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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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국내외 곳곳을 다니며 글과 그림으로 남긴 여행의 기록이다. 사진의 편리함과 신속성을 뒤로하고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자세히 관찰하고 지켜보며 그림을 남긴다는 것, 특히 그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만년필이라는 것이 아날로그 감성과 매우 잘 들어맞는다.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라는 부제가 달려있지만 만년필에 대한 책은 아니고, 스케치 기법을 가르쳐주는 책도 아니다. 다만 각 장의 말미마다 만년필과 잉크를 소개하고 있다. 뭐든 시작하려면 도구를 갖추어야 하는 법(?). 나는 이 책을 읽으며 1장에 소개된 파일롯트 프레라 라는 만년필을 냉큼 구매했다. 저자가 초심자들에게 항상 추천한다고 했으니까. 만년필이 배송 되기도 전에, 마찬가지로 이 책에 소개된, 워터맨 잉크도 구입했지만, 잉크를 담을 컨버터를 아직 구매하지 못해 결국 만년필에 동봉된 잉크 카트리지로 쓰는 중이다. 워낙 악필인데다 그림도 못 그리지만 만년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필기감이 너무 마음에 들어 뭐라도 계속 쓰고 싶은 요즘이다.


각 글 마다 실려있는 그림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샌프란시스코의 전차 그림 (그 중에서도 96페이지)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진으로 많이 본 광경인데도 만년필로 그린 그림을 보고 있자니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일었다. 멍하니 계속 그 그림을 지켜보았다. 종묘 그림을 보고서도 그랬다. 평소 관심 있던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묘를 일부러 다녀오게 될 정도로 인상적이었으니까.


교토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일본의 경주 정도로 비유되는 교토는, 저자가 지적한대로 전통의 도시란 별칭이 무색할 만큼 첨단 IT기업(닌텐도, 교세라, 일본전산 등)의 본사가 다수 모여있고 소득의 대부분이 관광업이 아닌 IT기업 종사자가 훨씬 많다고 한다. 건물만 놓고보아도 절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많이 언급되는 일본의 현대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건물이 가장 많은 곳이 교토라고 한다. 심지어는 과학 분야에서도 동경대가 아닌 교토대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또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저자는 여행이란 게 원래 그런 식으로 서로 만날 일 없던 것들이 만나가는 이야기의 축적이며, 여행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스케치로 남겨둔 풍경은 많은 기억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할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면 어디를 가든, 소위 ‘인증샷’만을 남길 것이 아니라 여행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 자세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꼭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 매일 지나치는 집 앞 공원, 혹은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안의 일상적인 풍경이라도 - 그림으로 남겨보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말한다. ‘누가 내게 여행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그건 이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보는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나는 글을 쓰는 것을 – 잘 하지는 못해도 - 좋아한다. 그림도 매우 서툴고 못 그리지만 조금씩 용기를 내어 그려보며 재미를 붙여가고 있다. 글이던 그림이던 남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러워 꽁꽁 숨기는 편이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은 나를 위한 일들인 것 같다. 즐거울 때, 화가 날 때, 슬플 때, 심심할 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보며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털어내기. 새로 산 만년필과 함께 ‘기록하는 인간’이 되기. 그게 이 책을 읽은 후 나의 바램이자 행동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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