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1 - 부흐하임
발터 뫼어스 지음, 플로리안 비게 그림, 전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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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일러스트와 유명한 제목에 끌려 약 한 달 전 구매한 책 《꿈꾸는 책들의 도시》. 동명의 소설을 쓴 작가 발터 뫼어스가 초안을 그리고 내용을 편집해 그림작가 플로리안 비게와 함께 만든 그래픽노블이다. 사놓고 잊고 있다가 이번에 친구에게 빌려주면서 핑계김에 완독했는데, 읽으면서 뫼어스가 만든 차모니아 세계관에 감탄하고 감격하며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은 다 바보야! 도대체 왜! 이 책을 아직도 영화화를 안 했냔 말이야! 멍청이들이야?!’ 가슴을 쳐댔다. 책을 사랑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ㅠㅠ 진짜로ㅠㅠ

차모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을 쓴 작가를 찾아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에 입성한 공룡 작가지망생(진짜 공룡이다ㅋㅋㅋㅋ) 힐데군스트. 부흐하임의 지하에는 고서가 가득한 동굴들이 즐비하고, 지상에는 온갖 종류의 고서점과 인기를 바라는 낭송가 작가, 욕심 많은 책수집가들로 성황이다. 특히 책사냥꾼으로 불리는 자들은 부흐하임의 지하동굴에서 희귀한 책으로 손꼽히는 ‘황금목록’ 책들을 사냥하여 명성을 얻거나 부를 얻는다. 쿰쿰한 종이 냄새가 흘러넘치고 활자와 인생이 하나가 된 듯한 부흐하임의 모습에 주인공 힐데군스트가 매료되었듯 나 역시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몰입했다. 이어서 등장하는, 지하묘지 운하임에서 종이 쓰레기를 먹어치우는 책벌레들! 온몸이 종이로 이루어져 해를 보지 못하는 그림자 제왕! 존경하는 작가의 이름을 따 이름을 짓고 그 작가의 작품을 외는 외눈박이 난쟁이 부흐링! 끝없이 새로운 책장이 쏟아져나오고 이동하는 부흐링들의 책기계와 머리카락에 새긴 초미세공예 유언! 흑흑 너무 재밌고 부흐링들 너무 귀여워ㅠㅠ! 끙끙 앓게 된다. 부흐링들이 힐데군스트를 보살피고 환대하고, 또는 최면술을 사용해 돕는 장면들을 보라! 가슴이 찡하지 않나! 흡사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권선징악 교훈의 웅장함과 탄탄한 세계관, 깜찍하고 독보적인 캐릭터들을 이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책에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포스’처럼 ‘오름’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작가로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게 되는 창조성을 ‘오름’으로 일컫는 것인데 마치 ‘May the force be with you’ 인사처럼 부흐하임에선 서로에게 오름을 기원해준다. 최면술을 쓰느라 힘이 소진된 부흐링들이 숨을 컥컥거리며 힐데군스트에게 오름을 기원해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힐 뻔했다...ㅠㅠ “오름이 그 작품을 관통하길 빈다!”

하지만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중력이 아니다. 호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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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이 기가 세요 - 유쾌한 여자 둘의 비혼 라이프
하말넘많 지음 / 포르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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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비하인드 영상에서 서솔 님이 예상했듯, 두 시간 가량 걸려서 완독! 즐겨보는 유튜버 하말넘많의 에세이 《따님이 기가 세요》 가 출간됐다. 일요일 오후 느즈막이 카페로 가서 조금씩 비오는 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비하인드 영상을 참고해서 말하자면, 파트1 ‘왜?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은 유튜브 채널 ‘하말넘많’이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의 (페미니즘 각성) 이야기를 담았고, 파트2 ‘여성을 위한 미디어를 만듭니다’는 ‘하말넘많’의 콘텐츠 이야기, 파트3 ‘전국 비혼 궐기 대회’는 채널과 관련되지 않아도 ‘비혼’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각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다. 마지막 파트4 ‘우리는 함께 내일로 간다’는 채널의 미래와 개인의 미래를 위해 ‘하말넘많’이 하고 있는 것과 준비하고 있는 것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서솔 님과 강민지 님이 기억하고 있는 서로의 첫인상은 무엇인지,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소울메이트처럼 보이는 두 사람도 싸울 때가 있는지, 구독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마치 아이돌 팬덤이 관계성 덕질을 하는 것처럼 수없이 질문하곤 했다. 유튜브 콘텐츠를 지켜보면서 나 역시 궁금했던 부분이었고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담백한 하말넘많의 담백한 대답 때문에 해당 질문들은 그냥 공중분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책에서도 말했듯 무뚝뚝한 경상도인 강민지와 더 무뚝뚝한 비경상도인 서솔의 만남이어서일까. 그들은 서로를 지나치게 추켜세우거나, 인생의 친구 혹은 평생의 동반자라는 식으로 닉네임을 달아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코드가 잘 맞는 ‘친구’ 반, 능력을 보완해주는 ‘비즈니스 동료’ 반의 비율을 알맞게 섞어 맛있는 음료처럼 혼합한 사이구나 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래서 더 좋아보이기도 했고.

