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새좌표와 변화방향
김상협기자 pppdemo@munhwa.co.kr
냉전종식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후 각국 정보기관은 안보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군사안보에서 경제안보로 강조점을 이동시킨 것이다. 국가경제경쟁력 강화가 ‘국가생존’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다. 이에 맞춰 산업정보활동이 정보기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로 부상하는 추세다.

?牟痢??국내 정치사찰에 정보기관의 역량을 총집중하는 동안 세계는 멀찌감치 앞서 나갔다. 10년전, 5년전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과학기술정보및 산업정보활동을 대폭 강화할 것’이라는 선언은 공수표가 됐다. 시스템개혁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안듣는 사람 자르고, 충성도에 따라 자기 사람만 심어놓으면 개혁이 저절로 될 줄 알았던 게 실패의 이유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1기인 ‘고영구 원장-서동만 기조실장 체제’에서도 이같은 우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정원 개혁방향으로 먼저 제시되는 게 인적청산이다. 국장급의 50~80% 교체설, 국정원 직원 2000명 감축설이 사실이라면 시스템 정비없이 인적 청산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후가 뒤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스템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의 제시가 선결적 과제다. 21세기에 걸맞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인적자원과 물적토대를 갖춰야함은 물론, 정보생산과 활용의 시스템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세계는 치열한 경제정보 전쟁중〓경제정보분야에 관한 한 현 국정원의 물적토대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국내분야의 경제담당파트를 해외분야로 옮기는 청사진 정도만 나왔을 뿐 전문인력양성 방안, 편제변화 등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세계 정보전쟁의 양상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겨우 발동을 거는 수준이다.

실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93년 브라질 국제입찰에 참가한 자국내 기업에 경쟁외국기업의 뇌물제공 정보를 지원, 입찰에 성공케 했다. 산업정보를 민간회사와 공유하는 문제도 서슴지 않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지난해 북한의 핵프로그램 시인사실을 자국기업의 주식매매활동을 감안해 발표시기를 조정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의 경우도 민간기업에 대한 산업정보의 지원이 관행으로 정착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스라엘은 모사드(중앙안보정보부·MOSAD)의 임무중 산업기술 첩보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57년 라캄(LAKAM)을 설립, 절취 등 비합법적 공작들도 활용하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6일 “미국의 경우 첩보위성을 통한 통신감청과 온갖 정보를 자국 기업에 전달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타국과 자동차협상을 할 때 통신감청을 통해 상대국의 협상전략을 알려주는 식이라는 것이다. 또 CIA의 경우 전세계에 망을 갖추고 해당국가의 방송청취, 과학자들의 세미나, 학회지, 신문스크랩, 공개세미나에서의 발표 등을 실시간으로 취합, 해당 정부부처는 물론 기업들에 전달해오고 있다. 이 관계자는 “산업스파이라고 간첩작전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열린 자료조차 활용할 인력이 편제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염돈재 신임 1차장은 산업정보활동의 방향(도표참조)으로 경제및 산업정책 수립에 필요한 국제경제동향 등을 지적한 바 있다.

◈해외정보분야 강화 방안은〓현재 국정원 직원 분포를 보면 해외담당(1차장산하)과 대북담당(3차장)을 합쳐도 국내담당(2차장)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다. 정보선진국에 비하면 대단히 기형적인 구조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과거 정치사찰 등에 힘을 쏟은 게 국내담당이 비대해진 이유다. 새 수뇌부의 의지가 강한 만큼 국내분야 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국회 정보위의 함승희(민주당)의원은 “정보기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정보활동의 위축은 불가피하다”며 “국내담당을 축소할 게 아니라 이들을 턱없이 인력이 부족한 해외분야로 돌리는 데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제시한다. 무조건적인 ‘축소지향’이 아닌 효율적인 체제개편과 인적정비에서 해답을 찾자는 제안이다. 현재 해외정보분야는 최소한의 필요인력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편제도 요식행위에 그치고 단순 정보수집에 국한된 상황이다. 이들에 대한 재교육과 훈련이 절실하며 우선적으로 새 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한 인식공유가 필요하다. 또 “해외정보만을 수집하라는 것은 정보기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국정원 내부 직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할 것으로 지적된다.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새 정부의 국정원은 동북아경제중심체 건설 지원의 막중한 임무도 추가돼 있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첫 국정토론회에서 “국정원은 동북아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연구,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는 게 붕괴된 휴민트의 복원. 중국, 북한, 일본을 무대로 한 정보각축전에 사활을 걸어야할 형국이다. 더구나 한반도가 냉전의 최후보루라는 점에서 국정원의 냉정한 판단이 요구되는 바이다.

휴민트와 현지 정보망 구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미 CIA의 조지 테닛 국장이 취임일성으로 강조한 바 있다. 수많은 위성과 첨단도청장비를 바탕으로 시긴트(sigint·신호정보), 엘린트(elint·전자정보), 이민트(imint·영상정보)에 관한 한 부러울 게 없는 미국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의외다. 이는 아무리 위성사진을 판독해도 결정적인 판단에는 휴민트가 관건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 국정원의 휴민트는 붕괴 직전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 특히 97년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총풍’ 사건 와중에 공작원 ‘흑금성’의 존재가 드러난 이후 와해되기 시작한 휴민트가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협기자 jupiter@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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