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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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종교 간 전쟁, 종교 밖 전쟁, 그리고 종교 내 전쟁이라는 안내와 함께 따뜻한 전쟁이라는 평을 봐왔거든요. 이 책 한권이면 종교를 둘러싼 각종 논의를 한방에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모두 3명입니다. 

종교가 인류를 괴롭히는 바이러스라 생각하는 과학자 장대익, 

진화론을 수용하는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신재식, 

과학과 종교를 특정한 세계관 안의 문제라 생각하는 종교학자 김윤성. 

 

이러한 3명의 조합이기에 종교 간 전쟁과 종교 내 전쟁은 볼 수 없었고, 종교 밖 전쟁만 볼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와 과학의 전쟁이지만요. 

그들은 진화론자들이나 인지 과학자들이 종교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종교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창조 과학이 휩쓸다시피 한 한국 개신교 현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고, 무신론자이지만, 신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의견을 보면 불편해하는 편이구요. 그런 입장이라 진화론을 부정하는 저자가 포함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전쟁이라 여겨지거든요. 제목은 <종교전쟁>을 달고 있지만, <개신교와 과학의 대화>라 고쳐야 할 거 같아요. 제목처럼 종교전쟁이 되려면 진화론을 부정하는 저자가 있었어야만 했어요. 

 

종교학자 김윤성은 한국 개신교가 창조과학에 압도적인 지지를 하는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국이 1960년대 이후 소련 인공위성 발사에 자극받아 과학교육이 중요해지면서 창조과학이 퇴출된 것에 비해 한국은 창조과학을 수입한 1세대가 발언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한국 교회는 보수적 성향의 선교사(그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 여파로 미국의 주인을 자처해 온 복음주의 개신교들이 결집했었답니다)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었고, 그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들 자신으로선 건재할지 몰라도 지금 한국 개신교가 깨달아야 할 것은, 보수주의라는 신앙의 '온실'에서 나와 바람 한 점 없는 광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개신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요. 

진화론이 허구라 하기 전에, 과학의 본질이 '내용'이 아니라 절차 또는 검증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대화로 표현되지만 그들의 이견은 결코 좁혀지거나 메워지지 않습니다. (창조과학 개신교가 없음에도요!) 그저 상대방 입장을 듣고 원위치할 뿐이지요. 그 이유는 언제나 되풀이 되는 '신앙 체험'  때문인거 같아요. 종교 혹은 신적 체험은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고, 각자 체험도 지극히 개별적이고 상이하기 때문일 터지요. 

그럼에도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비판적 담론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 편에선 창조 과학이 휩쓸다시피하고,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을 몰상식하고 비합리적인 종교라 비난하고 있는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니까요. 좋든 싫든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재 속에 깊이 자리 잡은 개신교라는 종교가 건강한 비판적 담론위에 우뚝 서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책 내용 중 '전사 리처드 도킨스, 전략가 데니얼 데닛, 그리고 외교가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들 표현대로 하면 장대익은 전사고, 신재식과 김윤성은 전략가나 외교가에 가까운 거 같아요. 

저는 전사보다 전략가나 외교가가 편했는데요,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존 호트'였습니다. 

존 호트는 종교와 과학을 우주를 읽는 중층적 독법으로, 즉 서로 다른 수준의 책 읽기로 이해하면서 둘의 관계를 해명합니다. 종교와 과학은 각자 독자적인 독법인데, 한 가지 독법으로 우주를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물이나 생명에 관한 설명은 다양한 수준의 설명이 있으며, 이것들은 상보적인 것이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개신교와의 논쟁이 없을까요? 

저자 3명 모두 창조 과학 개신교인과 친분이 없어서인지, 그들이 논쟁할 가치조차 없어 거부한 건지, 자못 궁금한걸요. 

      

  

           

 

 

 

읽은 날 2013. 1. 13    by 책과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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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모더니즘+제국주의+몬스터+종교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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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 주경철.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제게 '우석훈' 연관어로 기억됩니다. 

처음 주경철의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를 읽은 후 우석훈의 <1인분 인생>에서 주경철 이름을 보게 됐을 때, 무척 반갑더라구요. 그래서 망설임 없이 주경철의 <문화로 읽는 세계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이 책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에서도 의도치 않게 우석훈을 만났습니다. 

바로, 우석훈이 다음과 같은 해제를 달았더라구요. 

