 선정되었습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던 천용택은 이 사업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했었지만, 자신이 국방장관이 되고난 98년 3월에는 이 사업의 집행을 승인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백두사업에 쓰인 감청장비와 백두/금강에 사용된 비행기가 특히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초 공군이 원한 기종은 감청장비는 독일제, 항공기는 프랑스제 팔콘50기 였습니다. 이들 장비와 항공기는 선정된 E-시스템사의 장비와 호커800xp기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도입된 E-시스템 장비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장비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문 제작한 맞춤식 장비라는 것입니다. 그 많큼 기기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당시 미국의 NSA는 국방부 사업단에게 8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공식적으로 “E-시스템 장비를 선정해서는 안된다.”는 권고 서한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양호와 권영해의 외압으로 인해 사업이 그대로 추진되었습니다.

린다 김은 “장비를 납품하는 회사가 항공기도 직접 선정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다.”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E-시스템사의 모회사인 레이시온사가 제작하는 호커800xp기가 선정되도록 로비하였습니다.

호커 800xp는 개인용 소형 비행기로서, 군사 목적의 정찰기로 사용하기에는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크기가 너무 작고 출력이 낮아, 우리 공군이 요구하는 작전요구성능(ROC)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얼마나 작았든지 내부를 넓히기 위해 화장실을 뜯어 내고도 운용요원이 탑승할 공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탑제하는 장비 무게가 비행기의 탑재허용 중량을 초과했다고도 합니다.

또한 이 비행기가 적의 미사일에 쉽게 격추될 정도로 비행고도가 낮습니다. 공군에서는 특히 이 문제에 대해 민감했습니다. 유사시 격추될 줄 뻔히 알면서 비행사를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장비의 열을 냉각시키는 냉각기와, 전원을 공급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공군에서는 4시간의 작전 성능을 요구하였는데, 이 비행기는 작전가능 시간이 1간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대를 풀 가동하더라도 고작 한나절의 작전시간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점을 발견하고 난 후 미국측에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의 NSA가 이미 제품의 성능에 대해 우리 측에 공식으로 통보한 데다, FMS 방식으로 구매하였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기종 선정 후, 비행기의 구매 방식을 FMS에서 상용으로 변경한 것도 의혹이 남는 부분입니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FMS 방식으로는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으니 상용으로 바꾼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김대중 정권은 결국 사건을 덮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사업단장인 양치규 준장은 사업을 종결하고 관련 서류들을 폐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린다 김이란 여자에 대해 몇마디 언급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그녀는 동족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그동안 신동아와의 인터뷰, 자서전 등을 통해 밝힌 내용들은 모두 한결같이 진한 립스틱빛 거짓말들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미군부대에서 스트리퍼를 하던 양공주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재벌 2세랑 어쩌구, 연예인 지망생이 저쩌구, 카쇼기가 어떻고, 박종규가 저떻고, 하는 얘기들은 모두 순도 100%의 거짓말들입니다. 몇 건을 했느니, 조풍언과의 관계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지난 90년대 초 LA 폭동시, 헐값으로 변두리 호텔을 하나 인수하여 돈을 좀 모은 다음 무기 장사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몇몇 국회의원 할아버지들을 인터콘이나 하얏트로 모셔서 다양한 선진 몸로비 기술을 선보인 끝에 백두사업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저는 그녀도 곧 우리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린 죄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린다 김은 우리나라 어린 여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이상형이라고 합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처벌될 것으로 믿습니다.

M-270 다연장로켓(MLRS)/ATACMS 지대지 미사일 도입 사업

M-270 MLRS(Multiple Launch Rocket System)와 ATACMS 전술 지대지 유도 미사일은 미 육군의 가장 강력한 화력 장비라고 합니다. 한 대의 장비가 포병 수개 대대의 화력과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우수한 무기 체계라고 합니다. 김정일은 평양를 방문한 카터 전대통령에게 이 장비만은 한국에 판매하지 말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1997년 7월 15일, 3억 3천6백만불 어치의 장비를 도입하기로 미국과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그후 정권이 바뀌고 외환위기 상황에서 집행하기가 무리라는 점이 지적되어 김대중 정권 인수위가 사업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러나, 98년 4월 천용택 장관과 문일섭 획득실장이 사업집행을 지시, 총 사업비 4,700억이 지출되었습니다.

