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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내가 처음 읽어본 김영하 작가의 책이다. 팟캐스트로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들으면서도 정작 김영하 작가의 책은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작가의 스타일이라던지 문체 등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상태.
일단 소재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기억이나 기록 등에 대한 주제를 좋아해서 메멘토나 인셉션 류의 영화에도 열광했는데, 이 책도 비슷한 전개방식이라 흥미진진했다.
기본적으로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은퇴한 70세의 연쇄살인범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딸 은희와 둘이서 외로이 살고있는 김병수. 마을에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우연히 만나게 된 박주태가 연쇄살인범이라 직감하는데,
그가 은희와 교제중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실제로는 은희를 노린다는 확신으로 딸을 지키려한다.
그런데, 자신의 사라져가는 기억들을 붙들기위해 녹음과 기록을 하고있음에도,
조금씩 현실과 기록에 차이가 벌어진다.
읽는 나도 점점 더 헷갈리고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떤것이 현실인고 어떤것이 기록인지, 혹은 기록이 정확한 것인지, 내가(혹은 화자가) 이상한건지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이는 것인지...
아무튼 결론적으로는 몇 가지의 반전이 있는데,
실은 스토리상의 이러한 반전들이 주는 충격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 (읽으면서 어느정도는 예상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치매환자의 시점에서 씌여진 이야기라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을 많이하게 되었다.
이 책을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공포체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 줄로 정리한 것을 보았는데,
정말이지 이보다 더 요약을 잘할수는 없지싶다.
내가 알츠하이머 당사자라고 생각해보자.
여러형태로 애써써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자체가 현실과 어긋남으로 인해 느껴야하는 혼돈과 자괴감.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도 나온 대사처럼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는거야`와 같은, 점차 내 자신의 소멸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장편소설`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실제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닌데다,
이야기의 특성상 한번 읽기 시작하면 몰입되어 중단하기가 어려워 단숨에 읽어내렸다.
다만 같은 이야기를, 이 책의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서술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봄.
기억에 남는 구절들.
+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 그가 사냥하는 것이 짐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든다. 만약 이 예감이 맞아떨어지나면 이것은 신이 내게 던지는 고급스런 농담일까, 아니면 심판일까.
+ 지금 신은 내가 저지른 악행의 신성을 스스로 진부하게 만들 것을 명령하고 있다.
+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