 

"현대에 재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죽은 것이고, 시대가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후대에 그 시대도 재해석 되는 것이다. 해석이 죽은 시대는 그 시대 자체가 죽었거나, 해석이 살아 있는 다른 시대에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역사학을 가지지 않은 나라에서 능동적으로 시대를 열거나 주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라면서, 일본은 역사학이 튼튼한 사회적 자본으로 역할을 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IMF 경제 위기 전부터 역사학 인프라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했습니다. 

역사학의 힘이 차고 넘쳐서 소소한 생활사와 비경제적인 요소의 경제사까지 다룰 여력이 되는 일본과 비교해, 쥐어짜고 또 쥐어짜 어렵게 책 한 권 만들어내며 근근히 버티는 한국 역사학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석훈의 해제대로, 이 책은 일본 역사학의 집단적 체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사의 커다란 흐름과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이는 다섯 꼭지 -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의 내용은 글줄마다 폭깊은 성찰이 돋보입니다. 

사람들의 욕망, 동경이 역사를 움직이게 했고,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은 일종의 변종, 즉 몬스터로 설명하고 있어요.

자본주의가 멈춰질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이며,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욕망을 무시한 채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은 여전히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계사 중심에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는 부분은 특히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 종교가 본연의 의도와 다르게 분쟁의 발단이 되곤 했던 것은, 종교가 각자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이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정체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니,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특히나 유일신 종교라면 더할나위 없었겠지요.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가독성' 입니다. 나름 인문 서적인 역사책이 이렇게 술술 읽히다니,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차(tea) vs 커피, 금 vs 철의 주제로 풀어쓴 내용은 신선하면서도 기지가 번뜩입니다.

근대 이전 차(tea) 문화에서 각성작용이 강한 커피로 전환한 것이 세계사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는 부분은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또한 금(gold)이 마음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철이 이용됐다는 부분도 그러했어요.

그 외 자본주의가 기독교에서 시작됐다는 부분과 파시즘에 대한 설명은 제 얕은 지식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인상 깊은 저자의 이야기 후에 만난 우석훈의 해제는 제 가슴을 뛰게 하더군요.

우리 사회가 지난 10년 동안 역사학을 통한 교육과 교양을 무시해 왔지만, 지금 이 위기 시대를 맞아 또 한번 세상의 축이 바뀌고 있으며, 어차피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니 다시 백과사전형 지식 패턴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지요.

우석훈의 용어로는 종합기획자,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통섭'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백과사전형 지식에 '역사'는 분명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우리사회를 되돌아보는 거울에 '역사'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읽은 날  2013. 5. 1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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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인생론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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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라.... 아이들이 어리지만, 미리 예습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요.

 

이 책은 저자 안광복이 청소년을 위해 열두 번 철학강의한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강의 초반 저자는 끔찍한 지옥을 겪었다네요.

"이런 거 왜 해요? 정말 재수 없어."

"왜 나만 갖고 그러는데요?"

 

청소년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강의였기에 저자는 매우 당혹했습니다. 그러다, 곧.... 아이들이 뿜어내는 막막한 느낌, 가슴을 태우는 분노에 자신 마음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열일곱 살 아이를 발견합니다. 고민을 나눌 누군가를 간절히 바랬으나 주변으로부터 도움받지 못해 상처 입었던 열일곱 살의 자신을요.

 

지금 청소년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갈까요?

그들의 구체적 고민은 잘 모르지만, 아이들이 갖는 질문의 원형은 이 책에 나오는 내용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돈, 사랑, 인정, 성적, 성, 분노, 위기, 죽음.... 각각 챕터를 통해 이 책은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정말 당신이 바라는 건 뭔가요?"

 

어떻게 살아야 만족한 인생을 보내게 될까 라는 고민은 사실 10대에 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을 뒤로, 또 뒤로 자꾸만 늦춰요.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대출금만 다 갚으면, 돈만 많이 벌면, 승진만 하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꿈꾸며 유예시키지요.

마라톤에 '데드 포인트'라는 게 있어요. 몸이 붕 뜨는 상쾌한 기분, 이른바 runner's high, 즉 '몰입의 즐거움'이라 부르는 상태라 합니다.

정신 의학자 정혜신은 이런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네요. 그가 보기에 이런 이들은 일종의 조증상태(기분이 들떠서 쉽게 흥분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증세)로, 달뜬 기분에 빠져 앞뒤 재보지 않고 덤벙거린답니다.