이 장비는 발사대인 M-270 MLRS, M26 로켓 Pod, 그리고 지대지 미사일인 ATACM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4,700억을 들여 우리가 도입한 장비를 살펴보면, M-270 MLRS 29문, M26 6연발 로켓포드 271대, ATACMS Block1 미사일 111기 및 기타 훈련장비와 차량 등입니다.

이 사업의 문제점은 간단합니다. 우수하기는 하나 너무 비싼 무기를 들여온 것입니다. 그것도 외환위기 상황에서 말입니다. 들인 비용에 비해 전술적 가치가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산악지형이 MRLS의 능력에 제한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271대의 M26 로켓 Pod는 개전시 6시간 동안 사용할 분량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할 때, 개전시 10일간의 탄약 값이 무려1조 6,000억이나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업의 국내 에이젼트인 KCC사(사장:황선우)는 이 사업으로 막대한 커미션을 챙겼다고 합니다.

한편, 국방부는 2002년 약 5,00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2차 MLRS 도입 사업을 진행하였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때 추가로 MLRS 발사대 29문과 사정거리가 300Km에 달하는 신형 ATACMS Block1A 미사일 110기 등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인정찰기 획득사업 및 이스라엘제 Surcher 무인항공기 도입 사업

무인정찰기(UAV) 획득사업이란 적 지역의 첩보 수집을 위해 정찰용 무인 항공기 7식(35대~40대)을 국내 개발/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98년 현재 총 사업비는 1,500억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93년 10월, 대우 중공업이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비조”라는 UAV 획득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96~97년, ADD 주관하에 개발품에 대한 기술시험을 한 결과, 감지기의 성능, 항속거리, 탐지능력, 순항속도 등 주요 항목의 ROC에 미달하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97년 9월 11일, 국방부는 작전요구성능(ROC) 수준을 미달된 UAV 수준으로 낮추어 줌으로써, 대우 중공업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특혜를 부여했습니다. 이어서, 지난 97년11월 29일, 국방부는 278억원의 개발 예산을 승인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업과는 별도로 권영해 안기부장은 지난 96년 3월, 안기부 정보 전력화 사업 계획에 의거, 이스라엘제 Surcher 무인 정찰기 2식 10대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무인정찰기는 이종찬 원장 시절인99년 8월에 도입되어 1군단과 5군단 공중 정찰중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문제점은 국내 개발 중에 외국 제품을 도입하여 예산 낭비를 초래한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로부터Surcher 정찰기를 도입할 당시에 이미 국내 개발품의 성능 미달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사원은 1998년 감사에서 국내개발 장비와 해외 구매 장비의 동시 운영에 따른 운용 체계의 이원화 등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국방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후에도 국내에서 개발한 무인정찰기는 낙하산 착륙방식의 문제점이 여전히 미해결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카메라 초점의 고정유지 문제도 미완성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는 2001년 8월30일 “지상 1~2㎞ 상공에서 밤낮으로 영상정보를 수집, 지상부대에 전해주는 저고도 정찰용 UAV를 10년간의 개발 끝에 시험평가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며 “내년 중 실전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CAP-10B 훈련용 경비행기 도입 사업

이 사업은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훈련용으로 프랑스에서 CAP-10B라는 경비행기 4대를 도입한 사업입니다. 장비 자체는 별 것이 아니지만, 운용목적 등이 극비로 취급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비행기는 공사생들의 훈련이 아니라, 국정원이 대북 침투조 훈련용 또는 자폭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업도 김대중 정권 인수위에서 중단시켰는데, 그 이유는 “안기부 예산으로 사와야 하는 것을 국방부 예산으로 사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업도 문일섭 실장이 재검토없이 집행하였습니다.

BO-105 경전투헬기 도입 사업

이 사업은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AH-1S/F 코브라헬기의 목표 획득용 정찰헬기 12대를 국내에서 기술 도입하여 생산한 것입니다. 국방부가 대우와 삼성의 로비전에 휘말려 대우 중공업에 특혜을 준 사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우 중공업은 2대를 직도입하고, 10대를 기술 도입하여 생산할 목적으로 생산라인을 설치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예산만 낭비하고 기술 이전이나 축적은 전무했다고 합니다.