그런 그들이 활자를 만나니 살짝 간지러워졌다. 구독자 입장에선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이 역시 즐거운 일면이다. 목차 ‘어차피 결론은 서솔’에선 강민지 님이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밖으론 내지 못했던 ‘인생 2회차 같은 책임감과 카리스마를 지닌’ 서솔을 향한 무한신뢰를 엿볼 수 있다.(“사실 그냥 친구이기만 할 때보다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지금이 훨씬 더 좋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점점 전국 내 친구 자랑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차피 결론은 서솔이다.”/비하인드 영상에서 서솔 님도 “강민지에게서 이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고 말하더랔ㅋㅋㅋㅋ) 또한, 서솔 님이 곰곰이 기억을 끄집어 낸 끝에 결론지은 ‘참지 않는’ 강민지 님의 첫인상도 알 수 있다.(“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강민지의 첫인상은 이렇다. ‘아무도 대항하지 못하는 남학생을 비판하며,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웃긴 애.’”)

이들의 탄탄한 관계가 다시 한 번 부럽다고 느껴질 즈음,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 서솔 님은 세상에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살아갈 많은 날들에 다양한 일과 인연이 생길 거라고 우리의 앞날을 응원해준다. 내가 20대의 끝자락, 취업을 위해 등록했던 학원에서 마음 맞고 뜻이 맞는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난 걸 떠올리면, 확실히 이 응원은 어물쩍 넘어가려는 사탕발림이 아니다. 경험에서 나온 진심이지.

책을 통해 그들은 탈코르셋의 의미를 강조하고, 부업을 권장하며, 욜로를 경계한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까지 겪었던 치욕의 경험들도 털어놓고, 페미니스트 후드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던 과거의 심경을 밝히고(서솔 님이 강민지 님의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는 그 후드를 보며 표정관리를 했을 생각을 하닠ㅋㅋㅋㅋㅋ 그야말로 웃프다.), (자신의 몸보다 크고 값비싼 카메라 장비를 몰며 숏컷 머리를 했던) 어릴 적 롤모델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책은 출판 계기가 된 유튜브 채널 ‘하말넘많’의 치열한 콘텐츠 제작기이기도 하다. 16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하말넘많’은 2018년 5월 ‘바바리맨은 성범죄자’ 영상으로 처음 시작하여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과 여성 커뮤니티의 입소문으로 4일 만에 구독자 5천 명을 돌파하고(나도 알고리즘으로 초창기 ‘하말넘많’을 알게 되었다.), 9월 초엔 만 명 구독자를 보유한 채널로 성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작년엔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으로 잠시 채널을 숨긴 채 휴식 시간을 가져야만 했지만, 반강제로 시작했던 휴식이 그들의 몸과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었던 재정비 시간이었다며, 사실 많이 지쳐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문득 생각날 때마다 유튜브 검색창에 ‘하말넘많’을 검색해보곤, ‘아직이구나. 잘 싸우고 그냥 돌아오기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소망했던 나날이 떠오른다. 지금도 ‘하말넘많’ 채널의 많은 동영상들이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비공개 처리가 된 채 돌아오지 못했고, 시답지 않은 어그로와 비방으로밖에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하말넘많’의 외모를 지적하며 아직도 그 유치한 성별 타령을 해댄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싸움, 최전방에서 경계 태세를 갖춘 채 꼿꼿이 현실을 바라보고 앞서 목소리를 내는 일. ‘하말넘많’이 스피커를 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사실, 앞서 말했듯이 다시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책 많이 파시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돈 많이 버셔서 왕 큰 스피커 사시면 더욱 고맙겠지만요.(^^)/ (강제 아님)(협박 아님)

여성들이 직접 할 수 없는 작업은 어차피 숙련된 전문가가 필요한 수준의 공사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굳이 그 정도 효율 때문에 집안에 남자를 두어야 할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살면서 생각이 바뀌면 그때 다시 집필하여 정정하겠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궁금한 것은 유튜브에 모두 있으니, 내 인생의 동반자는 전동 드라이버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결국 ‘비혼 여성’을 키워드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우리에게 메일로 ‘탈페미’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은 익명의 구독자에게만큼은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당당히 우리 앞에 여성을 붙이고도 나아갈 수 있음을.