이렇게 질문을 늦춘 사람들이 결국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질문이 계속 유예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40대, 50대에 들어서라도 '인생병'을 크게 앓는다 합니다. 이때 깨달음을 얻어 자기 인생을 다잡으려 해도 이미 시기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구요.

평생을 무언가에 몰입한 runner's high 상태로 보낼 순 없어요. 삶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몰입의 즐거움이 자기 영혼의 성장을 막는 마취제일 뿐입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 또한 쉬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남의 일로만 여긴 <열일곱 살의 인생론>, 생각지 못한 곳에서 자신의 질문과 맞닥뜨렸네요.

우리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국 자신과 만났어요.

이런 경험이 아이들이 맞닥뜨릴 질풍노도의 시기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해도 조용히 이 책을 권해봐야겠어요.

최소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이 허락된다면요.

 

 

 

 

읽은 날 2013. 1. 24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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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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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의 인연은 한 문장에서 시작됐습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야만을 버려야 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저만 뒤쳐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맹렬히 달리고 있지 않아서 이 문장에 끌렸을까요.

 

이 책의 저자 한형조는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금강경]을 골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다지만, 불교 꽤나 머리가 아픈 분야네요.

 

인도 북동부 갠지스 강가 반경 200킬로미터 정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해서 대승불교로 발전했고, 반야 유식 화엄 천태 정토 선 등의 갈래를 낳았다 합니다. 이런 불교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팔라어, 산스크리트, 불교한문, 티베트어를 익혀야 하고, 거기에 근대 일본의 방대하고 치밀한 훈고적 성과와 구미의 불교연구까지 습득해야 한다니, 정말 아득하고 막막해지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러나,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라 합니다. 바로 사람이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세삼스런 각성이 바로 해방이라 합니다.

각자가 느끼는 세상은 객관적 실제와 상관없이 자신의 중력에 따라 휘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깨끗한 삶'이란 자아에 물든 더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으로, 실제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에는 더럽고 깨끗한 차별이 없다네요.

이렇게 주관적 가치의식이 깨어지고 깨어져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2>에서 일부 불교계가 사찰 근처의 결식아동이나 최빈층, 무의탁 노인들의 고통에 대해 모른척 하는 것에 대해 비난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것 같습니다. 불교의 교리자체가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 그런거 같아요.

 

그러나, 한형조는 '내 탓이오'라는 참회로부터 각성이 이뤄진다 말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하나는 전체에 연루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 속에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라네요.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인연 가운데 결정적 하나로 기여했다는 것을 안다면(緣起法) 자연스레 내 탓임을 알 수 있게 된다네요.

비록 자신의 주관적 세계를 바로 잡아도 객관적 세계와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으로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네요.

그 실천이란, 시련을 거치면서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 운명으로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 합니다.

 

아, 그런데 웬 말입니까!

어느 정도 알 거 같은데, 저자는 초자연적 실재라는 것도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모두 헛소리라네요.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없답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것은 없다네요.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라 합니다.

우리가 깨달음(돈오)를 오해하는 것은, '돈오'를 깨달음이 한번에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오란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로서 즉, 돈오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이라네요.

 

유명한 문구가 생각나는군요.

카르페 디엠 / Carpe diem /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가 말이에요.

 

돈오가 깨달음이 이미 와 있다는 뜻이라 해도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합니다.

돈오는 이제 시작이고, 전제일 뿐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이 세계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큰 믿음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 짧은 한 생 책임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사는 것, 그것이 불교,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이라 하네요.

장자가 말한 대로, 길은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 아니라, '각자 걸으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니, 각자 스스로의 길을 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하며 쉼없이 가는 것, 바로 불교의 가르침 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저까지 그래야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저만의 속도로 제 길을 만들며 한걸음씩 꾸준히 걸으면, 될 거 같습니다.

역시 저자의 말대로, 깨달음은 이미 와 있으며 삶의 구체적 정황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불교의 가르침.... 가슴 속에 새깁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건....참..... 어렵지만 말입니다.

 

 

 

읽은 날  2012. 5. 13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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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 '수학사랑' 박영훈 선생의 수학사 특강
박영훈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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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말만 들어도 골치 아파요. 

어쩌다 수학이 이렇게 됐을까요? 

원래 수학이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을텐데..... 수학이란 과연 뭘까요? 

 

이 책 <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는, 저자 박영훈이 무생물로 굳어버린 수학을 매만지고 가르치는 일이 한없이 공허하게 느껴져, 22년 동안 정든 교단을 떠나 여행을 다녀와 쓴 보고서입니다. 