기종 결정후, 대우의 헬기가 작전요구성능(ROC)상의 계기 능력에 미달하는 것으로 판명되자, 형상(무장장착형태)의 임의변경을 허용하고 편법으로 GPS수신기를 탑재하는 선에서 적당히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업도 권영해가 대우를 밀어주면서 무리하게 사업을 시작하였고, 김대중 정권 인수위에서 부당성을 제기한 것이었지만, 문일섭 획득실장이 재검토없이 집행하였던 것입니다.

동부지역 전자전 장비 도입 사업

이 사업은 권영해가 저지른 대표적인 무기도입 비리 사업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총 사업비 규모가 700여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당초 독일의 DASA사 제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권영해의 강압으로 프랑스의 톰슨사 제품을 들여왔습니다. 처음 들여와 시험해 보니“불만 껌뻑이는”먹통을 들여온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결국 이 제품은 작전요구성능(ROC)의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량품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부산의 코메른사가 추진하였는데, 당시 이 회사는 스팅어 미사일 제조업체인 휴즈사의 에이젼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코메른사는 스팅어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 사업을 따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산 CN-235-200M 수송기 도입 사업

이 사업은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송기를 8대를 도입한 사업입니다. 국방부가 공개한 바로는 사업규모가 거의 2,000억원에 이릅니다. 이 사업도 대표적인 비리의혹 사업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한참 후진국인 인도네시아로부터 비행기를 구입한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참고로, 권영해는 그 이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동종의 비행기를 도입한 적이 있습니다.


5) 김대중 정권의 무기도입 비리 의혹

김대중 정권에서 무기도입 비리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나 큰 착각일 것입니다. 줄어 들기는커녕, 오히려 여러 놈들이 아귀처럼 달라들어 경쟁적으로 부스러기를 뜯어 먹었습니다.

물론, 두 말하면 잔소리겠지만, 큰 덩치는 김대중이 직접 챙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대중의 평생 비밀 금고지기인 이수동이가 이러한 일에 개입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김대중 정권 시절에 이루어진 여러가지 무기도입 비리를 자세히 설명드릴 준비가 안되었지만, 그 가운데 아직도 비리의혹이 가시지 않은 몇가지 사업들을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차기 전투기 도입 사업

이 사업은 김대중 정권 시절 무기도입 사업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무수한 논란끝에 보잉사의 F-15K가 선정되었습니다.

김대중은 이 과정에서 보잉사로부터 엄청난 리베이트를 챙긴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보잉사의 아파치 헬기 에이젼트인 이영우가 김대중에게 거액을 바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업에는 김홍업, 천용택 등 여럿이 개입하였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F-15K가 승리하였지만, 권노갑과 박지원 등은 라팔 쪽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라팔쪽의 떡고물이 훨씬 더 컷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풍언의 후원을 등에 업은 일광공영 이규태라는 자가 라팔 쪽 업무를 대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사업은 당초 예산액이 4조 3000억 정도였는데, 아무런 설명 없이 5조 6000억으로 늘어나 의아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차기 VHF 무전기 도입 사업과 불곰 사업

그외에 비리의혹이 있는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차기 VHF 무전기 도입 사업과 러시아제 휴대용 대전자 유도 미사일 사업을 들 수 있습니다.

캐나다로부터 차기 VHF 무전기를 도입해 왔는데, 이 사업에는 권노갑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업은 사업비가 1조 1천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제 무기도입 사업(일명 불곰사업)은 애초에 러시아에 제공한 경협차관의 상환 조건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확대되면서 현금을 지급하고 들여온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제 휴대용 대전차 유도 미사일(METIS-M) 도입 사업은 사업비가 1조 3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의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에는 조풍언과 천용택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풍언을 대신하여 일광공영의 이규태가 전면에 나서 일을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6) 조풍언의 무기도입 비리 의혹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수 많은 무기 도입 사업에는 조풍언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비리의 실무는 천용택, 문일섭, 이원형 라인이 처리하였습니다.