돈을 들여 해외에 나가서까지 내 신체를 파편화하는 것. 에펠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에펠탑을 등지고 앉아있는 내 허리의 굵기와 머리카락의 놓임새를 살펴보는 것. 모두 내가 나 자신에게 열심히 했던 일이다. 내가 에펠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곳에서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20대 중반에 다녀온 두 달 간의 유럽 여행의 기억이 흐릿하다. 인생샷을 찍고 싶어했던 여행지에서는 특히 그렇다. 도시의 모습이 기억나기보다는 파리의 센강 앞에서 찍었던 사진만 남아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을 실패한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야 내가 진정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2019년이 되어서야 진정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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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시 그림이 되다 1
미야자와 겐지 지음, 곽수진 그림, 이지은 옮김 / 언제나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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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

하루에 현미 네 흡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내 잇속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벗짐을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얼마 전, 리디북스에서 공개한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다. 김연수 작가가 재차 추천한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읽으며, 이 책의 표지를 봤더랬다. 그러니, 예스북클럽 쿠폰(^^)을 노리고 5만원 이상 책쇼핑을 할 때 이 책을 자연스럽게 장바구니에 넣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미야자와 겐지의 시선집 쯤 되는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이 책은 그의 대표 시 <비에도 지지 않고>만 실려 있는 간략한 그림 에세이다. 책 정보를 제대로 읽지 않고 구매한 자의 말로가 이것인가…. 대신, 이 책이 지닌 특색은 한 구절씩 페이지를 할애하여 곽수진 그림 작가가 일러스트를 더했다는 점. 볼로냐 국제도서전과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수상한 바 있는 곽수진 그림 작가는 ‘공존’을 표현해보려 했다는 작가 후기에 걸맞게 따뜻하고 배려 있는 그림을 선보인다. 그가 그린 강아지, 고양이, 새, 달팽이 등 귀엽고 깜찍한 동물들과 함께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조금씩 읽어나가니 절로 마음이 평안해졌다.

미야자와 겐지는 1896년 출생하여 동화 작가이자 시인, 농업과학자로 살았다. 1933년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기까지 작가로서 주목받진 못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팽배했던 전체주의·제국주의 물결과 겐지의 소박하고 안온하고 이타적인 작품 색깔이 서로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겐지의 동생이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그의 100여 편 동화와 400여 편 시가 유작으로 출간되면서 그는 뒤늦게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질 만큼 일본에선 이미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살아 생전 빛을 받지 못했으나, 죽어선 신물 날 만큼 이름이 불리우는 명사들을 보면 복잡한 기분이 된다. 고흐, 로트렉처럼 가난과 중독에 시달리며 예술에 영혼을 바쳤던 명사들이 같이 떠오르니 말이다. 겐지의 일생을 간략하게 읽으며 역시 복잡한 기분이었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그의 시 <은하철도의 밤>을 찾아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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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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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섹스 후 어질러진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그에 관해 설명과 회상을 덧붙여 남긴 기록이다. 연인이었던 마크 마리와 함께 글을 써서, 사진 하나에 각각 두 개의 에세이가 붙은 구성으로 진행된다. 40여 장의 사진 가운데 14장을 골랐고, 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글을 보여주지 않고 자유롭게 썼다고 한다.


자신의 섹스'와 '그 풍경을 담은 사진'을 기록해 출간했다는 점에서 참 '아니 에르노다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글은 가감 없고 솔직하고 존재론적이다. 난 언제나 그녀의 내밀하고 열정적인 욕망이 궁금해 책을 열었지만, 새삼스럽게도 그녀가 회의하는 '세밀한 일상'과 '쓰는 삶'에 마음이 동하곤 했다. 이 책 또한 요란한 섹스 일기인 척 겉모습을 꾸미고 있지만, 속내는 아니 에르노의 투병 일기이자 생을 향한 투쟁 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쓰인 시기가 아니 에르노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던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항암 치료 때문에 체모가 모두 빠졌던 아니 에르노는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쓴다. 겨드랑이 쪽에는 맥주병 뚜껑같이 볼록한 플라스틱 관이 삽입되어 있었는데, 화학 요법을 할 때마다 악성 세포를 죽이는 물질을 집어넣는 카테테르였다. 이렇듯 온몸이 투쟁의 현장으로 바뀌어버린 아니 에르노는('몇 개월 동안 내 몸은 폭력적인 작업이 이뤄진 극장이었다.") 정형화된 섹스 어필이 불가한 몸으로 섹스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욕망과 삶은 병에 쉽사리 투항하지 않는다는 걸, 시간은 흘러가지만 순간은 영원하다는 걸 이야기한다.