그리스 찬란한 햇빛, 쪽빛 바다 앞 저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삶 속의 수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화가 농축된 진정한 수학,을 만날 수 있어요. 

그 얘기조차, 머리가 지끈지끈 할까요? 

 

사실, '수학'하면 머리로 떠오르는 정답만 있어요. 모든 학문의 기초라든가, 논리.사고력 증진....이라든가, 그런거 말이지요. 솔직히 '좋은 대학가려면 수학을 정말 잘해야 한다'가 마음 속 정답,이에요. 

 

수, 숫자..... 우리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요. 이집트, 인도, 바빌로니아.... 모두 수학이 쟁쟁했던 곳인데, 그곳을 제치고 최초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호칭을 받은 사람은 탈레스(기원전 624~546년 경) 랍니다. 

탈레스 전에도 수학은 있었는데, 왜 굳이 그리스에서 수학이 시작됐다 할까요? 

그건 바로 탈레스의 창조적인 업적 때문이랍니다. 바로 '증명'이라네요. 증명이야말로 수학이 다른 학문과 완벽하게 구별되는, 지식을 얻는 수학만의 독창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랍니다. 

그 전까지 수학은 대부분 어림짐작, 주먹구구 였어요. 이집트, 바빌로니아인들은 방대한 지식을 수학의 특징인 추상화 과정을 거쳐 통합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다네요. 하여 '수학'이라는 평가를 얻지 못하고, 수학의 창시자라는 영광스런 자리를 그리스인에게 내주고 말았다 합니다. 

 

이렇듯 수학이란 것이 땅의 넓이를 계산하거나 곡물의 양을 계산하는 절차라는 인식을 뛰어넘어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탈레스가 보여줬어요. 이 책은 그러한 그리스인들의 철학이 우리 가슴에 들어오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자가 유클리드의 <원론>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부분에선 가슴이 뛰더군요. 내용이 잡동사니인데도 유클리드의 <원론>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 정말 놀랍더군요. 

고작 다섯 개밖에 안되는 공리로 기학학의 모.든. 정리를 추론했대요. 그래서 기하학의 전체 체계가 구성됐다 합니다. 

학문 영역이 지나치게 분화되어 전문가만이 행세할 수 있는 요즘, 하나의 커다란 틀로 통합해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2의 유클리드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가슴이 뛰더군요. 

우와, 멋진 일인걸. 그러면 정말 좋겠다~ 내가 조금만 젊다면 어떨까? 하는. 

 

수학때문에 골머리 앓는 청소년이 있다면, 꼭 읽어볼만 합니다. ○○○정리, ◇◇◇정리, □□□정리를 증명하는 것보다 그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거, 생각보다 근사하네요. 

 

그렇다면, 수학의 시작이 왜 그리스일까요? 

오로지 탈레스 때문일까요? 

 

그리스의 수학은, 영원하고 이상적이며 완벽한 그 어떤 것의 추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즉, '신'이란 존재지요. (동양의 신과 다른 서양의 신 개념 말입니다) 

가령,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지구가 구 모양이라 한 것은 관측이나 자료에 따른 것이 아니라 모든 도형 가운데서 구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었다네요. 

인간의 삶과 아득히 떨어져있는 완벽한 (신들의) 세상, 바로 수학이 추구하는 세계와 맞닿아 있어요. 

 

경험적 사고에서 추상적 사고로 놀라운 전환을 한 그리스인들, 무엇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철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과 가족이 편히 먹고 살만큼 풍부한 물자는, 곧 생활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죠. 

그들은 상업적. 육체적 활동을 경멸한만큼, 지적인 탐구와 세계를 관장하는 근원적 질서를 추구했어요. 

 

아, 맥이 빠집니다.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수학이 지금처럼 괴물이 됐나요. 

그래서 우리들이 인간사의 여러 분야와 관련된 다양하고 독특한 수학의 방식을 고루 고찰하는 능력을 박탈, 당한 걸까요. 

 

이런, 맥 빠지는 결론을 위해 쓴 건 아닌데요. 

모리스 클라인의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를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660쪽이더군요!  

어휴, 660쪽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알게 됐어요. 

청소년을 위해 씌여진 263쪽인 이 책, 수학이 소곤소곤 들려주는 이야기. 

기대 이상입니다~~ 

 

 

 

읽은 날 2012. 7. 18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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