다음의 6가지 사업은 김대중 정권에서 추진되었던 무기도입 사업 중 특히 조풍언이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업들입니다.

1. 장거리 공대지 유도 미사일(AGM-142 Popeye) 도입 사업
2. AN/ALQ-165 ASPJ 대전자전 방어 및 교란 시스템 도입 사업
3. 전투기 레이다 경고 수신기(RWR) 교체 사업
4. 렙콘 항공기 착륙 유도용 항공관제 레이다 도입 사업
5. 공군 공지통신장비 도입 사업
6. 이스라엘제 Harpy 대레이다 공격용 무인정찰기(UAV) 도입 사업

장거리 공대지 유도 미사일(AGM-142 Popeye) 도입 사업

이 사업은 아군의 전투기가 적의 방공방 바깥에서 공격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거리 미사일을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총 사업비가 1,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업은 1998년 말에 결정되어, 이스라엘 라파엘사와 미국의 록히드마틴사의 합작 제품인 AGM-142 Popeye 미사일 100기를 FMS 방식으로 도입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공군은 F4-E 전투기를 개조한 후, 이 미사일을 장착하여 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경쟁기종은 미국 Rockwell사(현재 보잉사로 합병)의 AGM-130였다고 합니다. 양 기종 가운데 AGM-142가 AGM-130보다 사거리가 더 긴 장점이 있는 데다, 우리보다 터키가 먼저 AGM-142를 구매한 적이 있어 분위기가 AGM-142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조풍언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승진(대표: 김상태 전 공군 참모총장)이라는 회사를 내세워 사업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AN/ALQ-165 ASPJ 대전자전 방어 및 교란 시스템 도입 사업

이 사업은 KF-16에 탑재되는 ASPJ(Airborne Self Protection Jammer) 전자전 장비를 도입한 것입니다. ASPJ 전자전 장비란 전투기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적의 전자파를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공군이KF-16을 도입할 당시에는 아직 이 장비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장비가 탑재되지 않은 상태로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96년 장비 개발이 끝나 김영삼 정권시 대량 도입되었고, 김대중 정권 때인 99년도에도 추가로 도입되었습니다.

조풍언은 기흥물산이라는 회사를 설립, 직접 에이젼트를 맡아 이 사업을 처리하였고, 사업 종결후 회사를 정리하였습니다.

전투기 레이다 경고 수신기(RWR) 교체 사업

이 사업은 우리 공군의 F-4,F-5, F-16(초기도입모델)에 탑재되어 있던 구형 레이더 경고 수신기(RWR, Rader Warning Receiver)를 신형으로 교체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사업 규모는 약 650여억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1999년 사업이 결정되어 이스라엘 EAISRA사의 SPS-2000이라는 장비를 도입하였습니다. 경쟁기종은 미국 록히드마틴사의 AN/ALR-56M으로, 이것은 KF-16 전투기에 탑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사업은 PSI사(대표:이달화 예비역 공군 준장)가 표면에 나섰지만, 실제 배후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사람은 조풍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렙콘 항공기 착륙 유도용 항공관제 레이다 도입 사업

이 사업은 공군과 육군의 항공기 착륙 유도용 항공 관제 레이다를 도입한 사업입니다.

지난 96~97년, 공군은 미국 ITT(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사로부터 렙콘 레이다 4대를 도입하면서 기존의 레이다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탈로 교체하는 절충교역을 했습니다. 또한, 육군도 2000년 동 회사의 이동식 레이다 2대를 도입하였습니다.

지난 2001년 12월 17일, 감사원 감사결과 동 레이다가 장비 결함으로 인해 오랫 동안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94년 1차 구매시 결함을 발견하고도 2차 구매 계약을 체결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육군이 레이다를 구입할 당시, 공군측이 육군의 전투용으로는 부적절하다는 평가결과를 통보했음에도 국방부가 이를 무시하고 사업을 추진했던 사실도 적발되었습니다.