섹스를 할 때마다 그녀의 가발이 벗겨지던 이야기나, 아니 에르노와 마크 마리가 각자 어머니의 죽음 전후로 같은 아미고 호텔에 머물렀던 우연의 이야기, 투병 사실을 알리면 본인이 부재할 미래를 점쳐보는 사람들의 눈이 싫어 투병을 숨겼던 동정의 이야기, 베니스 성당 종탑에서 브래지어를 던졌던 낭만의 이야기, 육체가 보이지 않는 사진에서 함께 지낸 '여름'을 떠올리고 그가 신던 '부츠'를 기억하고 즐겨 듣던 '노래' 리스트를 되뇌는 흔적의 이야기… 연인은 동일한 사진을 두고 다른 감상과 회상을 늘어놓지만, 그 글들이 머금은 온도는 비슷해 보인다. 차츰 열정이 식어가는 온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식의 옛것을 대할 때의 차분하고 건조한 온도가 책 후반부로 향할수록 또렷하게 느껴진다.


오래전부터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소망이 더욱 강렬해졌다.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 모든 사진은 형이상학적이니까. 사진으로도 행복과 사랑은 붙잡을 수 없다. 하지만, 생이 지나가는 발자국만큼은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도 이토록 진지하게 죽음의 그림자를 외면하고 유한한 욕망에 매몰될 수 있을까.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은 매번 다른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남자 없이 지내기 것은 단지 성적인 필요성보다는 지식을 향한 욕망에 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어떤 깨달음을 위해 M을 만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진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과거 속에서 노래는 확장되어 나가 고, 사진은 멈춘다. 노래는 시간의 행복한 감정이며, 사진은 시간의 비극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한평생을 노래와 사진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속에 우리의 육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나눈 사랑도 없다. 그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 장면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고통.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진의 ‘필사적인‘ 의미. 우리는 구멍을 통해 시간의, 무(無)의 불변의 빛을 엿본다. 모든 사진은 형이상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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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낙태 여행 - Journey for Life
우유니게.이두루.이민경 외 지음 / 봄알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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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함의와 변화를 촉구하는 문제 의식, 우당탕탕 여행 에세이의 장점을 모두 종합해놓은 책이다.


책의 첫인상은 자극적이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 고딕 글씨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써놓은 제목이 눈에 띈다. 사실, 나도 지하철에서 책을 들며 읽는 와중에 종종 책의 표지를 가리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낙태'라는 글자를 보고 누군가 내 머리를 갑자기 후려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서였다.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른바 '묻지마 폭행'(^^)이 워낙 많이 일어나는 시국이라 불특정 다수가 모인 대중교통에서는 방어기제가 발동된다. '낙태'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고 부정적이며 거친 느낌을 준다. 이 책을 쓴 출판사 봄알람의 멤버들은 이를 겨냥해 부러 '임신 중단', '임신 중지'라는 표현 대신 '낙태'를 썼다. 대중이 더 널리 쓰는 단어 '낙태'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자 함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 표지 색이 먹색인 건 단순히 제목을 눈에 띄게 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낙태죄 폐지 운동을 가리키는 '검은 시위'를 상징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한국은 근대화 시기 일본법을 받아들이면서 1953년부터 낙태죄가 존재했다. 2019년 4월, 낙태한 여성과 낙태술을 시행한 의사를 처벌하는 낙태죄 항목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리면서 낙태죄 폐지를 향한 여지와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2020년 10월, 정부는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어정쩡하게 눈치만 본, 실효성 없는 법안이다. 한국에서 중절 수술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수술 희망자이자 대상자는 주로 기혼자들이다. 낙태죄는 사실상 사문화된 법인데, 2020년에도 낙태죄를 존속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여성의 신체결정권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겠다는 가부장적 억하심정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보다 여성 인권이 '그나마' 발전한 유럽에선 여성의 신체가 '그나마' 존중받고 있겠지 하고 기대를 품었다. 유럽 여행을 하면 <비포 선라이즈>처럼 로맨틱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처럼. 하지만 페미니스트의 기대는 언제나 배신당한다. 프랑스의 활동가 플로랑스의 말대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얻어진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절절히 느꼈다. 낙태가 합법인 네덜란드에서는 지정된 병원에서만 수술을 해야 하고(수도 암스테르담에는 낙태 병원이 없다. 네덜란드 전역에 12곳뿐이다.), 낙태권을 투쟁으로 얻어낸 프랑스는 극우 진영의 낙태 불법화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유토피아는, 허랜드는 남성이 권력을 쥔 종교와 제도가 있는 한 양립이 불가하다.

설령 임신 9개월이 됐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그러겠다고 결정하면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 마리 클로드

낙태를 할 때에는 무대에 여자만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돌연 아빠의 아이가 된다. 어쩌면 이게 여성의 낙태를 그토록 다 함께 손가락질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국가와 남성의 재산인데 그것에 대한 선택을 여성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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