한편, 디지털로 기기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레이다에 가끔 항적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육군의 이동식 렙콘 레이다 2대의 경우, 레이다간 일부 사각지대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그후 시정되어 현재는 정상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풍언 커낵션

조풍언은 지난 20여년간 우리나라 최고의 무기 브로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김대중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모든 무기도입 사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단히 치밀하고 노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워낙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위법사실이 전혀 포착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무기도입 분야에 관한한 그야말로 “천재”라고 합니다. 이 분야에서 그만한 자질을 보인 자가 전무후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주로 에이젼트를 내세워 일을 처리했다고 합니다. 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사업이 끝나면 회사를 정리해 버리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는 주로 미국과 이스라엘 제품을 도입하는 사업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감시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1천억 안팎 규모의 사업을 주로 취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조풍언은 러시아제 대전차 유도 미사일 도입 사업과 차기 전투기 도입 사업에서 일광공영 대표 이규태라는 자를 전면에 내세워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급 경찰관(경사) 출신에 불과한 이규태라는 자가 러시아제 무기도입 사업과 고철 및 비금속 수입 사업을 독점한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규태 뒤에 조풍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조풍언 뒤에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의 비자금을 밝혀내기 위해 조풍언 커넥션부터 먼저 밝혀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풍언과 이규태, 그리고 조풍언과 이수동과의 커넥션 고리가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차기 잠수함 건조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조풍언이 개입한 의혹 또한 앞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입니다.

제가 충분히 밝히지 못한 이러한 부분들은 차후에 국민 여러분들께서 직접 밝혀주시리라 믿습니다.

7) 끈끈한 비리의 사슬

이상으로 김영삼, 김대중 양 정권에 걸친 무기도입 사업의 비리 의혹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10년여간 우리나라에서 벌여졌던 모든 무기도입 비리 사건에 국방장관과 국정원장(안기부장)을 거친 권영해와 천용택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러한 비리들이 왜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고 덮혀 버리게 되었는지를 설명드릴 차례입니다. 이 비리의 주역들이 서로 어떻게 연계되어 있고, 이들이 해외에 숨겨 놓고 있는 비자금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비밀을 밝히기 전에 먼저 이해를 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저는 김대중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와 있는 한낱 망명객에 불과합니다. 일개인의 능력으로는 이들의 커넥션과 비자금의 전모를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동안 이들이 해외에 숨겨놓고 있는 비자금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그 실체를 파악하였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권영해와 김영삼, 김대중은 모두 해외에 거액의 비자금 계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두환과 노태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영해, 천용택, 김대중의 은밀한 뒷거래

김대중은 집권 초에 이미 권영해의 무기 비리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도 장차 무기도입 사업으로 돈을 먹으려고 계획했기 때문인지, 문제를 밝히기보다는 문제를 덮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지난 98년, 정권이 바뀌고 난 후 김대중 정권은 본격적으로 권영해를 압박하였습니다. 권영해는 북풍사건으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데다, 무기도입 비리까지 겹쳤으니 크게 손봐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권영해는 김대중 측과 거래해 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결국 구속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조사를 받으면서 할복 자살이라는 연극을 꾸미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할복이 아니라 비계 껍질을 살짝 긁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권영해는 구속이라는 불리한 처지에서 김대중 측과 거래를 벌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방장관이었던 천용택이 나섰습니다. 이때 권영해는 천용택에게 30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천용택은 국방부 내 문제는 자신이 직접 수습했습니다. 천용택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정권 인수위가 중단시켰던 여러 사업들을 강행하면서 반발하는 실무자들을 눌렀습니다.

권영해와 김대중간의 본격적인 뒷거래에는 박지원이 나섰다고 합니다. 권영해는 “무기 비리는 덮고, 북풍에 대해서만 처벌받는다.”는 조건으로 김대중에게 4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홍콩에 계설되어 있던 권영해의 비밀 계좌에서 홍콩에 있던 김대중의 비밀 계좌로 이 거액의 돈이 흘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권영해는 10여년간 무기 비리로 치부했던 돈의 상당 부분을 그렇게 토해내야 했던 것입니다.

권영해, 김영삼, 김대중의 해외 비자금

대한민국 역사상 대통령들을 제외하고는 권영해 만큼 부패한 자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권영해는 홍콩 등 여러 곳에 수개의 비밀계좌를 개설하고 2천억원대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숨겨 놓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 권영해는 극비로 북한제 장거리 미사일의 도입을 추진한 적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들여오지는 못했지만, 구입자금으로 쓰려던 안기부의 특수사업비 수백억원은 그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두 그의 비밀계좌로 들어간 것입니다.

비리의 교사범이자 공범인 김영삼도 대만 등 여러 곳에 1천억원에 조금 못미치는 비자금을 묻어 두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에 비해서는 약소한(?) 규모이지만, 아직도 김현철을 십여 차례는 국회의원에 당선시킬 수 있는 액수라고 합니다.

최근 홍인길은 어느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빈털터리다.”고 낮뜨거운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그의 측근들은 “가정부에게 월급을 줄 돈도 없다.”며 김영삼에게 푼돈을 모아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전두환의 29만원 사건에 버금가는 민망한 코미디입니다. 그나마, 좀 평가해줄만 부분이 있다면, 김영삼은 최근 몇 명의 대통령 가운데서는 가장 청렴하고 양심적으로(?) 해먹었다는 것입니다.

비리의 또다른 공동정범인 김대중은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거액의 비자금을 해외에 숨겨두고 있다고 합니다. 김대중이 혈세를 도둑질하여 스위스, 홍콩 등지에 분산 예치하고 있는 비자금의 규모는 최소 6,000억원에서 1조(兆)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범죄 규모로 보나 죄질로 보나, 김대중이 우리 역사상 가장 극악한 부패사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그를 “희대의 악마적인 사기꾼” 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가 “언젠가는 전라도 백성들의 손에 의해 부관참시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스위스를 방문중인 김대중은 세계보건기구(WHO) 총회 개막식 연설을 마치고 호텔에서 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스위스 방문 목적이 WHO에서 연설이나 하려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저는 그의 이번 스위스 방문이 “그의 비자금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구좌이체를 위한건지, 아니면 계좌의 상속문제를 처리하기 위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뭏든 그의 친필 싸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스위스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정부는 정부 예산으로 김대중의 유럽여행 경비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입니다. 이 악마적인 사기꾼의 사기행각에 철저히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김대중은 “4월 말경에 상해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계획이 결국 취소되었는지, 아니면 비밀리에 실행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때 김대중의 중국 방문도 홍콩에 있는 그의 비자금 구좌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난해 밝힌 바와 같이, 김대중은 대북송금과 관련하여 2억달러 이상을 챙겼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때, 저는 김대중과 김정일이 “북한에 송금할 돈의 10%는, 킥백(리베이트)으로 되돌려 받기로 약속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99년 12월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15억 달러를 주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북한의 최고위층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으로부터 그 정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출처가 북한의 최고위층과 접촉한다는 사실을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북에 건너간 돈은 15억불보다 좀 더 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3억달러씩 한 차례 내지 두 차례 더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노벨상 단독 수상이나 김정일의 방한약속 실행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었을 것입니다.

지난해 1월, 김대중은 2억달러 송금을 시인하고 이 문제를 덮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 후 예기치 않게 저의 글이 발표되자, 마지못해 5억 달러를 보냈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특검은 4억 5천만 달러밖에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5천만 달러(10%)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현대상선 미주지부에서도 북으로 3억 달러를 보냈다고 알려졌습니다. 정몽헌은 죽기 직전에 권노갑에게 3,000만 달러를 바쳤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러나, 그 3,000만 달러는 권노갑이 먹은 게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3억 달러의 리베이트(10%)로 김대중의 스위스 계좌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김대중은 또한 국내 굴지의 방산업체인 한국화약으로부터 수백억원을 뇌물로 받고 대한생명을 특혜 분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화약의 사주인 김승연이 소유하고 있던 경향신문이 지난 5년간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한 것은 이러한 커넥션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김한정 제1부속실장이 돈심부름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한나라당의 모 의원으로부터 두 차례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한화 비서실 관계자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지난 2002년 10월,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신건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감청부서인 과학보안국을 해체한 바 있습니다.

밝히려는 자 vs. 숨기려는 자

여러분들은 이제 김대중 시절, 김영삼이 김대중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김대중이 권영해를 구속하면서 치부를 들춰내려하자, 김영삼이 반격에 나섰던 것입니다.

아마도 김영삼은 공격을 받을수록 더 전투의지를 발휘하는 특이한(?) 승부사 체질을 가졌나 봅니다. 우리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저들은 저들끼리만 아는 언어로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는 지난 93년 감사원장시절 율곡비리 감사에서 권영해의 비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의 반대로 권영해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번호 시사저널이 보도한 대로, 당시 권영해 국방장관은 이회창 감사원장이 율곡비리를 캐고 들어오자, 이 총재 아들들의 병역비리 카드를 들고나와, 이 총재를 협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이회창 총재는 권영해와 김영삼을 처단할 목적으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숨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회창과 김영삼이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던 배경에는 이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16일, 임복진 전 의원은 내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비리의 일단을 증언했습니다. 임복진 전 의원은 특정 지역 출신으로서는 “드물게”-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음을 용서바랍니다.- 보는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초대 국방장관으로 내정되었으나, 개인적인 실수가 빌미가 되어 낙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천용택이 권노갑에게 고자질하여 국방장관 자리를 가로챘기 때문에, 그후 두 사람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임복진 전 의원의 지난번 인터뷰가 단순히 천용택에 대한 사적 감정의 발로라고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임복진 전 의원은 누구도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용기 있게 발언한 것입니다.

저는 임 전 의원님께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은 증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차제에 국방부 내 양심 있는 젊은 군인들도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해 발표한 글에서, “권영해가 조기에 석방된 것이 석연치 않으며, 김대중과 권영해 간에 엄청난 뒷거래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썼습니다. 저는 저들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그 내용을 넣었습니다.

얼마후 김한정은 제 3자를 통해 은밀히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자기가 국정원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저와 국정원간에 중재를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저는 김한정의 의도가 “내가 얼마나 아는지를 떠보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해 글을 발표하고 난 후 여러 사람들로부터, “김한정과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또는 “김한정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건 아닌가?”라는 오해를 종종 받은 적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와 아무런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그를 과대 평가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의 죄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의 사람됨 자체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어찌보면 그도 사악한 김대중의 가련한 희생물이기에 측은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고언

저는 이 기회를 빌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몇마디 충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진정으로 부패를 청산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시다면, 무기비리 문제부터 해결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 수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기대와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와대 모 측근 비서관에게 몇차례 연락을 드린 일도 있었습니다. 청와대가 진실로 수사의지가 있다면 저도 적극 돕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크게 실망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복진 전 의원이 말한 것처럼, 국내의 계좌 추적을 통한 수사로는 심부름꾼의 푼돈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비리의 몸통에는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최고 정책결정자 수준에서 건네진 큰 돈은 모두 해외에서 거래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외 구좌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당국이나 우방국에게 정보협력을 요청하는 일일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 정보기관의 대외 신인도를 감안하면 이마저 난망한 일입니다. 결국, 노 대통령께서 통치권차원에서, 더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말이 나온김에 정보기관에 대해 감히 한마디 사족을 달겠습니다. 정보기관은 속성상 현재의 사용자에게 충성하게 되어 있는 조직입니다. 과거의 인연이 어떠했건 간에 현재의 주군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노 대통령께서 지금처럼 정보기관을 못 미더워하면서 제쳐두고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보기관은 눈, 코, 귀, 손, 발, 촉수, 더듬이와 같은 것입니다. 눈코귀를 막고, 손발을 묶고, 촉수더듬이를 부러뜨린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시겠다는 것인지요?

국정원과 기무사는 과거 독재와 반역의 도구로 활용되었던 어두운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개혁의 도구로 쓰셔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기무사 방산보안실 케비넷 안에 존안되어 있는 자료를 정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십시요. 조속히 민군합동수사대을 구성하고 기무사와 국정원이 적극 정보협조를 하도록 지시를 내리십시요. 이 모두가 오로지 노 대통령님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8) 글을 마치며

국민 여러분, 이상으로 저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무기관련 비리에 대해 국민 여러분들께 설명드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부분은 무기비리 전체의 그림 가운데 몇 조각의 작은 퍼즐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가슴 속에 진실을 품고 있어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압니다. 저의 이 작은 글이 그분들에게 용기가 되어 양심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이 되는 이 지독한 시대는 하루 빨리 끝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이 끔찍한 세상은 어서 빨리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의 안보를 가지고 장난치는 자가 더 이상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저의 이 글이 우리의 안보 현실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빕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무장하여 권력을 제대로 감시할 때, 비로소 이러한 비리가 근절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비리의 사슬을 끊을 때야만, 비로소 우리의 안보도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저의 글이 여러분들의 판단을 돕는 데 일조했기를 빕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4년 5월,

전 국가정보원 직원 김기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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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국정원 직원에 속지 않으려면?”…실제로는 권총·수갑 보여주는 행동 안해
[쿠키뉴스 2006-03-13 14:49]

[쿠키 사회] “나 국가정보원 직원인데 말이야….”라면서 신분증과 권총,수갑을 슬쩍 보여준다면 이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절대 믿어선 안된다.

국가정보원 직원을 사칭해 사기행각을 저지르던 29살의 손모라는 사람이 경찰에서 수사를 받던 중 수갑을 찬 채 도주했다. 경찰의 수갑까지 확보했으니 앞으로 더 심한 거짓말을 하고 다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기에 손씨의 행각이 어설프기 그지없다. 진짜 국가정보원은 손씨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권총과 수갑을 보여주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물론 돈을 받고 민원을 해결해주겠다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국정원 직원은 어떻게 구별할수 있을까. 간단한 방법이 있다. 수첩과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면 된다.

국정원은 보안을 위해 청사 내에 카메라가 부착된 휴대전화의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때문에 국정원 직원들은 카메라가 없는 휴대폰을 쓰거나,카메라를 떼어넨 휴대폰을 사용한다. 공교롭게도 국내에서 파는 휴대폰 중에 카메라가 없는 휴대폰은 2∼3가지 밖에 없다.

국정원 직원들에게 인기 있는 휴대폰은 모토로라에서 나온 스타텍2004 모델이다. 현재 나와 있는 휴대폰 중에서 카메라가 없으면서 가장 디자인이 뛰어난 제품이다. 70% 이상의 국정원 직원이 이 휴대폰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하나는 수첩이다. 일반 기업이 직원용 수첩을 제작해 배부하듯이,국정원도 1년에 한번씩 수첩을 만들어 나눠준다. 남자들의 장지갑처럼 생긴 이 수첩은 크기가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이고,겉표지가 새까맣고 반들반들하다. 일반 기업에서 나눠주는 수첩과 달리,국가정보원이라는 표시는 전혀 없다. 시중에 파는 수첩 중에 이 수첩과 비슷한 종류는 있지만 동일한 것은 없다.

이 두가지,까만색 수첩과 스타텍2004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국정원 직원일 확률이 80% 이상이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가고 나면,사기꾼들도 모토로라 휴대폰과 까만색 수첩을 갖고 다닐지 모르니 조심할 것.

그렇다면,국정원 직원들은 정말 손씨처럼 국정원 신분증과 수갑,권총을 가지고 다닐까? 국정원 직원들은 신분증을 제시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보통 사법경찰관 신분증을 보여준다. 수갑과 권총은 휴대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휴대하더라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 정말 국정원 직원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그렇게 쉽게 노출시키지 않는다.

만약 당신 앞에 모토로라 스타텍 휴대폰과 검은 수첩을 갖고있는 사람이 나타나,국정원 직원이니 돈을 주면 민원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다면 믿어야할까? 기본적으로 국정원 직원이 그런 행동을 할리도 만무하지만,혹시나 믿어보고 싶다면 신분증에 나온 이름을 기억했다가 아무 공중전화기로나 달려가 긴급통화 버튼을 누른 뒤 ‘111’로 전화를 걸어라. 그리고 물어봐라 “이런 직원 진짜 있어요?” 국정원은 업무 특성상 신분 확인이 필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만약 진짜라면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국정원 직원도 명함을 들고다닐까? 기자가 만난 국정원 직원들은 모두 명함을 들고 다녔다. 그들의 명함은 일반 기업체나 관공서 명함처럼 양식이 통일돼 있지 않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이라고 찍은 명함을 내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 이름은 쏙 빠져있고,이름과 휴대폰,팩스번호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모규엽 기자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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